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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보다 '상식'을 믿는 이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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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보다 '상식'을 믿는 이들을 위하여!

[이명현의 '사이홀릭'] 대릴 커닝엄의 <과학 이야기>

같은 동네에 살던 만화가가 한명 있었다. 역시 같은 동네에 사는 몇몇 사람들과 가끔씩 동네에서 만나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더 자주 만나기로 의기투합하면서 그는 조만간 나를 해물누룽지탕 맛이 일품인 동네 중국집에 데리고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런 다짐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춘천으로 떠나버렸다. 나는 가끔씩 야속한 그를 생각하면서 그 중국집에서 혼자 자장면이나 짬뽕을 먹는다. 하지만 해물누룽지탕은 언젠가 그와 함께 먹을 생각으로 결코 주문하지 않는다. 이건 소심한 자존심의 문제다.

그 만화가는 처음에는 주중에 춘천에 있는 한 병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주말에는 서울 집으로 돌아오는 '거꾸로 기러기 아빠' 생활을 했다. 역시 만화를 좋아하고 직접 그리기도 하는 병원장과 함께 의학 만화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었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상과 환자들을 관찰하면서 스케치를 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러다가 그는 점점 더 병원 일을 돕는 시간이 많아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가족들이 아예 춘천으로 이사를 갔다. 동네 친구를 잃어버린 나는 그 중국집을 찾아가서 자존심을 허물어버린 채 해물누룽지탕을 시켜먹으면서 쓸쓸함을 달래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진짜 의료인이 되었다.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딴 것이었다. 만화를 더 잘 그리기 위한 방편이었겠지만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적인 요구도 있었을 것이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의학 만화 프로젝트에 어느 정도 진척은 있었지만 처음 의도한 만큼의 성과는 아직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춘천의 한 닭갈비집에서 그를 잠깐 만나서 회포를 풀 기회가 있었다. 만화가의 분위기보다 의료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를 마주하면서 약간의 낯섦을 느꼈다. 간호조무사로서의 그의 모습이 만화가로서의 그의 모습보다 더 자연스러웠다고나할까.

▲ <과학 이야기>(대릴 커닝엄 지음, 권예리 옮김, 이숲 펴냄). ⓒ이숲
그는 지금 생활인과 만화가 사이에서 큰 갈등을 겪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그가 진짜 의학 만화를 완성할 수 있는 적기라고 생각한다.

춘천에 다녀와서 한구석에 놓아두었던 <과학 이야기>(대릴 커닝엄 지음, 권예리 옮김, 이숲 펴냄)를 꺼내보면서 그 만화가 친구 생각을 많이 했다. 커닝엄은 미술을 전공하고 만화가로 활동하고 있지만 간호조무사로도 오랜 시간 일을 했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펴낸 만화책이 바로 <정신병동 이야기>(권예리 옮김, 함병주 해설, 이숲 펴냄)다. 내 만화가 친구가 제일 간호조무사다워졌을 때 역설적으로 속에 숨어들었던 그의 창작의 분수가 터질 것이라 나는 믿는다. 춘천 병원에서의 간호조무사 경험이 녹아든 멋진 작품이 나오리라 기대해본다.

만화가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내게 던진 질문 중에는 달 착륙 조작설에 대한 것도 있었다. 나는 상식적인 설명 몇 마디를 들려주었고 그는 바로 내 이야기의 핵심을 파악하고 음모론의 허구성을 간파했었다. 사실 대부분의 음모론은 한두 마디의 상식적인 설명이면 다 해결되고 이해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음모론이 팽배해 있는 것이 현실이고 그것은 아마도 수렵채집 시절에 살아남기 위해서 형성되었던 '이상한 것을 믿는' 인간의 진화심리학적 속성이 발현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과학과 비판적 사고를 옹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치 어린 양떼처럼 뛰어난 과학자들을 무조건 추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나는 과학적 사고와 절차를 소개했을 뿐, 과학계를 홍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으레 그렇듯이 과학계에서도 거짓말, 속임수, 사기극, 정치 비리, 뇌물 수수, 조작된 결과가 얼마든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 절차는 믿고 의지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전구에 불이 들어오지도, 휴대전화가 작동하지도, 인공위성이 지구 주위를 돌지도 않을 것이다. 과학은 신념이나 관점의 문제가 아니다. 훌륭한 과학은 실험하여 확인할 수 있고, 재현할 수 있으며,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다. 과학으로 입증되지 않은 것이 하나둘 물러나고 결국 남는 것을 우리는 '진리'라고 부른다."

<과학 이야기>는 커닝엄이 맺음말에 쓴 것처럼 과학적 사고와 비판적 사고로 본 과학과 사이비 과학의 모습이다. 이 책은 전기충격요법, 동종요법, 웨이크필드 사건의 진실, 달 착륙 조작설, 기후변화, 진화론, 카이로프랙틱, 과학부정론 같은 이야기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과학적 사고나 상식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는 그 구별이 너무나 명확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종교처럼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 속에 담겨있다. <과학 이야기>는 그만큼 음모론과 사이비 과학의 실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지은이의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스토리텔링 방식과 눈에 잘 들어오는 편안한 그림은 그의 이야기를 더 설득력 있게 만들어주고 있다. 과학자가 아닌 상식인의 눈으로 보고 풀어낸 만큼 일반 독자들과 더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책이기도 하다. 혼탁한 세상에서 만난 반가운 책이다.

강연을 다니다보면 강연 주제와는 상관없이 음모론과 관련된 질문을 많이 받는다. 주로 달 착륙 조작설이나 외계인 감금설 같은 것들이다. 나는 가능하면 차분하게 내가 그 만화가 친구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상식적인 설명을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질문을 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내 설명이 시작되면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종교적인 믿음과 다른 이야기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면 힘이 쭉 빠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끝까지 설명을 마치려고 노력한다.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으면 읽어볼 책을 권하기도 한다. 나는 <과학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여주는 상식적인 마음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권하는 책 목록에 포함시키고 싶다. 가벼운 인문서로 소개하기에 딱 좋은 책이다.

▲ <정신병동 이야기>(대릴 커닝엄 지음, 권예리 옮김, 함병주 해설, 이숲 펴냄). ⓒ이숲
내 만화가 친구가 <정신병동 이야기> 같은 만화책을 만들어내고 나면, 나는 <과학 이야기> 같은 과학 만화도 그려보라고 권하고 싶다. 내가 들려준 지극히 상식적인 몇 마디를 듣고 음모론의 실체를 단박에 파악하는 감각이라면 과학 만화를 그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학 만화를 위해서 시민천문대에 취직하라고 권하고 싶다. 천문지도자 자격증도 따면 좋겠다. 천체사진가가 되어도 좋다. 과학은 상식적인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는 학문이다. 과학적 사고를 하는 예술가들의 입을 통해서 튀어나오는 과학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다.

사실 내 만화가 친구와 나는 책을 한권 같이 내기로 하고 출판사와 계약한 적이 있었다. 내가 내용 구성을 하고 글을 쓰고 그 친구가 만화를 그리는 방식으로 협업을 하기로 했다. '만화로 본 세상' 정도로 이름 붙일 수 있는 만화 시리즈 중 한권을 맡기로 한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 작업은 그냥 기획 상태로만 머물러 있었다. 다른 팀들의 작업도 별 진전 없이 답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기획 전체가 무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미니스커트는 어떻게 세상을 바꿨을까?>(김경선 글, 이경희 그림, 부키 펴냄)가 출간된 것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했다. '만화로 보는 20세기의 역사' 시리즈의 첫 권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우리 작업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잠시 가슴이 철렁했지만, 한편으론 이제야말로 드디어 만화가 친구와 협업을 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에 새삼 설렘이 솟아오르기도 했다. 출판사에서 이 책을 내게 보내주지 않은 것으로 봐서, 아직까지는 우리를 압박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에 안도감과 섭섭함이 뒤섞여서 다가온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우주 개발은 어떻게 세상을 바꿨을까?>(가제; 이명현 글, 신성식 그림, 부키 펴냄)를 만들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만간 춘천에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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