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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도 없고 시인도 아니지만, 죽마가 있다네!

[금정연의 '요설']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③

금정연의 '요설' 지난 글들 모아 보기

<제18장> (파티 타임)

(마음껏 파티를 즐기시오)




<제19장> 토비 삼촌, 우리 모두에게는 죽마가 필요한 거죠, 그쵸?

이제 파티는 끝났다. 고작 몇 줄 만에 그러기냐고 따지는 깐깐한 분들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야겠다. 독자여, 그것이 바로 문학의 시간이라오. 아무려나. 이제는 무거운 머리와 침침한 눈을 안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 누군가는 남아서 뒷정리를 해야 하고, 나는 지금껏 미뤄왔던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건 물론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가 우리한테 주는 깊은 학식과 지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다는 약속이다. 검색을 통해 이 페이지를 찾은 당신(d)이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굳이 두꺼운 책을 읽는 수고를 하지 않고도 리포트를 제출할 수 있도록 스턴의 책을 요약하고, 설명을 덧붙이고, 그럴듯한 결론과 함께 마무리를 지어야 할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정말이지 언제나 문제는 있는 법이다. 특히 이번 경우는 더욱 고약하다고 할 수 있는데, 다름 아닌 나 자신의 탁월함 때문이다. 익히 보아서 알고 있겠지만 탁월함과 함께 나는 잘 해왔다. 다시 한 번 독자여, 당신이 굳이 눈살을 찌푸리지 않더라도 내가 지금 재수 없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느끼고 있소이다.

그렇긴 해도,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어떤 일이 탁월한 대가의 솜씨로 처리되었지만 세상에서 주목받을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경우, - 그 사람이 그 영예를 누리지 못한 채, 그 기발한 착상이 그의 머릿속에서 썩어 가다가 세상을 떠난다면 그 역시 대단히 혐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정확히 바로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
어쩌다 빠져들게 된 이 긴 탈선적 작업에는, 나의 모든 일탈이(단 하나만 빼고) 그렇듯이, 일탈의 대가의 필력이 들어 있다. 그런데 그 장점이 아무래도 그동안 내내 독자에 의해 간과되고 있는 것 같다. - 뭐 독자가 통찰력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 그 탁월성은 흔히 일탈적 여담에서 기대되거나 발견되는 그런 종류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 그 우수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김정희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93쪽)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로렌스 스턴 지음, 김정희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을유문화사
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어떤 영예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며칠 전, 나는 양복을 차려 입고 은행에 갔다. 대출 상담을 위해서였다. 나도 어느덧 금융기관 및 관공서에 갈 때에는 차려입고 가는 편이 좋다는 사실 정도는 깨달을 나이가 되었다. 정작 담당자는 별 관심도 없는 것 같았지만. 그는 내가 제출한 소득금액증명서를 보았고, 몇 번이나 보았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 혹시, 사업소득자용 서류를 떼어야 하는데 잘 못 떼신 것 아닙니까? - 저는 사업자가 아니라 자유기고가인데요. - 그러니까 그게 정확히 어떤…? - 이런저런 신문이나 잡지 같은데 글을 쓰고, 책도 내고 뭐 그런… - 그럼 근로소득자도 아니신 거죠…? - 저는 종합소득세신고자… – 아… 그럼 말이 안 되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가 너무 지쳐 보여, 내가 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게 이렇게 힘들다. 나는 그에게 남자 대 남자로서 어떤 공감을 느꼈다. 그가 무엇을 느꼈는지는 별로 알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나를 친절히 대하려 애썼고, 그것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그의 노력을 높이 사는 바다. 다만 설명하는 일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는 사실은 지적하고 싶다. 언젠가부터 우리의 대화는 제자리를 맴돌았고, 미디를 처음 배운 사람이 만든 전자음악처럼 지루하고도 반복적인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은행의 입장에서는 내게 '직업'이란 것이 없는 것과 다름없다는 내용이었다.) 내 오른손은 몇 번이나 재킷 안쪽을 들락거려야 했다. 안주머니에 꽂아둔 권총의 차가운 금속제 몸통을 어루만지며 닥치고 돈을 내놓으라고 소리칠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것이다, 라고 하면 물론 거짓말이고. 단지 가슴이 조금 아팠을 뿐이다. 나는 양복을 입은 채(새로 산 양복이었다) 그 자리에 앉아 내가 사랑하는 볼라뇨의 어떤 단편을 떠올렸다.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단편이었다.

시인은 무슨 일이든 견뎌 낼 수 있다. 고로, 인간은 무슨 일이든 견뎌 낼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거짓이다. 사실 인간이 진심으로 견뎌 낼 수 있는 일은 손꼽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진심으로 무슨 일이든 견뎌 낼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확신을 지닌 채 성장했다. 이 문단의 첫 번째 문장은 참이다. 그러나 파멸과 광기와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전화>(박세형 옮김, 열린책들 펴냄) 51쪽)

그리고 나는, 난생 처음으로, 내가 시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두 가지 해결책을 생각해 볼 있다. 총잡이가 되거나(내키는 대로 쏴버리거나) 시인이 되거나(무엇이건 견뎌 내거나). 혹은 "자살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끝끝내 굽히지 않다가 주인공의 총을 맞고 파리처럼 픽 쓰러지는 영화 속의 서툰 총잡이들처럼 맹목적이고 무분별한 고집"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되거나. 볼라뇨의 소설 속 인물이 그랬던 것처럼. 어쩐지 너무 낭만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쓸쓸한 바람 부는 가을이니 조금은 괜찮을 것이다.

같은 해결책이 이 글에도 적용될 수 있다. 총잡이가 되어 이런 '글' 따위는 쓰지 않을 수도 있고, 시인이 되어 '이런' 글 따위는 쓰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마찬가지다. 물론 당신은 운이 좋은 편이다. 이 페이지를 닫기 위해서 굳이 총잡이나 시인이 될 필요는 없을 테니까. 단지 침을 뱉으면 그만이다(☞지난 회 참고).

하지만 내게는 총이 없고(한국은 총기가 허가되지 않았으니까), 나는 시를 모른다(한국에는 시인이 너무 많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파멸과 광기와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러니 나는 오로지 한 벌의 양복(그렇다, 나는 지금 '새로 산' 양복을 입은 채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과 나의 탁월함에만 의지한 채 이러한 곤경을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생, 나는 그냥 하던 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섄디의 삼촌, 토비를 떠올린다.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집으로 돌아온 토비 삼촌은 동생이 상심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의 배려로, 새로운 문병객들을 끊임없이 상대해야만 했다. 자신이 어떻게 부상을 당하게 되었는지를 반복해서 설명해야만 하는 곤경에 처한 것이다.

삼촌은 이때 상대가 알아듣게 설명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번번이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했고, 그때마다 심한 곤혹감에 빠졌다. 즉 성벽 아래 해자의 내벽과 외벽, - 제방과 통로, - 반월보와 삼각 보루 같은 것의 차이를 구별하고 그 개념을 명확히 전달함으로써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를 완전히 이해시키려 하다 보니 겪게 되는 그런 어려움 말이다. (…)

아버지가 위층으로 모셔 오는 손님들의 머리가 비교적 명석하거나, 토비 삼촌이 마침 설명이 아주 잘 풀리는 최상의 컨디션에 있을 경우 외에는 사실상 삼촌이 어떻게 설명하건 간에 이야기가 모호성을 면하기는 어려운 형국이었다.

게다가 삼촌의 설명을 더욱더 뒤엉키게 만드는 사안이 있었으니, 다름 아니라, - 삼촌이 공격했던 성 니콜라스 성문 앞에 있는 해자 외벽은 뫼즈 강둑에서 대수문까지 뻗쳐 있었는데 – 이 일대에는 수많은 도랑, 배수구, 개울, 수문들이 얽히고설켜 있었다는 사실이다. - 그러니 삼촌은 딱하게도 이런 것들 사이에서 당황하고 발이 묶여 목숨이 걸렸다 한들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는 일이 허다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공격을 포기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 106~107쪽)


내가 정확히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 정말이지 <트리스트럼 섄디>의 복잡성은 삼촌이 겪은 그 전투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항상 컨디션이 좋지 않고, 당신의 머리가 명석한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그러니 이쯤에서 리포트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은 채 아직까지 이 글을 읽고 계신 영문과 대학생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드려야겠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만약 당신이 명석하다면 조금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뻔뻔하게 당신에게 명석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겠다. 어쨌거나 그건 나와 나의 탁월함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내가 앞에서도 암시했는데, 그것은 이미 모호성의 비옥한 원천이 되고 있고, -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며 – 가장 명징하고 가장 고양된 이해력을 가진 사람도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원인으로서, 바로 언어의 불안정한 사용 때문입니다.

십중팔구 당신은 과거의 문학사를 읽어 보았을 터인데(*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 만약 그렇다면, -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 심술과 잉크를 동원하여, 소위 언어 전쟁이란 이름의 끔찍한 전투를 수도 없이 일으키고 진행시키고 있는지, - 심성 착한 사람은 눈물 없이는 그것을 읽어 낼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아시겠지요. (112쪽)


섄디가 단언하듯 "삼촌의 인생이 위험에 처한 것은 바로 언어 때문"이었고, 나와 당신이 지금 처한 곤경도 마찬가지다. - 하지만 나는 alt+f4만 누르면 언제라도 이 지긋지긋한 글을 벗어날 수 있는데? - 당신은 자비가 없는 사람이구려. 나는 그저, 불완전한 언어를 통해서라도, 내가 지고 있는 이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고 싶었을 뿐이라오.

그렇다면 토비 삼촌은 어떻게 곤경을 벗어났을까? 바로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을 통해서다.

비트겐슈타인이 1914년 가을, 어느 전선에서 교통사고 재판에 관한 기사를 읽고서 "그림"이라는 영감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관련 기사에 따르면, 그 재판에서는 교통사고가 일어났던 과정이 모형을 통해 설명되었다. 자동차, 사람들, 길, 건물들 등이 모형으로 제작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형(모델)이 사실을 묘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비트겐슈타인은 명제 또한 그러한 역할을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그림을 그려서 어떤 사실을 묘사하듯이, 명제를 통해서 어떤 사실을 그린다. 요컨대,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의 골자는 명제는 일종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해제) ☞바로가기)

어느 날 아침, 침대에 반듯이 누워 있던(사타구니에 입은 상처 때문에 다른 자세로 누울 수가 없었다) 삼촌에게 한 가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나무르 시의 요새와 성채 그리고 그 주변을 보여 주는 큰 지도 같은 것을 구입해서 널빤지에 붙여 놓는다면 일이 쉬워지지 않을까?" 그러니까 지도와 모형을 이용한다면 언어의 불완전성을 넘어 보다 정확한 묘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토비 삼촌의 생각을 따라가기에 앞서, 혹시라도 '비트겐슈타인 그림 이론'을 검색해 이 글을 읽고 있는 철학과나 국문과 대학생이 있다면 역시 심심한 사과를 드리는 바다. 그런데 당신(e)은 그다지 명석한 독자는 아닌 것 같다.)

토비 삼촌은 자신이 생각이 마음에 들었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정확한 지도 제작을 위해 군사 건축학과 포술학을 다룬 수많은 저서를 섭렵했고("부목사와 이발사가 돈키호테의 서재에 침입했을 때 보았던 돈키호테의 기사도에 대한 소장 서적들을 능가할 정도로 온갖 군사 건축한 서적들을 갖추게" 되었고), 대포알이 날아가는 방향을 계산하는 기하학적 법칙을 공부하며 3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그만! 나의 사랑하는 토비 삼촌, - 그만 멈춰요! - 이 가시투성이의 혼란한 길에 한 발짝도 더 들어서지 말아요."). 그리고 마침내, 지도와 모형이라는 '쪼잔한' 생각을 넘어, 시골의 한적한 땅에 실물 그대로의 전장을 만들기로 한다.

바로 지금, 찰리 카우프만의 영화 <시네도키 뉴욕>이 떠올랐다면 당신은 이미 나의 친구다. 예술과 재현의 문제를 다룬 감동적인 작품이다. 혹은 보르헤스의 짧은 이야기를 떠올려도 좋겠다. 바로 이런 이야기다.

……그 왕국에서 지도술은 너무도 완벽한 수준에 이르러 한 도의 지도는 한 시의 전체를 담고 있었고, 한 왕국의 지도는 한 도 전체를 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거대한 지도들조차 만족감을 주지 못했고, 지도학교들은 왕국과 똑같은 크기에 완전히 왕국과 일치하는 왕국지도 하나를 만들었다. 지도 연구에 덜 중독되어 있던 다음 세대들은 그 널따란 지도가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고, 약간은 불경스럽게도 그 지도를 태양과 겨울의 자비에 내맡겨버렸다. 동물들과 거지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지도의 폐허들은 남서부의 사막에서 허물어져 가고 있다. 나라 전체에 그것 외에 지도술과 관련한 다른 유물들은 없다. ('과학에 대한 열정' <칼잡이들의 이야기>(황병하 옮김, 민음사 펴냄) 67쪽)

그러니 토비 삼촌의 계획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나는 여기서 토비 삼촌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생각이다. 다시 말해, <트리스트럼 섄디>의 모든 복잡한 구성과 농담과 일탈을 당신(들)에게 정확하게 설명하겠다는 일념으로 810쪽에 이르는 이 방대한 소설을 고스란히 타이핑할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나 원 참, 어차피 서점에 가면 있는 거 아닌가?

그렇지만 스턴이 토비 삼촌의 기벽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인 '죽마(hobby-horse)'라는 비유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철없는 어린 시절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죽마는 스턴에게 있어 욕망을 감추거나 억압해야 하는 당위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이 찾는 비교적 순수한 욕망의 분출 통로다."(옮긴이의 말) 말하자면 스턴은 그를 일종의 '오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스턴은 토비를 비난하지 않는다. ("누군가 대로 상에서 자기의 죽마를 조용히 그리고 평화롭게 타고 가면서, 당신이나 나한테 뒤에 타라고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 선생, 그 일이 도대체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스턴의 관점에서 죽마란 "고달프고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삶에서 활기와 순수한 기쁨을 담보받을 수 있는 중요한 통로다." 우디 앨런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 모두에게는 죽마가 필요한 것이다.

그건 이렇게 생겼다.

ⓒ위키미디어(commons.wikimedia.org/wiki/File:Hobby-Horse.jpg)

물론 나 또한 죽마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글을 쓰고 있을 리가 없다. 세상에, 말도 안 돼.

그렇다면 이 글은 <트리스트럼 섄디>를 빙자해 늘어놓는 나 혼자만의 죽마 타기에 불과한 걸까? 그래서 리포트 제출을 앞둔 대학생들을 도와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를 무시한 채, 책 전체를 개괄하기는커녕 섄디가 끝내 태어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이 글을 끝내고 있는 건가(하지만 스턴 역시 섄디를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스턴이 2년에 걸쳐서 한 일을 내가 어떻게 더 빨리 할 수 있겠는가)? 글쎄, 그건 당신이 판단할 문제다. 아니, 오직 당신(들)만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라고 해야겠다.

글쓰기란, 그것을 제대로 관리했을 때, (내가 내 글이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당신도 알 것이다) 단지 대화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치고 혼자서 이야기를 독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따라서 예의범절과 교양의 올바른 범주를 이해하는 작가라면 감히 혼자서 모든 것을 생각해 내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독자의 이해력에 진정으로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면 글 쓰는 일을 사이좋게 반 토막 내어, 독자도 작가처럼 상상할 거리를 남겨 주어야 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런 종류의 예의를 끊임없이 실천하고 있다. 나는 독자의 상상력이 나의 상상력처럼 분주히 움직이게 도와주기 위해, 내 힘닿는 대로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137쪽)

바로 이어지는 문장을 스턴은 이렇게 쓴다.

그러니 이제 독자의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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