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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자들' 부럽고 문학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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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자들' 부럽고 문학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

[프레시안 books] 나쓰메 소세키의 <태풍>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삶이 고달프다'라는 말을 흔히들 하고 듣는다. 취미는 직업과 양립할 수 없다는 말도 된다. 취미를 밥벌이의 반대말로 상정한다면, 취미가 곧 밥벌이가 되어버린 나 같은 사람은 입장이 좀 애매해진다.

취미와 취향이 진정한 계급을 결정한다는 말도 자주 들려온다. 웹서핑이나 TV시청 수준을 넘어서는 취미를 갖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을 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진정한 고급 취미를 도야하기 위해서는 돈만 갖고서도 부족하고 생활환경과 출신 국가가 제1세계 영역 바깥에 있는지 안쪽에 있는지의 여부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니, 어찌 보면 변방 국가 출신의 가난한 사람이 돈 들이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고급 취미가 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입시생과 구직자들의 자기 소개서에 '취미 : 독서'라고 적는 태도가 장려되는 이 나라에서는 더욱.)

가난한 재야 학자와 그보다 더 가난한 폐병쟁이 문학청년, 그리고 그들을 굽어보는 부르주아 청년. 문학 애호가라면 눈에 퍽 익숙할 군상들이다. 수많은 근대 문학에서 즐겨 다루어 온 것처럼,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태풍>(원제 '野分'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노재명 옮김, 현암사 펴냄)은 문학의 순수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 <태풍>(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현암사 펴냄). ⓒ현암사
<태풍>에는 세 명의 문학자가 등장한다. 우선 재야 학자 시라이 도야 선생.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시골의 중학교 교직을 전전하다 그마저도 학생들의 장난질에 휘말려 파면당한 뒤 백면서생 신세로 아내에게 면박을 당하며 빈궁하게 살아간다. 그는 '인격 면에서는 세속 사람들보다 자신이 높은 경지에 있다고 자신하는' 인물로 시종일관 문학의 순수성을 외치며 황금만능주의에 찌든 세태를 비판하는, 조금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대쪽 같은 문학자이다.

세상은 부자들을 칭송한다. 세상은 박사, 학사까지도 칭송한다. 그러나 공정한 인격을 만나서, 지위를 저버리고, 금전을 저버리고, 또는 학력이나 재능, 기예를 저버리고, 인격 그 자체만을 존경하는 일을 이해하지 않는다. (…) 공정한 인격은 백 명의 귀족, 백 명의 거부, 백 명의 박사로도 보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존귀한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인격을 지켜내는 것보다 의미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이것이 바로 현재 도야가 갖고 있는 신념이다. 이런 신념을 품고 세상을 살아가는 도야는 아내의 비위나 맞춰주고 있을 수는 없다. (60쪽)

갓 대학을 졸업한 동기 다카야나기와 나카노. 이 두 청년은 둘 다 문학사로서 형제처럼 친밀한 사이지만 전혀 다른 출신 배경을 지녔다. 시골의 가난한 집안 출신인 다카야나기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지리 교수 밑에서 번역 일을 하며 언젠가 자신의 작품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싶다는 문학자로서의 내면 욕망과의 간극에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반면 대도시 자산가의 후계자인 나카노는 생계 걱정 없이 아름다운 약혼녀와 함께 부와 명예를 만끽하며 살아간다. 폐병과 생활고에 시달리며 문학 생각에만 푹 빠져 있는 다카야나기에 비하면 부모 잘 만나 팔자 좋은 나카노의 문학자로서의 정체성은 희박해 보인다.

생활고와 열등의식에 시달리던 다카야나기는 우연히 시라이가 '해탈과 구애'라는 주제로 잡지에 기고한 글을 읽고서 시라이의 결벽한 사상에 경도된다. 이 기고문에서 소세키는 시라이의 입을 빌어 취미의 궁극으로서의 해탈을 설파하는데, 말인즉슨 금전과 지위보다는 고결한 취미를 인생의 근본 목적으로 삼을 때에 사람은 비로소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더불어 완전한 해탈을 위해서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을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해탈을 터득하기 전에 정곡을 찌르는 취미를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열한 취미를 아무런 구애 없이 일생을 두고 즐기는 것은 배운 사람의 치욕이다. (…) 학문이 없어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취미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취미는 생활 전체에 걸친 사회의 근본적인 요소다. 이것 없이 살아가려는 것은 들판에 들어가 호랑이와 함께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91쪽)

이 장광설에서 '취미'란 곧 문학을 뜻할 것이다. 타락한 세속의 대립항으로서의 취미. 생계 유지가 아닌 학문과 인격의 도야라는 정신적 가치를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의 고귀함은 소설 내도록 시라이라는 문학자를 통하여 강조된다. 시라이가 시종일관 주장하는 문학자의 자세란 지나칠 정도로 결벽하고 외통수인지라 21세기를 사는 사람이 보기에는 문학자보다는 차라리 성직자에 가까워 보인다.

돈과 지위, 권력으로 대표되는 세속적 가치에 구애받지 않는 정신적 가치의 숭고함, 즉 문학의 숭고함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설교에 가까운 형태로 반복되어 이어지는 가운데, 낡은 책에 어울리지 않게 꽂혀 있는 화사한 책갈피 같은 나카노의 일화들이 눈길을 끈다. 나카노가 미모의 약혼녀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환상소설 <청동 비너스>를 소재로 에로틱한 환담을 나누는 대목이나, 거창한 영국식 가든파티 장면은 소설의 골자와는 큰 관계가 없는 내용이지만 읽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데, 나카노로 대변되는 당대 유산 계급의 허위의식을 조롱하려는 의도로만 읽어내기에는 지극히 세련되고 치밀한 세부 묘사가 돋보인다. 물론 부유한 나카노를 바라보는 가난한 다카야나기의 태도에서 시종일관 자조적인 시선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나카노가 향유하는 화려한 '취미 생활' 그 자체 - 오케스트라나 가든파티 같은 서양 문화, 고급 가재도구, 기모노의 원단 같은 귀족적 취향에 대한 소세키의 해박한 지식에 눈길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소세키는 일찍이 문부성 장학생 신분으로 영국 유학을 경험했다. 유학 생활 도중에 파리 만국 박람회를 관람하기도 했다고 한다. 개화의 물결이 한창이던 메이지 시대에 최첨단의 서구 문물을 겪은 소세키가 말하고자 한 '취미'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가난을 부끄러워 않으며 문학에 매진하는 시라이를 성스럽게 묘사하는 한편 그를 한심하게 여기는 아내와 형을 통한 현실 의식도 빼놓지 않고 보여주며, 또 다시 그들의 아둔한 속물근성을 비꼬는 소세키의 복잡한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내 머릿속도 덩달아 복잡해진다.

여하간 이야기는 시라이의 문학 외길 인생과 나카노의 서양식 라이프를 왔다 갔다 하다가 마치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화들짝 제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갑작스럽고 극적인 결말을 맺는데, 그것은 다카야나기가 그동안 나카노의 부르주아 취미에 열등감을 느꼈던 속내를 시라이라는 '문학의 신' 앞에 엎드려 반성하는 모습처럼도 보인다.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문학자의 덕목을 꿋꿋이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속죄라고나 할까.

▲ 나쓰메 소세키. ⓒcommons.wikimedia.org
소세키가 소설 <태풍>을 발표한 1907년은 그의 문학 인생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해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랜 세월 시라이 도야처럼 지방 중고등학교의 교사로 일하며 집필 활동을 병행해 온 소세키는 1907년 1월 <태풍>을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에 발표한다. 그리고 그 해 4월 교직을 그만두고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하며 본격 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한다. 고등중학교 시절부터 교류했던 하이쿠 시인 마사오카 시키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교직을 그만두고 문학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1897년에서 장장 10년이 흐른 뒤의 일이다.

메이지 일본에서 백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글쟁이란 부업을 두세 개씩 겹쳐 뛰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숙명 속에 살아가는 슬픈 직업군에 속한다. 시라이 도야처럼 매문으로 돈을 버는 소설가('문학가'의 기준에는 물론 철저히 미달되지만)의 입장에서 <태풍>을 받아들이자면, 소세키는 비록 빈궁하지만 자신이 택한 취미에 푹 빠져 사니 부와 권력이 부럽지 않다는 일종의 '정신승리'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가난해도 굳건하게 해탈을 향한 구도적 삶을 추구하는(현실적 고뇌를 아내가 도맡아 준 덕분일지도 모르겠지만) 시라이와, 구도적 삶을 동경하지만 끊임없이 부와 명예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다카야나기는 소세키의 분열 자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 자연히 돈과 지위 앞에서는 작아질 수밖에 없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신적 가치의 성스러움을 강변하게 된다. 강변하면 강변할수록 어쩐지 모양새는 더 우스워진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경제 논리 대신 취미를 선택한 요령부득한 사람들의 슬프고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눈앞보다 멀고 높은 수준의 노력을 하는 사람의 보수는 그 노력이 제아무리 국가, 인류를 위해 큰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해도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즉 노력하는 질의 높고 낮음에 따라 보수의 많고 적음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금전의 분배는 그런 것에 지배되지 않아요. 따라서 돈이 있는 사람이 고상한 노력을 했다고 할 수 없어요. 말을 바꾸면 돈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고상하다고 말할 수 없어요."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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