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세대의 삶의 조건 자체가 불안한 이때, 삶을 더 불안하게 만들 것만 같은 '활동'이니 '운동'이니 하는 길을 택한 이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들은 행복한가? 아니 그보다 일단 힘들지 않은가? 왜 시작했으며 왜 계속하는가? 이들이 탐색하는 세계의 진실은 무엇이며, 이들이 일구어가는 활동의 질량은 세계의 관성에 맞서 달리는 열차의 속력과 방향을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까?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Basic Income Youth Network, 이하 BIYN)의 <2013 청년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각 분야의 청년 활동가들을 만나 지난 활동과 전망을 나누고, 기본소득과 교차점을 살펴본 기록이다. BIYN은 각 인터뷰이들이 걸어온 길의 가치를 믿고 이들의 서사와 메시지가 동시대의 친구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이 인터뷰를 기획했다. 또한 이 인터뷰가 늘 활동으로만 설명되어왔던 이들의 고유한 얼굴을 좀 더 자세히 그려내고, 더 나아가 곳곳에 흩어져 있는 활동들을 잇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아래의 인터뷰는 <프레시안> 연재를 위한 편집본입니다. 글 마지막의 링크에서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상한 모자'라는 필명을 쓴다. '야채인간'이라는 밴드에서 기타를 친다.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바로 가기)'라는 사이트를 운영한다.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텍스트 펴냄, 2009), <심상정, 이상 혹은 현실>(공저, 행복한책읽기 펴냄, 2010), <안철수 밀어서 잠금 해제>(공저, 메디치 펴냄, 2011), <우파의 불만>(공저, 글항아리 펴냄, 2012) 등의 책을 썼다. '큰 스승'이라는 별명이 있고, 더러는 그를 '운동권계의 관료/공무원/골품'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미디어 비평지 <미디어스>에서 기사를 쓴다.
지난 7월 21일 진보신당 연대회의(이하 진보신당)는 노동당으로 개명 후 재창당 작업을 마무리 했다. 그로부터 몇 주 전 당명 개정이 결렬되었던 당 대회 다음 날, 6호선 이태원역 근처에서 '진보신당' 정책위원 김민하를 만났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터뷰에서는 아직은 '진보신당'이다. 그는 인터뷰 사이사이에 "아 쉬운 말로 해야 하는데…." 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 사이로 비치는 그의 풍채와 웃음소리는 가히 삼국지의 장비 급이었다. 그가 맡고자 하는 배역은 공명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아니, 조조인가?
(비디오에서 그의 웃음을 보실 수 있습니다.)
BIYN : 본인 소개 부탁드릴게요. 요즘에는 스스로를 어떻게 소개하시나요?
김민하 : 저는 <미디어스> 기자 김민하입니다. 세상에… (웃음)
저는 진보신당에서 정책위원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기획실 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개인 사정이 생겨서 퇴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도 중앙당에서 일손이 계속 달리고 해야 할 몫이 있는 것 같아서 정책위원을 시켜 달라고 했죠. 다른 정책위원들 중에는 박사도 있고, 나름대로 가방끈이 긴 분들이 정책위원을 하는데 저는 대학도 졸업 안 했는데 시켜 달라고 졸라서 하고 있죠.
▲ 김민하 <미디어스> 기자·진보신당(현 노동당) 정책위원.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
진보정당 운동을 택하기까지
BIYN : 지금의 활동을 시작하시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인지요.
김민하 : 어떤 계기요? 이 모양 이 꼴이 된 계기인가요?
처음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 수 없겠다'라고 생각한 건 우리 집이 너무 가난하고 정상적인 가정환경이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는 장래희망을 적어 내라고 하면 '음악가'라고 적어냈거든요. 음악가가 되기 위해 음대를 가겠다고 하면 어머니도 우리 집엔 돈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하는 거죠.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도 했고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못 살 것 같아서 계속 음악가라고 써서 냈던 건데… 그래서 어머니한테 '그럼 나는 임꺽정 같은 도둑이 돼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겠다'라고 해서 맞은 기억이 있어요.
두 번째 계기는, 수능이 끝나고 시간이 남잖아요. 그때 인터넷을 너무 많이 한 거죠. 인터넷을 하다가 진중권이라는 사람이 쓴 글을 보게 됐어요. 그 사람이 그때는 지금 같지 않았거든요. 되게 멋있는 좌파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 사람이 주로 글을 쓰는 인터넷 사이트에 가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봤어요. 거의 80퍼센트 정도의 말은 '노동계급의 단결'과 '계급적 투쟁'과 '개량주의와 자유주의와의 반목' 같은 전문용어 때문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그 중에 소수의 알아들을 수 있는 글들을 타고 가니까 민주노동당이 나온 거예요. 대학교 2학년 때(2002년)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탄생했고, 저는 민주노동당에 입당하게 된 거죠. 이 과정에서 민주노동당 편이었던 저는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던 민주당 편 사람들과 많은 논쟁을 했어요. 그때 싸우면서 너무 화가 나서 대선이 끝나면 민주노동당에 입당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BIYN : 활동을 하기 위해 굳이 '당'이라는 곳을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민하 : 두 가지인 것 같은데, 첫 번째는 운동권 책을 읽었더니 당을 해야 된다고 쓰여 있더라고요. (웃음) 두 번째는 덤프연대에서 일한 경험 때문인데요. 덤프연대 노동자들은 특수고용노동자잖아요. 노동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를 받지 못해요. 법적으로는 자영업자, 개인사업자 신분인 거죠. 개인사업자인 경우는 다른 사업자와 이 사업자의 일대일의 사적 계약이어서, 이 계약에 의해 저 사람이 나에게 언제까지 1000만 원을 주기로 했는데 안 줬다면 근로기준법으로 처벌할 수 없어요. 특수고용노동자들이 훨씬 더 나쁜 노동 환경에 몰려있는 셈인데, 그걸 바꾸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죠. 그런데 법적으로 보장돼 있는 게 없으니까 (법적인) 힘을 위해 주력할 수밖에 없어요.
현장에서 너무 돈을 '짜게' 준다는 문제가 많았어요. 예를 들어서 원래 하루에 32만원을 줘야 되는데 27만원만 주는 거예요. 그래서 제 몫을 받기 위해 가서 때려 부수고, 농성하고 집회를 하면 그 현장에서는 해결이 돼요. 와서 다 때려 부수는데 어떡하겠어요. 그런데 거기에서만 그 일을 평생 하는 게 아니잖아요. 현장이 거기서 끝나요. 그럼 다른 현장에 가요. 그럼 27만원을 또 줘요. 그걸 또 부숴요. 그럼 또 32만원을 줘요. 이걸 평생 할 수는 없잖아요.
백날 해봐야 특수고용노동자라는 지위가 바뀌지 않으면 현실이 바뀌지 않아요. 믿을 것은 민주노동당 밖에 없던 시절인데, 온 운동권 노조들이 다 민노당 의원들한테 매달려서 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게 해달라고 얘기해요. 그런데 민주노동당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의원이 아홉 명 밖에 없잖아요. 의회에서 '왕따' 당하거나 상임위원회에서 '난장 까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거죠. 즉 노조 같은 틀에서는 부수고 드러눕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반면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이 열 명, 스무 명이 되면 뭔가 할 수 있는 게 조금 더 생기겠지요.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진보정당 운동이 커지고 활발해지는 것이 내가 원하는 사회의 도래를 조금이나마 앞당기는 데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나름 천직인 운동
BIYN : 활동을 그만두고 싶으셨던 적이 있는지, 있다면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요.
김민하 : 그만두고 싶다고 진지하게 생각한 적은 없어요. 이제 와서 다른 일을 할 수나 있겠어요? (웃음) 물론 절망감이 든 적은 몇 번 있었죠. 예를 들면 2011년에 (진보신당이) 갈라질 때가 있잖아요. 그 당시 진보신당의 일부 사람들이 통합진보당으로 가니까 너무 화가 났어요. 그게 그 사람들의 원칙이나 정치적인 입장이 달라졌다는 데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논쟁을 할 때 감정을 들이대는 경우가 많아서 그랬어요.
예를 들면, 우리가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옳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에 집중하는 것보다 이러저러한 정국에 맞게 민생과 관련한 입법을 하는 게 우선이고, 국보법 폐지는 열린우리당도 하고 있다고 얘기해요. 그러면 이 주장에 대한 논리적인 반박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당시 자주파 성향의 어떤 당원들은 "지금 우리 동지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서에 잡혀 있는데 어떻게 너희들은 그걸 외면하고, 민생 법안 얘기나 한가하게 하느냐"고 하는 거죠.
누가 그걸 외면하자고 한 게 아니잖아요. 당의 전체적인 정책의 방향이나 정치적인 행보를 민생과 관련한 입법 위주로 잡아가야 여러모로 이득이라고 얘기해도 말이 안 통해요. 그런데 2011년에 (진보신당 내) 소위 독자파와 통합파가 싸울 때 그 감정이 느껴지는 거예요.
최근 당의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들과 그 상황들을 둘러싸고 서로 하는 말들에 대해서도 많이 절망해요. 훨씬 생산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는 논쟁의 방법이 있고 그렇게 대화를 해야 답을 정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일방적인 비난과 감정적인 우기기만 반복하는지. 그래도 운동과 연을 끊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안 해요. 이게 나름의 천직인 것 같아서….
BIYN : 그럼에도 계속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에너지, 힘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김민하 : 첫 번째는 소박한 건데요. 제가 컴퓨터를 나름대로 잘 다룬다는 겁니다. 중앙당에서 일을 하다 보면 이쪽 사람들이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아주 간단한 문제를 붙잡고 하루 종일 헤매고 있지요. 근데 저는 굉장히 다양한 것들을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면 기쁘죠. '역시 내가 없으면 안 되는군' 이런 소박한 기쁨이 있죠.
그리고 두 번째는 제가 하는 활동(글 쓰는 일, 팟캐스트 등)을 보고, 원래는 진보정치에 관심이 없었는데 진보신당에 입당했다는 경우를 볼 때입니다. 내가 아주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
BIYN : 기본소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민하 : 기본소득이라는 의제를 내세워서 정치적인 흐름을 만드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다만 아쉬운 점은 기본소득을 전면에 내세우고 중요한 정책으로 삼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섬세하게 알고, 조율하는 것이 필요한 데 이에 대한 반론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수준이 미봉적인 느낌이 든다는 거예요.
일례로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인플레이션이 유발된다고 비판을 하잖아요. 제 생각에는 인플레이션이 올 거예요.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체제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거예요. 기본소득을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면 인플레이션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잖아요. 이런 주장에서 기본소득은 이행기 강령의 수준으로 격상되는 한편 현실적인 정책으로서의 성격은 줄어드는 측면이 있죠.
다른 한편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대중들의 구매력이 상승하므로 한쪽에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강해져도 그 압력을 해소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어요. 이런 주장에서는 기본소득의 이행기 강령으로서의 역할은 취소되어야겠죠. 이 두 의견이 서로 완전히 모순되지는 않지만 각각 주장의 성격에 대해 섬세하게 정리될 필요가 많아요. 기본소득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제시되는 반론에 대해 얼마나 매끄럽고 일관된 논리를 제시하는지가 중요하게 보일 테니까요.
직업인으로서의 당료 아닌 활동가 마인드를 가진 당료
BIYN : 중장기 계획 및 활동가로서의 삶의 최종 목표를 알려주세요.
김민하 : 최종 목표요? 하하하하. 10년 후요? 요즘 같을 때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 같은데… 저는 당분간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지속될 거라는 게 솔직한 생각이구요. 어렵다는 게, 정치적으로요.
제 기억 속에서는 민주노동당이 제일 잘 됐던 활동으로 남아 있는 거잖아요. 그 때는 어디 가서 민주노동당이라고 얘기할 때 자부심이 있었어요. 그 이후로 당의 지지율이나 정치적 성과를 떠나서 전체 운동의 지반 자체가 많이 붕괴됐어요. 당이 딛고 서야 될 토양이 계속 무너진 거죠. 지금까지 이 지반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힘이 부족한 상황에 몰려있으니까 이 토양을 복구하는 일 자체가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10년 후의 상황이 지금의 내 처지랑 뭐가 다를까 생각하죠. 슬픈 정당의 상근자를 다시 하거나, 아니면 지금처럼 다른 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곁다리로 당 운동에 참여하거나.
물론 어느 날 갑자기 (당 운동이) 잘 될 수도 있겠죠. 만약 그렇게 대박이 터진다면 저는 당료 내지는 보좌관처럼 주로 체제와 관계된 일을 하고 싶어요. 물론 현장에서 활동하고 사람들을 조직하고 지역에서 선거에 출마 하는 역할도 다 중요하지만, 상대적으로 그 역할을 할 사람들은 아직은 많은 것 같아요. 오히려 당료를 할 사람들은 부족하지 않나 싶어요. 그리고 이 사람들이 부족하면 그야말로 직업인으로서의 당료, 보좌관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오히려 당을 망치죠. 장기적으로 정치적 전망이 서지 않는 길이기 때문에 활동가 마인드를 갖고 있는 당료가 필요하고요.
롤모델은 레닌, "물론 대머리가 되고 싶진 않습니다."
BIYN : 롤모델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
이런 일화가 있어요. 볼셰비키가 무슨 행사를 했는데 사람들한테 회비를 걷어야 되는 거예요. 그럼 만일 지금 진보신당에서 마찬가지의 상황이 벌어졌다면, 이용길 당대표나 장석준 부대표가 안 걷을 거잖아요. 그런데 레닌이 걷었다는 거예요. (웃음)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는 어떤 지도자 상을 사람들이 봤던 거죠.
그렇지만 저는 그 사람이 지도자였다는 사실 자체보다, 필요한 일이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고 행하는 자세로 목표를 어느 정도까지는 이루었다는 것이 큰 의미라고 생각해 레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대머리는 되고 싶진 않습니다.
BIYN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김민하 : 성공한 인생을 사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사회적인 시선에서) 실패한 인생으로 찍힌다고 너무 좌절하지 말았으면 좋겠고요. 저는 처가에 가면 할 말이 없어서 처가에 자주 안 가요. 제가 처음에 인사드리러 갔을 때 장인어른께서 학교는 졸업했냐고 물으셔서 "안 했습니다.", 군대는 갔다 왔냐고 해서 "안 갔습니다.", 직장은 있냐고 해서 민주노동당이라고 했더니 그건 직장이 아니라는 거예요. (웃음) 그런데 어떤 직장이든 상황이 어려운 것은 똑같으니까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더 많은 자신감과 긍지를 가져야 될 것 같아요.
당원들이 진보신당의 당원이라는 사실에 대해 많이 자학하잖아요? 저도 그렇거든요. 그래도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된 진보적인 가치를 사회적으로 관철시키려는 당은 진보신당 밖에 남지 않은 것도 사실이잖아요. 말로야, 그리고 때때로 감정들로야 슬플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갖는 마음은 자신감과 자랑스러움이었으면 좋겠어요.
국내 기본소득 논의에 줄곧 관심을 기울여왔음이 드러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조금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기본소득 역시 연주에 앞서 '내용을 섬세하게 알고, 조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있는 까닭은 그가 당의 '정책위원'이고 '기자'여서가 아니라, '음악가'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실제로 음악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정책을 작곡하고 지휘하고 연주한다는 측면에서도 그는 전방위적인 '음악가'로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터뷰 전문은 이곳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기본소득은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조건 없이 보편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을 말합니다.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Basic Income Youth Network, 이하 BIYN)는 기본소득이 실현된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모인 개인 및 단체들의 네트워크입니다. BIYN는 한국사회에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알리고, 신자유주의의 누적된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당사자인 청'소'년(0세~30대)이 먼저 그리고 같이 기본소득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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