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하다시피 '전후'는 1945년 8월 패전 이후의 시기적 구분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 일본 사회를 지탱하고 작동시켜 온 정치적, 제도적, 가치론적 원리이자 그것이 통용된 범위를 일컫는다. 그래서 '전후가 끝났다'는 선언에는 일본이 이전과는 같은 방식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진단과 앞으로 새로운 판을 짜야 한다는 주장이 들어 있다. 그로부터 2년여의 시간이 지난 2013년 현재, 실제로 새로운 정치 지형이 펼쳐졌는가? 얼마간 몇 가지 새로운 가능성이 펼쳐지는 듯하더니, 하시모토 도루 같은 극우적 정치가의 등장, 아베 정권의 복귀와 끊임없는 개헌 논의, 황실이 동원된 도쿄 올림픽 열풍 등 우선회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경향이 이어지고 있다. 새로운 판이 존재한다면, 전통적인 보혁 대립 구도 속 리버럴 좌파 세력의 '배제'라는 의미에서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 <일본 전후의 붕괴: 서브컬처 소비사회 그리고 세대>(권혁태 지음, 제이앤씨 펴냄). ⓒ제이앤씨 |
왜 90년대일까. 이 시기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한 사건은 냉전 체제의 붕괴다. 사상가 마쓰모토 겐이치는 이 시기를 막말유신기와 1945년 패전에 이어 '제3의 개국'이라 형용하며, 일본이 "국제 사회의 한복판에 내쳐진" 계기라고 말했다. 즉 냉전 해체는 냉전이 존속하기에 가능한 미국의 반공 전투기지로서의 기존 안보론이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 열매였던 '전후 번영'의 스위치도 함께 내려갔음을 의미한다. 냉전의 수혜 시효가 끝나고, 버블이 꺼지고, 장기 불황의 시대가 열렸다.
여기서 사회적으로는 불황의 대책으로 규제 완화, 고용 시장 유연화 등 신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격차 사회'가 도래하고, 정치적으로는 '55년 체제'가 막을 내리게 된다. '55년 체제'는 자민당이 여당으로 장기 집권하고 혁신 계열의 사회당이 제1야당으로 기능하는 일본 보수 정치의 토대라 요약할 수 있는데, 사회가 걷잡을 수 없이 유동화되자 2대 정당의 정치 시장 장악력도 함께 퇴보하면서 기권율 상승, 다당화 경향으로 이어져 소멸을 맞게 된 것이다. 일본이 "국제 사회의 한복판에 내쳐"졌다는 비유를 가져온다면, 일본 속 개인들 역시 '사회 한복판으로 내쳐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일본의 존재 양식이 크게 변모한 시대에 성인 연령에 진입한 세대를 부르는 말이 잘 알려진 것처럼 '잃어버린 세대'다. 이들은 일본이 호황을 구가하던 시기, 다시 말해 젊은이들에게 '약속'을 줄 수 있던 연공서열 논리가 작동하던 시기 젊은 시절을 보낸 세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시대 경험을 하게 된다. "마루야마 마사오를 때려주고 싶다. 31세 아르바이트 생, 희망은 전쟁"이라는 자극적인 글을 발표해 논단에 충격을 던진 아카기 도모히로(1975년생), "프리터였던 나에게 없던" "'사는 의미'"를 옴진리교 신자들에게서 발견하고 우익 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아마미야 가린(1975년생)은 그 상징일 것이다. 아마미야는 후에 좌파 논단계로 '전향'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 모두 90년대를 통과하며 체험한 울분을 전후 평화주의에 대한 경멸과 내셔널리스트의 슬로건으로 쏟아낸 바 있다.
저자는 이들 세대가 도달한 내셔널리즘 앞에 붙은 형용사, '새로운'의 특징과 양태에 주목한다. 그것을 추동한 엔진 한쪽에는 "'전후 민주주의'나 '리버럴'이라는 형용으로 총괄"되는 "'좌'의 언어"를 기득권의 언어로 이해하는 거부감이 존재했고, 한쪽에는 1980년대 이래 일상 감각에 깊이 스며든 '포스트모던'하고 탈정치적인 문화 양식이 존재했다. 무국적의 서브컬처로 대표되는 이 문화 양식이 국가주의와 모순 없이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은, 아사다 아키라의 지적대로 당시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이 "호황기 소비 사회에 의해 지탱된" 일시적 조류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전후 일본을 지탱한 두 가지 '큰 이야기'가 있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자본주의 이야기, 또 하나는 혁명을 일으키면 행복해진다는 사회주의 이야기"다. 70년대 초반 두 번째 이야기는 '우치게바'와 아사마 산장의 비극을 끝으로 소멸했고, 첫 번째 이야기는 버블 경제 시기 그 믿음이 현실화되자 "이야기로서의 매력과 기능을 잃어버렸다." 그 이후 텅 빈 세계 앞에 붙잡아야 할 '큰 이야기'는 현실과 이상 모두 소멸한 만큼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1995년의 옴진리교 테러와 젊은이들이 그 이야기에 열광한 현상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여러 논자들이 이것을 '사회주의 혁명 이야기'의 대체재로 해석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포착한 대로 옴진리교의 이야기는 쓰레기 부품과 서브컬처 세계관을 조악하게 긁어모은 '위사(僞史)=가짜 역사'였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을 사로잡는 힘을 갖고 있었다. 이는 '전후 민주주의' '경제 성장'으로 요약되는 전후라는 가치 공간에 거기에 대항할 '정사'가 없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거기다 교주 아사하라 쇼코의 시력장애는 미나마타병이라는, 전후 번영에 가려진 '기민(棄民)'의 역사를 폭로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 사건은 '전후'의 기능 부전과 종말을 예고한 파탄이었던 셈이다.
옴진리교 사건 이후 한 논고에서 미야다이 신지는 1990년대 젊은이들에게 두 개의 서브컬처적 세계관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하나는 '끝없는 일상', 또 하나는 '핵 전쟁 후의 공동성'이다. 옴진리교의 위사가 실패한 뒤 남은 것은 '끝없는 일상'밖에는 없을 텐데, 여기에 기본 전제가 되었던 것은 "일상을 지탱하는 경제적 조건"이었기에 그것이 사라진 1990년대에 서사 전략은 필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7~80년대 소비사회부터 시작된 탈정치적인 흐름과 커다란 이야기의 실종 사이에서 일본이라는 국가에 몸을 내던지는 청년들이 쓸쓸하게 포착되는 것이다. '쓸쓸하게'라는 심상을 굳이 넣은 이유는, 이 오랜 배경을 지닌 현상이 넓은 의미로 '다른 정치적 가능성'의 실패담에 속하기 때문이다.
현대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한국 언론이라는 필터를 거치며 배율이 확대되어 오히려 모양이 흐릿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협인지'를 논하는 데 주력하고 있어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지, 과거와는 어떻게 다른지, 향후 관계를 설정해 나가는 데 어떤 변수를 작용할지는 섬세하게 판단하기 힘들다. 한일관계의 특성, 즉 미국 태평양 패권의 수직화된 계열 속에 국내 정치와 외교가 얽혀 있는 처지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겠으나, 바로 거기에 생각의 회로를 놓는 데 소홀하기 때문에 거의 똑같은 말이 되풀이되고 있다.
'일본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가 사는 시공간과 연관 지어 이해하려면, 두 나라의 존재 방식이 어떤 끈으로 이어져 있는지를 파악하게 하는 맥락의 충실한 서술이 가장 중요한 작업일 것이다. 저자 권혁태 교수는 기본적으로 학자이지만, 대중 매체를 통해 일본 사회에 나타나는 변화나 상징적인 사건을 그 역사적 흐름과 함께 제대로 보여주는 데 공을 들이는 몇 안 되는 대중 필자이기도 하다. 그의 글의 특징은 '충실히 보여주기'다. 2010년에 펴낸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교양인 펴냄)에 이어 이번 책에서도 명확한 결론이나 주장은 없지만, 일본의 운동 세력이나 리버럴 좌파가 어떤 내부 결함을 해소하지 못한 채 몰락하고 있는지, 그게 한국의 경우와 어떤 원리를 공유하고 있는지를 독자 스스로 찬찬히 돌아보게 해준다.
지금까지 10권이 출간된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의 '리딩 재팬' 시리즈는 국내외 일본 전문가들의 학술 세미나를 토대로 만들어진 소책자다. <일본 전후의 붕괴>는 발표 내용을 크게 고치고 보완해 시리즈 가운데서도 단행본으로서 완성도가 높다. 다만 시리즈 전체에 지적되는 내용이지만, 편집은 상당히 아쉽다. 강의 발표문이라는 형식의 제한이 있더라도 그 내용의 수준이 높기에 전문적으로 기획·편집되었더라면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독자의 접근을 도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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