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날짜가 임박해서야 간신히 강연 자료를 만들고 청중들에게 나눠줄 분량이 제법 많은 에세이를 한편 썼다. 나는 여전히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궁리를 해서 '천문학이 역사에게' 정도의 애매모호한 제목을 잡고 네 가지인지 다섯 가지인지 역사와 천문학이 섞여 들어간 이야기를 구성해서 강연을 했다. 나는 자꾸 역사 이야기를 하려고 애를 쓰면서 강연을 했는데 같이 강연을 했던 역사학자는 강연 내내 천문학 이야기를 놓지 않았다.
강연이 끝나고 여러 사람이 같이 모인 뒤풀이 자리에서 그 날의 작은 워크숍이 '빅 히스토리' 워크숍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말로는 '거대사' 정도로 부르는 '빅 히스토리'라는 단어 자체도 내겐 익숙하지 않았었다. 그날 그 자리에서 진화학자와 역사학자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경청하면서 나는 내가 한 일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어리바리한 내가 창피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워크숍 의도에 크게 벗어나지 않은 강연을 했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이렇게 빅 히스토리와 나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재작년 말이었는지 작년 초였는지 모르겠다. 평소 알고 지내던 편집자 한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빅 히스토리'를 주제로 시리즈물을 기획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5~6년 전 그 작은 워크숍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바로 그 역사학자와 진화학자와 한 팀이 되어서 작업을 한다면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도 역시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작업한다는 조건으로 빅 히스토리 시리즈 발간 작업에 동참하겠다는 이야기를 그 편집자에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 시리즈의 첫 세 권이 10월 중순에 출판될 예정이다.
▲ <빅 히스토리>(데이비드 크리스천·밥 베인 지음, 조지형 옮김, 해나무 펴냄). ⓒ해나무 |
이런 분위기 속에서 또 한 권의 빅 히스토리 책이 나왔다. 나와 같이 강연을 했던 바로 그 역사학자가 번역한 <빅 히스토리>(데이비드 크리스천·밥 베인 지음, 조지형 옮김, 해나무 펴냄)다.
이 책은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설립자인 빌 게이츠가 지원하는 빅 히스토리 프로젝트의 기본 텍스트를 번역하여 엮은 것이다.
<빅 히스토리>는 옮긴이의 글 첫 문장에서 조지형이 명확하게 밝혀 놓은 바처럼, 책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온라인 텍스트를 번역한 것이다. 영문 원본을 책으로 엮을 계획이 아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면에서 <빅 히스토리>는 형식상 특이한 책이고 유일무이한 책이기도 하다.
신시아 브라운의 책이나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책에 비해서 이번에 나온 <빅 히스토리>가 가볍고 중량감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이 책의 진짜 가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빅 히스토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분량으로 적절한 질문을 갖고 적합한 답안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책이 바로 <빅 히스토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모태가 웹 페이지의 텍스트이기 때문에 글 자체가 가볍고 경쾌할 수밖에 없다. 처음 읽는 독자들이 부담감 없이 접근할 수 있는 편한 책이라는 이야기다. 한편 좀 더 심각한 독자들에게는 어쩌면 조금은 시시하고 다소 뻔한 이야기들의 나열일 수도 있다.
이런 이유에서 빅 히스토리에 관심을 갖게 된 독자에게 첫 번째 '빅 히스토리' 책으로 권하고 싶은 책이 바로 크리스천과 베인이 지은 <빅 히스토리>이다. 아직도 빅 히스토리에 대한 개념이 어리바리한 내게도 이 책은 좋은 가이드북이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빅 히스토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여전히 내 머릿속의 빅 히스토리는 오리무중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제 겨우 안개 속에서 어떤 실체의 꼬리를 잡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인의 독서와 청소년의 독서가 다를 것이고 읽을 텍스트가 다를 것이지만 빅 히스토리라는 아직은 다소 생소한 분야에서는 그 구분이 여전히 크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성인이나 청소년 구분 없이 누구에게나 이 책 <빅 히스토리>를 첫 번째 빅 히스토리 책으로 권하고 싶다.
사실 이 책은 가볍고 경쾌한 책이면서 할 말은 모두 담긴 콤팩트한 책이기도 하다.
빅 히스토리 혹은 거대사는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이 세상 모든 것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과 같이 되었으며 그 이야기 속에 우리는 어디에 위치해 있고,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다.
▲ <시간의 지도>(데이비드 크리스천 지음, 이근영 옮김, 심산문화 펴냄). ⓒ심산문화 |
사족을 달자면 '빅 히스토리'라는 이름에는 적극 동의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아무래도 '히스토리'라는 단어가 걸린다. 그 보다는 더 포괄적인 작업인데 그 속에 갇혀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노파심이다. 내가 생각하는 별다른 대안은 없다. 차라리 '빅 스토리'라고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해봤다.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관점들 중의 하나는 복잡성의 증가라는 것입니다. 137억 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우주에서 완전히 새로운 특징을 가진 새로운 것들, 새로운 복잡한 것들이 점진적으로 출현했습니다. 우리는 특히 이를 '임계국면'이라고 부르는 전환점을 통해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마지막 임계국면은 오늘날의 세계이며, 이 세계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복잡한 것입니다.
<빅 히스토리>를 읽는 재미를 더하는 것은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관점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빅 히스토리 정신의 관점이기도 할 것이다. 확실한 관점 아래 서술된 텍스트는 명확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이런 단순함과 콤팩트한 구성은 늘 감동적이고 여운을 남긴다. 하지만 '복잡성의 증가'라는 관점에는 역시 약간의 사족을 달고 싶다. 이 제한된 지면에서 과학자들의 생각을 들먹거리면서 논쟁을 유발할 생각은 없지만 새로운 것의 출현과 복잡성의 증가를 연계시키거나 과도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하는 것이 마음에 좀 걸린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여덟 가지 임계국면은 이렇다.
(1) 137억 년 전 빅뱅
(2) 135억 년 전 별의 출현
(3) 135억 년 전 새로운 원소의 출현
(4) 45억 년 전 태양계와 지구
(5) 38억 년 전 지구상의 생명
(6) 20만 년 전 집단학습
(7) 1만 1000년 전 농경
(8) 250년 전 근대 혁명
이 책에서는 '임계국면'을 '복잡성 증가의 임계국면'으로 풀어서 해석하면서 '역사 속에서 많은 임계국면을 발견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이런 문제 인식 아래서 이 책은 각 임계국면에서 일어난 일들을 추적하는 역사 서술 방식을 선보이고 있다.
<빅 히스토리>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핵심 질문'으로 시작해서 임계국면에서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점이다. 질문은 누구나 마구 던질 수 있다.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해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질문을 더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만드는 작업이야말로 더 정밀한 해답을 얻기 위한 첫걸음일 것이다. <빅 히스토리>의 핵심 질문들은 누구나 마구 던질 수 있는 거칠고 근원적인 질문들을 정교하고 계산된 구체적인 질문으로 만들어놓은 것들이다. 질문에 의해서 사고하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사고훈련을 하기 적합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 어울리는 새로운 방식이 돋보인다.
▲ <빅 히스토리>(신시아 브라운 지음, 이근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
여전히 애매하게 남겨둔 빅 히스토리란 무엇인지 또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초짜라는 비겁한 핑계를 다시 하면서 <빅 히스토리>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면피하려고 한다.
빅뱅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는 광대한 시간의 역사를 살펴보는 지식은 나약한 한 인간에게 여전히 압도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광대한 것을 이래하려고 노력하는 영웅적인 한 인간에게 종속적이기도 하다.
사족. 빅 히스토리 시리즈 20권의 첫 세 권의 지은이는 이 글에서 언급된 진화학자, 역사학자 그리고 나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혀두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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