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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간 친구, CEO 된 친구… '가난'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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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간 친구, CEO 된 친구… '가난'을 생각하다

[마녀의 '도서관 편지'] 그 시절 그 친구들에게

조은, <사당동 더하기 25>(또하나의문화 펴냄)
캐서린 부, <안나와디의 아이들>(강수정 옮김, 반비 펴냄)
오스카 루이스, <산체스네 아이들>(박현수 옮김, 이매진 펴냄)


얘들아, 안녕!
오랜만이야.

나이가 들면 추억이 현실보다 생생해진다더니 어린 시절의 몇 장면들, 그리고 그 장면 속의 너희들 모습이 갈수록 또렷하구나. 여름이면 으레 물난리가 나던 1970년대 서강에서 함께 '똥통학교'를 다닌 우리, 그러나 학교 성적만큼이나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사는 곳도 사는 모양도 다 달랐던 어린 우리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옛일을 떠올리는 건 묵은 기억에 민감해지는 나이 탓도 있겠지만 요즘 읽는 책들도 한몫을 한 것 같다. 달포 전 오스카 루이스의 <산체스네 아이들>(박현수 옮김, 이매진 펴냄)이 16년 만에 재출간되고 이어서 캐서린 부가 쓴 논픽션 <안나와디의 아이들>(강수정 옮김, 반비 펴냄)이 나오기에, 이참에 비슷한 책들을 묶어서 읽자 하고 작년에 나온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또하나의문화 펴냄)까지 세 권을 잇달아 읽었거든.

다루는 지역과 시기는 1960년대 멕시코시티 빈민가, 2010년경 인도 뭄바이, 1980~90년대 서울 사당동으로 각각 다르지만, 모두 가난한 마을 가난한 사람들을 다룬 이 책들을 읽다보니 자꾸 우리가 살았던 서강이 떠오르고 너희들이 생각나더구나.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고 이웃 마을로 이사를 가고 한 번 두 번 집을 옮기고 세월은 흘러, 우리가 함께했던 공간도 시간도 꿈인 듯 아스라해진 지금 이렇게 편지를 쓴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잘 지내냐고 묻는 게 순서겠지? 그래, 잘 지내니? 모두 무사히 건강히 잘 살고 있니? 글쎄, 모르겠다. 이런 물음이 왜 이렇게 한심하게, 아니 잔인하게까지 느껴지는지… 아무튼,

나는 잘 지내. 한동안 고생은 좀 했지만 학력도 있고 나름대로 애쓴 덕분에 뒤늦게 취직해서 일하다가 요즘은 글을 쓰고 있어. 비록 몸은 골골하고 글쓰기는 암담하고 앞으로 닥칠 노년과 죽음을 생각하면 막막해서 잠이 안 오지만, 그래도 집도 있고 차도 있는 안정된 중산층으로 큰 걱정 없이 살고 있단다. 그러고 보니 작년엔가, 신문에서 은이 얼굴을 본 기억이 나는구나. 성공한 여성 CEO로 대문짝만한 사진과 함께 근황이 소개된 것을 보고 얼마나 놀라고 반가웠던지. 초등학교 때 반장 부반장을 번갈아 하면서 은이의 탁월한 리더십은 곁에서 보아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성공할 줄이야. 돈 많고 지위 높은 게 뭐 그리 중요하냐는 평소의 소신과 달리 성공한 은이 모습에 손뼉을 치며 기뻐했단다.

▲ <산체스네 아이들>(오스카 루이스 지음, 박현수 옮김, 이매진 펴냄). ⓒ이매진
은이였기 때문일 거야. 속 좁은 내가 친구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4학년 때였던가, 어느 날 방과 후에 은이가 짝의 공부를 봐주기로 했는데 같이하자고 하더라. 나는 그런 생각을 해낸 은이와 짝 숙이에게 은근히 놀라면서 숙이네 집으로 따라갔어. 열 집 남짓한 단칸 셋방들이 디귿(ㄷ)자 모양으로 죽 이어져 있고 마당 한가운데 펌프가 있는 공동 빨래터가, 한쪽 구석에는 공동변소가 있는 집이었는데, 아마 <산체스네 아이들>의 배경이었던 빠나데로스의 단칸방 연립주택과 비슷한 구조일 거야. 맨션아파트에 살던 은이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여러 셋집이랑 마당과 재래식 변소를 함께 쓰던 터라 숙이네 단칸방이 너무 작고 어두운 데 움찔하긴 했지만 집을 보곤 그리 놀랍지 않았어.

정작 내가 놀란 건 숙이네 어머니께서 우리를 반기며 차려주신 점심 밥상이었지. 고마운 친구들인데 차린 게 없어 미안하다면서, 숙이처럼 까맣게 탄 얼굴을 붉히며 어머니가 내오신 밥상에는 고봉으로 푼 깡보리밥 세 그릇과 맹물 세 그릇, 노란 단무지 한 접시, 간장 한 종지, 그리고 종점 식당에서나 쓰는 플라스틱 동그란 수저통이 놓여 있었어. 김치 없는 밥상은 처음이었다. 가난해도 김치는 다 먹는 줄 알았던 나는 간장이 찬이 되는 밥상에 충격을 받았어. 은이도 비슷했겠지만 눈치 빠른 우리는 내색 않고 밥을 먹기 시작했어. 한데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그날 숙이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보다 더 맛있는 밥은 그 뒤로 먹어본 적이 없다.(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맛본 갈비만 빼고.) 그러고 우리가 공부를 했는지, 얼마나 오래 했는지 그런 건 기억이 없어. 그냥 그날의 밥상과 그 맛만이 눈과 혀에 또렷이 남았을 뿐.

신문에서 은이를 보자마자 그날 그 밥상이, 숙이가 떠올랐어. 어떻게 사는지, 잘 지내는지 궁금하더구나. 그때보다 잘살기를 바라지만 솔직히, 여전히 어둑한 셋방에서 찬 없는 밥을 먹는 건 아닌지 지레 걱정이 되더라. 왜 그리 비관적이냐고 탓할 지도 모르지만 사당동 철거민의 25년 세월을 추적한 <사당동 더하기 25>를 읽었다면 이런 나를 이해하리라 믿어. 매일 꼼꼼히 가계부를 쓸 만큼 성실하게 열심히 일했지만 금선 할머니가 결국 자손들에게 가난을 대물림했듯이, 가난을 벗어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니까.

▲ <사당동 더하기 25>(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 ⓒ또하나의문화
사람들은 말하지. 요즘 세상은 부지런히 노력하면 잘살 수 있다고,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이유는 게으르고 무절제해서 있는 돈도 까먹는 탓이라고. 하지만 굳이 금선 할머니네 가족들의 25년을 보지 않아도, 또 학교도 못 가고 여섯 살 무렵부터 넝마주이로 일한 안나와디의 압둘을 모르더라도 현실은 그와 다르다는 걸 나는 알아. 아마 너희들도 그렇겠지.

은이의 뛰어난 능력을 잘 알면서도 나는 만약 은이가 숙이였다면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곤 해. 예닐곱 명의 식구들이 복작거리는 단칸방에서 동생들을 돌보며 숙제할 시간조차 없이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면, 미국 유학은커녕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어야 했다면, 과연 지금처럼 다국적기업의 경영자로 성공할 수 있었을까?

초등학교 1학년 때였어. 2학기가 시작하자 선생님은 우리에게 직접 반장을 뽑으라고 하셨어. 선거는 전임 반장과 우리 반 일등, 두 명의 각축전이 되었지. 나는 가난하지만 영리한 일등을 지지하면서도 선생님이 예뻐하는 부잣집 아이가 반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다들 비슷한 생각이었지. 선생님조차도. 하지만 투표 결과 제일 많은 표를 얻은 건 일등이었어. 와! 놀람의 함성이 교실 안에 퍼졌고 선생님은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하셨어. 그리고 더듬거리며 이런저런 핑계를 대더니 반장은 결과와 상관없이 전임 반장이 계속하는 걸로 한다고 하셨어. 그때 일등의 표정을 지금도 난 기억해. 실망, 분노, 경멸, 냉소가 뒤섞인 그 표정. 여덟 살이었지만 그 애는 그때 세상을 알아버렸지. 아니, 그 애만이 아니라 낮은 탄식으로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받아들인 우리 반 아이들 모두가 다 알았어. 세상이 얼마나 부당하게 우리를 속이는지.

지금 나는 그 애의 안부가 궁금하다. 가난한 형편에도 일등을 놓치지 않았던 똑똑한 아이가, 선생님을 노려보던 그 분노를 가지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왔을지. 그 애가 세상이 원하는 대로 분노는 잘 다스리고 머리는 잘 써서 자수성가했기를 바라. 한 반 80명 중 40명이 중학교에 가지 못했던 그 시절, 같이 졸업했지만 진학을 하지 못한 절반의 친구들이, 교복 입은 내 모습을 보고 담장 뒤로 숨었던 예쁜 동창이 지금은 옛말 하며 잘살기를 바라.

하지만 사회학자 조은이 입지전적 성공담을 기대하며 하청업체 박 사장을 만난 뒤, "20여 년 전 사당동에서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를 순서만 바꿔 다시 듣는 듯했다."고 토로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난망한 꿈을 꾼다는 걸 알았어. 물론 내가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갈 때 동네 가발공장에서 일했던 동창들 중에는 지금 번듯한 집에서 보란 듯이 사는 친구들도 있겠지. 근면성실한 건 물론이요 아주 운이 좋았다면, 그래서 가족 중에 아픈 사람도 없고 산재 같은 것도 안 당하고 취직한 회사도 안 망하고 아이들도 모범생이고 경제위기의 불똥도 피했다면 그렇게 살기도 하겠지. 그러나 사당동에서 제일 착실한 집으로 소문났던 염씨 아주머니네가 아들이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몸이 닳아지게" 일하고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아무리 성실했어도 운이 나빴다면 내가 목격한 어린 날의 가난에서 벗어나진 못했을 거야. 실직, 질병, 사고, 금융위기, 재개발 같은 충격이 왔을 때 이를 완화할 '완충지대'가 없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이니까.

그래서 나는 "가난이 빈민들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구조이자 근거이자 방어기제"라며 "가난의 문화가 구성원에게 현저한 사회적, 심리적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주장한 오스카 루이스에게 동의하지 않는단다. 그의 말처럼 산체스네 아이들도, 금선 할머니네 아이들도, 안나와디의 아이들도 모두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고 툭하면 직장을 바꾸거나 그만두지만, 그걸 빈곤 문화의 특성이라 할 수는 없을 거야. 다친 아들의 병원비를 대느라 집안이 망하는 불안한 구조에서는 미래를 계획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테니까.

"돈 씀씀이가 헤프고 계획성이 없다"고 비판하던 연구자가 긴 시간이 지난 뒤 계획이 불가능한 빈곤층의 현실을 깨닫는 것처럼, 중산층의 눈에 한심하고 답답해 보이는 생활방식에는 빈곤 문화가 아니라 "그런 문화를 가져오는 구조", "가난의 구조적 조건"이 있다고 생각해. 문제는 조은이 지적하는 것처럼, 이런 구조가 개선되기는커녕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오히려 가난한 이들의 삶이 이 같은 "구조적 요인의 직접적인 충격에 노출"된다는 거야.

1986년부터 2011년까지 25년간 서울의 빈곤을 기록한 조은은 "금융 자본주의 시대에 와서 이들의 가난은 더욱 개별화되고 제도화된 가난이 된다."고 분석하는데, 2007년에서 2011년 사이 인도 안나와디 빈민촌을 추적한 캐서린 부 역시 비슷한 말을 하더구나. 자본의 세계화 시대에 "무력한 개인들은 자신들의 결핍을 똑같이 무력한 다른 개인의 탓으로 돌렸"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연대하지 않았다"고,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불평등한 도시는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를 그럭저럭 이어갔다."고.

그녀들이 꼼꼼히 보고한 대로 이제 한국에서나 인도에서나 빈민들은 맨몸으로 혼자 가난을 겪고 있어. 그리고 시지포스의 운명처럼 가난을 받아들이는 그들을 사회는 외면하지. 1961년 <산체스네 아이들>을 펴내면서 루이스는 C. P. 스노의 말을 인용하여, "사람들이 이제는 가난이란 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잊어버려 불우한 사람들을 느끼지도 못하고 그들과 이야기도 못하게 돼버린 것이 아닐까?" 하고 우려했어. 그런데 반세기가 지난 오늘, <사당동 더하기 25>를 보니 그 우려가 우리의 현실이 되었더구나. 책에서, 네 장점이 뭐냐고 묻는 연구자에게 "장점이 뭐예요?" 하고 되묻는 5학년 아이, "저녁 먹을 때 화제가 뭐예요?" 하자 "화제가 뭔데요?"라고 묻는 아이의 삼촌을 보며, 서로 다른 계층끼리 '이야기도 못하는' 불통과 소외의 현실을 새삼 실감했단다.

아마 지금 숙이를 만난다면, 중학교 대신 가발공장에 간 동창을 다시 만난다면, 우리의 대화 또한 그렇게 삐걱거릴지 몰라. 가방끈 긴 내가 쓰는 말들이 낯설어서 수줍음 잘 타던 숙이는 전처럼 얼굴을 붉힐지도 모르지. 하지만 은이를 만나도 편할 것 같진 않구나. 엽렵한 은이가 배려해주겠지만, 그간의 경험상 오랜 외국 생활을 한데다 기업을 경영하는 친구의 언어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는 걸 알거든.

▲ <안나와디의 아이들>(캐서린 부 지음, 강수정 옮김, 반비 펴냄). ⓒ반비
돌이켜보면 40년 전에도 나는 우리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어.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아파트에서 자기만의 방을 가진 은이는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손등이 부어터지도록 집안일을 하면서 간신히 학교를 마치자마자 공장에 들어간 숙이는 미안함의 대상이었지. 부러움과 미안함 사이, 그 경계에 나는 서 있었어. 어쩔 줄 몰라 하며, 누구의 언어가 내 언어인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채, 때론 원망하고 때론 분노하고 때론 슬퍼하며 살았던 것 같아.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다. 운명에 대해 누가 얼마만큼 책임져야 하고 책임질 수 있는지.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건, 가난이 차별과 경멸의 이유가 되어선 안 된다는 거야. 가난하다는 이유로 반장이 되어야 할 아이가 반장이 되지 못하고 배우고 싶은 아이가 배우지 못하는 세상은 잘못이라는 것, 그런 아이들의 꿈을 꺾어 누리는 풍요는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아.

대학원까지 다니며 오래 배우고 많이 읽었지만, 생각하면 내 배움의 처음이자 끝은 너희들과 함께했던 서강에서의 어린 시절이었던 같아. 운명의 무거움과 세상의 불공평함에 대해 지금도 답 없는 질문을 계속하는 건 그 시절 내가 만난 가난한 친구들 때문이니,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생의 질문을 잊었을 거야.

고마운 벗들아,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은 편안하기를, 부디 지치지 말기를 진심으로 기원할게. 모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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