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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비극의 소녀상' 뒤집는 두 가지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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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비극의 소녀상' 뒤집는 두 가지 시선?

[프레시안 books] 안세홍의 <겹겹>·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한 장의 사진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안세홍의 책 <겹겹>(서해문집 펴냄)의 35쪽에 실린 사진을 찍은 사진이다. 흙바닥에 살포시 놓인 흑백 가족사진은 프레임 안의 프레임으로 존재한다. 사진이 사진을 찍을 때는 그것이 유일무이한, 복제될 수 없는 그 무엇임을 암시한다. 사진이지만 원본은 사라지고 프린트된 한 장만이 세상에 남았을 때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한 '아우라'라 존재한다. 그 아우라는 사진이 아름답다거나 예술적이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그것이 기록한 무엇이 개인에게든 사회에게든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안세홍

위안부 문제로 자살골 넣은 전범기업 미쓰비시

이 사진은 중국 훈춘시 동닝에서 홀로 살아가는 이수단(91) 할머니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유일한 가족사진이다. 고향이 평양인 할머니는 이 사진을 북조선과 서신 왕래가 가능했던 70년대 초 전달받았지만 73년을 마지막으로 주소불명으로 연락이 끊어졌다. 사진을 보건대 1940년 할머니가 평양을 떠나오던 그해쯤 찍힌 사진이다. 할머니는 19살에 동네 처녀 3명과 함께 군복 입고 칼을 찬 일본의 앞잡이에게 "돈도 주고 옷도 주고, 밥해주는 허드렛일을 하는 줄 알고" 만주로 끌려왔다. 하지만 실상은 제국 군인들을 몸으로 위안하는 것이었다. "하루에 군인 8명 내지 10명 정도 받았어." 할머니는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아청위안소에서 군표를 받으며 일본군의 위안부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으며 살았다. 그리고 중국에 남았다. 이 책에는 이수단 할머니와 같은 처지의 여성 8명에 대한 이야기가 사진과 글로 세밀하게 기록돼 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처음 만난 건 1996년이었다. 그때 한 잡지의 사진 화보 취재를 위해 할머니들이 있는 '나눔의 집'을 찾았다. 그 뒤로 17년 동안 전국에 계시는 할머니들을 만났다. 처음엔 할머니들의 낯가림이 심했다. 하지만 점차 가까워지면서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는 할머니들의 고통과 한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2001년부터는 중국에 살고 있는 할머니들과도 만났다. 나라 없이 떠도는 그들의 비참한 실상은 과거의 삶을 그대로 연장시키고 있었다. 그런 할머니들을 보며 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우선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사진으로 그들의 존재를 알리자고 결심했다."

사진가 안세홍(41)씨는 두 달 전 일본에서 포토에세이집 <겹겹>을 출간했다. 한 달 사이 한국에서도 동명의 책을 낸 것이다. 17년 가까이 진행된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작업이 봇물처럼 터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대표적인 전범기업인 미쓰비시 덕이었다.

개인이 쌓아올린 작은 아카이브

▲ <겹겹-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안세홍 지음,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올해 도쿄 긴자의 니콘 살롱에서는 안세홍의 사진전 <겹겹>이 예정되어 있었다. 안 씨는 이곳에 초대전을 신청했고 저명한 일본 사진가와 평론가로 구성된 위원회는 1월 그 요청을 승낙했다. 하지만 5월쯤 니콘 살롱은 일방적으로 취소 통지를 했다. 여러 차례 대화를 요구했지만 묵살 당했다. 결국 도쿄지방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하기에 이르렀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전시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이 사태에 배경에는 미쓰비시가 있었다. 니콘은 한반도 강점의 첨병 역할을 했던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계열사였다. 그들은 일본 군국주의의 치부를 드러내기 싫었던 것이다. 결국 도쿄 전시는 우익들의 반대집회 속에서 어렵게 진행되긴 했지만, 미쓰비시 그룹과 니콘은 사진전을 계속해서 훼방하고 있다. 올 9월에 열기로 예정돼 있던 오사카 니콘 살롱 전시 역시 장소 제공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로 인해 안 씨의 사진전은 미국 의 주요 뉴스로 취급됐고 미국에서도 동명의 사진전을 열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출판도 급물살을 타 일본어판에 이어 한국어판도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안 씨는 "도쿄 니콘 살롱 전시는 2주 동안 7900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대부분 일본인이었는데 20, 30대가 관람객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이들은 위안부에 대해 잘 몰랐는데 사진을 통해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고, 앞으로 자신이 어떤 실천을 하면 좋을지도 물었다. 사진전이 일본 곳곳에서 계속 이어진다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데 큰 힘이 되리라는 희망을 체험했다"고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개인이 이룰 수 있는 최대한의 '아카이브'다. 책에 담긴 글 사진 모두 작가의 감정이 억제되어 있다. 애초 정신대문제연구소와 함께 이루어진 기록 작업에서 출발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후 진행된 개인적인 작업도 이 선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글은 모두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클로즈업이 절제된 사진들은 인물의 감정을 곧바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은 포토에세이라는 대중성을 표방해도 역사 연구자들을 위한 1차 사료의 역할까지 훌륭히 해내고 있다.

기억과 망각으로서의 '소녀상'

사진은 프레임이라는 공간의 제약과 조작 가능하다는 어두운 약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탄생에서 지금까지 '증거'하는 역할을 잘 수행해 왔다. 사진에 담긴 정보는 미약하나마 표면의 진실을 담았고 사진가는 양심이라는 망점을 새겼다. 하지만 인간의 뇌에 입력된 기억은 그다지 디테일하지 못하다. 필요에 따라 출력되고 일부는 지워진 채, 일부는 왜곡된 채 떠오른다.

"소녀상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저항하고 싸우는 소녀'의 모습이야말로 한국인 자신과 오버랩시키고 싶어 하는 아이덴티티로 이상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소녀상이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은 실상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지만, 리얼리티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위안부'를 바람직한 '민족의 딸'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조선인 위안부는 '국가'를 위해서 동원되었고 일본군과 함께 전쟁에 이기고자 그들을 보살피고 사기를 진작한 이들이기도 했다. 대사관 앞 소녀상은 그녀들의 그런 모습을 은폐한다."

▲ <제국의 위안부>(박유하 지음, 뿌리와이파리 펴냄). ⓒ뿌리와이파리
참으로 불편한 이 이야기는 박유하 세종대학교 일문과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 펴냄)에 등장한다. "소녀상으로 대표되는 '20만 명 소녀 강제 연행'이 상식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20만'은 한국과 일본을 합한 정신대 숫자를 위안부로 오해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위안부는 예를 들면 일본군이 점령지에서 모집한 위안부들과 다른 대우를 받았다. 네덜란드인 강제 연행이나 중국인 강간 등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조선인 위안부에 일반화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피해에 얹혀 가는 것이다."

이미 출간 후 격렬한 논쟁을 예고할만한 대목이다. 게다가 이 책은 논쟁 대상을 위안부 할머니들의 대변인 역할을 자임해 온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로 삼고 있다. 박 교수는 정대협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박 교수는 정대협이 "저항하는 위안부'의 이미지와 '사죄하지 않는 일본'의 이미지를 만들었지만, 이에 어긋나는 다양한 양상은 외면한다"고 지적한다. 또 정대협의 주요한 요구인 일본의 법적 배상, 국회 결의를 통한 사죄와 배상은 사실상 실현 가능성이 없고 요구할 근거도 불충분하다면서 "반제국의 의미를 가졌던 저항이 그곳에서는 어느새 민족권력화 되어 있었다"고 까지 말한다.

이에 대해 윤미향 정대협 대표는 "그는 일본의 양심 있는 지식인조차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라며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으며, 윤정옥 전 정대협 대표는 "박 교수가 일본 우익의 흐름에 맞는 얘기를 하고 있다"며 강하게 우려했다고 한 언론사는 전한다. 전면전 양상이다. 게다가 소위 진보적인 언론에선 이 책에 대한 논의가 별로 없었던 데 비해 보수 언론에서는 자세한 인터뷰까지 하며 지면을 할애하는 것을 보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과 궤를 같이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은 충분히 설득력 있다. 하지만 책의 저자는 이 책의 의미를 좀 더 돌아볼 것을 요구한다.

"자신을 위한 집도 땅 한 뼘도 없이 몸담을 곳을 찾아 이동을 당하거나 선택하는 것은 늘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들이었다. 빈곤이 고향을 떠나도록 그들의 등을 떠밀었고,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 위안부가 되었다. 가난한 이들은 경제적 자립을 할 만한 문화자본(교육)과 사회안전망을 갖지 못한 탓에 다른 직업을 못 찾고 자신의 신체(장기, 피, 성)를 팔게 된다." 박 교수는 위안부 문제가 민족의 문제라기보다는 국가와 자본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 시스템은 단지 일본 제국주의의 산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일본과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기지 주변의 기지촌으로 확장된다고 본다. 그곳의 조선족, 러시아, 필리핀, 페루 여성은 이러한 시스템의 희생자들인 것이다. 하지만 정대협의 민족주의적인 요구인 '국회입법에 의한 국가배상'만 고집하면서 일본 진보진영의 침묵과 우익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악마'를 깨웠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의 충돌이다.

민족주의 탈피와 세계적 시각

이러한 박 교수의 담론은 민족을 '근대 상상의 공동체'라고 보는 탈민족주의 사관과도 연결된다. 당대의 기록은 당대인의 눈으로 본다. 오늘의 가치로 과거의 문제를 재해석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는 국사를 한국사로 대체할 것을 요구한 임지현 교수나 한국사에서 요동을 분리해 새롭게 고대사를 볼 것을 요구한 김한규 교수의 담론과도 맥을 같이한다. 박 교수는 친일적인 식민지 근대화론자들과도 이석기 유의 주체사상파에 부화뇌동하는 민족 모순의 진보론자들과도 다른 방향에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박 교수는 이야기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아베 정부를 설득해야 한다. 설득할 수 있다고 본다. 먹혀 들어갈 논리를 제시해야 한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법적 해결이 끝났다고 일본 정부에서 말하면 식민지 지배 사죄 의식이 없었다는 문제를 지적해야 하고, 그에 대해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으로 끝났다고 하면 한국에서 반발해 그 사죄가 충분히 수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이야기해야 한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는 충분히 문제를 해결할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안세홍 씨가 <겹겹>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연구할 '아카이브'를 던졌다면 박유하 교수는 그것을 겹겹이 꿰어 '맥락'을 만든 것이다. 우리가 문제를 풀 단 하나의 길만 알고 있다면 위안부를 만들었던 저들의 길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 책들은 우리에게 다양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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