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주군의 태양> 4회에서 강우(서인국)는 태공실(공효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빛나던 과거의 자신과 달리 "찌그러진" 현재가 "챙피한" 공실을 격려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말은 이를 직접 쓴 <주군의 태양>의 작가 홍 자매(홍정은, 홍미란)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있다. <주군의 태양>에는 홍 자매 전작의 그림자가 짙다. 그들은 과거의 자신과 겨루는 것일까.
<주군의 태양>은 '로코믹호러'를 표방한다. 로맨틱 코미디에 호러가 더해진 이 장르는 <주군의 태양>이 처음은 아니다. 손예진, 이민기가 주연을 맡은 영화 <오싹한 연애>도 귀신 보는 여자의 로맨스를 다룬 바 있다. <주군의 태양> 역시 주인공 태공실을 귀신 보는 사람으로 설정하고 귀신들의 억울한 사연을 이야기에 활용함으로써 일반적인 로맨틱 코미디와 다른 색깔을 보이고 있다.
▲ SBS 드라마 <주군의 태양>의 공효진. ⓒSBS |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의 핵심 재미는 태양, 태공실과 그녀가 의지하는 남자인 주군, 주중원(소지섭)의 독특한 관계 설정과 이들이 주고받는 '합'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는 지난 2011년 방송된 MBC <최고의 사랑> 속 두 주인공과 닮았다. 홍자매가 극본을 쓰고 역시 공효진이 주인공 구애정을 맡았던 <최고의 사랑>은 전 국민이 욕하는 비호감 연예인과 전 국민이 사랑하는 스타 독고진(차승원)의 독특하고 사랑스런 캐릭터와 "급이 다른" 두 사람의 로맨스를 통해 쉽지 않지만 그래서 더 귀한 어른의 사랑을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주군의 태양>의 태공실과 주중원은 구애정과 독고진을 닮았다. 큰 사고를 겪은 뒤 귀신을 보게 되고 그로 인해 평범한 삶을 살 수 없게 된 음침한 여자 태공실은 오해와 선입견 때문에 국민 비호감이 된 구애정이 그랬듯, 자기 의지가 아닌 이유로 힘든 삶을 살고 모두에게 경원 당한다. 반면, 주중원과 독고진은 겉보기엔 허우대 멀쩡한 동경의 대상이지만 알고 보면 자기중심적이고 독단적이고 숨겨진 '하자'가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여기에 남들보다 먼저 여자의 숨은 상처와 마음을 알아보는 또 한 명의 남자라는 점에서 윤필주(윤계상)와 강우의 역할도 닮았다.
무엇보다 다들 기피하는 여자와 얽히게 된 남자가 처음에는 현실을 부정하고 경계하다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주군의 태양>은 <최고의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최고의 사랑>이 홍 자매의 최근작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의 개성과 장점이 가장 잘 발현된 극본이었던 걸 생각해보면, 당연하고 영리한 선택이다. 하지만 게으른 자기복제라고 평가하기엔 이르다. <주군의 태양>은 로코믹호러라는 장르가 허언이 아니도록 꽤 알차게 만들어 놓은 귀신 에피소드와 이것이 두 주인공의 로맨스에 기여하는 역할부터 갑 티슈 신발과 내비게이션 등 소품의 활용, "방공호", "100억짜리 레이더"와 같은 쫄깃한 말맛이 살아있는 대사를 비롯해 홍 자매 특유의 성실하고 꼼꼼한 스토리텔링이 돋보인다.
즉, <주군의 태양>은 홍자매가 가장 자신 있는 무기를 선택했지만 이를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다시 날카롭게 연마한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이 필살기를 통해 그들은 또 하나의 과거와 겨루는 것 같다. 그것은 지난 2012년 방송된 KBS <빅>이다. <최고의 사랑>의 성공 이후 방송된 <빅>은 홍 자매는 물론 공유, 이민정, 수지 등 배우들로 인해 기대가 컸던 작품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기대에 미치지 못 한 채 종영하고 말았다. 18살 고등학생과 30살 성인남자의 '영혼 체인지'라는 소재를 택한 <빅>은 로맨스 판타지를 표방했다. 판타지와 호러, 영혼과 귀신, 물론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평범한 현실에 발붙인 이야기가 아닌 땅 위에서 10cm 정도 떠 있는 가상의 상태를 상정하는 점에서 <빅>과 <주군의 태양>도 닮은 점이 있다.
▲ SBS 드라마 <주군의 태양>의 소지섭. ⓒSBS |
무엇보다 <빅>이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사랑이란 눈에 보이는 외형과 조건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과 가치 중 어느 것에서 기인하냐는 로맨스에 대한 다소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고자 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주군의 태양>이 <빅>의 실패에 대한 재도전이랄까 홍 자매의 절치부심의 결과로 느껴지기도 한다. <빅>의 길다란(이민정)이 그랬듯이 그리고 <주군의 태양>의 태공실이 그렇듯이, 남이 보지 못 하는 것을 보는 사람, 즉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사람을 통해 우리가 보고 믿는 것들 이면에 진실이나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이야기하려는 것 같다.
물론 이런 해석과 상관없이, 홍 자매는 그저 더운 여름밤을 위한 등골 오싹한 호러와 마음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를 교배한 드라마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할 정도로 흥미롭다. 여기에는 상대 배우와의 화학작용부터 코미디와 드라마까지 어느 하나 모자람 없이 해내는 전천후 배우 공효진의 독보적인 캐릭터 플레이의 공도 크다. 일단은 홍 자매와 공효진이 진두지휘하고, 막말도 매력적인 소지섭과 믿음직한 우렁각시 서인국이 뒤에서 밀어주는 <주군의 태양>이 열대야의 불쾌지수를 낮춰주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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