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9일, 전직 대통령 윤석열이 내란우두머리 혐의로 1심 선고를 받는다. 이 글은 법원이 유죄 판단을 내린다는 전제 위에서 쓴다. 다른 결과가 나온다면 다른 판단이 가능하다. 이후에도 해당 정치세력을 지지하거나 두둔하는 지식인의 행위는 어떤 기준 위에서 설명될 수 있는가.
이 글은 2022년 대선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한 선택을 문제삼지 않는다. 개인의 이념이 진보냐 보수냐, 좌파냐 우파냐도 문제삼지 않는다. 그러나 계엄이라는 비상권력 행사 이후에도 그 책임을 상대 진영의 과오로 환원하거나, 계엄과 내란을 동일시하는 시도가 더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순한 의견 표명을 넘어선다. 그것은 사건의 성격을 재규정하려는 담론적 개입이다. 당시 야당의 행태는 정치적 평가의 대상이지만, 계엄 선포와 군경 동원은 그 차원을 넘어선다. 이는 논쟁의 대상이라기보다 원칙의 문제다.
이 글은 지식인의 위치라는 주제로 논의를 좁힌다. 예외적 권력 행사가 있었음에도 이를 상대화하거나 축소하는 언어가 공적 담론 공간에서 반복된다면, 지식장은 스스로의 기준을 점검해야 한다. 여러 사례가 있지만 네 명에게만 초점을 맞춘다.
윤소영 전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해 왔고, 아직까지도 50대 진보 성향 지식인들에게는 완전히 무시하기 어려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는 2020년부터 생각을 바꿔 윤석열 지지를 선언했고, 최근 간행한 2025년 공동저서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위헌·위법적 계엄으로 대응한 것이 아무리 잘못이라 하더라도, 계엄과 내란을 동일시하는 프레임이야말로 민주당의 분열증적 파시즘"이라고 썼다. 학계의 관심은 거의 없지만, 그와 그의 제자들은 지난 50년의 민주화운동을 비판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생산할 기세다.
진중권은 2019년 12월 동양대를 사직한 뒤 윤석열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논객으로 활동했고, 2024년 9월 복직했다. 그는 계엄 이전과 김건희와의 사적 소통 사실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개인적 교류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지식인이 정치권력과 어떤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남는다. 계엄 이후 그는 윤석열 지지를 철회했지만, 그 기준 변화가 정치적 판단인지 생존의 도생인지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지지 대상만 한동훈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는 논문과 언론 인터뷰에서 학생운동 경력을 공적으로 밝혀 왔다. 2025년 4월 3일 스카이 데일리 기고문에서 검찰·경찰·공수처를 "괴물의 삼지창"이라 표현하고, "약 3백 명 미만의 군인들만이 국회의사당에 진입해 있었다"고 서술했다. 병력 규모가 사건의 성격을 완화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논쟁은 명확한 전제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해당 글이 실린 매체가 대선 과정에서 명백한 오보를 냈던 매체라는 사실도 검토의 대상이다.
백승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국내 정치 발언은 명시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윤소영의 작업을 인용하며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주의를 연구해 왔다. 그런데 2021년 '중국이 대만의 일부 섬을 점령할 가능성'을 제기했고, 2022년에는 "시진핑 체제는 국제정치질서와 충돌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4년 동안 그 예측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이는 국제정치에 대한 지식인의 공적 발언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핵심은 이것이다. 이들이 2020년 이후의 '혁신적' 견해를 과거 운동 경력이라는 상징자본과 연결하지 않는다면, 개인이든 단체든 이들의 발언을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스스로 그 경력을 현재의 정치적 선택과 구조적으로 연결하면서, 민주화운동·변혁운동 전체를 전문적 조사와 분석도 없이 감정적 언어로 재단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민주화운동이든 변혁운동이든 비판과 평가는 필요하다. 그 후예들 가운데 21세기 이후 정치인과 전문직이 보이는 정치 행태는 특별히 냉정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러나 반세기에 걸친 사회운동의 역사와 2024년 12월의 예외적 권력 행사를 동일선상에 놓는 순간 논의의 초점은 흐려진다. 비판은 가능하되 비교의 기준은 명확해야 한다. 분석 없이 재단한다면 그것은 학문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은 당시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과 정체성으로 형성한 채 평범하게 일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이다.
제안은 단순하다. 해당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를 공적으로 지속한다면, 2026년 2월 19일 이후 자신의 정치적 자기규정을 '어느 정도는' 밝혀 달라는 것이다. 더 이상 진보나 좌파가 아니라면 그렇게 말하면 된다. 중도라면 중도라 하면 된다. 특정 범주로 설명하기 어렵다면 그 이유를 밝히면 된다. 이는 도덕적 심판이 아니다. 공적 담론에 참여하는 이들이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하자는 요청이다. 오늘날 보수나 우파라는 표지는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시대가 아니고 오히려 진보나 좌파가 비판받는 국면이다. 다양한 정치적 위치가 공존하는 만큼, 위치 표명은 부담이 아니라 논쟁의 출발점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면, 이는 평시라면 불필요한 요구다. 그러나 2월 19일 유죄가 확정된다면, 당신들은 중형을 선고받은 범죄자를 지지했던 사람이 된다. 이 순간 최소한의 책임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나약한 개인이고, 지식인이라는 이름 역시 언제든 허술해질 수 있다. 당신들이 과거 변혁운동에서의 경력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그것을 현재의 권위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하든 그건 상관할 바 아니다. 윤어게인이든, 한어게인이든, 지하 국민전선이든, 이 글의 제안은 그런 곳까지 미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지점은 단 하나다. 과거의 운동 경력을 현재의 상징자본으로 계속 호출하면서, 그 운동을 감정적 언어로 재단하고, 동시에 특정 정치인 지지를 원칙 이동인 것처럼 설명하는 경우다. 인간은 고결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의 기준은 필요하다. 자신의 위치를 밝히고, 판단의 근거를 설명하며, 과거의 언어와 현재의 선택 사이의 연결을 말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참회를 요구하지도, 퇴장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공적 담론에 계속 참여하고자 한다면, 더 이상 모호함 뒤에 숨지 말자는 뜻이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말할 것인지, 말하지 않을 것인지. 정리할 것인지, 흐린 채로 갈 것인지. 그리고 침묵 역시 하나의 입장이라는 점만 남겨 둔다. 만약 정리가 어렵다면, 최소한 윤석열 재임 기간에 해당하는 시간만큼은 공적 발언을 멈추는 것도 하나의 책임 방식일 수 있다.
침묵은 회피가 아니라 선택이다. 그리고 선택은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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