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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눈'의 급진 투사, "싸우지 말고 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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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눈'의 급진 투사, "싸우지 말고 피하라"?!

[노정태의 논객시대] 역사학자 박노자와 그의 책들

1.

어린 시절 비디오로 본 영화 중 <잉글리시 맨>(1996)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젊은 시절의 휴 그랜트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였는데, 영화의 원제는 다음과 같다. , 번역하자면 '언덕에 올라갔지만 산에서 내려온 영국사람' 정도가 되겠다.

웨일즈에서 가장 높은 산의 높이를 재기 위해 온 측량 기사 레지날드 얀슨(휴 그랜트)은, 지역 주민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웨일즈 최고봉인 '피넌 가루'의 높이가 1000피트가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1000피트는 산과 언덕을 가르는 기준선이기 때문에, 졸지에 그 지역 주민들 및 웨일즈의 자랑거리인 피넌 가루는 산에서 언덕으로 강등되게 생긴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꾀를 내어 레지날드가 마을을 떠나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동시에 산 아래에서 위로 흙을 퍼올려 1000피트를 채워넣는 대 공사를 감행한다. 고작 몇 피트가 모자라서 우리의 자랑거리가 언덕이 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저런 에피소드 끝에 마을 처녀와 눈이 맞은 레지날드는 그 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해가 뜬 후 측량을 해보니 1000피트가 넘었고, 결국 그는 "언덕에 올라갔지만 산에서 내려온 영국 사람"이 된 것이다.

▲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학교 교수. ⓒ프레시안
갑자기 뜬금없이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다른 논객들과 달리, 박노자의 인생 및 그가 우리의 '논객시대'와 맺은 상호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이렇듯 다소 어이없는 비유를 들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휴 그랜트가 '언덕에 올라갔지만 산에서 내려온 영국 사람'이었다면, 박노자는 '소련에서 왔지만 러시아로 돌아가야 했던' 유학생이었다. 휴 그랜트는 자신이 그 마을에 정착하면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어린이들에게 산수라도 가르쳐야 하냐고 묻는다.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씨는 한국에 귀화해 박노자가 된 후 한국 학생들을 상대로 한반도의 고대사를 가르치고 싶었지만, 영화 속의 레지날드와 달리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고, 저 먼 노르웨이의 오슬로 대학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레지날드는 영국에서 온 '잉글리시 맨'이었지만, 소련에서 온 박노자의 조국은 이미 그 수명을 다한 상태였다. 그는 한국에서 '노웨어 맨'(nowhere man)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의 조국을 찾았지만, 비판적 지식인 혹은 논객이 아닌 역사학자 박노자에게 대한민국은 쉽사리 문호를 열어주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는 기꺼이 박노자가 됨으로써 '우리'의 일원으로서 "당신들의 대한민국"에 문제가 있다고 외치는 잠수함의 카나리아가 될 수 있었지만, 그의 두 번째 조국은, 심지어 이른바 '진보 진영' 내에서도, 그에게 퍽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2.

박노자의 인생 유전을 논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 편의 영화를 더 언급해야 한다. 박노자는 자신이 본 최초의 한국 영화가 "아마 1980년대에 유원준 감독이 만든 <춘향전>이었을 것"(12쪽, <당신들의 대한민국 1>(한겨레출판 펴냄))이라고 회상한다. "물론 현재의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내가 그때 봤던 북한의 <춘향전> 같은 영화는 여러 측면에서 상당히 단순"(255쪽, <당신들의 대한민국 2>(한겨레출판 펴냄, 2006년))했지만, 감수성이 한창 예민하던 시절의 소년 블라디미르는 남다른 감흥을 느꼈다.

그러나 그 영화를 통해서 한반도의 자연이나 두 젊은이의 애절한 사랑과 시련 이야기를 접했을 때, 어렸던 나는 크게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폭력을 참고 애인을 기다리는 춘향은 말 그대로 보편적인 인간성의 화신으로 보였다. 그때 나의 생각은 그러한 영화를 보고 한반도에 애착을 가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같은 곳)

뒤이어지는 박노자의 설명을 보면, 당시 소련 사람들 사이에는 다소 독특한 형태의 북한 유행이 불고 있었던 것 같다.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면서, 동시에 김일성 가문의 독재를 굳히기 위해 신성화 작업에 들어갔던 북한의 촌스러움을 비웃는 유머가 널리 퍼졌다는 것이 당시 소련에 살았던 박노자의 증언이다. "오늘의 한국 독자가 못 믿을 가능성이 많지만, 1980년대의 많은 소련 중산층 가정들이 북한 선전 잡지들을 정기 구독했"는데, 조악하기 짝이 없는 그것들을 "돈을 들여 구독하는 목적은 그 잡지의 내용을 보면서 실컷 웃으려는 것이었다."(같은 책, 256쪽)

▲ <당신들의 대한민국 1>(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소년 블라디미르는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자유가 없었던 북한에 대한 자만적 멸시도, 위대하신 수령님이 모델로 삼았던 스탈린 시대가 지나갔음에 대한 안도와 만족의 감정도 들어 있"(같은 책, 257쪽)는 그런 비웃음을 견디기 힘들었다. 우리 소련인들에게 북한이란, 한국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커졌을 것이다.

가슴 속에 그런 의문을 품고 성장한 소년은 훗날 대학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학생은 병역이 면제되는 반면, 나머지 청년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군대에 끌려가던 시절이라 입학에 실패하면 불교 대신 군영에서 탱크와 대포를 '공부'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나는, 결국 용기를 잃고 '상황과 타협'해서 경쟁률이 비교적 낮은 한국(그 당시의 명칭으로 조선) 역사학과에 입학 신청서를 내고 시험을 보았다"(<당신들의 대한민국 1>, 14쪽)고 박노자는 말했지만,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묘연(妙緣)이자 가연(佳緣)"이었다.

냉전 시절, 당연히 소련에서 조선과 관련된 무언가를 공부하는 대학생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참조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박노자가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던 1980년대 말은 이미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 체제가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냉전 올림픽인 1988년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소련은 금메달 55개를 획득하며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다. 그것이 마지막 불꽃이었다. 1987년 민주화 투쟁 이후 직선제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노태우는 이른바 '북방외교'를 펼치기 시작했고, 경제적으로 허물어져가고 있으며 초강대국의 자부심도 잃어가고 있던 소련의 관료들은 급격히 녹아내렸다. 소련은 북한을 버리고 남한과의 수교를 선택한다. 그것이 박노자의 인생을 바꿨다.

한편 소·남 관계가 공식화하자 이미 경직되어 가던 소·북 관계가 더욱더 악화되어 학생 교류 프로그램 등이 하나둘씩 취소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애당초 평양의 김일성 종합대학에 가기로 되어 있던 나는 그 대신 1991년 9월에 서울에 있는 고려대학교로 가게 됐다. 3개월밖에 안 되는 매우 짧은 유학이었지만, 그 유학은 <춘향전>이나 한문 수업 못지않게 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책, 16쪽)

3.

1991년 후반기, 한국 대학가는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1987년 민주화 투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로 인해 정권은 노태우에게 넘어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오히려 노태우 정부가 한발 앞서 북방외교를 시작했고, 냉전이 끝나가는 분위기 속에서 북한의 체제 존속도 서서히 어려워지는 기색이 보였다. 급격한 경제 성장 이후 '샴페인' 뚜껑이 열리기 시작하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맞서 싸워야 할 거대한 당위적 과제는 사라지고 나니, 대학가에는 '새내기'가 아니라 'X세대'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암중모색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학생운동권은 서서히 극단으로 치달았다. 명지대학교 학생이었던 고 강경대 씨가 시위 도중 경찰 폭력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991년 4월 하순이었다. 그리고 5월 내내 학생과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였다. 4월은 잔인한 달이었고 5월은 더욱 끔찍했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정작 학생운동은 더욱 학생들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형식적 민주화 이후의 투쟁 과제를 선정하지 못한 채 학생운동은 어떤 책의 제목처럼 "오래된 습관"처럼 굴러갔고, 그 공백은 온갖 탈근대이론의 힘을 빌린 "복잡한 반성"들이 채워나갔다.

소련에서 온 유학생 박노자가 한국에 발을 디딘 것은 이른바 '분신정국'이 대략 수습되고 난 1991년 9월 초의 일이었다. 당시의 학생운동권이 자기 쇄신의 노력을 아예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박노자의 눈에 비친 운동권들의 모습은 지나치게 권위적이며 자신들이 타파하고자 하는 바로 그 권력의 행태를 흉내 내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었다. "1991년 이른 가을, 설레는 마음으로 김포공항에 내린" 박노자는 "다습하고 매우 따뜻한,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날씨에 흠뻑 빠져들었"(같은 책, 99쪽)지만, 고려대학교 기숙사에서 만난 학생들이 그에게 군대는 갔다 왔냐고 질문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당신들의 대한민국 2>(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박노자가 서울에서 유학 생활을 한 것은 1991년의 일이다. 한편 그의 데뷔작이며 출세작인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2001년에 출간되었다. 게다가 그의 첫 번째 채류기간은 매우 짧았다. 소련의 붕괴 후 거의 곧장 귀국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박노자의 유학생활은 고작 3개월 가량에 지나지 않는다. "1991년 9월 초에 소련을 떠나 한국으로 출발한 나는, 1991년 12월에 소련이 아닌 신생 러시아로 돌아왔다."(같은 책, 22쪽)

하지만 그 3개월간의 경험은 그에게 매우 큰 인상을 남겼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10년이 지난 후, 한국 진보 진영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유행하던 당시, 한국의 운동권 및 범진보 계열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는, 우리가 아는 논객 박노자는 탄생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이른바 '우리 안의 파시즘'에 대한 평가와 반성은, '귀화한 한국인'이라는, 내부에 속하지만 외부인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입지를 가지고 있던 박노자를 위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박노자는 유학 기간 도중에 조국이 몰락하는 것을 그 바깥에서 지켜보았다. 물론 그는 '귀화한 러시아인'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그 자신은 스스로를 러시아인이 아니라 소련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즉, 서류상 벌어진 일이 어찌되었건, 그는 러시아를 버리고 한국을 택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몰락한 자리를 차지한, 과거의 사회주의적 정신은 어디 갔는지 찾아볼 수 없는 자본주의 괴물 사회인 러시아와, 공항에 내릴 때부터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게 자신을 안아주는 동방의 나라 한국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 것이다. 법은 러시아인 박노자가 대한민국에 귀환했다고 처리했지만, 사실은 소련인 박노자가 대한민국에 망명을 온 것에 더욱 가깝다.

바로 이런 '고향 상실'의 정서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문제작을 올바로 이해할 수도 없다. 분명 그는 외부인의 눈으로 한국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그가 가장 잘 아는 외국 사회는 당연히 소련, 혹은 러시아일 것이므로, 논리적으로만 보면 '러시아와 비교했을 때 한국은 이런 저런 점이 아쉽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올 것이 예상된다. 독일에 유학을 갔던 진중권이 독일을 척도로 삼고,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던 홍세화가 프랑스의 똘레랑스를 한국 사회에 요구한 것과 같은 기제가 작동해야 할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박노자에게, 1991년 말에 탄생한 새로운 나라는 자신의 조국이 아니다. 조국이 아닐 뿐더러 그 나라에서 벌어지는 온갖 무질서한 자본주의와 국가 폭력의 천태만상은 결코 한국 사람들에게 모범으로 제시할만한 것이 못 된다. 그래서 <당신들의 대한민국>에는 특정한 나라의 관습과 제도 등이 어떤 '모델'로 제시되지 않는다. 진중권의 독일, 홍세화의 프랑스, 혹은 김어준이 배낭여행에서 보고 들은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더라구'처럼 확고한 지위를 갖는 '외국'이, 박노자에게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조국은 이미 망했고, 설령 아직 남아있다고 해도 갓 21세기를 맞이한 한국인들에게 삶의 표준으로 제시할 수는 없는 구 소련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박노자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주변인'이 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한국에 첫 발을 디딘 후 소련의 몰락을 지켜보던 그 때부터 그는 한국 뿐 아니라 러시아에 대해서도 '주변인'이 되었다. 소련 사람 박노자의 내면은 가뭄의 둑처럼 허물어졌다. 해외 유학중인 한국 학생들은 한국 음식과 선물 따위를 받기 위해 교회에 나간 후 문화 충격을 받거나 자괴감에 빠져들곤 한다. 소련 사람 박노자는 한국에 유학을 와서 똑같은 경험을 한다. 그의 내면에 '한국 사회에서 동떨어진 한국인'이라는, 두 겹으로 포장된 자아가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속된 말로 나는 매수된 셈이었다. 그 사람들의 친절과 관심, 그 사람들이 베푸는 음식과 서울 견학, 재원이 풍부한 그 교회가 주는 선물에 마음이 팔린 셈이었다. 그들이 매일같이 주는 선물이 나로서는 평생 보지 못한 희귀한 물자였고, 나를 치켜세우고 칭찬해 주고 '모시는' 그들의 태도는 내가 평생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베풀어주는' 대신 나를 그만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도 이미 대충 눈치 챌 수 있었다. (같은 책, 84쪽)

'서양'에서 한국에 온 유학생인 박노자가, 오히려 한국에서 '서양'으로 향한 한국인 유학생이 느낄법한 경험을 하는 이 장면은 그런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다. 박노자는 그와 동시대에 활약한 모든 논객들 가운데 가장 '서양'에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그 논객들 중 해외 체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각자 하나씩 그 나라들을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제 판단의 (숨은) 기준으로 활용했던 것과 달리, 심정적으로는 모든 '서양'과 거리를 두게 된 것이다.

4.

▲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박노자의 저작들 중 그의 전공 분야인 역사학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책들이 갖는 독특한 위상도 바로 그 점에서 출발한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1>, <당신들의 대한민국 2>,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한겨레출판 펴냄, 2009년)는 모두 특정한 서양의 어떤 나라를 표준으로 삼아 논의를 전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훨씬 더 크고 거창하며 포괄적이지만 결코 구체적으로는 제시되지 않는 보편적 선과 당위에 호소한다.

박노자가 '외국인', 특히 '백인 남성'의 풍모를 지녔다는 사실을 잠시 접어두고 그의 책을 다시 읽어보면 그 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내가 유럽에 가봐서 아는데'가 그의 궁극적 논거로 등장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물론 상대적으로 어떤 나라의 무슨 제도가 더 낫다는 식의 언급은 당연히 등장하지만, 특정 외국이 가치 판단의 근거로 등장하는 일은 다른 논객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편이다.

가령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한겨레출판 펴냄, 2002년)와 홍세화의 <세느강은 좌우를 가르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한겨레출판 펴냄, 1999년)를 비교해보자. 프랑스에 비판적인 듯하다가도 결국 프랑스의 똘레랑스에서 자신의 논거를 찾는 홍세화와 달리, 박노자는 북유럽의 미덕에 아주 적은 분량을 할애하고, 곧장 서양 사회의 위선과 폭력성을 폭로하는 일에 집중한다. 그러므로 박노자를 향해 '서양에 빗대어 한국을 부끄러워 보이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 작품인 <하얀 가면의 제국>(한겨레출판 펴냄, 2003년)을 보면 그 경향성을 더욱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서구 중심적인 인식의 틀, 서양처럼 발전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박노자는, 한국의 다른 그 어떤 논객보다도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서구권의 온갖 위선을 향해 융단폭격을 퍼붓는다. 그는 한국이 A 나라(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기타 등등)와 같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의 목표는 훨씬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불교적이다.

그리고 하얀 가면을 벗지 않으면 우리 자신의 진면목, 진아(眞我)를 볼 수 없다. 하얀 가면을 벗는 일이야말로 사회·정치적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견성(見性)의 경험, 깨침의 경험이다. 그러한 견성이 이루어져야 사회적인 의미의 성불(成佛), 즉 자본주의 이후의 인간다운 사회의 건설이 가능할 것이다. (<하얀 가면의 제국>, 25쪽)

이렇다보니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등 기존의 러시아 문학을 상징하는 대 문호들 또한 박노자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혹은, 통상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한국인이라면 거의 알기 힘든 사람만이 박노자의 기준선을 통과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제정 러시아 관료층의 위선과 아첨, 철저한 인간성의 말살을 천재적으로 풍자한 살치코프-시체드린(Saltykov-Shchedrin, 1826~1889)보다 관료층의 상부와 밀접하게 유착한 골수 보수주의자 도스토예프스키를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꼽는다는 것은, 미국·서구 보수층의 '가치 서열'을 그대로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같은 책, 31쪽)고 박노자는 일갈하지만, 아마 이 글의 독자들 중 대부분은 살치코프-시체드린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았을 것이다. 물론 나도 모르는 그는,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작가다.

여기서 한 가지 중대한 딜레마가 발생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서양'은, 혹은 그 '서양'을 동경하는 마음은, 우리의 깨달음, 견성을 방해하는 "하얀 가면"이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태어나 한문 고전을 공부하고 한시를 줄줄 외우며 한국어로 글을 쓰고 일본어로 논문을 읽으며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에서 노르웨이어로 대화를 하는 박노자와 달리, 거의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는 '서양'의 "하얀 가면"이야말로 곧 서양 그 자체다. 나는 개인적으로 박노자의 탁월한 정보력과 성실함을 대단히 존경하는 사람이지만, 박노자가 말하는 '하얀 가면' 너머의 서구권 국가들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우리의 현실에 맞게 비판하고 재적용할 수 있는 사람이 박노자 말고 또 누가 있을지 도저히 모르겠다.

한국은 영원한 촌동네이자 변방이므로, 그렇게 만들어진 서양의 이미지, 가령 '핀란드식 교육'이나 '독일식 사민주의' 같은 알록달록한 허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허구의 장치를 빌리지 않고서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 중생 모두가 어느 날 다 함께 견성을 하고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면 아주 좋을 것이다.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하지만 박노자는 바로 그것을 원한다. 인간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관통하는 총체적 해탈, 그것이 박노자가 추구하는 바 궁극적인 혁명인 것이다. 소련에서 온 푸른 눈의 동아시아 고대사학자는 '우리 모두 노르웨이 같은 선진국을 만듭시다' 같은 시시한 소리를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해박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은 그는,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나라에서 동등하게 인간적인 결함을 발견한다. 박노자가 볼 때 한국 사람들이 "별의별 불편을 끼치는 비합리적인 한국의 관료 체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 나라답다. 우리 나라답네!" 같은 표현을 쓴다는 것은"(같은 책, 305쪽) 충격적인 일인데, 왜냐하면 "러시아의 고질적인 관료주의에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러시아 사람들도 "역시 러시아구나!" 같은 표현을 많이 쓰기 때문"(같은 곳)이다. 삶은 고통이고 고통은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에서 나오며, 우리 모두는 깨닫지 못한 상태로 살아간다. 한국도 러시아도, 심지어 북유럽 선진국 노르웨이도 한 꺼풀을 벗기고 보면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박노자는 생각한다.

5.

소련에서 태어나 러시아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인이 된 불교-마르크스주의자. 박노자는 모든 사회를 모든 사회와 비교하여, 모든 사회의 모든 단점을 바라본다. 누차 반복하여 말하고 있듯 이것은 서구권의 특정 국가를 우리의 '모델'로 제시하는 사고방식과는 매우 상이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의 시야와 관심으로 전 세계를 둘러보지만, 그 밑바닥에 도저한 회의주의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이 박노자를 더욱 특이한 논객으로 만든다. 그가 한국 사회, 혹은 다른 나라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논하는 방식은, 모두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이라기보다는 도덕적 관점에 입각해 있다. 그런데 그 도덕적 관점이 배타적이지 않다. 하나의 도덕적 입장을 취하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는 단호함이 없고, 매 순간과 사안에 맞춰 비판이 제시된다는 뜻이다. 박노자가 불교도인 만큼 이 사례를 들어보자.

2001년에 탈레반 정권이 쿠샨 이후, 즉 6~9세기에 만들어진 아프가니스탄 바미안(Bamiyan) 대불(大佛)을 파괴함으로써 각국의 불자를 비롯한 전 세계 여론의 분노를 산 일이 있다. 보는 이를 압도하며 붓다의 무한한 권위를 실감하게 하는 바미안 왕국의 '초대형 불사'야말로 미술을 통한 붓다 신격화, 권력화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미 쿠샨 미술에서 보이기 시작한 붓다의 신격화 경향은 이 바미안 대불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것을 파괴하려 했던 탈레반 정권이야 야만을 저질렀지만, 우리가 굳이 '힘'을 상징하는 커다란 부처님의 모습에서 자비의 가르침을 배울 필요가 있는가? (<붓다를 죽인 부처>(인물과사상사 펴냄, 2011년), 172쪽)

얼핏 보면 이 대목은 소련 출신인 그가 반미주의적 경향성 때문에 탈레반의 흉악한 문화재 파괴를 용인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이 책, 그리고 그의 논의가 갖는 전체적인 맥락을 놓고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그에게는 바미안 석불이, 불교가 국가의 권위와 결탁해서 만들어진 가장 큰 기념물로 보일 따름이다. 부처는 바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있으니, 탈레반의 야만을 탓하기는 하되 그것만을 놓고 크게 난리를 칠 일도 아니라는, 어떤 큰 스님의 말씀인 것이다.

▲ <붓다를 죽인 부처>(박노자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인물과사상사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시피 저 말은 그 자체로 대단히 큰 어폐가 있다. 탈레반은 불교의 잘못된 권위를 파괴한 게 아니다. 불교의 문화재를 파괴함으로써 자신들이 숭배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권위를 다이너마이트로 우뚝 세운 것이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비유처럼, 마귀를 쫓아내면 쫓겨난 마귀가 동무들을 데리고 돌아와 더 크게 판을 벌이듯, 권위나 권력은 단순히 몰아내기만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한 번도 그냥 넘어간 적이 없는 역사적 교훈이다.

하지만 당장의 우상, 권위, 부조리를 파괴하는 일에 더 관심이 있고, 특히 불교가 국가 권력과 결탁하는 것을 끔찍하게 여기는 박노자는 그런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 탈레반이 나쁜 짓을 하긴 했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나쁘냐, 가령 아프가니스탄에 폭격을 해서 민간인을 살해하는 미군보다 나쁘냐고 박노자는 물을 것이다. 그렇게 묻는다면 그 누구도 '인간의 목숨보다 암벽에 새겨진, 오랜 세월 바람과 모래에 닳아빠진 부처의 형상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테지만, 질문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박노자의 극단적인 가치 상대주의는 심지어 그를, 박노자 본인과 거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해도 무방할 누군가와 같은 결론으로 이끌어주기도 한다. 주지하다시피 박노자는 2002년부터 한국 사회가 월드컵에 미쳐 돌아가는 것에 단호한 경고의 목소리를 내어온 사람이다. 그런 그를 김어준은 "재수 없다"고 몰아붙였지만 둘 사이에 따로 논쟁이 있지는 않았다. 황우석 사건도 마찬가지다. 박노자는 여러 지면을 동원해 황우석 사건 및 그에 대한 일부 불교도들의 맹목적 믿음을 부끄러워했다. 반면 김어준은 자타가 공인하는 '황빠'였고, 지금도 그 입장에는 본질적 차이가 없다.

그러나 박노자는 동시에 서구 학계, 특히 과학계의 절대적 권위 자체도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2006년 초 노르웨이에서 벌어진, 오슬로 대학교 겸임교수 욘 수드보(Jon Sudboe) 박사의 논문 조작 건을 박노자는 국내에 소개했다. 욘 수드보 박사가 "2005년 10월 영국의 최고 의학 저널이라 일컬어지는 <랜싯(The Lancet)> 지에 발표한 구강암 관련 논문이 완전한 조작으로 밝혀진 것이다."(<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235쪽)

이 조작의 내용은 황우석 사건의 그것처럼 황당했다. 있지도 않은 환자들의 파일을 만들고, 가짜로 사회보장번호를 지어내어 붙인 것이다. 논문 심사 과정에서 그런 눈에 뻔히 보이는 조작이 적발되지 않았고, <랜싯>에 해당 논문이 기재되었다. 물론 이런 일을 보며 주류 학계가 한심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이렇게 유치한 조작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믿음이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박노자는 여기서 대범하게 "학술·과학의 파탄"을 논한다.

이 사건을 접했을 때 내 머릿속에선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학술·과학의 파탄은 국내나 국외나 마찬가지인데 도대체 왜 우리는 구미의 '권위지'를 이렇게까지 숭배하고 있는가? 수드보의 조작을 밝혀내지 못한 <랜싯> 지에 만약 국내 교수의 논문이 실린다면 국내 언론의 큰 기사감이 되는 것이다. 황우석이 세인의 눈을 어둡게 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가 무엇인가.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던 <사이언스> 지의 권위가 아니었던가? 물론 과학 발전 수준의 객관적인 차이를 감안하는 것이야 좋지만, 우리는 합리적인 차원을 넘어 구미 '권위지'에 거의 사서삼경 격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같은 책, 236쪽)

김어준도 같은 결론에 도달한 바 있다. 김어준은 국가주의적 열광에 힘입어 기존에 확립된 과학의 권위에 정면으로 대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박노자는 사바세계의 어리석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부처의 눈으로, 구미 '권위지'에 너무 큰 권위를 부여하지 말자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 차이일 것이다. 물론 그 차이가 대단히 중요하고 또 본질적이지만, 이 건을 통해 우리는 박노자라는 불교-마르크스주의자의 눈높이가 어디에 맞춰져 있는지를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본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하나에 지나친 권위를 부여하여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아집일 뿐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6.

▲ <하얀 가면의 제국>(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박노자는 대단히 열성적으로 세계의 다양한 사건들을 추적하고 그것을 국내에 소개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냉담하다. 그 반대의 경우도 참이다. 박노자는 인간사 전체를 제행무상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어쨌건 그 속에서 조금이라도 세상이 나아져야 한다는 믿음을 쉽게 포기하지도 않는다.

이런 이중적 태도가 성립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세계 속의 다양한 폭력과 갈등과 고통을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포괄하기 위한 총체적인 시각을 제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박노자의 만감일기>(인물과사상사 펴냄)를 다시 펴보자. 그는 방효유라는 명나라 선비의 일화를 꺼내들며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연다.

"방효유. 요즘은 교과과정상 세계사가 필수 과목이 아니기에 모르시는 분이 계실 수도 있지만, 조선 왕조의 선비 같았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박노자의 만감일기>, 168쪽)

우리가 모르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세계사가 필수 과목이라 하더라도, 명나라 영락제에게 대들다가 9족이 아닌 10족이 멸족당하는 일화가 과연 세계사 국정교과서의 한 귀퉁이를 차지할 수 있었을지 매우 미지수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삶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는 이 인물을, 박노자는 자신의 블로그 독자들이(<박노자의 만감일기>는 그의 블로그 글을 모아서 만든 책이다) 알고 있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박노자는 조선조 선비들이 좋아하던 방효유의 이 기개를 탐탁케 여기지 않는다. "방효유가 붙잡았던 도덕론이란 절대 진리가 아니고 상대 진리 중에서도 지배계급이 표방했던 하나의 명분론에 불과했던 것"(같은 책, 169쪽)이기 때문이다. 박노자는 방효유가 "관념적인 '절개'와 같은 가치를 위해 무고한 백성들의 목숨을 나 몰라라 하고 역사에 남을 만한 폼을 잡는 게 특기"(같은 책, 170쪽)였던 사대부 중 하나일 뿐이라고 꼬집는다. 즉 그는 성리학적 명분론이, 진리도 아닌 것을 붙잡고 늘어지느라 엉뚱한 사람들을 괴롭힐 뿐이지 않냐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박노자가 가지고 있는 열정적이면서 동시에 냉담한 태도가 확인된다. 그는 대단히 열정적으로 세계 속의 온갖 사례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좌파적 프레임에 맞도록 재배열해두고 있다. 하지만 그 개별적인 사례 속에서, 누군가가 어떤 입장, 이념, 신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거나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까지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주 단순하게 요약해보자면, '즐길 수 없다면 싸워라'와 '즐길 수 없다면 피해라'라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을 때, 박노자는 전자보다 후자를 선호한다.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고자 했던 고려대에 맞서 시위를 하다 출교 조치를 당한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박노자는 매우 아프게 기억한다. 비록 3개월의 짧은 유학생활을 했을 뿐이지만 그에게 고려대학교는 제2의 모교이며, 그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 고려대학교 출교자들에게, 박노자는 "그들과 개인적으로 만난다면 그들에게 유학을 떠나 당분간 돌아오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같은 책, 38쪽)는 심경을 털어놓는다.

여기 남아 끝까지 투쟁하는 건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 분명 좋은 선택이다. 그러나 초인적인 희생 없이 그냥 자존심이 살아있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면, 해선 안 될 말인 줄 알지만, 과연 대한민국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가를 진정으로 고민해보시기를. 여러분들의 상황이 하도 마음에 걸려서 하는 이야기다. (같은 곳)

전 지구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안에 대해 가장 급진적인 입장을 취하는 박노자는, 그러나 그 개별적인 갈등 속에 놓인 이에게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라'는 조언을 차선책으로 전달하기도 하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즉 그는 근본적(radical)이긴 하지만, 급진적인 해법을 찾을 수 없을 때에는 찾지 말라는 입장을 취한다. 인간 사이에서의 가장 급진적인 갈등의 해결법은 상대방을 죽임으로써 그가 아무런 의사를 표현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므로,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은 살생하지 말라는 불교의 가르침과도 어느 정도 맞닿는 측면이 있다. 박노자가 소개하는 석가모니의 에피소드를 하나 살펴보자.

▲ <박노자의 만감일기>(박노자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인물과사상사
붓다는 중인도 코살라국의 프라세나지트 왕에게 설법을 베풀며 그의 신세를 지고 살았다. 그런데 그 아들 비두다바가 왕위에 오르자, 새 왕은 붓다가 출가 전에 속해있던 샤카 족을 향해 사소한 트집을 잡아 복수의 칼날을 세운다. 샤카 족 출신이었던 붓다는 그런데, 비두다바를 몇 번 말리고는, 그가 말을 듣지 않자 "결국 다 과거의 악연(惡緣)인줄 알고 내버려두"(<붓다를 죽인 부처>(인물과사상사 펴냄), 225쪽)는 선택을 한다. 그 결과 "붓다의 고향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속가는 섬멸당하고 말았다."

물론 석가모니 본인이 맞서 싸워봐야 그리 큰 도움이 되었을 상황처럼 보이지 않지만,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박노자의 어조는 매우 덤덤하다.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될지언정, 외부로부터의 국가폭력을 막기 위해 내부의 폭력에 가담하지는 않는 석가모니의 태도를, 찬양까지는 아니어도 지지하고 있음이 한 눈에 드러난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도덕적 판단일 뿐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추가적인 논의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더 큰 폭력의 희생자, 혹은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맞서 싸울 수 있음에도 '이탈'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

7.

경제학자 앨버트 허쉬먼이 그의 역작 <이탈, 항의, 충성>(한국어판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강명구 옮김, 나남 펴냄) 절판, 원제 'Exit, Voice and Loyalty')에서 설득력 있게 논증한 바와 같이, 체제의 압력에 짓눌린 구성원들은 항의를 하거나 조직에서 이탈하거나 하는 두 개의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 파업, 투석전, 화염병 투척, 분신자살, 폭탄 테러 등은 모두 결국 어떤 항의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폭력적 의사 표현 방식이다. 방효유의 기개 떨치기, 출교당한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천막 시위, 비두다바를 찾아가 설득하는 싯다르타의 모습 등도 모두 그에 해당한다.

그런데 사회가 안정화되고 자본주의 내지는 통치의 방식이 세련되어질수록, 사회의 구성원들이 제대로 항의의 목소리를 내는 일 또한 어려워진다. 혹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항의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 효과를 내는 것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진보진영에 종사하는 이들이 늘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도 바로 이것이다. 항의할 것인가, 이탈할 것인가. 항의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한국 사회의 진보 담론에서는 언제나 이탈 옵션을 은연중에 배제하는 쪽을 택해왔다. 모든 투쟁은 사생결단이고 죽을 때까지 우리는 물러서지 않는다는 결의를 다진다. 실제로 박노자가 한국에 도착하기 몇 달 전, 비극적인 연쇄 분신자살이 있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고 두산중공업의 노동자 배달호 씨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목숨을 끊었지만 이미 권력을 잡은 대통령과 그 주변인들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신청 이후 한국 사회는 지속적으로 노동의 몫을 줄이고 자본의 크기만을 불려왔다. 항의 옵션의 버튼을 누르고 누르고 또 눌러도, 고장 난 용수철은 계속 튀어나올 뿐이다.

본인이 능력이 있다면, 대부분의 경우 항의보다는 이탈이 더 좋은 선택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탈을 하기 위해 움직인다면 사회는 존속할 수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논객들은 출판물의 형태로 기록이 남는 발언에서는 결코 이탈 옵션을 타인에게 권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전투적인 노동운동, 학생운동, 사회운동의 맥락을 놓고 볼 때 그 편이 훨씬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스스로 의식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박노자는 바로 그 금기 아닌 금기를 깨고 있다. 전 세계 곳곳의 모순과 억압을 이야기하다가, 자신의 눈길과 마음이 밟히는 곳에서는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한 발 빼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 또한 한국 사회의 맥락 속에서 성장해왔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박노자처럼 영향력 있는 논객이 그런 말을 하는 모습을 재차 확인했을 때, 심정적인 반발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 적어도 이 지면은 결론을 내릴만한 곳이 아닐 터이다. 단지 우리는 박노자의 내면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불교적 사고방식이, 지금까지의 진보 담론에서는 쉽게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다른 무언가를 지시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 정도를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또한 박노자 본인이 러시아에서 항의하는 대신 이탈하는 쪽을 택한 사람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가 러시아에서 이탈한 덕분에 우리는 한국 사회의 문제에 대해 항의하는, 가장 성실하고 촘촘하게 세계의 문제들을 향해 그물을 던지는 한 사람의 논객을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8.

▲ <우승 열패의 신화>(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한국어가 아닌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는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한문을 읽고 한반도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당장 누군가 생계를 책임져준다고 했을 때, 러시아의 고대사를 연구해서 러시아어로 논문을 쓰고 발표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적어도 나는 아니다. 한국에 대한 사랑, 더불어 본인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학자적 재능이 결합하여, 박노자는 이 시점에서 가장 읽을 만한 대중적 역사 학술서를 쓰는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어있다.

그 중 우리는 특히 <우승 열패의 신화>(한겨레출판 펴냄, 2005년)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진보냐 개혁이냐'의 갈등이 식상해질 무렵, 박노자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한반도 남반부 지배자들의 이념은 과연 무엇이었는가?"(같은 책, 29쪽)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어설프게 수입된, "그때 그때 필요한 대로 '수입 부품' 위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져다 붙이기/뜯어 맞추기' 식으로 '조립'"(같은 책, 49쪽)한 사회진화론이 바로 그것이라고 박노자는 말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 단위에 적용한 허버트 스팬서의 이론이,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와 같은 논객, 즉 칼럼니스트들을 통해 소개되었고 아직까지 그 어설픈 담론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개화기에 미국이나 서구에 갔다 오거나 국내에서라도 원서를 통해 사회진화론을 제대로 소화할 만큼 영어 실력이 뛰어난 사람의 수는 극히 제한돼 있었다. 1910년 이전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한국인은 64명으로 추산되며, 1940년 이전에 도미 유학을 마친 사람의 총수라 하더라도 사실 900명을 넘지 못할 것이다. (중략)

즉, '경쟁의 소리'나 '우리 인종을 보호할 계책'과 같은 유의 논설을 써서 현상윤이나 이광수, 송진우그리고 결과적으로 박정희나 박종홍에게 영향을 끼친 개신 유림의 대다수는 국내에서 량치차오의 서술을 통해 '경쟁의 종교'에 '입교'했거나, 사회진화론 분야에서는 량치차오의 스승 격이었던 가토 히로유키의 책을 읽고 '우주의 기초가 천륜(天倫)이 아닌 힘'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보아야 한다. (같은 책, 74쪽)


요컨대 한국 사회의 지배담론이라는 것은 원본도 아니고 직역본도 아니요, 요약 발췌한 중역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광수가 바로 그 대표적인 소매상이었다. 하여 박노자는 지적한다.

"박정희와 박종홍, 이선근의 공통점이라면, 이들이 다 이광수의 문학과 시론들을 '필독서'로 삼아 읽었다는 것이다."(같은 책, 50쪽)

본래의 논의 맥락에서 잠시 벗어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이제 독자들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박노자는 특유의 어학 능력과 성실함으로, 본인이 어떤 똑 부러지는 결론을 내지는 못하고, 그저 안타깝고 잘 되었으면 싶은 사례들을 한가득 가져다주고 있을 뿐이지만, 아무튼 한국어로 세계의 소식을 업데이트해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그 와중에 교수로서의 자기 직분을 이행하고, 연구 논문을 쓰며, 그것을 묶어서 책으로 내기도 한다. 한국 사회의 담론 수준이 아직도 '해외 칼럼 소개'에서 크게 나아진 게 없다는 현실을 인정한다면, 그만큼 박노자의 존재는 좀 더 나은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렇게 소개되는 동서고금의 박람강기는 제각각의, 상대적으로 옳은 가치관을 흩뿌리며 덜그럭거린다. 박노자는 외국인 지식인의 프레임을 우리의 눈에 덮어씌우지 않는, 훌륭한 '국산 렌즈'지만, 그 렌즈를 끼면 우리는 도저히 어떤 단호한 정치적, 역사적 목적을 향해 초점을 맞출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중생을 구원하기 전에는 자신도 해탈하지 않겠다던 지장보살처럼, 박노자는 자신이 아는 한 세계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끄집어내는데, 그것들은 종종 서로 이상한 마찰음을 내며 부대끼고 기괴한 불꽃을 튀긴다. 우리는 박노자를 통해 너무도 많은 것을 한꺼번에 배울 수 있지만, 그래서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모일 수도 없게 된다.

9.

이미 먼 과거의 일인 것처럼 느껴지는 그 2002년 벽두에,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대한민국이 나는 무한히 자랑스러웠다. 푸틴의 러시아, 고이즈미의 일본, 부시의 미국에 비해서, 그 당시 '노무현의 한국'은 왠지 '희망의 오아시스'로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그 뒤로는 가슴 아픈 일이 하도 많아서 '그때 그 감동'은 결국 여지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시민 김선일 씨의 희생된 목숨과 함께 말이다. 이라크 파병과 김선일 씨의 죽음 이후 내게 '노무현'은 더 이상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사실, 지지한 일도 없고 약간의 '희망'을 가져봤을 뿐인데, 2003년 이후로는 그 '희망'도 없어지고 말았고, '일체 보수 정치인에 대한 관심을 아예 끊는 게 좋겠다'는 결심이 섰다. 지금도 그 결심대로 살고 있고 말이다.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52쪽)


▲ <모든 것을 사랑하며 간다>(박노자·에를링 키텔센 풀어 엮음, 책과함께 펴냄). ⓒ책과함께
대체 노무현의 그 어떤 점이, 소비에트에서 왔지만 러시아로 돌아가야 했던 벽안의 한국인마저도 기꺼이 한 표를 던지게 만들었을지, 이제는 그 이유를 되짚어 보는 것도 쉽지가 않다. 단 하나의 선거, 단 한 사람의 대통령을 바꾸고 나면, 역사의 미완결 과제가 마치 열쇠를 꽂아 돌린 것처럼 해결되어 나갈 것이라는 믿음의 근거가 어디에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모르겠다.

우리가 그의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바는 이런 것들뿐이다. 2003년, 2004년 무렵을 지나면 박노자에게 불교는 과거의 추억이 아닌 오늘의 삶의 방침이 된다. 그리고 그는 2011년, 본격적인 불교 교양서 <붓다를 죽인 부처>를 내고, 2013년에는 동아시아 3국 고승 및 불자들의 임종계를 모아 <모든 것을 사랑하며 간다>(박노자·에를링 키텔센 풀어 엮음, 책과함께 펴냄)를 출간하기도 한다. 그가 2009년에 낸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에는 촛불시위를 보고 흥분하여 혁명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조심스럽지만 설레어하는 그의 육성이 담겨있다. 불과 4년 후의 책에는 그런 불꽃마저도 담배꽁초처럼 짓눌려 있을 따름이다.

박노자는 세계의 모든 아픔과 고통과 권력의 압제를 눈여겨보고, 쓰다듬으며, 일주일에 몇 번씩 자신의 블로그에 새 글을 올린다. 우리가 가진 최초의, '겹눈'을 지닌 지식인은 그러나 이제는 어느 나뭇가지에도 앉지 못하는 잠자리처럼, 항공사 마일리지를 쌓으며 한국과 오슬로를 오간다. 우리가 더 강하게 항의하고, 무장투쟁까지 결사하고 나면, 세상이 바뀔까? 그렇다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곳으로부터 이탈하는 것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올바른 선택지는 아니라고, 아직까지 우리는 믿고 있다.

박노자 스스로가 그렇다. "나만의 깨달음, 즉 붓다가 말한 성문(聲門)과 연각(緣覺), 벽지불(辟支佛)의 깨달음을 일체 중생의 '대중적' 깨달음으로 어떻게, 전환시키느냐, 즉 개인적 반란을 대중적·세계적 반란으로 어떻게 '대승화'시키느냐, 이게 문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내 화두"(<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96쪽)라고 다짐한다. 한 번은 스스로 이탈하고, 이제는 새로운 조국에 돌아와 항의하고자 하는 지식인은 아직 백기를 들지 않았다. 그가 쓰는 글이 랜선을 타고 내 책상 위로 날아든다. 아직 이 혼미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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