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우리가 멈출 수 있었던 것은 스님 덕만은 아닌 것 같다. 이 나라에서는 어찌된 일인지 살면 살수록 여유가 없어진다. 자신의 위상에 만족하는 이도 드물고, 서로에 대한 존재감도 희미하다.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내적 결핍과 빈곤감이 크며, 마음이 바쁘고 여유가 없다. 무엇보다 자존감이 부족하고, 국민의 행복도가 심각할 정도로 낮다. 그리고 이런 야박한 나라에 사는 우리는, 내 몸 하나 챙기며 살기 버거운 우리는, 이제 지친 것이다. 이제 좀 사람답게 살고 싶어진 것이다. 그래서 따뜻하고 진실한 목소리의 누군가가 "멈추어요.~"라고 말했을 때, 슬며시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여요.
내 생각이
내 아픔이
내 관계가
그리고 내 주변이 또 비로소 보여요.
▲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 스님 지음, 쌤앤파커스 펴냄). ⓒ쌤앤파커스 |
그러나 알고 보면 그 말씀의 바탕에는 무수한 원인과 조건의 상호 관계에 의해 나와 세상 일체가 생겨난다는 ‛연기론(緣起論)'이라는 불교 사상의 정수가 들어 있다. 만물은 생멸변화하고 이합집산하여 영원하고 불변한 고정된 실체가 없음에도 내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함으로써 인연이 연달아 일어나 괴로움을 만든다는 것이 부처의 깨달음이었다. 우주적 관점에서는 나와 남의 구분도,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틀린 것도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가 옳다고 내세우며 분쟁과 살상을 일삼고, 고정관념과 집착에 연연하여 타인을 억압하고, 잘 풀리지 않는 관계에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을 탓하며 산다.
이제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모든 비난과 집착에 얽매여 있는 만신창이의 우리 자신을 돌아본다. 열심히 일하며 공부하며 살아온 만큼의 자신의 존재의 가치와 자격을 인정받고 싶다. 삶은 이제 주위의 편견이나 자신의 아집이 아니라, 더 크고 신성한 차원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물질문명의 유혹과 세속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이제 좀 부처처럼 살아 보고 싶다는 독자들의 이러한 웰빙(Wellbeing)의 염원과 어리석은 중생을 보듬고 싶은 스님의 힐링 의지가 만나 그렇게 이 책은 대한민국의 ‛베스트셀러'가 되어버린다.
진리는 통한다
철학 수업을 들었던 제자 하나가 법륜 스님과 함께하는 수행에 참석한다고 얼마 전 서울을 떠났다. 서른이 코앞인 사람이 취직 준비는 안 하고 속 편하게 수행이라니 영 탐탁지 않았다. 그리고 불교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철학 수업에서 충분히 설명을 해줬다고 생각했는데 뭘 더 배워야 한다고 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가르친 것은 논리적인 철학적 이론뿐이었음을, 믿음과 수행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 진리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주어진 삶을 주체적으로 고민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 훌륭한 자신이 되기 위해 떠난 것인데 나는 그를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용감한 선택임을 깨달은 것은 이 책을 읽은 후이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세상에 대한 그토록 많은 잡지식을 교과서에서 주입받으면서도 삶에 대한 기도와 명상은 학교에서 배워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론 지식만 많이 배워 머리만 가분수인데다 그마저도 현실에서 제대로 써먹지도 못한다. 그래서 "지성과 감성과 영성이 골고루 발달해야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혜민 스님의 말씀에 공감한다. 지성을 위해서는 철학과 과학을, 감성을 위해서는 예술을, 영성을 위해서는 기도와 명상을 아이들에게 경험하게 해주어야 한다. 스님도 "지성만 있고 감성이 없으면 남의 고통을 모르고 영성만 있고 지성이 없으면 사이비 종교에 빠지기 쉬워요"(262쪽)라고 하신다. 방법은 각각 달라도 진리와 지혜라는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동일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몇몇 이론의 틀에 그들의 생각을 가두고, 국가와 학교가 추구하는 이데올로기와 질서만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지금 당장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쉬면 세상도 쉽니다
제목이 알려주듯, 이 책은 한꺼번에 빨리 읽어 버리는 책은 아니다. 지식을 전달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극적이고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상처받은 마음을 관조하고 "자신의 온전함과 존귀함"(281쪽)과 만나게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래서 천천히, 조금씩,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읽으면 더 좋다. 이 책의 여백이 많은 것은, 단락마다 예쁘고 조그마한 쉼표가 있는 것은, 공이 많이 든 일러스트가 삽입된 것은 그런 연유에서이다. 그것이 자신을 비우고 큰 관점에서 바라봄, 바로'명상'이다.
당신의 마음을 현재로 온전히 돌려
그냥 있음을 고요 속에서 충분히 만끽하십시오.
시간이 사라집니다. (43쪽)
그리고 '깨어 있음'으로 인해 나에서 출발한 마음은 비로소 타인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다른 사람이 건강하고 편안해지고 행복하길 기원하는 마음은 아무에게나 그렇게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 빠르게 진행되는 속도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나 자신이 바쁘니 친하지 않은 주변 사람이나 길가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존재 의미를 갖기가 어렵다. 하지만 "깨어 있다는 것은 내 마음의 의식공간 안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바로 인식한다는"(196쪽) 것이다. 깨달음을 통해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그 평범했던 모든 존재들과 순간들이 각각의 의미를 갖게 되고 소중해진다. 그때서야 비로소 타인을 향해 마음이 열리게 된다. 그들의 기쁨도 고통도 공감할 수 있게 되고, 그들이 고통 받지 않고 잘 지냈으면 싶어진다. 남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사랑해주는 것은 개인적 차원 같지만 알고 보면 나와 너라는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참으로 우주적인 과정이다. 사랑받으시길, 행복해지시길, 인정받으시길… 혜민 스님이 그렇게 자주 책에서 반복해서 읊조리시던 말들, 그것이 바로 타인에 대한 사랑의 염원, 자비심, 즉 '기도'이다.
기도는 하느님의 사람을 더 얻게 되는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우리를 항상 사랑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중생이었던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부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271쪽)
사유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내 마음의 신성이 가득 찰수록 세상의 신성도 가득차야 옳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여전히 어지럽고 혼잡하고 속되다. 사람들 모두가 보살 수행을 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우리들에게 삶이 그다지 너그러워질 것 같지는 않다. 스님의 위로와 응원으로 고단한 대한민국 국민은 어느 정도 마음을 치유하고,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개인의 내면의 인식과 태도를 변화시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혜민 스님의 생각은 사회구조적 문제를 간과한 나이브(naive)한 주장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나아가 내면 수행만으로는 공동체의 복잡다단한 문제에 접근하기 어렵고, 불의에 대한 저항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원하든 원치 않든 어느 정도 그것은 체제 옹호적일 수도 있다.
해결해야 할 일들이 보다 복잡하고 풀기 힘든 문제라는 것을 일찍이 깨달은 이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였다. 그는 현재 티베트의 인권과 자치권을 위해 비폭력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세상의 모순과 폭력에 여러 방법으로 저항하고 있다. 베트남 승려인 틱낫한 스님도 인류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세계를 돌며 반전운동가로서 동분서주하고 계신다. 먼 곳에서 찾을 것도 없이 한국 불교계의 종단 내분만 보아도 인간의 권력애와 욕망, 집착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다.
마음의 평화로부터 공동체의 평화가 실현되기 어렵다면 이 세상에 만연한 착취와 분쟁, 살상 행위의 원인을 사유를 통해 심층적으로 분석, 접근하는 방법, 즉 철학에서 해법을 구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 본다면, 우리가 힘든 것은 단지 편견과 아집에 물든 나의 마음, 나의 탓인가? 개인을 숨차게 닦달하는 자본주의 시장 원리, 나를 조종하는 무의식적 사회구조, 나아가 병적인 물질문명, 이성과 진보의 탈을 쓴 근대라는 시대성 때문은 아닌가? 실존주의와 구조주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와 같은 사상이 이 세상의 병폐와 병리 현상으로부터 인류의 해방과 자유, 정의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 종교는 명상하라고 권유하지만, 철학은 당신에게 '사유하라'고 권고한다. 사유해야, 비로소 은폐된 상황은 우리 앞에 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불합리한 제도와 관습에 의해, 사회적 억압과 편견에 의해 자신이라는 존재가 온전히 남아 있기 힘든 그러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특히 테크놀로지 문명은 가공할 속도로 인간을 지배하고,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화할 것을 우리에게 명령한다. 일찌감치 이를 통찰한 것은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였다. 그는 현대 테크놀로지의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본질을 성찰한 후, 존재 망각의 역사를 극복하고 존재의 진리를 사유하라고 촉구하였다. 프랑스의 문화 이론가인 폴 비릴리오는 속도가 이제 개인의 체험 세계 뿐 아니라 국가사회를 지배해 '시간 차원'의 정치, 경제 체제까지 재편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시시각각으로 변화를 강요받는 이러한 '유동하는' 근대사회의 불안정성과 그러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심에 대해 서술한 바 있다. 자유시장 원리라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삶 깊숙이 침투하여 무한 경쟁과 양극화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압력에 속 깊은 우울증을 앓고 있다. 혜민 스님의 '멈추라'는 말이 철학적으로, 학문적으로 연결되는 무소불위의 '속도의 시대'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어떤 방식이어도 좋다. 은둔과 고행의 자기 수행이나,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성찰, 불의에 대한 저항과 사회 참여 등, 자신의 내적 의지와 용기를 강화해 이 시대를 책임지는 자율적, 주체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게 해줄 수 있다면 그 모두를 거절하지 말고 시도해 볼 일이다. 우리 시대의 병폐와 모순은 증식이 빠르고 전염력이 강한 변종 질병이기 때문이다. 위로와 격려라는 뜻밖의 치료제를 스님에게 선물 받았지만, 이제는 병든 사회, 병든 시대를 그 뿌리부터 진단하고 치유하기 위해 멈추어 함께 생각해 볼 때이다. 시대의 폭력과 착취, 불의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현명한 처방과 쓰디쓴 약, 무엇보다 그것을 단숨에 삼킬 수 있는 용기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 모두를 위해 이쯤에서 멈추어 서자. 그리고 우리 모두의 합의와 연대를 기초로 한 넉넉하고 인간적인 사회를 계획해보자. 국가와 사회제도에 종속되지 않고도, 종교와 철학에 의지함 없이도,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삶에서 의욕을 느끼며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가 도래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보자. 멈추면, 그리고 사유하면, 비로소 많은 것들이 우리 눈앞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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