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어떤지 몰라도 저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젊은 시절 돈도 조직도 없이 오직 연설 하나로 전국 최연소 시의원에 당선되었을 만큼 워낙 말씀을 잘하시기도 하지만, 제가 느끼는 즐거움은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남북문제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와 온갖 주제에 대해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대화'라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지난 5월, 어버이날을 앞두고 찾아뵈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날 아버지는 얼마 전부터 자다가 숨이 멈출 때가 가끔 있다며 자다가 죽을까 봐 걱정이라고 하셨지요. 어머니도 그렇고 많은 노인들이 자다가 죽으면 복이라 하는데 아버지는 안 그러냐고 했더니, "나는 생각이 다르다. 사람은 짐승과 달라서 살고 죽는 걸 인식하는 존재인데 자다가 죽는 줄도 모르게 죽는 것이 뭐가 좋으냐. 좀 아프더라도 죽음이 어떻게 오는지, 죽는 과정을 고스란히 느끼며 죽어야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죽을 때 괴롭고 아픈 게 겁나지 않으세요?" 하니까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이 정도 살고 이런저런 재미도 보았으면 죽을 때 좀 괴롭기도 해야지, 어떻게 영 안 아프길 바라느냐고. 그러면서 바둑 친구인 교회 장로분이 이제라도 하나님을 믿어 천당에 가라고 전도하기에, 이 나이까지 이 정도 누리고 살았으면서 죽어서 천당에 가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다, 천당이 있으면 거기엔 이승에서 나보다 더 힘들게 산 사람들이 가야 된다고 했더니 다시는 교회 가잔 말을 안 한다고 하시며 웃으셨지요.
그날 아버지와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얼마나 재미있었는지요. 돌아보면 어릴 적부터 그랬습니다. 지금처럼 자유로운 대화는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밥상머리에서 늘 사회 현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식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솔직히 토론을 위한 의견 청취라기보다는 제대로 알고 있는지 시험하는 일종의 테스트였지만 -그래서 조마조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가끔 머리 큰 자식들이 아버지의 견해에 반론을 제기할 정도의 자유는 있었습니다. 그 바람에 우리 집 밥상은 늘 시끄러웠고 자식들이 커갈수록 치열한 난상토론으로 얼굴을 붉히는 일도 적지 않았지요. 밥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가 숟가락을 든 뒤에야 밥을 먹는 엄격한 예의범절과는 무관하게 언론의 자유만은 철저히 보장되었던 셈인데, 아마 그래서 자식 다섯이 모두 필자 노릇을 하며 책과 관련된 인생을 사는가 봅니다.
가난 때문에 간신히 초등학교만 졸업한 처지였으나 아버지는 평생 앎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직장도 없이 곤궁한 살림에도 너덧 개 일간지에 경제신문과 어린이신문까지 매일 예닐곱 개 신문을 구독하며 세상을 읽으려 했고 자식들에게 읽는 눈을 키워주려 했습니다. 그리고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세상에서 읽는다는 것은 행간을 생각하는 것이며 글자 뒤의 세상까지 상상하는 것임을 가르쳤습니다. 늦게나마 제가 읽고 쓰는 일로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아버지의 오랜 가르침이 있었던 덕분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버지가 늘 지금처럼 제게 정다운 대화 상대였던 것은 아닙니다. 어릴 적엔 그저 두려운 엄부(嚴父)였고 젊은 날엔 뛰어넘어서야 할 벽 같은 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관심과 기대의 대상이었던 손위 형제들과 달리 막내인 저는 "낳을 생각이 없던 아이"였기에 존재부터 인정받아야 했지요. 아마 그래서 제가 눈치 빠르고 남의 시선에 민감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부 잘하고 똑똑한 오빠 언니들 틈에서 인정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아버진 잊으셨을지 모르지만 제겐 아픈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대학 시절, 그 즈음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 아버지는 제게 원고의 정서와 교정을 맡겼습니다. 처음엔 이면지에 써 내려간 글을 원고지에 옮겨 보여드리면 다시 고치셨고, 컴퓨터가 나온 뒤에는 원고지에 정서한 것을 새로 옮겨 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출판사에서 편집을 하기 한참 전에 벌써 편집자 노릇을 한 셈이지요.
한데 몇 해 동안 이어진 그 일이 저는 달갑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 용돈을 타 쓰는 처지라 할 수 없이 했지만 애써 하고서도 툭하면 욕을 듣는 것이 그렇게 서운하고 싫을 수가 없었지요. 더구나 근 십 년 만에 책으로 만들면서 아버지는 머리말에 오빠 언니들의 수고만 적고 정작 그 원고를 갖고 씨름한 저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아, 그때의 배신감이라니!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 일을 계기로 부모와 자식, 가족이라는 운명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프로이트의 책들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지요. <정신분석 강의>를 비롯해 <토템과 터부>, '도스토예프스키와 아버지 살해'(<창조적인 작가와 몽상>(열린책들 펴냄, 1996) 수록) 같은 글들을 읽으며 아버지를 향한 제 양가감정을 들여다보았습니다.
▲ <홀로 걸어온 길 함께 가야할 길>(김경남 지음,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
그런데 이런 기쁨을 누릴 날이 많지 않음을 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보며 처음으로 절감했습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의 무거움, 아니 무서움에 숨이 막히고,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삶의 가뭇없음에 앞이 캄캄했습니다. 숱한 책을 읽고 고민하며 잘살려 애쓴 것은, 제 자신을 잘 다스리고 인연을 잘 맺고 풀어 쉬 흔들리지도 쉬 무너지지도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픔을 덜어드릴 수도 없었고,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를 수도 없었으며, 아버지와 제게 다가오는 삶의 마지막을 담담히 직면할 수도 없었습니다. 죽음에 관한 책들을 그토록 많이 읽었건만 저는 '필멸'의 허무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을 지우기에 책은 너무 무력해 보였습니다.
책에 대한 회의가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엔 상태가 좀 심각했지요. 그런데 아버지, 책의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제가 책을 버리는 게 싫은가 봅니다. 흔들리는 제 마음을 알고 딱 맞는 책을 보내줬으니 말이에요. 제목은 <달나라 소년>(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 캐나다의 저널리스트인 이언 브라운이란 사람이 쓴 책인데 선물로 받지 않았으면 제가 먼저 읽자고 나섰을 책은 아니었습니다. CFC 증후군이라는, 전 세계에 환자가 백 명 남짓인 희귀병을 앓는 아들을 키운 이야기를 쓴 책이라 장애 아들과 아버지의 사랑을 그린 그렇고 그런 책이겠거니 예단했거든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말도 못하고 밥도 못 먹고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들에 대한 안타까운 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 아버지는 '이런 삶에 어떤 가치가 있을까? 이 아이에게도 내면의 삶이 있을까?' 하고 물어요. 심지어 아들을 훌륭한 공동체에서 살게 하려면 사회가 큰돈을 부담해야 하는데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자문하기도 하고요.
▲ <달나라 소년>(이언 브라운 지음, 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 ⓒ부키 |
지난 일요일 찾아뵈었을 때 아버지는 한결 기운이 난 모습이셨어요. 전처럼 아버지와 둘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버지께서 제 손을 어루만지며 –이런 스킨십은 난생 처음!- 자식이 없어도 괜찮으냐고, 허무에 빠지지 말고 잘 살라고 당부하셨지요. 아버지, 그날 저는 자식이 있어도 허무는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어떻게든 잘해가겠다고 대답하면서 속으로 이언 브라운이 쓴 책의 한 대목을 떠올렸습니다.
"이 아이가 죽을 때 이럴 것이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나는 이미 할 수 있는 한 워커와 가장 가까이에 있다. 아들과 나 사이에 공간은, 기대나 실망은, 실패나 성공은 이제 없다. 나는 아들을 품에 안고 기다렸다. 이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지만 우리는 둘이서 함께 기다렸다."
아버지, 아버지와 저 사이에도 이제 기대나 실망, 실패나 성공 따위는 없지요. 이렇게 되기까지 저도 노력했지만 아버지도 마음 쓰신 거 알아요. 아버지, 제가 누린 인생의 많은 행운이 당신이 제 아버지인 것,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제 가장 오랜 친구인 김경남 님, 아버지,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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