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김형태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
지난 7월 8일 법무법인 덕수 사무실에서 김형태 변호사를 만났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편집자>
▲ 김형태 변호사. ⓒ프레시안(최형락) |
프레시안 : 법률 전문 서적 말고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한 저서가 이번이 처음이다. 의외였다.
김형태 : 나 자신은 가톨릭 신자인데, 90년대 <경향잡지>에서 기독교, 불교, 노자 등의 주제와 세상사를 섞어서 칼럼을 오래 썼다. 정통 가톨릭 입장에선 좀 벗어난 내용들이었지만, 수녀님이나 수도자 분들에게 꽤 인기를 끌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한겨레> 신문에 오래 썼던 칼럼들도 있고. 사실 책을 내려면 그 연재 원고들로 예전에 시도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엔 뭔가 맞지 않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다 가장 최근 <한겨레> 토요판에서 연재한 원고로 첫 책을 내게 됐다.
프레시안 : 신문에 연재될 때와 책으로 묶여 나올 때 느낌이 또 달랐을 것 같다.
김형태 : 그렇더라. 토요일자 신문에 원고가 실렸을 땐 일주일 단위로 그냥 읽고 넘기게 됐는데, 그리고 다큐멘터리 몇 편에 출연할 때에도 이건 '시간예술이니까' 하고 비교적 담담하게 생각했는데, 책으로는 앞으로도 계속 남는다는 생각이 들어 또 다른 무게감이 느껴진다.
프레시안 : <한겨레>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연재를 시작했을 때 굉장히 신선하게 읽었었다. 중요한 법적 논점을 제대로 짚으면서 법 전문가가 아닌 이들조차 사건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도록 쓰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김형태 : 그동안 동료들 대상으로 전문적 자료를 쓸 때 말고는 법에 대한 글을 쓰는 걸 일부러 피했다. 너무 딱딱하고 재미도 없지 않나. 하지만 <한겨레> 토요판 고경태 편집장의 설득으로, 여태까지 법조계에서 30년 가까이 일했는데 그동안 참여했던 재판들을 한번 정리해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었다. 쟁점부터 결과까지 한 번에 정리하면 나중에 참고 자료도 될 것 같고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연재를 시작했다.
막상 첫 번째 연재 원고를 쓰고 나니…내가 봐도 너무 재미가 없더라.(웃음) 톤을 정하기가 어려웠다. 비슷한 예가 있으면 따라갈 텐데 아무런 레퍼런스가 없다보니 혼자서 끙끙거리며 새로운 글의 형식을 개발하다시피 했다. 논문도 아니고 일기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자기고백도 아니고, 동시에 전부이기도 하고. 그래도 매주 쓰다 보니 조금씩 글 형식이 정착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연재 처음 글과 마지막 글이 그래서 많이 달라졌다. 단행본 작업할 때 쭉 읽어보니까 초창기 글은 고칠 게 많더라.
일단 소재는 법이지만 법이라는 게 결국 세상에 대한 이야기니까, 사람과 세상과 종교를 아우르는 글을 쓰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인문학 분류에 넣고 싶었는데 편집자들은 법률서적으로 규정하려 했고, 최종 분류는 사회과학으로 되어있다.(웃음)
프레시안 :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뽑은 기준도 궁금하다.
김형태 : 가장 중요한 건 자료가 많이 남아있는 사건이어야 했다. 20년 전 사건들이라도 자료가 충분하면 글을 쓸 수 있다. 다만 아쉬운 건 1980, 90년대 노동 사건들이 빠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운수노조와 지하철 노조가 처음 생기던 무렵이라든가 언론 노조에 얽힌 각종 사건들, MBC 파업 당시 9시 뉴스 앵커였던 손석희 씨의 구속 등 우리 회사(법무법인 덕수)에서 맡았던 큰 사건들이 참 많다. 그런데 홍수가 크게 났을 때 당시 자료가 모여 있던 창고에 물이 스며들어 자료가 다 썩고 말았다. 그래서 특정 기간 사건들의 자료는 남아있질 않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을 바탕으로 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명필름 |
프레시안 : 팩트를 정리하는 글의 뼈대는 어떤 식으로 구축했나.
김형태 : 기본적으로 쟁점과 증거가 들어가야 하니까 재판 기록이 먼저 있어야지. 당시 운동권들이 활발하게 작성했던 '찌라시' 자료들도 순서대로 정리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사건 뒷얘기들은 나와 당사자 사이에 오갔던 편지와 이메일들에서 뽑아냈고, 사회적 평가는 신문을 찾아봤고. 요즘은 인터넷에서 옛 신문 제공 서비스가 되니까 거기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다보면 순수하게 법 자체만이 아니라, 사건을 둘러싼 주변 상황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프레시안 : 연재 당시 주변 반응은 어땠나.
김형태 : 조심스러웠던 게, 사건 관련자들이 대개는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그분들의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중요한 부분을 누락시킨 게 좀 있다. 조금 아쉽긴 하다. 60살도 안 된 자가 비망록을 너무 일찍 써서 그래.(웃음) 다들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그 사이를 뚫고 가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젊은 사람들은 의외로 여기 다뤄진 사건들을 잘 모르더라. 그들을 기준으로 처음부터 다 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 썼다.
프레시안 : <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의 첫 번째 글은 1982년 법조계에 처음 발을 내딛었던 검사시보 시절로 시작한다. 1986년 변호사를 시작하기 전까지, 그 중간엔 군대가 있었다. 혹시 변호사 시절 공동경비구역(JSA)의 김훈 중위 사건 등 군의문사를 자주 다루게 된 것도 이때의 경험 때문일까.
김형태 : 연수원에서 2년, 군대에서 3년을 보냈지. 군대 때 겪었던 사건들이 이 책에도 좀 들어가 있는데, 당시 군대에서 북파공작원이라든가 군 의문사 사건을 수도 없이 겪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내 삶에 영향을 미친 건 맞다.
프레시안 : 그런 의미에서 책에도 언급되었던 당신의 어린 시절, 창신동에서의 기억 때문에 이후 달동네 재개발 세입자들의 입장을 좀 더 잘 대변할 수 있었다고도 보인다. 환경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
김형태 : 동의한다. 게다가 내가 시보 시절 초창기에 겪었던 사건들은 주로 노동조합 사건들이었고, 그런 경험들이 나한테 굉장히 크게 다가왔었다. 원래는 검사가 희망사항이었다. 아무래도 현장에 제일 가까운 건 경찰과 검찰이고, 판사는 변호사와 검사가 만든 사건에 대한 판단을 주로 맡아야 하니 다소 수동적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시보 시절 검찰이 돌아가는 행태를 지켜보고, 또 당시 정권을 장악한 군인들이 군 의문사를 쉬쉬하는 걸 보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만일 내가 뭣도 모르고 검찰에 계속 남았다면 뭐랄까…악질 검사로 소문 좀 났을 것 같다.(웃음) 지금은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프레시안 : 돌이켜보면 언제가 가장 바빴나. 책에 언급된 사건들을 보면 1990년대에 집중적으로 큰 사건들이 많았던데.
김형태 : 치과의사모녀 살인사건(1995년 치과의사인 30대 여자와 한 살짜리 딸이 끈으로 목졸린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남편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구속되었고, 그로부터 7년 동안 사형과 무죄 확정을 몇 번이나 오갔던 사건이다. <편집자>)을 다루던 1990년대 중반부터 일의 하중이 커졌다. 양평 생매장 사건(1990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직후 터진 첫 번째 대형 사건. 어린 아이와 할머니가 포함된 가족을 무참하게 죽인 사건으로,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연루되었다. <편집자>)도 비슷한 시기였고, 지하철 노조가 처음 생기는 등 큰 사건들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요즘이야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규모가 커지고 변호사들의 전문성을 고려해 일을 나눌 수가 있는데, 1980년대 후반에 민변이 생기고 난 초반에는 변호사 수가 너무 적었다. 전문 분야를 가리지 않고 팔방미인처럼 다 맡아야 했다. 노동, 빈민, 보안법, 교육 등 가릴 틈 없이 의문사 사건, 철거민, 전교조 초기 멤버였던 이수호 씨와 이부영 씨의 구속 사건들까지 한꺼번에 다 맡아야 했다.
사실 법이라는 건 도구고, 다루는 사건 속으로 직접 들어가고 나면 그 당사자들로부터 상황을 새로 배워야 한다. 노조에 가면 노조 관행부터 다시 배워야 하고, 전교조를 다루려면 한국 교육 쟁점을 배워야 했다. 방송사 기자들이 해고될 때는 또 방송사 내부 시스템을 알아야 하고. 사회 전반에 관한 공부를 계속 쫓아다니며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변호사를 가르쳐야 하니 답답했을지도 모른다.(웃음)
프레시안 : <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에서 인상적인 구절 중 하나는 "법에는 중간이란 게 없다. 순 빨강과 순 노랑 사이에는 무수히 다양한 주황색이 있다. 하지만 법은 이런 스펙트럼의 세계를 모른다"였다. '스펙트럼을 모르는 법의 세계'는 인권변호사의 입장에선 더 한층 까다롭고 가혹한 조건일 수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변호사의 임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김형태 변호사. ⓒ프레시안(최형락) |
김형태 : 그 부분이 내가 법을 싫어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법조문의 몇몇 문헌만으로 다양한 사회 현상을 판단하기가 너무 어렵다. 예를 들어 사기 사건에서 타인을 속일 의사가 있었던 건지, 속일 능력이 있었던 건지를 세세히 판단하는 건 쉽지 않다. 일반 사무와 법의 잣대가 포착하는 세계가 너무 다르고, 인류가 진보하더라도 법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한계가 있으며, 거기서 오는 수많은 부작용이 있다. 빨강와 노랑 사이에 주황색이 얼마나 다양한데, 그 수많은 주황들은 다 어떡해야 하나?
사람 사는 게 두 가지 문제로 귀결된다. 가치의 문제와 이익의 문제. 노자를 보면 맨 앞에 나오는 가르침이 이거다. 현명함을 숭상하지 말라, 사람이 현명해지기 위해 싸운다. 귀한 것을 귀하게 여기지 말라, 누군가 도둑질한다. 난 그게 바로 가치와 이익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모든 싸움이 가치 아니면 이익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과정이다. 법은 가치와 이익을 적절히 배분해야 하는 역할을 떠안고 있다.
▲ 용산참사 사건을 다룬 홍지유, 김일란 감독의 <두 개의 문>. ⓒ연분홍치마 |
법으로 일단 만들어지면 그걸 정의라고 생각하잖아. 법은 정의가 아니다. 가치와 이익의 배분 기술일 뿐인데, 그게 일단 형성되면 스스로를 정의라고 포장한다. 하지만 법이 사람들을 죽여 온 역사를 보면…용산참사가 일어났고, 어떤 이들은 사회주의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수십 년을 감옥에 갇혀있었다. 그게 다 법이 가치와 이익을 측정하는 부분을 독점해서 생겨난 일이다.
반대로 법을 잘 활용해서 그런 모순을 흐트러트리고 부각시키고 바로잡도록 하는 게 가능하다. 그게 법을 전공한 사람이 한 일이다. 처음 말했던 판단 부분은 여전히 어렵고 괴롭지만, 가치와 이익을 배분하는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법은 좋은 도구다.
프레시안 : 법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시절은 어떻게 견뎌냈나.
김형태 : 일단 법대를 입학하고 난 뒤에는 법의 딱딱함과 생경함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법이 싫어서 다른 과를 기웃거렸다. 문학 수업 듣고, 종교 수업 듣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굉장히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잘못된 사회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다행이었고. 학교에 남아 있었다면 현실에서 유리되기 쉬운데, 변호사로 일하면서는 계속 현실에 밀착해 있을 수 있어서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안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아주 실용성 있고 괜찮은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이 책을 읽다보면 김형태 변호사는 '작은' 사건은 안 다루는 건가 하는 궁금증도 든다.(웃음)
김형태 : 그런 얘기 자주 듣는데, 일반 사건도 다루면서 먹고 산다.(웃음) 책에 나오는 것 같은 큰 사건들은 오히려 내 돈과 시간을 쏟아 부으면서 해결해야 한다. 가끔 친구들이 연락해서 "우리 집안에 명도소송이 걸린 게 있는데, 미안한데 너 이런 것도 혹시 다루냐?"하고 묻는다. 나는 펄쩍 뛰면서 "당연히 한다"고 덥석 받는다.(웃음)
비슷하게 <공동선>이라고, 지금 내가 발행인으로 올라가있는 잡지가 있다. 함세웅 신부, 고 박완서 작가 등이 모여서 만든 잡지인데 어쩌다보니 종이 값, 인쇄비 청구서가 나한테 오게 됐다. 여기 글 쓰시는 작가님들, 다른 출판사에서 책 내지 마시고 공동선 출판사에서 내세요!(웃음)
프레시안 : "좌우를 막론하고 내가 무슨 무당처럼 억울하게 죽은 이들 푸닥거리하러 태어났나 싶기도 했다"라는 구절도 눈에 띄었다. 이 책에 한데 모인 사건들을 보고 있노라면 20세기 한국현대사를 증언하는 변호사로서 그 책임감이 어마어마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형태 : 군대에서 자살했다는 군인 사건을 맡으면, 내가 직접 그 화장실에 가서 비슷한 자세로 군화 끈으로 목을 졸라맨다. 수도 없이 그 자세를 취해보고, 어떻게 죽었을지 짐작해본다. 신호수 사건(1986년 인천에서 가스 배달을 하던 평범한 청년 신호수가 간첩으로 조작되는 과정에서 경찰의 가혹행위로 사망에 이른 사건. <편집자>)도 그렇고, 최종길 교수 사건(1973년 당시 서울대학교 법대 학생과장이었던 최종길 교수가 간첩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뒤 건물 앞에 추락한 시체로 발견된 사건. <편집자>)도 그렇고, 양평 생매장 사건도 그렇고. 죽은 사람들을 참 많이 봤다.
전생에 대체 무슨 죄를 지은 팔자일까 싶었는데, 보도연맹 사건 (1949년 이승만 정권이 권력 장악을 위해 '좌익'으로 분류한 전국의 양민들이 갑자기 끌려가 영문도 모르고 총살당한 사건. <편집자>)까지 맡다보니 이젠 십 수만 명이다. 영화 <지슬>에서도 보도연맹과 연관된 4.3사건을 다뤘다. 영화 마지막에 소지(燒紙)라고 하나, 죽은 혼들을 위로하는 의식으로 마무리되지 않나. 그런 식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와 소설들이 그분들을 위로해드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난 법을 전공했으니 법으로 위안해드려야 하는데…돌아가신 분은 십 수만 명인데 재판받는 사람들은 3, 4000 정도밖에 안 된다. 유족들도 다 풍비박산이 났으니까. 이런 사건이 다시는 앞으로 재현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무당의 역할이 원혼을 달래는 것 뿐 아니라 좋은 곳으로 보내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막는 것까지라고 생각한다.
천안함 사건 터진 다음 그런 얘기들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전쟁이 나야 빨갱이를 다 색출할 수 있다고. 일베 등의 논쟁이 더 과열된 지금 무렵에 또 그런 사건이 나온다면 정말 전쟁이 반복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전쟁이 터지면 나부터 빨갱이 1번으로 잡혀가겠지.(웃음) 한편에선 진보 쪽에서도 우파 진영을 무섭게 몰아치는 게 있고. 서로 계속 강화 상승되면서 싸움이 반복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그저 해원(解冤)하고 다시 이런 일이 안 생기도록 빌 수밖에 없다.
▲ 제주도 4.3사건을 배경으로 한 오멸 감독의 <지슬>. ⓒ자파리필름 |
프레시안 : 개인적으로 1995년 서울 불광동 치과의사모녀 살인사건에 관한 기록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소위 '과학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우왕좌왕했던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그 사건 직후 터졌던 미국의 O. J. 심슨 사건과 비교되면서 무척 선정적으로 보도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김형태 : 보는 사람도 그렇게 답답한데 그걸 당한 사람 입장은 어땠겠나. 죽은 처의 이야기는 많이 빼긴 했는데…남편은 만나서 한 10분만 얘기해보면 속없고 순진한 사람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그런 사람의 평생에 금이 가 버린 거다.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잘 지내고 있지만, 7년 동안 재판 결과가 엎치락뒤치락할 땐 내가 오죽하면 그 사람보고 도망가라고 그랬겠나. 그 친구 감옥에 있을 땐, 차라리 옷 바꿔 입고 내가 감옥 들어가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사람은 너무 억울한 상황이었고, 나는 그를 정말 살리고 싶었으니까. 1997년 김영삼 정권 말기 사형을 몰아서 집행할 당시 그도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프레시안 : 용산참사에서도 그러했지만, 경찰이나 검찰 쪽에서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모든 디테일들을 추적해야 한다는 점에서 변호사가 탐정 노릇까지 해야 한다는 게 벅찰 것 같다.
김형태 : 한 달 전에도 모처에서 강의할 때, 형사재판을 맡으면 변호사가 탐정을 고용하든 변호사가 탐정이 되든 해야 사건이 풀린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도, 과학수사에 분명 한계가 있다. 내가 맨날 얘기하는 게, 죽은 사람 머리를 스캔해서 마지막 순간이 찍혀 나오지 않는 한 사망 시간 추정은 정말 어렵다. 몇 시부터 몇 시 사이까지라고 추정하는데, 만일 실제 죽은 순간이 그보다 10분 전이라고 가정한다면 기술은 그 10분 차이를 커버하지 못하거든.
이런 사건도 있다. 어떤 사람이 사촌 동생의 애인을 강간하다 죽였다는 죄목으로 구속됐다. 시체에 남은 증거들로 DNA 검사를 했는데, 사촌 동생과 그 형이 혈육이다 보니 구별이 잘 안 되는 거다. 구속된 형은 자기가 안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아직도 7, 8년째 갇혀 있다. 과학 수사가 궤도에 올랐고 오류가 없다고 믿어버리는 순간 억울한 희생양이 계속 생겨난다.
치과의사모녀 살인사건은 가장 힘들었던 사건이다. 거기 비하면 다른 것들은 비교적 수월한 편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좀 다른 경우지만, 요즘 진행 중인 천안함 사건도 많이 힘들다. 벌써 3년째인데, 자료 접근이 워낙 어려우니 1심이 절반도 진행이 안 되고 있다. 이건 사실, 검찰을 군 특검으로 임명해서 강제 수사, 압수수색하고 합조단 자료 전부 가져오면 금방 진상을 밝혀낼 수 있는데 자료를 안 내놓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바깥에선 천안함 사건이 당연히 북 소행이라고 기정사실화되어있고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되어버렸잖아. 반대 의견을 이야기하면 국론 분열로 몰아붙이고.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프레시안 : 말씀하신 천안함 사건부터 시작해서 이 책에서 인상적으로 기술된 인혁당과 민청학련, 보도연맹 사건, 송두율 교수 사건, 최종길 교수 의문사 등의 참혹한 사건들 대부분이 남북분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고통스럽다. 우리가 관계하지 않았던 몇십년 전 역사 때문에 그 이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뒤바꾸어야만 했을지 생각해보면 말문이 막힌다. 김형태 변호사 역시 그중 한명일 것이고.
김형태 : 책에도 언급되는 장기수 할아버지 생각을 자주 한다. 재판을 받고 난 다음 호송차에 타기 전에 화장실에 간다던 양반이 너무 오래 돌아오지 않아서 찾아갔더니, 화장실에 30분째 앉아있던 거였다. 십 수 년 만에 나온 바깥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었다고.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또 내가 사회안전법의 헌법소원을 내기 위해 청주보안감호소에 감금된 장기수들에게 위임장을 받으러 갔을 때, 그중 한분이 간수가 아닌 '바깥사람'을 보는 게 14년 만에 처음이라고 그랬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으로 내려왔다가 잡혔거나, 1950, 60년대 남파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잡혔으니 그들의 삶은 60년대쯤에 멈춰 있는 거다. 지난 4, 50년간 사회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1989년 결국 청주보안감호소에서 풀려난 다음 그들이 갈 곳은 없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소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거꾸로 북파되었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가까스로 돌아왔지만 존재 자체가 비밀에 붙여있었으니 마땅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형편없이 사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1990년대 말부터 북파공작원들의 보상 소송도 많이 도왔다. 남파간첩과 북파공작원 양쪽을 돕다보니 우스갯소리로 이제 죽을 때도 다 됐는데 빨갱이와 파랑이들 양쪽이 좀 만나면 어떻겠냐고 물어볼 때도 있었다.
▲ 송두율 교수 사건을 다룬 홍형숙 감독의 <경계도시 2>. ⓒ감어인필름 |
프레시안 : 2007년 보성 앞바다에서 처음 본 젊은이들을 끔찍하게 살해한 노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을 때, "사형을 예정한 형법 제250조가 헌법에 위반"된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을 하게 됐고, 당신도 그 재판에 참여한 바 있다. 책에서는 이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그럼에도 사형은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데, 사형제 폐지에 대한 법조계의 전반적인 입장은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이 사형제 폐지 운동에 앞장서게 된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김형태 : 변협의 공식 입장은 사형 유지가 맞다. 그 안에서도 따져보면, 검사들은 사형 유지 입장이 많고 변호사들은 사형 폐지가 조금 더 많다고 보면 된다. 판사들은 양쪽이 엇비슷할 것이다.
무엇보다 양평 생매장사건 때 내가 간접적으로 변론을 맡았던 두 사람에게 사형이 집행되는 과정을 지켜보자니 정말 괴로웠다. 치과의사모녀 살인사건에서 그 죄 없는 남편이 사형 선고 받을 때도 그랬고. 나쁜 놈은 죽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군대에서부터 죽음을 워낙 많이 봐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4대 국회를 겪으면서 계속 사형폐지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했는데, 국회의원들이 과반수 넘게 찬성 사인을 하고 난 다음 안건을 올리질 않는다. 급박한 게 아니니까, 잘 되면 좋고 아님 말고 정도의 자세인 것일까. 헌법 재판소에서도 2010년 재판관 5대 4로 사형 합헌결정을 내렸다. 이번에 헌법 재판소 구성원이 바뀌었는데, 현 구성원들은 어떻게 판결을 내릴지 모르겠다. 어쨌든 시도해 봐야지.
사형폐지 운동할 때 유럽연합과 유럽평의회 쪽 외교관들이 엄청 도움을 많이 줬다. 아무 상관 없는 타국에 와있는데도 우리 측 질문에 일일이 답해주고 행사 하면 와주고 자기가 못 오면 대사라도 보내고 하니까, 무척 고맙고 부럽다. 그 국가들에도 사형 찬성 움직임은 많다고 하지만 국가가 앞장서 살인을 저지르면 안 된다는 믿음이 확고한 사람들이었다.
사실 사형폐지를 주장하는 쪽 규모가 참 보잘 것 없다. 하지만 종단이라는 큰 틀이 우리를 받쳐준다. 주교님들과 스님들이 매번 사형폐지 찬성에 서명해주시고, 우리는 그걸 앞세워서 크게 떠든다. 그것만으로도 사형 집행하려는 측에게는 상당한 압박이 된다.
십 수 년째, 국회를 네 번 겪었는데도 사형폐지가 성사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운동하는 입장에서도 지치고 힘이 든다. 하지만 사형수들에게는 우리가 엄청난 동아줄이고 생명 유지 장치이자 든든한 '빽'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 때문이라도, 한국은 현재 15년 째 사형 집행을 하지 않고 있다. 아시아에선 모범이 되는 입장이며, 그럼으로써 중국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의 사형수들에게도 우리가 희망의 동아줄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힘들어도 계속 해야 한다.
프레시안 : 여가 시간엔 주로 뭘 하고 지내나. 사건들이 워낙 크고 복잡하다보니 그걸 짊어져야 하는 변호사의 스트레스는 얼마 만큼일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 김형태 변호사. ⓒ프레시안(최형락) |
재판 때는 스트레스가 심하다. 치과의사모녀 살인사건 때에는 정말…최종판결이 내려지던 날에는 머리에서 쥐가 나는데 그 압박감 때문에 똑바로 앉아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판사가 판결문을 읽는 걸 듣다보면, 어느 순간 '모멘트'가 보인다. 유죄냐 무죄냐. 무죄로 내려지겠구나하는 확신이 든 순간 거짓말처럼 머리에서 쥐가 풀렸고, 10여분 쯤 지나 재판정에 와 있던 모두가 와아 하고 함성을 질렀다. 용산 참사의 2009년 1심 재판에선 말도 안 되는 판결 선고를 듣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왔는데, 그때 어떤 검사가 시집과 클래식 CD를 선물했다. 변호사 시작한 지 수 십 년만에 검사에게 그런 선물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아마도 이런 순간들이, 그나마 한숨을 돌리게 하는 것 같다.
프레시안 : 현재 맡고 있는 사건들은 무엇인가.
김형태 : 우선 아까 말했던 천안함 사건이 제일 고민스럽다. 두 번째는 정수장학회 최필립 사건이다.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이진숙 당시 MBC 기획홍보본부장의 비밀 회동에서 정수장학회 매각을 논의하던 걸, 최 이사장이 실수로 핸드폰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지 않은 바람에 <한겨레> 최성진 기자가 내용을 듣게 됐고 이를 보도했다. 이를 둘러싼 고발 자체에 문제가 많다. 옆방에서 둘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내가 그 자리를 떠나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다지 크게 알려지지 않은 사건 중에 평통사(통일운동단체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의 약칭)도 있다. 거기 실무자들이 2, 30만원씩만 받으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인데, 미국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게 이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한 미군 훈련 등에 대해 구체적인 수치를 들고 와서 따지거든. 올 봄에도 이쪽 실무자가 '작전계획 5027에 의해 진행되는 키리졸브·독수리 훈련은 북한 정권의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위험한 작전계획'이며 '을지프리덤가디언(UFG)은 북침전쟁연습'이라고 연설했던 내용을 꼬투리 잡아, 검찰이 '북한의 주장에 동조한 혐의'로 그를 불구속기소했다.
이런 발언으로 기소하기 시작하고 유죄로 판결이 나면, 남북관계에 대한 시민들의 일반적인 비판은 전부 기소될 수 있다. 내가 봐도 당시 군사훈련엔 명백히 공격 요소가 있었는데, 다행히 판사가 우리 쪽 전문가 증언을 다 채택했다. 현재까진 괜찮은 상황인데 앞으론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내가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던 80년대와 지금이 달라진 게 없다. 정상적인 법 집행 과정을 지연하고 감추고, 이성적으로 진실을 밟혀내려는 게 아니라 과정을 전부 무시하고 이익만을 위해 억지 기소하고. 앞으로는 비망록을 안 쓰면 좋겠는데, 이러다간 얼마 뒤에 또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계속될 숙제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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