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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노인을 저주하는 '짐승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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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노인을 저주하는 '짐승의 나라'

[장석준 칼럼] 사회의 복원을 위해 제대로 된 기초연금을

인류학 책을 보다가 인상 깊게 읽은 이야기가 있다. 현생 인류가 등장하면서 전체 인구에서 노년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갑자기 커졌는데, 그 시기가 세상에 처음으로 예술이란 게 등장한 때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본래 그 전에도 원시 인류는 다른 포유류보다 최장 생존 기간이 길었다. 하지만 노인의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우리의 직접적 조상이 나타나면서 비로소 노년'층'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노인의 비중이 늘어났다. 그리고 이때부터 인간은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리고 뼈와 돌을 깎아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많은 인류학자들이 이 사실에서 이런 추론을 내놓는다. 인간이 예술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상징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지적 능력이 발달했음을 말해준다. 한데 이러한 지적인 발달에 노인 인구의 증가가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집단 내에 노인이 늘어날수록 지식의 축적과 전승이 더 원활해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한 세대를 건너 뛴 세대 간 교류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조부모 세대가 손자 세대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면서 교육의 원형이 등장했다. 부모 세대가 노동에 시간을 쏟는 동안 동굴에서는 이런 위대한 학습이 진행됐다.

한 마디로 인간에게 노년이라는 시간이 생기면서 인간은 짐승의 세계와의 간격을 한 발 더 벌렸다. 늙기 전에 죽는 게 아니라 '늙어감'에 익숙해졌다는 것, 이것은 장구한 인간 역사의 위대한 갈림길들 중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노인의 존재는 곧 우리 인간의 인간됨의 뚜렷한 증거 중 하나다.


원시 사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다. 불과 한, 두 세기 전만 해도 모든 사회는 나이 먹은 이들이 함께 한다는 것을 축복으로 여겼다. 굳이 <노자(老子)>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노인은 곧 지혜를 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동굴 시대 이후 농경과 목축 생활을 거쳐 축적된 광대한 지식과 정보, 기술과 노하우가 노인들에게 집약되어 있었다. 그래서 전통 사회는 자연 재해로 파괴되기도 쉬웠지만 또한 복구하기도 쉬웠다. 노인들이 곁에 있는 한, 공동체는 어렵지 않게 되살아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이 듦은 권위의 가장 자연스러운 형성 과정이기도 했다.

이게 완전히 뒤바뀐 것은 산업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다. 인간이 '노동력'으로 계산되기 시작하면서 노인은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나이 든 인간은 유아,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으로 쓸 수 없는 부양 대상, 즉 비용으로 치부되었다. 이제 막 등장한 혈기왕성한 산업 자본주의는 인간 집단에 은퇴 이후에도 30년가량을 더 사는 자들이 적잖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오히려 당황했다고 말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1권에 전형적으로 묘사돼 있는 영국 자본주의가 평균 수명을 낮출 정도로 노동자들을 혹사시키려고 안달한 것은 어쩌면 자신들을 당혹케 하는 노인 인구를 최소화하려던 애처로운 노력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때부터 인간 세상에서 나이 든다는 것은 결코 축복일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이 청춘을 찬양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겠지만, 자본주의만큼 강박적으로 젊음을 숭배하고 반대로 나이 드는 것을 저주하는 문명은 존재해본 적이 없다. 노인의 권위도 이제는 과거의 지나간 추억 거리가 되었다. 짐승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벌려놓는 데 기여한 노인의 역할은 기업으로, 관료 기구로, 학교로 넘어갔다. 이제 지식과 기술은 이들 조직에 축적되며 이들을 통해 전수된다. 책이 늘어나고 컴퓨터가 등장하는 등 정보 축적 기술이 발달할수록 이들 조직 내에 그나마 잔존하던 노인의 권위도 사멸하고 만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최신 판본이 확산시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도 이런 맥락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민중의 자생적 질서 안에는 이전에 인류에게 익숙했던 세대 간 관계가 여전히 존속했다. 즉, 민중의 생활 세계에서는 원시 동굴의 확대판 같은 문화 전승이나 나이 듦에 따른 권위의 형성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자본주의와는 비대칭적인 질서의 강인한 잔존이야말로 민중이 끝내 포기하지 않은 삶의 자율성의 증거이자 자본의 논리에 포섭될 수 없는 그들만의 윤리의 지반이었다. 말하자면, '자본'과는 분리된,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무엇인 '사회'가 존재한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모습을 드러낸 한국 자본주의 공장의 노동자 공동체도 그러했다. 거기에는 '형님'과 '아우'가 있었다. 이 관계는 공장의 공식 체계와는 상관없는 노동자들의 자생적 질서였다. 나이에 따른 신뢰와 권위의 질서였다. 자본은 때로 이 관계까지 활용해 지배를 관철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사주에 맞서는 전투가 벌어지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형님'과 '아우'의 관계는 투쟁하는 노동자 쪽에서는 동원력, 조직력, 투쟁력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 역할을 했다. 이 관계를 모태로 한국의 민주 노조들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게 꼭 아름답기만 한 그림은 아니다. 이미 많은 사회학자들이 이 점을 지적했다. 여기에는 뿌리 깊은 가부장 질서도 있고 군대 문화의 그림자도 있다. 하지만 노동 현장의 이러한 '형님'-'아우' 관계가 어떤 경우에는 자본에게 커다란 위협이 됨을 보여줬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규직-비정규직 분할은 다름 아니라 이 관계를 철저히 파괴했다. 어느덧 '형님'들은 '정규직'이 되었고 '아우'들은 '비정규직'이 되었다. 둘 사이에는 이제 세대에 따른 신뢰나 권위가 쌓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질시와 갈등이 피어난다. 자본은 이렇게 공장 안의 자생적 '사회'를 해체해버렸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제 논리대로만 움직이게 놔둔다면, 인간에게 나이 든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 노인이 된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뿐이다. 노인 자살률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이게 이미 현실이다. 자산 소유 계층이 아닌 대다수 인간에게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한 상황의 도래가 필연이라면, 과연 인간 사회가 더 이상 존립할 수 있을까? 드디어 인간은 저 동굴의 문화 혁명 이후 처음으로 금수의 세계를 향해 결정적 퇴보의 한 발을 내딛게 될 것인가?

ⓒ연합뉴스
산업 자본주의가 한 세대 이상 지속된 사회는 예외 없이 이 물음에 마주해야 했다. 그래서 어느 자본주의 국가든 사회복지를 뿌리내리면서 항상 가장 먼저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게 노후 연금이다. 그나마 상당한 포괄 범위를 지닌 연금 제도가 도입된 덕분에 자본주의는 낭떠러지를 향한 미친 질주로부터 어찌어찌 경로를 수정할 수 있었다. 기독교, 사회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민중 자신의 삶이라는, 자본과는 기원을 달리 하는 흐름들의 개입이 없었다면 이조차도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산업 자본주의를 향해 돌진한 이후 한 세대가 지난 한국 사회에서도 지금 노후 연금이 쟁점이다. 지난 대선에서 새누리당은 보편적 기초연금 도입을 공약했다. 이것은 정치적 순발력의 입증이기도 하지만, 주요 정치 세력으로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성의 발현이기도 했다. 그런데 집권 이후 이 정부는 기초연금을 과제로 꺼내놓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세대 간 경제적 부담 돌리기로 희화화시켜 버렸다.

7월 17일 행복연금위원회가 발표한 합의문은 대선 공약이 애초에 제시한 보편성도 포기하고 실질적 소득 보장과도 거리가 멀어진 실행 방안을 제시했다. 덕분에 기초연금은 보편적 공적 연금이 아니라 현행 기초노령연금의 확대판 성격을 띠게 되었다. 공약 후퇴의 이유로는 역시 재정 부족을 들었다. 한국 사회를 '사회'로 지탱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책은 그 도입 전부터 세대 간 이해 다툼의 소재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자본의 회계 장부에 부담을 강요하게 되더라도 보편적 공적 연금을 반드시 실시해야만 할 근본 이유를 망각하게 하면서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 근본 이유는 인간 사회의 재건이다. 나이 들어가는 모든 이의 삶의 존엄성을 보장함으로써 나 자신의 존엄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실질적 수준의 보편적인 공적 연금은 이 존엄성의 상호 인정을 위한 제도이지 단순한 화폐 소득 배분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인 기본 소득의 성격을 띤 제대로 된 기초연금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싸움은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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