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그때 권산이라는 저자의 글을 처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연스럽게 그가 운영하는 그 <전라도닷컴>에 글을 쓰던 권산이 운영하는 '지리산닷컴' 사이트에도 접속했다.(애초에 <전라도닷컴>을 알려줬던 지인도, '지리산닷컴'을 통해 <전라도닷컴>을 추천받아 정기구독하고 있었다). 서울을 벗어나겠다는 생각을 거의 해보지 않았던 서울토박이조차 훅하고 홀리는 힘이 있었다. 사진은 아름다웠고, 글 속에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은 각자 또렷한 존재감을 과시했고, 무엇보다 글쓴이 '이장'(권산의 ID)의 센 유머 감각이 좋았다.
▲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사는 법>(권산 지음, 북하우스 펴냄). ⓒ북하우스 |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사는 방식이 당신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새로 쓴 책 <맨땅에 펀드>(반비 펴냄)를 읽다보면 가슴이 저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것까지 막을 순 없다. 귀농, 혹은 귀촌까진 아니더라도 농부들이 의도했던 그대로의 상태에 최대한 가까운, 신선하고 좋은 농산물을 가능한 한 빠른 시간에 먹고 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난다. 마트에 있는 '유기농 농산물' 코너가 예전만큼 매력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부작용'도 발생한다.
"나는 웰빙, 유기농, 친환경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트렌드가 싫다. 그것은 트렌드나 경향의 문제로 발생한 담론이 아니다. 유기농이란 개념의 출발은 최초 하나의 '운동'이었다. 인간이 자연에 대해, 스스로에 대해 반성하는 의미로 발생한 운동이었다. 지금 대중적으로 유기농이란 무엇인가? 대형마트 식품코너 제일 앞쪽에 위치한 메인 코너의 이름이 유기농이다. 그것은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가 제일 앞으로 배치되는 디스플레이 전술과 다르지 않다. (…) 유기농은 농민과 소비자의 직거래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작은 것들의 자립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사는 법>)
그는 "유통망을 장악한 대기업에 있어 유기농은 장악해야 할 하나의 아이템"이며 "유기농이 백화점으로 걸어들어갔을 때 실질적으로 게임은 끝이 난 것"(<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사는 법>)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2006년 서울 생활을 접고 내려갔던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오미마을(통칭 '오미동')에서 이것저것 '농사짓지 않고' 사진 찍고 웹디자인하고 글을 쓰고 '지리산닷컴'을 운영하다가, 친하게 지내는 농민들의 삶을 가깝게 들여다보다가 어떤 공상을 시작했다. "지자체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농협이라는 조직이 실질적으로 농민들을 위한 조직일 수 없다는 게 확연해졌을 때 "'관의 개입이 없는' 모종의 작업'"이 가능한 방식이 뭘까, 대충 그런 공상이었다.
"큰 싸움을 이기기 위해서 그만큼 큰 무엇을 만들 필요는 없다. 작은 힘이 단결하는 방식이 옳다."(<맨땅에 펀드>)
▲ <맨땅에 펀드>(권산 지음, 반비 펴냄). ⓒ반비 |
그에 앞서, 지난 7월 10일 홍대 인근에서 열린 <맨땅에 펀드> 출간 기념 저자 강연에서 저자 권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 지난 7월 10일 열렸던 <맨땅에 펀드> 출간 기념 저자 강연의 풍경. ⓒ프레시안(최형락) |
나는 왜 구례에 내려와서 '무모한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나
40년을 부산에서 살았어요. 2001년엔가 서울에 올라와 월급 받는 생활을 처음 했어요. 위성 채널의 작은 방송국을 다녔는데 직책은 본부장이었습니다. 믿거나말거나. 직장은 굉장히 심심했어요. 사장이나 이사장 다 브로커 같았고, 좀 이상했어요. 직장이 그러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지요. 결국 문을 닫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긴 좀 그래서 은평구 연신내에 집을 얻었어요. 객지에서 올라온 사람이 돈 없이 살기에 적당한 동네였습니다. 연신내역 4번 출구 근처 역세권에서 재미있게 살았어요.
하루 종일 웹디자인 작업하다가 오후 느지막이 카메라를 들고 산책 나갔어요. 불광시장 쪽으로 걸어가서 장을 봤고요. 전 매일 장을 보고 매일 밥을 했습니다. 많이 사서 비축하는 건 싫었고, 그날 먹을 걸 그날 장 봐서 밥상을 꾸렸어요. 계속 돈을 벌긴 했습니다. 많이 번 건 아니지만, 비참하게 번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서울 떠나기 전까지 사이트를 200개 정도 구축했어요. 그중 70퍼센트가 돈을 안 주는 곳이었고(웃음), 대한민국에 어떤 시국사건이 터져서 생겨나는 사이트들 중 대부분은 제가 만들었다고 보면 됩니다.
항상 서너 가지 일이 밀려 있었어요. 카드 값, 월세 낸 다음 남는 돈으로 저축도 안 했어요. 있으면 무조건 다 써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애가 초등학교 5학년쯤 됐는데 점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 노동력은 점점 소진해갈 텐데 가진 건 없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까진 아니었지만 이런 생각은 간혹 들지요. 서울에서 계속 연명할 수 있을까? 하늘 크기가 도시 생활자의 형편을 말해주는데, 연신내에서 월세로 살면서 볼 수 있는 하늘의 면적이 작았어요. 하늘이 얼마큼 트여있느냐가 경제력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2006년 5월 30일 짐을 쌌어요. 별 준비 없이 구례에 내려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지리산에 내려갔다'라는 말은 안 씁니다. 어디 원고를 쓸 때도 꼭 구례라고 쓰는데 편집 과정에서 지리산으로 바꾸더라고요. 그게 더 먹히는 건가? 하지만 '지리산에 내려갔다'라는 말에 담긴 특정 관념이 있잖아요. 제 작업장에는 팔리아먼트 양담배와 믹스 커피가 있는데요, 놀러오는 손님들은 제가 녹차 마시는 줄 알아요.(일동 웃음) 저 녹차 싫어합니다. 그리고 제가 장발을 묶고 개량 한복 입고 있을 거라고 기대하더라고요.
지금도 그런 분들이 계세요. '지리산닷컴' 사이트 이미지만 보는 거예요. 잘 꾸며진 전원주택 카탈로그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리산닷컴'에서 말하지 못하는 사실들도 많거든요. 골치 아픈 이야기들은 당연히 공개적으로 하지 않지요. 그러다보니 '지리산닷컴'에 노출된 것들만 보고는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살겠지'라고 머릿속에서 이미 완료된 기대를 품고 옵니다. 얼마 전에는 읍내 나갔다가 마트에서 라면이랑 콜라를 사는데 어떤 분이 절 알아봤어요. "'지리산닷컴' 이장님이 라면과 콜라를 사요?" 그 말의 뉘앙스에서 느껴지는 것들이 있죠. 그런 완료형의 이미지부터 들이댈 때가 사실 피곤하지요.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그동안 들어온 바에 따르면 귀농 귀촌해서 만족하는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어쨌든 구례 오니까 잘 사나 못 사나 하늘 사이즈가 넓었어요. 서울 사는 후배가 놀러와서 그러더군요. "형, 여기 하늘이 360도네." 그제서야 저도 아 그렇구나 싶었습니다.
여기 와서 '지리산닷컴'이라는 사무실에 눌러앉았습니다. '지리산닷컴'의 대표, 책에선 K형이라고 불렀는데요, 하여튼 그 형이랑 1999년부터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알고 지냈는데 2000년쯤 저보고 '지리산닷컴' 사이트를 만들어볼 생각 없냐고 그랬거든요. 그것 때문에 구례 간 건 아니지만, 그게 있으니까 갔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간판만 걸어놓고 2007년까진 계속 놀았습니다. 구례 안에서만 3만 킬로미터를 돌아다녔어요. 2007년 5월 23일, 원래 읍내에 있던 '지리산닷컴' 사무실을 오미동으로 옮겼어요. 조립한 컨테이너 박스를 통째로 옮겨와 설치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오미동과는 나름 인연이 있었습니다. 1991년 수배 당시, 대중교통을 이용 못하니까 히치하이킹을 하면서 19번 국도를 죽 지나갔거든요. 그때가 5월이었는데 오미동 들판을 봤어요. 들판이 온통 노란색이라서, 5월에 왜 벼가 익었지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평생 도시에서 살았으니, 늦가을에 밀을 심는다는 것 자체를 몰랐으니까. 그러다 세월이 흘러 제가 바로 그곳에 컨테이너 박스를 세우고 들어간 겁니다.
▲ 오미동 풍경. ⓒ권산 |
읍내에 있다 면으로 오니까 확 달랐어요. 읍내는 도시나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오미동에선 옆집 살구나무를 볼 수 있었어요. 나무에서 떨어진 살구가 사무실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오는데, 제 손으로 처음 잡아본 열매였어요. 마트에서 사먹은 과일이랑 느낌이 달랐어요. 그 집에는 감나무도 있었어요. 감나무 잎이 그렇게 예쁜 줄도, 45살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멀리 들판 근처엔 자운영이 피어 있고요. 이 모든 풍경이 제 사무실 안에서 보이는 겁니다. 부인할 수 없이, 아주 좋았어요. 이 들판을 감상할 수 있는 게 저 혼자 유일하다는 사실이 충분히 만족스러웠습니다.
여기서 '지리산닷컴'도 운영하고 마을 지도도 만들었습니다. 구례 문수골에서 계곡 마을 지도를 만들어달라고 연락이 왔었어요. 그동안 서울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 사이트나 이미지 작업을 할 땐 실제 이용 가치와는 별도로 세련되고 우아한 쪽에 치중했는데, 지도는 촌스럽든 어쨌든 실제 쓰여야 되잖아요. 디자인이 뭘까, 구체적으로 사용되는 사물들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그런 생각들이 들었지요. 원래는 서체 디자인을 작게 쓰는 걸 선호하는데 시골에선 겁나게 크게 써야 돼요. 궁서체도 많이 쓰고.(웃음) 지도를 만든 다음, 제일 하단에 "우리 마을 지역 번호는 061입니다"라는 문장도 넣어봤습니다. 사실 이 지도를 제일 자주 보는 사람들은 외지 관광객인데, 그 사람들은 여기 지역 번호를 모르니까요.
그럼 시골에서 산다고 했을 때 착각하게 되는 것들을 좀 얘기하겠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주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전입신고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건 1단계 행정일 뿐이고, 2단계로는 마을 '위층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 부조금에 필요한 적정한 회비를 내고 행사에 참여하는 멤버가 되는 거죠. 그러면서 조금씩 마을 주민 공동 소유의 산이나 논 등의 처분 결정권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사는 마을은 300만원을 내야 합니다. 그것까지 내면 3단계에 진입한 거예요. 그렇다고 주민이 된 거냐? 힘듭니다.
시골에서 일어나는 모든 스토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해요. 차마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집에 막 들어와요. 작년 여름에도 6시쯤 팬티만 입고 대자로 누워 자고 있는데 눈떠보니까 옆집 아줌마가 빤히 절 내려다보고 있어요. 컴퓨터 고장 났다고 고쳐달라고. 결국 요즘은 문을 잠그고 잡니다.(웃음) 제가 집세를 갖다 바치는 우리 반장님은 글을 읽을 줄 모르시는데 고지서를 돌립니다. 해당 집이 아닌데 그냥 막 뿌리는 겁니다. 그런 걸 알아서 헤아려서 제가 찾아와야 합니다.
▲ '맨땅에 펀드'의 수석펀드매니저 대평댁. ⓒ권산 |
여기선 내가 모르는 가운데 계속 평가받고 재단됩니다. 그리고 해명의 기회는 없어요.(일동 폭소) 시골에 여행가면 아무도 없는 것 같죠? 그런데 실제로 다 보고 있어요. 감시당한다는 느낌이 많이 들죠. 시골에서 팩트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객관은 없어요. 직관과 주관만 있어요. 인상이 중요한 겁니다. 나보고 저 친구는 사글세로 살 사람이 아니야, 새로 짓는 한옥에 2억 정도 쓸 수 있을 거야, 그런 추정치가 지금도 계속 돌아요. 거기 대해 아무리 해명을 해도, 설득은 안 됩니다.
마을 청년회원 중 한 명이 나보고 그랬어요. "형님은 우리하고 다르자녀." 또 다른 청년회장도 그랬어요. "마을과 주민들을 풍경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제게 신뢰가 생겼지만, 그래도 똑같지 않아요. 벽은 있고, 명확한 한계도 있습니다. 주민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외지인은 주민이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 자식이 성장해서 여기 살아도, "걔는 그 부산 친구 아들이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외지에서 온 사람을 마을 주민들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그냥 마을에 잘해야지라는 목표에 따라 노력할 수밖에 없어요.
2009년에 마을 신문 <지리산 장수마을>을 만들었었어요. 이때만 해도 내가 구례를 홍보하고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시골에서도 이렇게 깔끔한 마을 신문을 만드냐고 다들 놀라겠지? 하는 생각이 내심 있었어요. 과연 매체들에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게다가 제가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사는 법>을 쓰고 나서, 외부에서 연락 올 때 구례 군청이 아니라 저를 찾더라고요. 그래도 단체 손님들이 저를 찾아오면 마을과 적극적으로 연결했고, 당시 마을에서도 '이대로는 안 된다, 이것저것 좀 세련되게 바꿔보자'는 분위기가 생겨 밤마다 회의가 자주 열렸어요. 손님이 많아지면 마을도 행복해질 줄 알았죠. 마을이 알려지면 농산물을 판매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기대했지만, 결과적으론 그렇지 않았어요.
마을이 좀 알려지면 지자체에서 돈이 들어옵니다. 한 마을당 20억 정도의 예산이 투자돼요. 오미동은 45가구, 인구 70명 정도 마을인데 거기 20억이 투입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돈이 정작 필요한 데 쓰이기보다는 새로운 건물을 짓는 쪽에 주로 사용돼요. 공무원들은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하드웨어를 좋아하니까요. 예산을 배분하는 게 아니라 한 군데 집중적으로 투자함으로써 시각적 완료성을 추구하는 겁니다.
투자금이 들어오면서 갑자기 새 한옥들이 생겨났어요. 그 한옥들은 원래는 민박 용도였지만, 실제 그 22채의 한옥 중 실제 민박집은 5채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는 그 한옥을 지을 수 있었던 개인들의 소유에요. 마을의 절반 정도가 새 옷을 갈아입은 셈입니다. 일종의 새마을 운동이죠. 계속 공사 중이었고, 그 소음을 견디며 살았습니다. 그 한옥들이 들어서면서부터 빈부 격차가 눈에 보였고 정서적으로도 갈라졌어요. 하지만 이 마을을 방문하는 여러분들이, '도시에 꿀리지 않는 세련된 무언가'를 보러 오는 게 아니잖아요. 마을의 옛 원형이 보존된 걸 보고 싶어하잖아요.
2010년 하반기부터 회의가 들었습니다. '우리도 변해야 한다'는 건 젊은 사람들 생각이었어요. 농사 말고 다른 걸로 돈을 벌고 싶어하는 마음이 변화의 주된 이유였던 거죠. 하지만 다른 노인 분들은 외지 사람이 들락거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조용히 살고 싶어했어요. 괜히 마을이 번잡해지기만 한 거지요. 이 마을이 270년 전 처음 생겼는데, 270년 동안의 변화보다 지난 3년간의 변화가 훨씬 커요.
▲ 오미동의 백일홍. ⓒ권산 |
F1이 뭔지 아십니까? 농산물의 우량화를 위해 교배된 1세대 잡종 종자입니다. 그런데 이 F1의 수확량은 딱 그 종자의 대에서 끊겨요. F1끼리 교배해도 그 후속 종자는 확연히 질이 떨어집니다. 미국이 F1 종자의 개발에 가장 앞장서 있어요. 결과적으로, 농민들은 바깥에서 수입되는 종자를 매년 새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농민은 끊임없이 소비를 해줘야 하는 위치에 놓인 겁니다. 한국의 농업이 미국의 농업 규모에 비할 수 없지만, 그것을 이만큼이라도 계속 유지시키려면 뭔가 다른 구조를 만들어야 했어요. '밥상을 차릴 수 있는 작물을 키우고 가공하는 비용을 먼저 받고 투자자들에게 제철 농산물을 보내드리는 방식'의 펀드라는 도구를 그렇게 해서 떠올렸습니다. 생산자는 전체 농정을 결정하는 정치와 자본에 강제당하고, 생산물은 대기업과 유통업자들의 돈벌이 놀이에 등장하는 노리개가 되었습니다. 농부들은 온라인에서조차 소비자들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쉽지 않아요. 오직 싼 가격에 농산물을 생산할 것만 강요받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직거래를 중심으로 한 유통이지 농산물 생산방식이 아니에요.
'맨땅에 펀드'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닙니다. 적어도 구례 전체의 농산물을 수매할 수 있을 때까지 운용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싸웁니다. 구체적으로 싸우는 거지요.
물론 우리는 패배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몇 개의 발자국은 남지 않겠습니까. 큰 싸움을 조직하는 게 이젠 좀 지겨워요. 옛날을 생각해보면, 80년대에는 눈앞에 닥친 모든 싸움이 필사적이었어요. 대부분 패배했고요. 우리도 한번 씩은 이겨봐야죠. 어떻게 매번 집니까. 그러려면 싸움을 약간 축소하면 됩니다. 저에게는 이 펀드가 싸움입니다. 여러분이 그 싸움 자금을 대는 것이고요.
여기 오신 분들은 '지리산닷컴'을 방문하는 분들일 겁니다. 그 사이트에 왜 들어오는 거죠? 왜 <맨땅에 펀드> 책을 샀죠? 단지 풍경이 예뻐서 들어온 건 아닐 겁니다. 제가 추구하는 바나 여러분이 들어오는 이유나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작은 영역, 내가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아주 작은 모델을 만들고 싶은 겁니다. 여러분도, 뭔가 찾고 있지 않습니까?
'디스 이즈 이야기'
그러니까 <맨땅에 펀드>는 2012년 한 해 동안 권산과 오미동의 몇몇 농민들과 몇몇 '비'농민들의 악전고투의 기록이다. 100명의 투자자들이 내놓은 총 3000만원으로 오미동 텃밭 1000평과 감나무밭을 임대하고 마을 할머니들을 펀드매니저로 고용하는 등 야심차게 출발했으나, 자신했던 작물인 감과 땅콩과 감자, 고구마, 배추, 무 등이 흉작을 거듭했다. 애초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 돈,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했고, 스스로 "사무직"이라고 주장하는 권산조차 뼈가 부서져라 포장하고 배달하는 막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1년간의 난투극 펀드가 끝난 뒤 "농사짓는 바보들과 농사도 모르는 바보들"의 좌충우돌은, 그러나 '지리산닷컴'의 생생한 중계를 매일 지켜보며 통해 '본전 생각'보다는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았던 100명의 투자자들 덕분에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다.
▲ <맨땅에 펀드>의 저자 권산. ⓒ프레시안(최형락) |
2013년에도 '맨땅에 펀드' 두 번째는 진행형이다. 먼저 자체 농지에서 많은 작물을 생산하려던 욕심을 버렸다. 자체 농지에선 콩하고 밀만 심었고, 거기서 나오는 농산물은 '맨땅에 펀드'가 아니라 '지리산닷컴'에서만 파는 것으로 결정 내렸다. "최대한 편하게" 가겠다는 욕심에 구례의 믿음직한 농부 7명을 미리 점찍은 뒤 그들의 농산물을 집중적으로 펀드에 배당키로 했다. 물론 "집하하고 포장하는 건 우리 일"이기 때문에, "되도록 안 하려고 발악"을 해보지만 여전히 끌려가서 막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권산의 불만은 컸다. 그래도 2012년의 "어설프고 무질서한" 펀드보단 좀 나을 것이라 했다.
얼마 전 6월 29일엔 자체 농지에서 경작한 앉은뱅이 밀로 만든 국수와 온갖 먹거리가 등장하는 '밀가리 축제'도 열었다. 이 자리에선 마을 사람들의 몸뻬바지 패션쇼 '엄마는 프라다를 입지 않는다'도 열렸다. 책 속에도 자주 등장하는 대평댁, 지정댁 등을 포함한 오미동 할머니들이 대거 모델로 등장했고, 심지어 과묵하기 때문에 책에는 잘 등장하지 않았던 할아버지들까지 자청해서 무대에 섰다. 패션쇼는 성황리에 끝났다.('지리산닷컴' 사진상으로는 그렇다.) 혹시 오미동 주민들이, 권산이라는 '외지 인물' 때문에 지난 몇 년 간의 삶이 엄청나게 스펙터클해지고 즐거워졌다고 느끼진 않았을까. 권산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어디까지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저를 경제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툴"로 본다고 했다.
"된장을 팔고 싶은데 저 친구한테 말하면 인터방(인터넷)으로 팔아준다더라, 그렇게 인지하시죠. 제가 하는 일을 정확히 이해하신다기보다는, 경제적 효용 가치에 있어 제가 필요한 인간으로 판가름된 거지요. 제가 뭘 하자고 했을 때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는다, 그 정도입니다. 도시나 시골이나 똑같아요. 인간관계가 뭔가 주고받아야 성립되잖아요."
그는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맨땅에 펀드'가 2014년, 2015년까지 계속 이어지면 애초 구상했던 대로 "오미동 정도 규모의 마을이 도시 1000가구 정도와 끈을 맺는다면 마을경제 자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이 아주 불가능해 보이지만은 않는다.(일단, <맨땅에 펀드>를 읽은 기자부터 2014년 펀드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쯤 되면 오미동 주민들은 권산에 대한 평가를 좀 더 후하게 내리게 될 것이다.
권산은 올해 '맨땅에 펀드 2013'과 더불어 연곡분교에 관한 새 책에 매진할 예정이다. 정확한 명칭은 토지초등학교 연곡분교장. 본교는 토지초등학교인데, 2000년대 들어서면서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분교들 중 학생 수 20명 이하의 학교들을 통폐합시켰다. 연곡분교도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주민들의 노력으로 연곡분교 폐교는 막을 수 있었다. 권산은 지난 한 해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연곡분교를 찾아 풍경과 아이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 연곡분교 아이들. ⓒ권산 |
"그 책의 뼈대는 작은 학교를 지키자는 흔한 이야기들이 될 것입니다. 큰 것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작은 것을 지키는 게 제가 여기서 해야 할 일입니다. '맨땅에 펀드'도 이 작은 마을을 지키려는 노력이었어요. 농지를 더 이상 팔지 않아도 되도록, 그 땅에 모텔이 들어서지 않아도 되도록 방어하는 거죠. 연곡분교는 구례에 남아있는 단 하나의 분교입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구례군이 울릉도 다름으로 작은 군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연곡분교 하나 없애는 게 쉽다고 느낀다면, 사실 이 작은 행정 자치 단위를 날리는 것도 역시 쉽지 않겠냐고 생각합니다."
작년 3월에는 연곡분교의 총 학생 수가 6명이었다. 올해 3월에는 '청강생'까지 합해서 21명의 학생들이 교정을 시끄럽게 채웠다. 권산은 연곡분교에 이런 변화가 일어났던 작년 한해의 기록을 오는 가을 정도까지 완성해서 다시 한 번 책으로 내놓을 것이다. 구례가 딱히 특별할 것 없다고 그는 누누이 강조했지만, 그의 시선과 차가운(?) 유머감각의 입담이 더해지면서 구례의 곳곳은 또다시 특별한 이야기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권산이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사는 법>에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사물을 발견했을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디스 이즈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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