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와중에 복지 국가의 목표치나 기대 수준은 대선 전보다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 경상남도에서는 멀쩡히 운영되던 공공 의료 시설이 폐쇄되는 일이 벌어졌다. 새누리당 대선 핵심 공약 중 하나이던 보편적 기초연금은 새 정부의 손길을 거쳐 현행 기초노령연금의 확대판 정도로 왜소화되고 말았다. 국민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겠다는 공약도 3대 비급여 항목(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 간병비)의 해결 방안은 빠진, 알맹이 없는 방침으로 변질됐다.
결국은 기획재정부가 제시하는 재정 수치가 온갖 복지 국가 담론보다 위에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그것은 정권이나 정당이 유권자와 맺은 약속보다 위이고, 그 약속을 낳은 대중의 열망보다 더 소중하다. 복지는 정확히 기획재정부가 작성한 예산 목록의 한 하위 항목일 뿐이다. 선거 때만 가려져 있지 그 열병(熱病)의 시기만 지나면 대번 명확해진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제까지의 복지 국가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경제 부처 고위 관료들을 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제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들은 복지 국가를 만드는 데 강력한 장애물 중 하나일 것이다. 싸워 극복해야 할 상대다. 하지만 이들과 제대로 대결하기 위해서도 먼저 따져볼 게 있다. 복지 국가를 주장하는 쪽에는 문제가 없었는가? 혹시 우리의 복지 국가 전망 자체가 경제 관료들에게 포획되기 딱 좋은 약점을 지닌 것은 아닌가?
저들에게 그런 것처럼 우리에게도 '복지'란 대체로 또 다른 경제적 몫이었다. 임금과 마찬가지로 복지도 화폐 소득의 분배 문제였다. 그래서 국민연금이나 기초연금 수령액이 얼마여야 하는지가 쟁점이 되고 그 지급 수준에 맞추자면 예산이 얼마나 필요한지가 주된 고민거리가 된다. 자본주의에서 이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돈 문제를 이야기 안 할 수가 없고, 그래서 복지도 돈 문제가 된다. 더 정확히는 돈을 어떻게 나누느냐는 문제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해볼 게 있다. 자본주의에서 복지에 이런 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럼 '복지 국가'는 뭐냐는 것이다. 굳이 '복지'를 나라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내세우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만약 위와 같은 상식적인 복지관에 따른다면, 돈을 복지 쪽으로 좀 더 푸는 나라쯤 될 것이다.
그러면 곧장 이런 물음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좀 더"가 얼마인가? 복지에 돈을 얼마나 더 풀어야 '복지 국가'라 할 수 있는가? 저마다 할 이야기는 있다. 좌파라면 "될 수 있는 한 많이"라 할 것이고, 반대 진영은 "적당한" 수준을 이야기할 것이다. 결국은 '복지 국가' 역시 돈 문제, 즉 화폐 몫을 어떻게 나누느냐는 문제가 된다.
이것이 우리의 통상적인 복지 국가관이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경제주의'적인 복지 국가론 정도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제주의적 복지 국가론은 경제 부처가 내놓는 재정 수치에 근본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다. 고위 관료의 서슬 퍼런 으름장 앞에 무력하지 않을 수 없다. 재정 여유분을 복지 쪽에 좀 더 책정하는 게 '복지 국가 건설'이라면, 복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민심도 아니고 정치권도 아니다. 정부 예산 담당자인 것이다.
이런 경제주의적 복지 국가관에는 또 다른 중대한 약점도 있다. 화폐 경제의 모든 경제 단위에는 자체 회계 장부가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이들 회계 장부 사이에 명확한 위계 관계가 존재한다. 맨 위에는 기업과 은행의 회계 장부가 있다. 그 다음에 정부의 예결산이 있고, 가장 아래에 가계부가 있다.
장부 위의 검은 숫자와 붉은 숫자는 이 위계 관계에 따라 배분된다. 검은 숫자가 기재되는 데 우선권을 지니는 것은 맨 위의 장부, 즉 기업과 은행의 재무제표다. 붉은 숫자를 감내해야 할 순서는 그 반대다. 가계부가 선두에 나서야 한다. 이 우선순위에 맞게 검은 숫자가 배열되는 경제가 자본주의에서는 좋은 경제다. 반면 맨 위 회계 정부의 흑자 수치를 줄이면서 아래층 장부들의 검은 숫자를 늘리려 한다면 그것은 "반자본주의적" 행위가 된다.
복지 국가를 정부 예산의 복지 할당액 증대 정도로 바라보는 시각은 쉽게 이 위계 구조의 포로가 되고 만다. 정부 재정 수지 때문에 대기업의 이윤 규모를 줄인다는 것은 안 될 말이다. 복지 국가란 이 정언명령과 대중의 요구 사이의 좁은 틈에 기적처럼 서 있는 절묘한 균형이다. 맨 위 서열의 회계 장부에서 흑자 수치에 손대느니 차라리 가계부에 붉은 숫자를 좀 더 안겨주는 게 바람직하다. 이것이 경제주의적 복지 국가상이 넘어설 수 없는 절대적 한계선이다.
▲ 페르디낭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a liberté guidant le peuple)>(1830년). ⓒwikipedia.org |
그럼 이것과 다른 복지국가상은 무엇인가? 역사의 첫 출발점으로 돌아가 보자. 항상 출발점에는 지금 실현된 양상과는 다른, 다양한 발전 경로들이 잠복해 있게 마련이다. 복지 국가에게 그런 시작의 순간은 아마도 18세기의 마지막 10년 언제쯤일 것이다. 그 무렵 혁명에 성공한 이상주의자들은 민주공화국이 인민의 먹고 사는 문제까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 고민은 프랑스 혁명 정부가 1793년에 채택한 헌법 전문(前文)(1793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이 문서의 제1조는 낯선 주어로 시작한다.
"사회의 목적은 공동의 행복에 있다."
'사회'라는 주격이 처음 등장했다. 이런 문장은 곳곳에서 반복된다.
"사회는 불행한 시민에게 노동을 제공해주거나, 노동할 수 없는 상태의 시민에게 생존수단을 보장해줌으로써 생계를 유지해줄 의무가 있다." (제21조)
"사회는 (…) 모든 시민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제22조)
'사회'라는 주체가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은 엄청난 책임의 주체이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인 문구는 이것이다.
"사회 구성원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억압될 때, 사회 전체에 대한 억압이 존재한다. 사회 전체가 억압될 때, 각 구성원에 대한 억압이 존재한다." (제34조)
문제는 이 '사회'를 어떻게 실체화할 것인가이다. 사회의 연대 책임은 어떻게 현실의 힘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복지 국가'는 그에 대한 한 답이다. 복지 국가란 그 '사회'를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무엇으로 만들려는 시도다. 그렇기에 이것은 단순히 화폐 몫을 나누는 문제일 수 없다. 물론 각각의 복지 제도가 실현되려면 결국 이 문제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임금 협상 하듯이 그 몫을 늘리고 줄이는 게 본령은 아니다. 핵심은 짐승의 세계가 아닌 인간의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이 일은 인간으로서 가장 급한 일이고 우리가 인간이기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자신만의 새로운 우열순위를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위에서 말한 회계 장부들의 위계 구조 같은 것에 끼워 맞춰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체 목적 실현을 위해 기존 구조에 변화를 강요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복지 국가와 자본주의가 충돌할 때 포기해야 할 것은 복지 국가가 아니다. 자본주의다. 복지 국가가 실현하려는 '사회'가 인간에게는 '자본'보다 더 근본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 말 서유럽에서 팽창 일로의 복지국가가 국가 재정과 지속적인 긴장을 빚기 시작할 무렵, 경제학자 H. D. 디킨슨은 영국 노동당에 이렇게 조언했다.
"예산 부족으로 복지 국가가 흔들린다면, 생산적 자산에서 그 재원을 확보하라." (☞관련 기사 : Tariq Ali, "The fog of confusion has finally lifted")
여기에서 "생산적 자산"이란 곧 자본과 토지를 뜻한다. 자본과 토지를 공공 자산으로 만들어서 복지 국가의 지속 가능한 재정 기반으로 삼으라는 이야기다. 이제 복지 국가를 위해 자본주의가 희생할 차례다.
우리가 무심코 입에 담던 '복지 국가'란 이런 것이었다. 이 정도 무게와 깊이를 지닌 말이었다. 그 엄중함을 우리 스스로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복지 국가를 그 끊임없는 희화화로부터 구제할 수 있다. 이제 우리부터 복지 국가의 경제주의를 넘어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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