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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버리기, 사람이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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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버리기, 사람이 되기 위해

[프레시안 books] 심보선의 <그을린 예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장을 가졌을 때, 일을 함께 하기로 한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더랬다.

"우리, 부부처럼 일하지 말고 애인처럼 일하자."

그때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말만은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새침한 애인처럼 조금의 인내심도 발휘하지 않고 금세 그 일을 그만두었다. 언젠가 한번은 술잔을 기울이다가 시인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꼭 시랑 결혼을 한 사람처럼 굴어. 그러지 마, 촌스럽게. 그냥 시랑 연애나 하라구."

괜찮은 시를 쓰고 싶어서 머릿속에 온통 시 생각밖에 없었던 내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러게. 연애나 하면 딱 좋을 텐데. 시에서 뭐가 나온다고. 시랑 연애나 하고 있어 보이는 친구가 홀가분해 보이기도 하고, 한없이 무거워지기만 하는 내가 못마땅하기도 해서, 그 말을 듣고 며칠 동안은 이 결혼을 물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결국은 물리지 못한 채로 나는 계속 시의 신부가 되어 시를 썼고 점점 문학이라는 종갓집에 시집을 간 맏며느리처럼 되어갔다. 몰락한 양반집의 맏며느리.

시를 쓰는 일은, 문학을 포함하여 이 세상의 모든 예술은, 사명감이 생기는 그 순간부터 그을려버린다. 사명감은 전문가 정신이기 때문이다. 전문가 정신은 예술을 온전히 전유하기 위해서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 전유에의 노력이 예술을 더 어렵게, 더 고급한 것으로 끌고 올라가며 그 때문에 예술은 전문성을 얻는 동시에 대중과의 거리가 멀어져버린다. 즉, 향유되지 않는다. 향유는 전문가들만의 소수집단 내부에서 극렬하게 행해질 뿐, 이 세상의 지형과 이 삶의 척박함에 그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못한 채로 파리해져간다. 예술가를 위한 예술로밖에는 달리 부를 길이 없는, 이 예술가의 전유에의 욕망 때문에 어쩌면 예술은 죽었다. 그러니까 예술은 죽었고 예술가만 바글바글거리며 살아남아 있다. 예술을 살해한 장본인이 예술가라고 말한다면 너무 과장일까.

예술가 집단은 제도 속에 들어와 있다. 제도의 공인을 받아야 전문 예술가가 되며, 제도 속의 수순대로 성장해야 한다. 기성 예술가는 이 제도를 더욱 품격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더욱 완고해지며 제도를 한층 더 단단하게 만드는 데에 자신을 도구로 쓴다. 제도가 되어버린 예술, 이 제도의 틀을 부수거나 탈주할 욕망이 없는 예술을 예술이라고 불러줄 수 있을까. 이 예술이라고 불러줄 수 없는 예술을 하기 위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술가로 새로 태어나고 있는, 이 예술가 과잉 시대에, 예술은 죽고 예술가만 무한증식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예술로써 과연 무엇을 할 수가 있을까.

▲ <그을린 예술>(심보선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바로 이 지점에서 심보선의 <그을린 예술>(민음사 펴냄)은 질문을 시작한다. 이 책의 맨 첫 페이지에는 이런 헌사가 적혀 있다. "이 책을 독학자이자 아마추어 예술가였던 아버지의 영전에 바친다." 심보선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사진가였고 좋은 카메라들을 유품으로 남겼다. 아버지가 남긴 카메라를 들고 심보선은 사진을 찍는다. 아버지가 남긴 메모들을 유품함에서 꺼내어 아버지를 기억해내며 시를 쓴다. 심보선은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 펴냄)의 뒤표지에 이런 글을 적어두었다.

"오직 시를 쓴다는 육체적 행위 속에서만 시는 나를 지배하고 나는 시를 경배한다. 그렇지 않을 때 나는 차라리 시에 대해 험담하고 조롱하고 모반을 꿈꾸는 불경한 이교도이다. 그러나 노예라는 신분의 그 이교도는 간혹 불안에 떨며 아무도 없는 고요한 평일의 성전으로 숨어든다. 거기서 남몰래 마음을 바쳐 기도를 올릴 때, 그는 치유되고 고양된다. 유일무이해지는 동시에 비밀이 되는 것, 이것이 비천한 자에게는 가장 바람직한 일 아니겠는가."

<그을린 예술>을 다 읽고 생각해보니, 스스로를 '이교도'라고 표현했던 이유를 이해할 것 같다. 심보선은 전문 예술가가 되지 못한 아마추어가 아니라, 자발적인 열외의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예술가 집단의 제도권 속에 귀속되지 않아야만 언제고 모반을 꿈꿀 수 있고 불경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게 예술가가 되는 것보다 더 예술의 근원적인 욕망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에.

삶과 유리된 채로 고급한 코드를 재생산하는 예술은 이제 죽었다. 예술의 근원적인 욕망은 어딘가에 내팽개쳐져 있다. 심보선은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그 내팽개쳐짐의 명백한 사례들을 제시하기도 하고, 내팽개쳐진 그곳으로 방문을 하기도 한다.

"저는 아마추어 예술과 작업장 공동체의 사례들을 통해 "적어도 그건 아니야!"라는 비판의 몸짓들을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이 비판의 몸짓들은 사회적 신체의 통치성에 대항하여 감성적 신체가 수행하는 예술(기술)의 사례들입니다. 그 몸짓의 꿈틀거림은 개인적 삶의 주름 속에 비밀처럼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새벽에 남몰래 쓰는 시, 수십 년에 걸쳐 쌓는 성과 같은 고독한 작업처럼 말입니다. 혹은 그것은 동호회나 작업장 같은 공통의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소박한 협력과 교환의 형태를 갖기도 합니다. 이때 사람들이 구사하는 예술(기술)은 평범하고 궁색합니다. "적어도 그렇게는 못 살겠다."와 "적어도 나는 시를 쓰고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이 두 말의 결합은 삶과 상상력의 결합을 대변합니다. 이 결합 속에서 사람들은 삶의 주인으로 갱신되고 고양됩니다. 이 결합이 세계를 향한 원한 감정과 정복 욕망에 가까울수록 우리는 그것을 자아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과시적 생산/소비의 한 버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합이 해방된 자아의 표현과 호혜적 협력의 행복감에 가까울수록 우리는 그것을 자율적 삶의 형태를 만들고 나누는 비과시적 제작/사용의 전범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에서 우리는 예술과 민주주의가 만나는 생생한 시간과 장소를, 공동의 상상력으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마술을, 누구나 생각보다 조금은 위대해질 수 있는 구체적 계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보선은 이 책이 "예술은 죽었다"라는 선언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적었다. "예술은 다른 곳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삶 속에서, 삶의 불길에 그을린 채"라고 적었다. 어느 범부가 자기 생의 비밀을 엿보기 위해, 창작에 자기 감수성을 쏟고 있는 그 장소에만 예술이 겨우 잔존해 있을지 모른다. 예술가가 엘리트가 아니라 다시 범부가 될 때에, 전문가가 아니라 다시 아마추어가 될 때에, 제도 속에서 과시적 생산을 하지 않고 제도 바깥으로 탈주하여 비과시적 생산의 즐거움을 만끽할 때에, 예술은 갱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제도가 시신처럼 딱딱해진지 오래고, 이미 부패하여 악취와 진물이 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우리 삶을 어떤 식으로 지켜낼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힘으로 삶을 사랑할 의지를 보존할 수 있을까. 감수성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향유하고 나누는 것, 그 자유와 예민함을 우정으로 공유하는 것 말고 다른 낙이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시와 맺은 백년가약을 끊고, 시와 놀고 싶어졌다. 시와 놀아나고 싶어졌다. 제도 바깥에서, 제도를 조롱하며 그렇게 하고 싶다. 시인은 안하고 시만 쓰고 싶다. 이미 전문가가 되어 제도에 포획된 당신도, 전문가가 되려고 절치부심하는 또 다른 당신도,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 <그을린 예술>의 저자 심보선. 사회학을 공부하며, 시를 쓴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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