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에서 7월로 넘어갈 즈음, 촛불은 장마와 폭력 시위 논란이라는 두 장애물 앞에서 급속히 힘을 잃어갔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시국 미사를 계기로 그 불씨가 일주일 정도 더 이어지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역부족이었다. 주말이던 7월 5일과 6일 사이의 밤, 지난 두 달간 농성 거점 역할을 하던 서울시청 앞 광장(어찌 보면 이집트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이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의 선구였던)은 마지막 축제로 시끌벅적했다.
다음 날 아침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밤새 광장에서 북적이던 시민들은 온 데 간 데 없고 천막들만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장마철 물기와 축제 뒤의 공허함이 광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나는 그날 진보신당 천막을 지키는 당번이었다. 옆에는 사회당 천막이 있었는데, 나중에 진보신당과 사회당이 통합한 뒤 정책위원회에서 함께 일하게 된 권문석이 지키고 있었다.
점심이 가까워오자 공무원들이 경찰과 함께 들이닥쳐 천막을 하나둘 철거하기 시작했고 나와 권문석은 그 광경을 속절없이 바라보아야 했다. 그리고 한때 거대했던 운동의 이 처연한 뒷모습을 함께 목도한 동지 권문석은 올해 돌연 이 세상을 떠났다. 문득 지난 번 촛불과 지금 사이의 그 6년이 아프게 다가온다. 세월의 날카로움이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이런 뜻밖의 회한과 함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그 무렵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노래 <헌법 제1조>다. 그 노랫말은 제목 그대로 대한민국 헌법 제1조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문구 중 단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부분만 생략되었을 따름이다. 그해 우리는 중고등학생이든 노동조합원이든 깃발 없는 시민이든 한 목소리로 이 헌법 첫 조항을 노래했다.
촛불 집회의 이념에 대해서는 그 당시에도 말들이 많았다. 이해하기 힘든 심오한 이야기들도 오갔다. 하지만 집회에 참가한 이들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공통분모라면, 결국 위 노랫말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여기에 무슨 이름을 붙인다면, 가장 적합한 것은 '공화주의'일 것이다. 이 나라는 우리 모든 시민의 나라,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주인인 나라, 즉 민주공화국임을 확인하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때 우리 모두는 '공화주의자'였다.
그때만이 아니다. 요즘의 촛불도 그 대의는 '공화주의'로 요약된다.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은 곧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정신에 대한 도전이다. 이 더위에 다시 거리에 나선 이들은 지금 이 반역에 맞서고 있다. 다시 한 번, 우리 모두는 '공화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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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 가지 아픈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 명명백백히 드러난 민주공화국의 적에 대해서는 당연히 손가락질과 야유를 멈추지 않되 차가운 물음 하나를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한다. 지난 번 촛불은 왜 더 타오르지 못했던가? 그것은 왜 장마와 여름방학과 '명박산성'을 넘어 나아가지 못했던가? 달리 말하면, 민주공화국의 시민됨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은 왜 두 달 이상을 더 지속할 수 없었던 것일까?
답을 찾기 위해서는 어쩌면 시야를 세계사로 넓혀야 할지 모르겠다. 공화주의 자체가 우리의 촛불 이전에 인류 전체의 경험 속에 새겨져 있는 이상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문구부터가 그렇다. 그것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산물인 <인권 선언>(정확하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제3조 "모든 주권의 근원은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의 메아리다. 두 세기도 더 전의 세계사적 사건과 6년 전의 우리는 공화주의의 이상을 통해 이렇게 서로 연결돼 있었다.
그런데 200년 전 혁명 역시 그 끝이 영광스럽지만은 않았다. 공화주의의 원칙을 가장 철저히 추구한 세력(자코뱅파)이 결국은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몰락하고 혁명 정부는 새로운 특권층, 즉 자본가 계급의 전리품이 되었다. 2008년 한국의 촛불이 대혁명 정신의 작은 반복이었듯이 대혁명의 결말은 텅 빈 서울시청 앞 광장보다 훨씬 더 공허했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공화주의 정신은 국민이 실은 하나가 아니라 먹고 사는 문제를 놓고 다투는 소수와 다수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 앞에서 무력했다. 그리고 결국은 그 소수의 경제적 힘이 새로운 권력의 원천으로 자리 잡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고 보면 1794년 자코뱅파가 몰락하고 난 뒤 2년 만에 새롭게 혁명의 횃불을 이어받은 세력이 내건 구호가 "평등한 사람들의 공화국"인 것은 필연이었다. 이들은 대혁명이 단지 더 거대한 다음 혁명의 전주곡에 불과하다고 선언했다. 그 다음 혁명의 목표는 소수가 독점한 경제 권력의 해체였다. 공화주의의 실패에서 또 다른 새로운 이상이 태동한 것이다. 그라쿠스 바뵈프를 중심으로 한 이들 선구자로부터 이후 사회주의 운동의 물줄기가 비롯되었다.
생물학에서는 흔히 개체 발생이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생물학만의 진리는 아닌 것 같다. 인간의 역사 역시 비슷하지 않은가. 프랑스 혁명이 맞부딪힌 난제인 경제적 불평등이 해결되지 않는 한, 법전 속 공화주의 원리는 현실에서 끊임없이 교란되고 왜곡되며 무력화된다. 그래서 각 세대마다 이에 대한 자각이 대혁명의 크고 작은 반복으로 나타난다. 마치 5년 전 우리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젊음을 되찾은 공화주의도 자신의 장애물을 직시하지 못한다면, 대혁명의 실패를 왜소하게 반복할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무한 반복으로부터의 탈출은 오직 제2의 자각이 제 때에 반복될 것인지에 달려 있다. 공화주의의 이상을 경제 권력에 맞서 확장해야 한다는 각성, 즉 우리 시대에 걸맞은 "평등한 사람들의 공화국"의 제창 말이다. 지금 우리의 경우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들이 항쟁의 중심에 서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공화주의의 전환과 확장이 적절한 시점에 이뤄지지 못한다면, 2008년 촛불식 결말은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지금의 촛불 역시 마찬가지다.
돌이켜 보면, 이런 역사의 논리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한 것은 새누리당이었다. '경제 민주화'라는 박근혜 진영의 선제공격은 신의 한 수였다. 이런 식으로 이들은 경제 권력 구조에 맞서는 진지한 도전이 등장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했다. 반면 그 반대 진영은 아직 이 수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국가정보원 쟁점조차도 이 난국을 풀어줄 계기는 되지 못한다.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는 오히려 우리를 또 다시 무한 반복되는 소극(笑劇)의 주인공들로 만들고 만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공화주의자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도 우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그 한 걸음에 어떤 이름을 붙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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