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e-편하게' 사육당하는 당신, 행복한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e-편하게' 사육당하는 당신, 행복한가!

[프레시안 books] 이반 일리치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식사와 사료, 주택과 집

지난 6월 21일에 방영된 <문화방송(MBC)>의 '나 혼자 산다'에는 철학박사 강신주가 출연했다. 그는 발터 벤야민을 참고하여 '사료와 식사'를 구분해 제시해 화제가 되었다. 사료는 '의무감으로 먹는 것'을 의미하고, 식사는 '스스로를 위하고, 서로간의 보살핌 속에서 먹는 것'이라고 했다. '먹는 행위'는 인간 생활의 전제 조건이다. 그 행위가 '나눔의 형태'로 이뤄지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다면 사람은 스스로 자존감을 획득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느냐를 '식사와 사료'라는 언어를 통해 성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료와 식사'의 대비처럼, '주택과 집'도 대비가 가능하다.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사상가인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는 바로 그 '주택과 집'을 구분해 제시했다. 그는 주택이 "사람이 짐과 가구를 보관하는 곳"이라면, 집은 '내면의 힘을 키워줄 수 있는 창의적인 곳'이라고 했다. 그는 "시멘트와 벽돌로 짓고 가구나 기타 편의시설이 잘 맞아 들어갈 수 있는 상자"를 주택이라고 했고, 집은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는 기억의 장소'라고 했다.

▲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이반 일리치 지음, 권루시안 옮김, 느린걸음 펴냄). ⓒ느린걸음
현대 도시인은 주택에 살고 있을까, 집에 살고 있을까. 삶의 자존감을 상실할 정도로 급하게 사료를 먹듯 끼니를 해결하는 것처럼, 현대 도시인은 집을 가꾸는 능력 또한 잃어버렸다. 주택에 가전제품과 전자기기를 채워 넣기에만 급급하다. 경제적 가치를 먼저 생각하다 보니 끊임없이 이사를 다녀야하고, 온전한 의미의 집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이반 일리치는 집의 조건은 정주(定住)라고 강조해서 말했다. 정주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흔적 속에 깃들여 산다는 뜻이었고, 그날그날 살아가며 자신의 일대기를 한 올 한 올 풍경 속에 적어 넣는다는 뜻"(<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75쪽)이라고 했다. 정주하지 못하면, 자신의 숨결을 집에 불어넣지 못한다. 오히려 주택에서 사육당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근원적 각도에서 현대적 삶을 다시 보는 사상가이자 신학자인 이반 일리치의 책이 번역되어 오래도록 책에 시선이 머물게 한다. 그 책은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권루시안 옮김, 느린걸음 펴냄)이다. 이 책은 1978년부터 1990년까지 이반 일리치가 전문가 집단을 대상으로 강연한 내용들을 묶은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일별해 볼만한 책이 없는 상황에서 이 책은 소중한 번역서임에 틀림없다.

사제에서 급진적 사상가로

이반 일리치의 책은 '이반 일리히 전집'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없는 사회>(심성보 옮김)·<병원이 병을 만든다>(박홍규 옮김)·<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박홍규 옮김)·<성장을 멈춰라>(이한 옮김)·<그림자 노동>(박홍규 옮김, 이상 미토 펴냄) 등이 꾸준히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또,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이반 일리치·데이비드 케일리 지음, 권루시안 옮김, 물레 펴냄)도 번역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낯선 존재이다. 한국 사회가 경제 성장에 유독 민감하고 개발주의에 포박되어 있었다는 측면에서 이반 일리치는 앞으로도 낯선 존재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의 아픈 통찰은 점차 더 많은 영향력을 확보할 것이 틀림없다. 그는 20세기 내내 세계를 지배해 왔던 경제 개발 담론의 대척점에 서서, 삶의 근원적 문제를 설파한 사상가이다. 20세기 전반기엔 발터 벤야민이라는 아웃사이더 지식인이 있었다면, 20세기 후반기엔 이반 일리치라는 근본주의적 사상가가 있어 안도할 수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누구인가? 그는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해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가톨릭 신부 사제 서품을 받았다. 때로는 빈민구제에 나선 고결한 성직자로, 때로는 교회 개혁을 주도하는 급진주의자로 활동했다. 그가 대중적 영향력 있는 가톨릭 지식인이 된 것은 '문화간 소통 연구소(Institute of Intercultural Communication)'를 설립하면서부터였다. 이 단체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국제적 담론이었었던 '경제 개발 이념'에 의문을 던지며 가난이 '근대화하고 현대화'하는 원인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했다. 이반 일리치는 경제 개발이 있지도 않은 필요를 만들어냄으로써 가난의 현대화를 부추겼다고 보았다.

그는 우리가 이른바 '상대적 빈곤'이라고 일컫는 것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특히 개발에 대해서는 "언제나 소비에 의존하지 않고 생존하려는 사람을 환경의 이용 가치로부터 폭력적으로 배제한다는 뜻"이라고 보았다. 그의 급진적인 관점은 미 중앙정보국(CIA)과 가톨릭 보수파의 집중적인 비판을 감당해야 했다. 결국 그는 가톨릭 사제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계기로 오히려 자유로워졌다. 그 성과가 <학교 없는 사회>와 <의학의 응보>(한국어판 <병원이 병을 만든다>)이다. 이 두 저작이 출간되자 그는 서구 사회에서 전보다 오히려 더 큰 대중적 영향력을 획득하게 되었다.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는 경제, 교육, 질료, 의료, 침묵을 다룬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대안 경제학도 거부할 정도로 근대 경제학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반 일리치의 경제학은 <거대한 전환>(홍기빈 옮김, 길 펴냄)의 저자인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반 일리치는 근대 경제학이 '필요를 발견하고 교육하는 시대'의 도구였다는 사실을 설파했다.

교육의 문제를 다루는 태도 역시 급진적이다. 교육과 관련해 수록된 글들은 대부분 교육자들을 대상으로 행해진 강연록이다. 그는 교육의 역사를 살피는 방법 등을 통해 현대 교육이 '희소성 권력의 식민화'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책, 컴퓨터, 인공두뇌의 문제까지 넘나들며, 읽기의 형태가 변화하면서 결국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까지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주장 중 가장 충격적인 것으로 꼽히는 것이 '병원, 의료의 문제'에 관한 문제제기이다. 그는 일관되게 "의료제도는 건강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되어 왔다"는 주장을 펼쳤다. 의료의 진보에 따라 생겨난 질병으로 인해, 오히려 의료제도가 인간의 생명을 관리하는 역전적인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본 것이다. 현대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통해 그가 도달한 지점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품위 있는 침묵'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니오, 사양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오히려 "삶에 대한 믿음과 자기 아이들을 위한 희망을 품고 있는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근본적으로 사고하고, 역사적으로 분석하기

이반 일리치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는 쉬운 대중 강연록도, 이반 일리치 사상의 해설서도 아니다. 여전히 그의 사상은 일상적 언어로 풀어낼 수 있을 만큼 간단하지도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경청할 수 있을 만큼 위안적이지도 않다. 그는 항상 금기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도전적인 태도를 취하며, 현대인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도발한다. 도대체 그의 사상의 기저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기에 이런 과감한 육박이 가능한 것일까?

이반 일리치의 이야기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다시 사고하게 한다. 우리는 "필요의 충족에 그치지 않고 필요를 형성하도록 관리"되는 사회를 살고 있다. 이 체제 안에서는 우리의 현 상태를 인식할 수 없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소외시키게 되고, 고립되게 되고, 인간이 아닌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의 논리에 지배를 받게 된다. 이반 일리치가 강조하는 것은 '지배당하지 않는 삶'이다. 그의 논의는 항상 신학적 측면과 연루되어 있고, 그래서 오히려 '인간을 둘러싸고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민감하다. 신학적 근본주의는 이런 것이다. 동시대와 끊임없이 불화함으로써 다른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근본주의가 갖고 있는 매력이다.

다음으로 이반 일리치가 갖고 있는 독특한 역사주의적 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잇다. 이반 일리치는 "현 시대의 전제를 예민하게 파악"하기 위해 전제 자체를 의심하는 방법을 취한다. 그 방법으로 과거의 시간 속으로 뛰어들어 12세기 중반의 상황을 참조하고 인용하고 재구성해 논의를 이끌어 간다. 이러한 그의 태도로 우리는 근대의 병원, 학교, 감옥을 낯설게 재구성해 비판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인간이 만든 도구에 의해 인간이 다시 역 지배를 받는 상황을 역사적 관점에서 통찰해낸 셈이다.

이반 일리치는 현대에서 과거를 산 성인이다. 근대 경제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이다. 피델 카스트로와 존 케네디도 지지한 경제 개발 담론에 저항하며, 그는 1960년대에 이미 대안적 세계를 구상한 근본주의적 사상가가 되었다. 경제 개발과 생산성 향상이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면, 그는 생명을 위한 선택으로 공생의 원리를 강조했다. 그는 '신학적 관점과 역사주의적 관점'에 서 있었기에, 반현대주의적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논리와 근거를 펼칠 수 있었다.

우정과 연대, 그리고 침묵의 저항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글은 더글러스 러미스(Dauglas Lummis, 1936∼)의 '이반 일리치를 회상하며'라는 발문이다. 이 글은 깊은 우정과 추모의 언어로 채워져 있어 가슴을 두드린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미국인으로서 오키나와에 거주하며, 평화 운동을 하고 있는 사상가이다. 그는 이반 일리치와의 우정을 회상하며 "모든 것이 파괴된 이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영혼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바로 내 옆에 있는 이의 심장"이라고 했다. 서로의 삶을 서로 연결된 실로 느끼며, 삶을 나누는 것이 우정이다. 내 옆의 사람과 삶을 나누지 않으면 결코 근원적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

근본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해 '사료와 식사'에 대해, '집과 주택'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한다. 집에서 기억을 가꾸며, 더불어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식사를 하며,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내 주변 사람의 심장을 느끼는 감수성의 확대가 행복의 근원적 조건이다. 또한 다른 권위에 의존하지 말고 불안한 미래가 아닌 희망 자체를 사랑할 수 있는 자존감의 회복이 중요하다.

글을 마무리하며 이반 일리치가 설파하는 '침묵'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침묵은 부당한 것에 대해 말하지 않음으로써 연루되기를 거부하는 투쟁이다. 이반 일리치는 '나 또한 침묵을 지키기로 결심한다'라는 글에서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그리고 평화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한반도 비핵화가 정치적 의제로 다뤄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핵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저항하는 방법에 대해 숙고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 또한 침묵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왜냐하면
대량학살에 관한 어떤 토론에도 끌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이며,
핵폭탄은 전통적 의미의 무기가 아니라 인간의 말살 이외에는 어디에도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며,
핵폭탄을 배치하는 행위는 평화와 전쟁 모두를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며,
이런 폭탄의 사용을 거부하는 조건을 논의하는 순간 내가 범죄자가 되기 때문이며,
핵 억지력이란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며,
나의 자살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협박하지 않기 위함이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