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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딸, 박정희를 사랑했던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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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딸, 박정희를 사랑했던 그 남자!

[프레시안 books] 안경환의 <황용주 : 그와 박정희의 시대>

1.
황용주는 1918년에 태어나 2001년에 사망했다. 태어난 곳은 의령이지만 누대에 걸친 집안의 터전인 밀양에서 성장했다. 밀양의 민족주의 지식인 황상규와 김원봉이 혈연으로 연결된 할아버지뻘과 아저씨뻘이어서, 황용주는 그들로부터 인간적인 영향과 동시에 지적인 영향을 받았다. 대구사범에 진학해서 몇 년 다니다가 사회비판적인 독서서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쓰고 퇴학당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중학을 거쳐 와세다 대학 문과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 소위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일본 전시정부가 한 학기 남은 학업을 면제해 주고 발행한 조기 졸업장을 손에 쥐고, 학병에 지원을 강제당하여 1944년 일본군에 입대한다.

일본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해방 소식을 들은 황용주는 일본군 내의 조선인 장병들을 모아 단기적으로는 탈출을,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조국의 건설을 준비한다. 황용주가 모은 학병 출신들은 광복군 주호지대(駐扈支隊)로 연결된다. 귀국 후 황용주는 김원봉의 비서로 일하다가 김원봉이 월북해버리자 밀양으로 돌아가서 학교를 세우고 후학을 가르친다. 동시에 <부산일보>, <국제신문> 등에 기고하면서 대학 강사로도 활동했다. 김지태의 초빙에 응해 1958년 <부산일보>의 주필이 되었고, 김주열의 시신 사진이 묻히지 않고 국내외에 널리 보도되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 <황용주 : 그와 박정희의 시대>(안경환 지음, 까치글방 펴냄). ⓒ황용주
부산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부임한 대구사범 동기생 박정희를 만나고, 홀로 짝사랑한 박정희의 영상에 "민족혁명"의 꿈을 투사한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군사혁명"을 지지하고, <부산일보> 사장을 거쳐 <문화방송> 사장직을 맡는다. 그러나 1964년 11월 <세대>에 기고한 일련의 글들이 문제가 되어 구속된다. 반공법 제4조 1항, 반국가단체 찬양고무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고 1965년 4월에 풀려난다. 이 선고는 1968년에 대법원에서 확정된다. 이후 사회적으로는 사실상 잊혀진 인물로, 개인적으로는 꿈이 꺾인 지식인으로 살다가 2001년에 사망했다.

2.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이 행한 하나의 행위를 이해할 때에도 다각적인 조명이 필요한데 하물며 한 사람의 일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극히 복잡다기한 시각이 필요하다. 위에 적은 것처럼 황용주의 일생을 한 페이지에 요약하게 되면, 딱히 틀렸다고 할 만한 대목은 없겠지만, 그의 행적에 내재하는 굉장히 많은 사연들이 묻히고 만다.

한국 사회의 공론장에서 나타나는 인물평들은 한 사람의 행적 몇 가지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그 몇 가지 행적조차도 주변 사정을 세심하게 이해하고 나서 가타부타 평가하기보다는 피상적인 겉모습만을 취하고 나서 평자가 가지고 있던 상투적인 규범의 틀에 끼워 맞춰서 재단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한말의 혼란기, 일제 강점기, 해방 정국, 이승만 체제, 군부 독재 등, 이 나라 근현대사를 장식한 숱한 계기에서 지식인들과 우국지사들과 야심가들이 보인 행적에 대한 평가라는 것들이 이렇게 몇 가지 행적의 겉모습을 상투적인 규범에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극심한 진영 논법이 횡행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우리 자신의 역사에 대한 일반적인 멸시와 부정과 냉소를 부추긴다. 한민족은 19세기 이래 대단한 격동의 시대를 겪어야만 했다. 격동은 자생적인 변화의 동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주로 외부로부터 밀려온 압박 때문에 일어났다. 일제와 전쟁으로 대표되는 민족의 고난을 한탄하는 심성이 적어도 한 세기 이상 세대를 건너 전승되는 와중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사를 "실패의 역사"로 바라보기만 하는 프레임을 고착시켜 왔다.

"우리"가 역사에서 실패했다는 생각은 결국 선배들의 "무능"과 "혼동"을 은연중에 성토하는 풍조로 이어졌다. 4월 혁명 이후에 학병 세대를 공격하던 4·19 세대는 6월 항쟁 이후 "386 세대"에게 공격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이제 50줄에 접어든 왕년의 386 세대는 현재의 청년들에게 어리석고 답답한 꼰대로 전락했다.

외부로부터 밀려오는 압박을 우리 맘대로 간단하게 일축해 버리고 싶은 치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현재의 청년들 역시 그다음 세대에게 똑같은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물리적 환경을 우리 맘대로 통제할 수 없을 때도 많고, 그런 상황에서는 적응과 양보와 변신이 불가피하다는 세속적 진리를 한국 사회의 지식인 사회는 내면화할 필요가 있다. 적응과 양보와 변신 자체를 절대악으로 여기는 심성에서 탈피하여 바라보면, 그리하여 "성공"의 기준을 현실의 한계 안에서 설정하고 바라보면, 한민족의 최근 역사는 여러 면에서 성공한 역사다. 흔히 하는 말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최단기간에 이룩한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안경환은 황용주의 전기 <황용주 : 그와 박정희의 시대>(이하 '황용주', 까치글방 펴냄)를 쓰면서 이렇게 적는다.

"이 책은 인간 황용주의 이야기다. (…) 글을 쓰는 지난 수년 동안 나는 새삼 나의 세대의 무지와 후속세대의 경박한 오만에 절망하곤 했다.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고뇌하고, 만들어가면서 분노하고 좌절하던 고인의 세대, 그 세대 지식인들이 입었던 상처에 따뜻한 위로와 깊은 경의를 표한다.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역사는 성공한 역사다. 그 성공의 역사에 이분들의 열정과 좌절, 환희와 분노가 밑거름이 되었다. 고인과 비슷한 세대를 살았으나 단 한 줄의 수묵도 남기지 않고 서둘러 떠난 내 아버지에 대한 복합된 추모의 염, 용서하지도 용서받지도 못하고 아비를 보낸 자식의 회한이 이 글의 밑바닥에 깔려 있을 것이다." (6~7쪽)

3.
인간 황용주를 그려낸 안경환의 성과에 나는 경의를 표한다. 법대 교수가 <조영래 평전>(강 펴냄)에 이어 두 번째 전기를 썼다는 점에도 나는 최대한의 경하를 보낸다.

성장기 황용주에게 배경이 되었던 밀양의 풍광과 사람들에 대한 도입부의 묘사는 안경환 자신의 고향에 대한 감정이입이 짙게 스며들어 더욱 생생하지만, 고향이 다르더라도 전기 작가라면 주인공의 성장 환경에 대해 마땅히 그 정도의 애정 어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대구사범 시절, 일본 유학 시절, 중국에서 보낸 학병 시절, 김원봉의 비서 시절, 낙향한 후의 교사 시절, <부산일보> 칼럼니스트와 주필로 문명(文名)을 날리던 시절, 그리고 박정희를 만나 꿈을 이룬 줄 알았다가 필화 한 방에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사연들을 안경환은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또래 가운데 영민한 축에 속한 야심찬 소년 소녀라면 식민지 조선인이라는 신분이야말로 사유의 틀을 구획하는 결정적인 요인일 수밖에 없다. 평화와 자유와 도량을 애호하고, 사랑과 낭만을 동경하는 문학청년의 꿈은 식민지 조선인이라는 신분에 의해 원초적으로 제약된다. 입신하여 이름을 드높이는 것을 효도의 최고 경지로 여겼던 전통적 가치도 식민지 조선인 청년으로서 지배자들의 교육체계에 적응해야 한다는 조건에 좌우된다. 청소년기에 삶의 목적에 관해 방황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인데, 식민지 조선인 젊은이가 지적 여정을 일본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잡아야 한다는 이중성까지 가중되면 정진의 목표를 한결같이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겨우 불문학 전공으로 행보를 정했다 싶었는데, 일본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일본 정부에 의해 학도병으로 동원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무언가 가치 있는 기여를 할 수 있다면 여태까지 겪었던 방황과 혼란과 고초와 억압을 일거에 떨쳐 버릴 수 있다. 개인적으로 입신양명의 길이고, 민족적으로는 자랑스러운 조국을 건설하는 길이다. 어릴 때부터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꼈던 차, 마침 집안 아저씨뻘인 김원봉을 보좌하니 보람 있는 일이다. 김원봉이 월북한 뒤에는 교육과 문필로써 새로운 조국의 건설에 힘을 보탰다. 그러다가 박정희를 만나 의기투합하고,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적극 환영한다. 평소에 자기가 꿈꾸던 "민족혁명"이 거기에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황용주는 박정희가 거사를 확신하는 데 바로 자기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믿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등 통일을 위한 방책을 발표했다가 구속되기는 했지만, 황용주는 자신의 방안이 틀렸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1991년에 가서야 성사될 일을 27년 앞서서 1964년에, 시대를 너무 앞서서 주장했을 뿐이다.(452쪽) 박정희가 자신의 통일 방안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책임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한건수, 김준연 등 구태 정치인들이 박정희를 공격하기 위한 빌미로 자신의 기고문을 물고 늘어진 것이고, 따라서 자기가 희생당하는 것이 박정희와 혁명정부를 보호하는 길이다. 황용주는 이처럼 박정희가 자신의 생각과 같으리라는 희망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았지만, 박정희는 1964년 이후 다시는 황용주에게 5·16장학회(즉, 정수장학회) 이사 자리 말고는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

정운현은 추도사를 적으면서, 황용주의 풍모에서 "지식인의 '전형' 같은 것이 느껴졌다"고 썼다. 예사롭지 않았던 시대를 살면서, "누구보다도 치열한 '시대의식'으로 살아" 온 인물이며, "어려운 시절에도 드물게 양심과 기개로 살다간 선배 언론인"이라고 고인을 기렸다. (498~499쪽).

▲ <황용주>의 저자 안경환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안경환이 정운현의 추도사를 한 페이지 넘게 인용하는 것은 이것이 텅 빈 덕담이 아니라 황용주의 실제 모습에 부합하는 면이 있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민족의 미래를 어떻게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마침내 나세르 식의 군사혁명만이 가난한 후진국에게 유일한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 결론을 박정희를 통해 추구하는 등 치열한 시대의식이라는 평은 결코 어긋나지 않는다. 자기가 나름대로 생각해본 결과를 글로 적어야 하고, 부화뇌동하는 허튼 소리를 적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는 점에서, 양심과 기개로 살다간 언론인이라는 평도 과장이 아니다.

1918년부터 2001년까지, 또는 1964년까지, 파란만장한 시대를 황용주는 이런 식으로 살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전후에 태어난 나 같은 후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시대였다는 점, 그리고 그런 시대를 살면서 황용주가 질곡에서 탈출할 길을 끊임없이 모색했다는 점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가 가족에게 따뜻한 남편이자 아버지였고, 꽃과 자연을 사랑한 사람이었다는 점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일제와 전쟁과 빈곤과 정치적 공방이라는 현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독자들로 하여금 이런 점들을 이해하기를 바란 것이 저자의 의도였다면, 안경환의 황용주 전기는 적어도 이 대목에서는 성공작이라고 봐도 된다.

4.
황용주의 마지막 말은 "아 정희야! 아 란서야!"였다고 한다.(501쪽) 프랑스를 너무나 좋아해서 이름을 란서라고 지어준 딸, 프랑스에서 살다가 위독한 아버지를 보러 날아와 병상 옆에서 손을 잡아주는 딸 이름을 부른 것은 특별히 눈길을 끌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기보다 22년이나 먼저 죽은 박정희의 이름을 부른 대목은 매우 흥미롭다.

물론 1979년 이후 해마다 10월 26일이 되면 박정희 묘를 참배했고,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이 대통령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박정희의 유업이 계승되지 못해 안타까워했을 정도로 박정희를 그리워한 사람이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아주 끈끈한 유대가 이승과 저승의 간극을 22년 동안 메울 수 있었다는 점은 충분히 해명이 되고도 남는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결국 쓰지는 못했지만, 생전에 자기 손으로 박정희 전기를 쓰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인간 박정희, 그리고 박정희와 자신에 관한 진실의 전모를 글로 적어 밝히고 싶다는 다짐을 수십번이나 했다고 한다.(464~466쪽)

황용주가 만약 박정희 전기를 썼다면, 거기에는 박정희에 관해 알려지지 않은 비화도 많이 담겨있었겠지만, 황용주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많은 단서들도 담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기가 박정희의 전모를 담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황용주는 박정희의 영상 위에 자기 자신을 투영해 놓고서, 그렇게 자신과 박정희가 합쳐진 모습을 박정희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6년 <부산일보>에 기고한 '지식인의 저항정신'에서 황용주는 "지성은 언제나 휴머니즘의 편"이라고 하면서 1930년대의 일본은 "'비상시'라는 표어하에 내세운 지도이념과 제반 정책과 사회풍조가 반지성적이었기 때문에 명석을 잃지 않는 지성인으로부터 일련의 저항을 받았다"고 썼다. 또 "개인의 자유 없이는 창조도 없다. 연구에는 자유가 인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처음부터 결론을 맺는 곳에는 연구라는 것은 없다"고도 썼다. 심지어 이런 풍자까지도 언급한다.

"군중 속에서 누가 '쓰리(소매치기)다, 쓰리다' 하고 지나갔다. 군중은 그자가 외치고 지나가는 곳만 쳐다보고 우왕좌왕하다가 지나간 뒤에 제각기 자기 호주머니 빈 것을 발견했다. '쓰리다'라고 외친 바로 그 자가 소매치기였던 것이다. '비상시다, 비상시다!' 외치며 국민 대중을 한곳으로 몰아넣고 나서는 전시체제를 갖추었다는 것이다."(279~280쪽)

1930년대 일본이 반지성적이었고, 당시 지배계급이 말하는 "비상시"라는 것이 소매치기 수준이었다고 보는 사람이 1960~70년대 한국을 지성적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 이런 사람은 박정희 체제 18년 동안 일상화된 "비상"과 "위기"의 담론이 일본 군국주의의 "비상시" 담론과 다르다고 볼 수 있는 근거를 어디에서 찾을까?

황용주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민족주의에서 찾았다. 후진국에서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므로 민족주의가 유일한 길이라는 황용주의 발상은 여러 가지 요소들로 구성된다. (363~366쪽) 산업화가 이뤄지지 않은 곳에서 민주주의가 자라나기 어렵다는 가설에는 상당한 이치가 담겨 있는 것이 사실이다. 황용주는 이집트, 이라크, 버마 등지의 군부 정권을 보고 이 가설을 진리로 믿었다. 산업화를 위한 독재라는 구상이 이렇게 자리를 잡고, 산업화는 다시 민족의 중흥이라는 대의에 의해 정당화된다.

하지만 황용주는 민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문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민족이 무엇인지, 한민족의 구성원으로 포섭될 사람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한민족이 추구할 가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등에 관해 다름 아닌 한민족의 구성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 봐야 할 지적인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 같다.

그리하여 이런 점들을 간과한 채로 민족을 내세우게 되면, 결국 민족이라는 것이 권력에 의해 자의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통찰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사실 황용주 개인의 단견이라기보다는, 일제 강점이라고 하는 역사적 치욕을 하나의 절대적 기준으로 설정하는 사유형식에서 저절로 돌출하는 하나의 반향과 같다.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이항대립의 관계로 설정하고, 민족을 양보하는 대신 민주를 택할 것인지 아니면 민주를 양보하는 대신 민족을 택할 것인지를 묻는 것은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사전에 정해진 답을 유도하는 수사적 장치에 불과하다. "처음부터 결론을 맺는 곳에는 연구라는 것은 없다"고 했던 황용주의 말대로, 민족이라는 표어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는지는 묻지 않고 표어만이 절대선으로 내걸리는 순간 민족은 증발하고 권력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민족을 구성하는 내용이 오로지 권력자의 의중에 따라 규정되는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황용주는 박정희의 거사가 사리사욕에 의한 쿠데타가 아니라 하나의 이념적 쿠데타이기를 소망하고 믿었지만, 세상에 독재를 위한 이념은 있지만 이념을 위한 독재 따위는 없다. 어떤 이념을 표방하든지, 권력이 이념을 위해 행사되는 상태라고 한다면 실제로 시시각각 도처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작용이 해당 이념과 부합하는지 여부가 따져봐야 할 질문으로 상황을 반드시 예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전형적으로 권력과 무관한 지평에서 구해져야 한다. 행사되고 있는 권력의 성격에 관한 질문을 권력과 무관한 지평에서 탐구하는 곳이라면 이미 독재가 아닌 것이다. 이처럼 어떤 권력이 이념 지향적으로 행사되고 있다면 이미 그것은 독재일 수가 없다.

정부, 기업, 가정, 학교, 각종 단체 등등 인간의 조직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때로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리더가 키를 잡고 나가야 할 때가 있다. 사정이 급해서 시급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중론이 한데 모이지 않을 때가 대표적으로 그런 때다. 독재를 정당화하는 심성은 이럴 때도 있다는 사실을 부풀려서 항상 그렇다는 결론을 지어내고 나서, 자기가 지어낸 그 결론이 마치 진리의 목소리라서 자기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는 듯한 가식 또는 자기기만을 저지른다.

황용주의 민족주의는 이처럼 분석되지도 해명되지도 않은 상태의 형체 없는 덩어리였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이 선을 표상한다고 믿고 싶었다. 이런 민족주의의 현신으로 박정희를 옹립해두고, 황용주는 박정희가 하는 모든 행위가 민족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이나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하던 지성인의 눈으로 보면 박정희의 행적에도 비판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건만, 박정희의 잘못만은 선을 행하려다보니 불가피하게 섞여 들어간 잡티 또는 인간적인 불찰 정도로 눈을 감아줬다.

황용주가 박정희처럼 쿠데타를 해치울 수 있는 인물은 전혀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깜냥이 아니라는 소리가 아니고, 기질이 다르다는 소리다. 설령 황용주가 군인이 되어 쿠데타를 감행하고 권좌에 앉았더라도,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수사기관을 이용한 정치공작이나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고문, 그리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잡아다가 간첩으로 엮어내는 등의 악랄하고 저열한 술책을 자행하지는 않았으리라. 적어도 사르트르의 전집을 애장했다는 사람이 그런 짓을 저지를 수는 없다는 추정이다.

황용주에게는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원초적인 경험에서 빚어져 나온 민족이라고 하는 미분석 관념이 사유의 건강한 진전을 가로 막는 족쇄로 작용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사유의 진전이 가로막힌 막바지에 황용주는 그렇게 설정된 미분석 관념 "민족"에다가 아름다운 채색을 입히고서, 그것을 박정희의 군복 위에다 투영시켰다.

반면에 박정희는 이념을 위한 독재 따위는 없고 독재를 위한 이념이 있을 뿐인 냉혹한 현실을 적어도 어렴풋하게는 인지하고 있었다고 나는 평가한다. 하지만 황용주의 사념 속에 존재하는 박정희는 아름다운 민족주의의 화신일 뿐이고, 이념을 수사로 이용하는 권력 사냥꾼 박정희는 없다. 나는 이런 이유로 만약에 황용주가 박정희의 전기를 썼더라도 박정희의 전모를 담기는 어려웠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어쩌면 권력과 이념의 부적절한 동거는 황용주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 어디엔가에도 도사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나서 대오각성한 스무 살 청년 황용주는 1937년 이렇게 다짐했다.

"첫째, 자유주의를 버린다. 둘째, 작가 지향을 단념한다. 그리하여 좌익적 경향을 개량한다. 슬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살아 나가야 한다."(110쪽)

물론 그는 자유주의도 작가 지향도 좌익적 경향도 깨끗이 단념한 적은 없다. 다시 말해, 세속적인 생존과 출세를 향한 욕망과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 추구 사이에서 흔들리는 단면도 (대다수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겠지만) 황용주에게 있다. 이 지점에 주목한다면 황용주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뚜렷하게 자각하지 못했는지도 모를 일이다.(이 역시 대다수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이 가능성을 따라가더라도 황용주가 박정희의 전모를 글로 형상화하기는 어려웠다는 결론이 나온다. 황용주에게 박정희는 황용주 자신의 꿈이 투영된 화신이다. 그런데 만약 황용주가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고 한다면, 당연히 자신의 꿈이 투영된 화신인 박정희의 모습 역시 뚜렷하게 포착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러하다.

안경환의 <황용주>는 황용주 개인과 나아가 학병 세대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실마리를 열어주고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으로서 우리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학병 세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에도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단, 이러한 작업에서 황용주를 비롯한 학병 세대가 스스로 자신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리라고 추정하고 들어가면 오류가 발생할 위험이 높아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듯이, 우리 앞 세대도 자신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민주와 민족을 이항대립으로 설정한 탓에 황용주가 사유의 진전을 방해받았다고 한다면, 그래서 그가 때때로 자신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면, 그의 그러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편이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학병 세대가 어떤 대목에서 자기 이해에 어려움을 겪었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안경환이 거론하는 학병 세대들 중에서는 이병주가 그나마 자기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대목이 있다는 진실과 눈싸움을 벌일 용기가 두드러졌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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