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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건달, 딸 바보,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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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예수, 건달, 딸 바보, 지식인

[노정태의 논객시대] '불온한 B급 좌파' 김규항

1.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구소련이 해체되고, 다시 말해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게 되었을 때, 거대한 역사의 서사를 잃어버린 80년대의 운동권들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냉전의 끝은, 비록 김영삼과 김대중 두 사람이 독자 출마를 감행하면서 정권 교체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군사독재 시절의 느린 결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노태우 정권은 '물태우'라는 조롱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한시적 동맹은 제 갈 길을 찾아 바삐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치'의 문제가 해결, 혹은 적어도 일단락된 시점에, 더 이상 무슨 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헤겔이 말하는바 '이성의 간계'가 이끄는 역사의 서사는 멈추거나 완성되거나, 아무튼 젊은이의 심장을 뛰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인간이 만든 서사는 그렇지 않았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이르는 시대가 그렇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이루고 나니, 1988년 서울올림픽이 있었고, 같은 해 마이클 더글러스 주연의 <위험한 관계>가 개봉했다. <위험한 관계>는 무조건 한국 영화사를 통해 수입되어야 했던 기존의 관계를 깨고, 1986년 맺어진 한미무역협정의 결과 미국 영화사를 통해 국내에 직접 배급되었다. 이것을 줄여서 '직배'라고 하며, 1988년부터 바야흐로 국내 영화계에 직배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역사의 거대한 서사가 펼쳐지는 무대는 막을 내렸거나, 적어도 이전처럼 세계사적인 장엄함을 띄지는 않게 되었다. 반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그 수많은 군중들은 제 발로 어두컴컴한 극장에 찾아들어갔는데, 그 속에는 미국에서 직접 수입된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VHS 등 미디어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전에 비해 보다 다양한 경로로 이전까지는 접할 수도 없었던 창작물들이 숨어들어왔다.

▲ 패트릭 스웨이지와 데미 무어 주연의 <사랑과 영혼>.

그러므로 80년대의 운동권들이 직면해야 했던 '현실'은 이런 것이다. 민주화를 이루고 나자, 두 명의 야권 지도자는 서로 분열해서 노태우에게 정권을 내어주었는데, 국민들은 그 현실에 분노하고 맞서기는커녕 종로 3가 서울극장에서 <사랑과 영혼>을 보며 데미 무어와 패트릭 스웨이지의 안타까운 사연에 부질없는 손수건만 적시고 나올 뿐이었다. 여전히 조국은 분단되어 있었고, 공산주의가 실패한 만큼 자본주의의 침략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정작 '민중'은 소비 지향적이고 향락적인 외국, 특히 미국의 '문화'에 눈이 돌아가 버린 상태인 것이다.

'문화'와 '운동'이 만날 수 있는, 아니 만나야 하는 상황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졌다. 민중들을 '문화'로부터 되찾아올 수 없다면, 적어도 그 '문화' 속에 지금까지의 '역사'를 어떻게든 새겨 넣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자면 문화, 그 중에서도 특히 대중적 파급력이 무지막지한 영화에 대해 뭔가 알긴 알아야 한다. 알아야 가르칠 수 있고, 올바른 영화도 만들 수 있고,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낸 후 못다 이룬 민주화의 과제도 성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대중문화 자체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그에 맞는 공급이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이전까지는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을 연구했던 젊은 두뇌들은 졸지에 할 일이 없어진 상황이었다. 1987년 민주화 투쟁 이후 789 노동자 대투쟁으로 인해, 기존의 중산층을 넘어서 수많은 이들이 임금 상승을 경험하고 그들 중 일부는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기도 했다. 3저 호황으로 인해 경기는 순풍을 탔고 개개인의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전체에, 생산을 위한 기계 부품이 아니라 소비를 위한 영화 필름과 음반들의 마스터테이프를 수입할 수 있을만한 경제력이 생겼다. 그리고 '운동권'들은 영화와 혁명의 관계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김규항·지승호 지음, 알마 펴냄). ⓒ알마
영화라는 매체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봐야만 하는 영화'의 목록은 늘어만 갔다. 즉 대중적 소비를 온전히 하기 위해서라도 영화는 '공부'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하물며 마르크스와 레닌으로도 하기 힘들었던 혁명을 타르코프스키와 에이젠슈타인으로 하고자 했던 운동권들에게는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영화를 배워야 할 필요성이 커진 만큼,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지면 또한 절실해졌다. 당신들이 보는 영화가 단지 오락물이 아니라 그 속에 어떤 혁명의 메시지가 숨겨져 있는지 이야기할 수 있는 지면이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그러한 수요에 부응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된 것이 1995년의 일이다. 그해 5월 월간지 <키노>가 창간되었다. 그보다 한 달 빨리, 당시 한겨레신문사에서 발행하던 <씨네21>이 창간되었고, 당시 두각을 나타내던 여성주의자이자 언론인이었던 조선희가 편집장을 맡았다. 물론 그때에도 세상에는 인터넷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 무렵 가장 뜨거웠던 문화 영역인 영화를 주제로 삼되, 비단 영화에만 머물지 않고 문화 전반을 다루는 주간지가 나타나면서, 문화를 매개로 한 담론의 장이 만개했다.

그 중심에 <씨네21>, 그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라는, 몇 명의 필자가 돌아가면서 쓰는 칼럼 코너가 있었다. 영화지의 기명 칼럼이되, 반드시 영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그 묘한 해방구에서 김규항이라는 필자가 탄생했다.

(<씨네21>은) 영화를 중심으로 만들긴 했지만 당시 이삼십 대 인텔리들에게 가장 저명한 사회 문화지가 되었어요.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라는 꼭지는 <씨네21>의 편집 방향에 부합해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조선희라는 사람과 <한겨레신문>의 인문주의를 반영한 흔적 같은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필자도 고종석, 정과리, 복거일 같은 주로 사오십 대 인문주의자들이었고요. 하여튼 그런 특이한 지면이었는데 내가 참여하면서 좀 달라진 것 같아요. (<가장 왼쪽에서 가장 오른쪽까지>(김규항·지승호 지음, 알마 펴냄), 89쪽)

이전까지 특별히 글을 써본 경험이 없었고, 그저 "조선희 씨 만나기 몇 달 전에 <이매진>이라는 주인석 씨가 만드는 잡지에 '땜빵' 원고를 한 번 쓴 적이 있었"(90쪽, 같은 책)을 뿐인 김규항은, 이렇게 1998년 당시 가장 '핫'했던 매체의 지면에 신데렐라처럼 등장하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주로 번역 일을 하다가 IMF 외환 위기로 인해 잡지에서 주는 일거리를 잃고 생계가 곤란해졌던 그는, 앞뒤 안 가리고 익숙지 않은 칼럼 쓰기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유시민이 쓴 <97 대선 게임의 법칙>(돌베개 펴냄)의 비관적 전망을 강준만의 <김대중 죽이기>(개마고원 펴냄)가 이겨냈지만, IMF 구제금융 이후 온 나라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강준만이 주도하는 <인물과 사상>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으며, 진중권이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개마고원 펴냄)의 원고가 되는 글을 다양한 지면에 던지고 있던 바로 그 시절이었다.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 ⓒ프레시안(최형락)

3.

이런 저런 강연록, 작은 원고들을 모아서 내는 공저 등을 빼고 나면, 김규항의 저서로 부를 수 있을만한 책은 크게 다섯 권으로 압축된다. <씨네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에 연재했던 원고를 모아 묶은 (야간비행 펴냄), 이후 다양한 곳에 실은 칼럼 등을 모아 묶은 <나는 왜 불온한가>(돌베개 펴냄), 예수라는 한 사내의 혁명적 인생과 사상을 묵상하는 책 <예수전>(돌베개 펴냄),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와의 대화를 엮은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알마 펴냄),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칼럼과 기타 작은 글을 모은 (리더스하우스 펴냄)가 그것이다.

마가복음의 본문에 코멘트를 다는 형식의 <예수전>과 인터뷰 형식으로 구술된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를 빼고 나면, 나머지 세 권의 책은 모두 칼럼 모음집이다. 앞서 말했던 <씨네21>과 <한겨레> 및 기타 진보적인 매체에 실은 글, 그 외 본인의 블로그(☞바로 가기)나 강연 등에서 한 발언을 모아서, 대체로 시간 순서에 따라 엮어 책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김규항이 쓴 첫 번째 칼럼부터, 그가 책으로 묶어서 낸 마지막 칼럼까지 그 전부를, 그의 책을 가지고 있기만 하다면 어느 정도 무리 없이 일별할 수 있다.

첫 번째 칼럼부터 살펴보자. '지식인들, 록을 고르다'(1998년 4월)의 바로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한국 지식인들이 록에 열중하고 있다." 첫 문장을 인용한 김에, 첫 문단까지 계속 읽어보자.

한국 지식인들이 록에 열중하고 있다. 노래라곤 <광야에서>나 <아침이슬>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록을 듣는다. 한국 지식인들을 대변한다는 한겨레신문사는 '신중현 헌정공연'을 주최했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록은 지적이고 저항적인 음악으로, 쓸 만한 예술양식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 15쪽)

(김규항 지음, 야간비행 펴냄). ⓒ야간비행
이 첫 문단에서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몇 가지 사항들이 김규항의 10년이 넘는 글쓰기 역사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첫째, 그는 지식인, 그 중에서도 "한국 지식인"을 자신의 비판 대상 혹은 화두로 삼는다. 둘째, 김규항의 문제의식은 '민중가요만 듣다가 갑자기 록을 듣는', 아니 '공부하는' 지식인들의 태도와 행태를 비판하는 쪽으로 맞춰져 있다. 셋째, 이렇듯 '민중의 유희'를 '지식인의 저항'에 억지로 접목하는 행태는, 진보 언론 등에 의해 상업화·산업화되고 있다. 물론 김규항은 그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앞서 우리가 다소 긴 지면을 할애해서 살펴본,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정치와 문화의 대격변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자. 김규항의 주제는 그 격변의 중심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를 주도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데 맞춰져 있다. 원래 대중들의 것이었던 록 음악을 억지춘향이격으로 자신들의 싸구려 운동권 논리에 갖다 맞추면서, "실제 대중예술이나 대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지식인이 쓰고 역시 지식인들이 읽기 위해 만들어 낸 대중예술의 해적판 같은 것"(같은 책, 17쪽)이나 만들어내는 "사회풍 대중음악 평론"이라는 "아이디어 상품"(같은 책, 16쪽)을 만들어 파는 누군가, 혹은 어떤 사람들이 도마에 올라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 실명이 누군지 적시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무리하게 '실명비판이 아니다'라고 볼멘소리를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 글이 지면에 실렸던 1998년 그 무렵만 해도, 그게 누구인지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해당 맥락을 알고 있는 독자들은 다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불행히도 필자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김규항은 그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이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한다. "논리적인 근거나 타당성 없이는 행동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익숙하지 않은 대중예술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평론과 연구라는 고유의 해석판이 필요"할 것이나, "그것이 진짜로 대중을 선도하거나 아주 조금이라도 연관되어 있다는 기대는 버"(18쪽, 같은 책)리라고 말이다.

이후 꾸준히 칼럼을 쓰면서 정련된 김규항의 명징한, 그러면서도 울림이 깊은 단문과 달리, 이 첫 작품의 호흡은 길고 불규칙하며 잠언을 연상케 하는 구절이 박혀있지도 않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짧은 글 속에는 김규항이라는 필자가, 바로 그 '지식인들의 문화운동'의 거점 노릇을 더러 하기도 했던 <씨네21>에서, 기존의 명성과 글쓰기 경험 없이도 빠르게 독자를 확보하고 명성을 쌓아갈 수 있었던 원인 요소 중 하나가 굵게 아로새겨져 있다. '지식인 비판', 특히 문화예술계의 지식인들을 비판하고, 그들이 '진짜 문화'를 이해하지도 즐기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 말이다. 비판적 지식인을 비판하고, 평론가를 논평하는 김규항의 복층적 입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4.

픽션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실이 아닌 내용만을 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논픽션이라고 해서 그 속에 캐릭터와 서사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김규항이라는, 10년 넘게 논픽션의 일부인 칼럼을 써온 한 논객 역시, 바로 그렇게 모종의 방식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형성해나갔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의 칼럼들이 단행본으로 잘 편집되어 있는 덕에, 우리는 그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짚어볼 수 있다.

'김규항'은 지식인을 비판하는 '건달'이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나 자신의 일도 아니지만 어딘가 머쓱한 느낌이 드는데, 실제로 김규항은 스스로를 3인칭으로 "건달"이라 칭하기도 했다. 2000년 12월에 <씨네21>에 실린 칼럼 '건달의 2백자평'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영화 취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건달은 자발적으로 극장에 가는 일이 거의 없고(늘 뒤늦게 비디오로 보고) 꼭 봐야 할 영화를 빠트리기 일쑤(올해의 예로는 <공동경비구역 JSA>)이나, 영화는 물론 모든 예술 작품 평가에 객관성이나 권위 따위는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는 나름의 고집도 있다."(같은 책, 257쪽)

(김규항 지음, 리더스하우스 펴냄). ⓒ리더스하우스
이 칼럼에 등장하는 "건달"이 필자 김규항 본인을 지칭하는, 이른바 '오너캐'임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일단 그 "건달"은 지식인을 꼭 김규항처럼 싫어한다. 영화 <박하사탕>에 대해, "모범생 출신들에게 벅찬 감동을 줄 만한 지점이 세상의 쓴맛을 조금이나마 보아 온 건달에겐 피할 수 없는 거북함으로 다가왔다"(같은 곳) 같은 서술 등이 그렇다. 둘째, 그 "건달"은 다른 칼럼에 등장하는 김규항처럼, 이른바 '딸바보'이다. "건달의 딸이 그 애니메이션들의 비디오 출시를 기다릴 수 없다는 견해"를 보였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극장에 가는 일이 거의 없는 건달"도 "애니메이션들만큼은 모조리 극장에서"(같은 책, 260쪽) 보았다.

이렇듯 김규항이 자신의 칼럼을 통해 그려내는 김규항은, 딸을 사랑하고 지식인을 혐오하는 건달이다. 자발적으로 가지 않는 극장을 향해 기꺼이 발걸음을 옮길 만큼 딸을 사랑하고, "밥 대신 맥주를 먹기로 하고 골뱅이 집에 들어"가, "일 이야기에 간간이 '깃발 꼽는 지식인들'을 안주(참으로 질긴 안주)삼아 네댓 시간을 보"(같은 책, 69쪽)낼 수 있을 만큼 지식인을 미워하는 그런 건달이 바로 김규항인 것이다. 자녀를 위해 담배도 끊고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대한민국 아버지의 기본인지라, 우리는 전자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만, 대체 왜 다섯 시간씩 욕을 할 만큼 지식인을 미워하는지는 다소 의아하게 여겨질 수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천천히 더 알아보기로 하자. 아무튼 김규항은 딸을 사랑하고 지식인을 미워하는 건달이다.

그렇게 자신의 '캐릭터'를 잡고 난 후, 김규항은 수많은 주제들과 좌충우돌 맞닥뜨려왔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록 음악이지만, 영화 평론에 있어서도 그는 한결같이 '평론가'들을 비판하는 '건달'의 입장에서 발언했다. 하지만 그가 1998년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과 똑같은 '건달'일 수는 없었고, 그 사실을 김규항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의 머리말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97년 <랜드 앤 프리덤>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그 영화가 낡은 이야기라 생각했다. 한때는 저런 걸 보면서 피가 끓었었지, 하며 쓰게 웃었는지도 모르겠다. 99년 그 영화를 다시 봤을 때 나는 피가 끓었다. 97년과 99년 사이에 내 정신이 변화했고 그 변화의 중심에 98년 시작한 글쓰기가 있었다. 내 삶에 글쓰기라는 불의의 습격이 없었다면 나는 <랜드 앤 프리덤> 따위 신념에 가득 찬 영화는 아예 거들떠보려 들지도 않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같은 책, 7쪽)

대단히 뒤틀린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 한, 김규항이 자신의 딸과 아들을 사랑한다는 사실까지 의심할 필요는 없고 그 의심을 확인할 방법도 없다. 즉,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캐릭터는, 대부분의 부모가 그러하듯이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다. 하지만 '건달'은 다르다. "<랜드 앤 프리덤> 따위 신념에 가득 찬 영화"를 아예 거들떠보려 하지도 않았을, 말하자면 97년 이전의 '원조 건달' 김규항과, 그것을 보며 피가 끓는다는 것을 느끼지만, 바로 그런 취향의 영화에 온갖 '평론'을 붙이면서 혁명의 서사를 이어가려고 하는 비평가들에게 새된 비판을 퍼붓는 '건달 캐릭터' 김규항 사이에는 모종의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자가 생래적이라면 후자는 구성적이다. '지식인을 비판하는 지식인'이라는 애매한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김규항은 "건달"이 되어야만 했다. <씨네21>에 첫 칼럼을 보낸 후 그는 자신의 원고에 대한 반응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지만, "반응이 좋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고 한다(<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91쪽). 첫 번째 원고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면 김규항의 글쓰기가 과연 어떻게 되었을지, 그의 완성된 작품만을 손에 넣고 있는 우리들은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반응이 좋았고, 김규항 스스로도 그에 만족했다. 97년과는 다른, 98년 이후의 '건달'이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5.

▲ <나는 왜 불온한가>(김규항 지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모든 자연인이 그렇듯, 또한 모든 캐릭터가 그러하듯, 김규항의 '건달' 또한 나름의 모순을 안고 있다. 비판하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내적 모순을 안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인간, 혹은 인간의 형태를 지닌 그 무언가일 수가 없다. 바로 그 균열,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요소가 만나고 있는 그 지점에 캐릭터 혹은 인격의 본질이 숨어있는 것이다.

김규항이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는 '건달'은 다른 '먹물'들에 비해 세상의 쓴 맛을 좀 더 본 그런 남자지만, 몇 가지 의외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일단 그는 다른 '먹물'들이 대중들과 소통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한다고 비판하는 것을 본인의 본령으로 삼고 있지만, 그 스스로도 "구사대"라는 운동권 용어를 사용했다가 독자들의 끝없는 질문 세례를 받고 해명 칼럼을 쓴 바 있다. '교양'(1998년 9월, <씨네21>)과 '교양2'(1998년 12월, <씨네21>)가 그것으로, 그 내용 모두 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김규항의 고백을 들어보자.

'교양'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라디오를 듣던 내가 '구사대'가 무슨 말인지조차 모르는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에 놀라 쓴 글이었다. 나는 '구사대'를 모르는 30대 여자 코미디언과 40대 남자 가수 진행자의 교양을 가련하다 했다. 그러나 독자들 가운데는 '구사대'를 모르는 이가 적지 않았다. 나는 <씨네21>의 20대 독자들이 '구사대'가 창궐하던 시대에 10대였음을 잊고 있었다. (, 73쪽)

여기서 그는 20대 독자들이 한때 10대였음을 "잊고 있었다"고 말하지만, 그 표현이 전적으로 정확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1998년 당시 20대였던, 그러므로 구사대가 한창 활개치던 당시 10대였던 독자들은, 김규항이 '건달'을 내세워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예상 독자군에 처음부터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승호와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그 점을 확인해볼 수 있다.

지 : 글쓰기의 대상이 분명하신 거군요.
김 : 그렇죠. 내 글을 읽을 사람이라면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죠. 굳이 극우 세력이나 수구 기득권 세력을 욕하는 글은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자신이 진보적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과 설득력을 갖는 중간계급 인텔리들이나 자유주의자들이 내 비판의 대상이죠.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116쪽)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지승호가 물어보는바 "글쓰기의 대상"이 지니는 두 가지 의미, 즉 글쓰기의 소재로 사용되는 집단 및 그의 글쓰기가 예상 독자로 삼는 집단이 사실상 동일하다는 것 말이다. 김규항은 "중간계급 인텔리들이나 자유주의자"들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며, 동시에 그들이 "내 글을 읽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글을 쓴다. 그러므로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칼럼을 읽는 사람들에게 '구사대'라는 단어의 의미와 용례는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것이라 가정하게 되지만, 실제로 맞닥뜨린 독자의 반응은 그와 좀 달랐던 것이다.

요컨대 김규항의 페르소나인 '건달'은 사실 건달이 아니다. 지식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일단 겁을 먹는 그런 '순박한 민중'이 아니라, 그들을 대신하여 먹물들을 상대로 삿대질을 하고 필요하다면 함성을 지르기도 하는 그런 '배운 건달'인 것이다. 그 건달은 "좌파의 글쓰기"를 하기 위한 페르소나이며, 따라서 "내가 지지하는 계급의 수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말하는"(같은 곳) 사람이다. "중간계급 인텔리들이나 자유주의자"들에게 "민중"의 언어를 전달하는 메신저를 김규항은 스스로의 화자로 삼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 화자인 '건달'과 실제 자연인인 '김규항' 사이의 거리 감각에 있다. 왜냐하면 '건달'의 페르소나 뒤에서 글을 쓰는 김규항 그 자신은, 어쨌건 또 한 사람의 먹물이며 지식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식인이라는 말이 과도하다면, 부인할 수 없는 사실만 몇 개 짚어보기로 하자.

그는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1982년에, 그의 말마따나 "특별한 시기"를 겪고 있던, 즉 학생운동이 참으로 한창이던 한국신학대학교에 들어갔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자신이 비판하는 "문화평론가"들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웃사이더를 위하여>(김정란·진중권·김규항·홍세화 지음, 아웃사이더 펴냄)에서 스스로를 소개할 때 "'진보적 영화도서출판'이라는 아둔한 구상 덕에 90년대 내내 나는 지리멸렬했다"고 말하고 있다. 자연인 김규항은, 적어도 '민중'이나 '건달'보다는, 그가 비판하는 "평론가"에 더욱 가까운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달'이 아닌, 그저 자연인인 '김규항'은 좋은 평론가인가?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그 대답은 그리 긍정적일 수가 없다. "'영화언어 발행인'이라는 매우 영화적인 직함과는 달리" 그리 영화에 전문적이지 않다는 그는, "한 시사월간지로부터 '김규항의 영화에세이'라는 지면을 수락"하여 "극장에 가는 회수를 2년에 한번에서 한 달에 한 번으로 늘"(, 125쪽)렸다. 다시 말해, 매달 영화평을 쓰는데, 오직 그 영화평을 쓸 때에만 해당 영화를 딱 한 번 본다는 뜻이다. 이 또한 '건달'스러운 허세의 표현이고, 실제로는 대단히 성실한 시네필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만을 놓고 말하자면 그렇다. 김규항은 영화를, 반드시 봐야 할 일이 없다면 보지 않는, 그러면서 '영화언어 발행인'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그런 평론가였다.

프랑소와 트뤼포가 한 말처럼,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고, 그 다음은 영화평을 쓰는 것이고, 마지막은 직접 영화를 찍는 것이라고 했을 때, 김규항은 첫 번째 방법마저도 실행하지 않는다. 2013년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그가 <씨네21>에 '광수 생각'이라는 칼럼을 기고했던 1999년 7월의 기록은 그렇다. 그리고 그는 '사회파 감독'으로 알려진 박광수에게, <이재수의 난>까지 포함해 총 여섯 편의 '사회적 영화'를 만든 영화감독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 박광수 감독의 <이재수의 난>. 기획시대

박광수가 사회적 소재를 즐겨 채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통속적인 것을 재미없어 하는 그의 고급한 취향에 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런 취향이야말로 박광수의 창작 방법의 골간인 듯하다. 그러나 박광수의 그런 고급한 취향은 '이재수의 난'이라는 역사적 다이내미즘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하다. <이재수의 난>은 그런 무기력과 그것을 자인하지 않는 박광수의 오만한 결합물이다. (같은 책, 127쪽)

모든 영화평론가가 정성일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극장에 가는 '영화평론가', 혹은 영화 관련 출판업계 종사자가 내놓는 비평을 독자가 선선히 받아들여야 할 이유 또한 없다. 영화를 논하는 사람이 영화의 적극적 소비자가 아니고, 문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이미 다 끝나버린 60년대의 로큰롤만을 줄창 읊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의아한 일이지만, 바로 그런 정당한 의문이 등장할 시점에 김규항은 '건달'의 페르소나 뒤로 숨어버린다. 그리고는 본인이 비평하는 대상 및, 자신의 예상 독자인 "중간계급 인텔리나 자유주의자"들의 위선과 허위의식 등을 짚기 시작하는 것이다.

6.

졸지에 '인터넷 강국'이 되고, 급격하게 성장했던 대중음악 시장이 MP3와 냅스터(Napster) 이후 빠르게 몰락하고, 한국영화가 양과 질 두 가지 측면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정치·사회적인 이슈들을 떼어놓고 볼 때,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 사회는 어쨌건 흥미진진한 볼거리를 끝없이 생산해내는 자동 기계 같은 것이었다. 2002년에는 일본과 공동으로 월드컵을 개최하여 사상 최초의 16강 진출을 넘어 4강에 오르는 위업을 쌓았고, 2004년에는 <실미도>가 사상 최초로 인구 4000만인 나라에서 영화표를 1000만 장을 팔았다. 2006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그마저도 뛰어넘어 1300만 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이끌었다. 이 모든 문화적 현상들은, 그 이면의 사회적·경제적 흐름을 전제하더라도, 어쨌건 적극적 해석과 비평을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건달'과 '아빠'라는 두 개의 페르소나를 손에 쥔 김규항은 늘 한결같을 뿐이었다. '건달'의 자세로 엘리트와 평론가들을 비판하고, 딸 혹은 아들과 대화하면서 '상식', 혹은 '어린이의 눈'을 찾아내 그것을 비판의 근거로 삼았을 뿐이다. 노무현 당선, 노무현 대통령 탄핵, 2004년 총선, 기타 등등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스크린쿼터 축소, 안티조선, H.O.T.라는 아이돌 그룹의 출현과 인기몰이 등에 대해서도 김규항의 논조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어떤 사안에 대한 지식인들의 의견이 먼저 존재하는 한, 그것을 비판하는 김규항의 입장 역시 어떻게든 성립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텔리', '평론가'들의 기존 발언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역으로 산출해내는 일이 쉽지 않거나, 그렇게 하더라도 그의 독자층인 '운동 경험이 있는 3~40대 남성'들의 보편적인 죄의식을 건드릴 수 없거나, 그가 염두에 두는 독자들 말고 다른 집단이 김규항의 글에 반응하기 시작하면, 그는 대체로 자신의 명징함을 잃어버리고 혼란에 빠졌다. '그 페미니즘', '그놈들과 그년들'로 인해 벌어진 논란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주류 페미니즘은 다른 이의 사회적 억압에 정말이지 무관심하다. 이를테면 주류 페미니즘은 모든 사회적 억압의 출발점인 계급 문제에 대해 정말이지 무관심하다. 그들은 아마도 여성이라는 계급이 일반적인 의미의 계급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과연 그런가. 페미니즘을 둘러싼 해묵고 아둔한 논쟁이기도 하지만, 여성의 억압이 근본적으로 계급에서 오는가 성에서 오는가는, '중산층 혹은 상류계급 여성이 하층계급 남성에게서 억압받을 가능성'을 살펴보거나 '중산층 혹은 상류계급 여성의 억압과 하층계급 여성의 억압을 비교'해 봄으로써 간단히 알 수 있다. (<나는 왜 불온한가>, 85쪽)

여기서 우리가 직접, 글쓴이인 김규항이 제시하지도 않은 "'중산층 혹은 상류계급 여성의 억압과 하층계급 여성의 억압을 비교'"한 자료를 찾기 시작하면, 그것은 이 글의 본질과는 어긋난 수고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김규항의 글쓰기 방식을 염두에 두고 이 대목을 다시 읽어보자. 그는 '주류 페미니즘'과 '비주류 페미니즘'을 갈라, 자신을 '비주류 페미니즘'의 대변인 자리에 슬쩍 올려놓고, '주류 엘리트'에 대한 본인의 상투적인 화법을 계속 재활용하고 있다.

문제는 김규항이 은연중의 비판의 대상으로 적시한 "한 대중적인 페미니스트 잡지"나, "한 '도발 전문' 페미니스트"(같은 곳)는 김규항의 죄책감 자극 플레이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데 있다. 김규항은 '건달'의 페르소나로 '주류 페미니스트'의 죄의식도 건드릴 수 있을 것이라는, 10년도 더 지난 지금 돌이켜볼 때 다소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성주의자들은 반발했고, "한 '도발 전문' 페미니스트"로 지목된 최보은 <프리미어> 편집장은 본인의 개인사를 직접 거론하며 반론을 제기했다. 그 글의 제목은 '마지막까지 쓰고 싶지 않았던 글'이며, 지금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 논쟁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야기하는 부담이 적지 않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김규항은 어쩌면 본인의 글쓰기 역사상 최초로 '논객' 노릇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차마 말하지 못하는 지점을 굳이 거론함으로써, 어쨌건 사회적 논의 내지는 논란의 지점을 만들어냈다. 김규항이 비판하는 바, 그런 종류의 '중산층 페미니스트'들은 과연 실존하는가? 혹은 본인이 노동계급을 대변한다는 자의식에 도취된 한 "'노력하는 마초'"의 환상의 반영일 뿐인가? 노동운동이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과연 여성들의 보편적 권익이 신장되는가? 혹은 여성운동이 뿌리를 내리고 성과를 거둠으로써 노동운동이 반사적 이익을 보는 일은 없는가?

논란이 지나치게 커지자 김규항은 잠시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의 연재를 중단했다. 그리고 약 한달 후, "해미"라는 이름의 여성이 보낸 편지에 응답하는 형식의 칼럼을 연이어 세 편 게재하면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보수란 무엇이며 진보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고, 진보주의자도 행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며, 그는 마지막으로 "해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 빠뜨릴 뻔했군요. 대학생이 된 것 축하합니다. 연애와 여행을 많이 하기 바랍니다."(같은 책, 89쪽)

논란의 지점을 열어젖히는 것이 평론가의 첫 번째 임무라면, 그 다음 해야 할 일은 마땅히 그 속에 직접 뛰어들어 현실의 대상 및 자료와 싸움으로써 어떤 '입장'을 형성해나가는 것이어야 할 테지만, 한 달의 휴식을 취하고 돌아온 김규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건달'이 '아가씨'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는지, 본인이 짐짓 그 역할을 떠맡고자 했던 '주류 페미니즘'의 외부에 있는 여성을 칼럼의 수신인으로 불러 세운 후, 진보와 보수와 행복과 연애에 대해 이런 저런 넋두리 비슷한 강의를 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여성 내 소수자의 위치에서 발화해보려던 한 남성의 시도라고 갈무리할 수 있을 '그 페미니즘' 논쟁은, 이렇듯 '노력하는 마초'로서의 김규항을 확인하는 선에서 흐지부지 봉합되었다.

▲ 심형래 감독의 <디 워>. ⓒ영구아트무비

이른바 <디 워> 논란도 같은 맥락에서 되짚어볼 수 있다. 김규항은 "사실 <디 워> 사태의 시작은 <디 워>를 넘어 <용가리>도 나오기 전이다. 언젠가부터 한국의 영화평론가들이 평론가와 평론가 지망생, 그리고 지식인들끼리 읽는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 152쪽)고 지적한다. 같은 패턴이다. 영화평론가 허지웅을 포함해 <디 워>에 대해 감히 비판적인 발언을 내뱉은 이들이 네티즌들에게 폭격을 당하고 있을 때, 김규항은 그 현상을 이렇게 해석했다.

"그들은 타인의 취향에 폭력적인 게 아니라 제 취향을 경멸하는 재수 없는 인간들에 반발하는 것이다. 동네 양아치들이 싸우다 파출소에 잡혀가도 '선빵'을 가리는 법이다."(같은 책, 153쪽)

마음 편히 비판할 수 있는 '기존의 권력'이 있고, 사실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 '기존의 권력'과 어느 정도 접점을 가지고 있는 터라, 사실상 독자의 죄의식을 자극하는 글쓰기가 성립하지 않을 때, 김규항은 우리가 아는 '김규항식 글쓰기'에 늘 실패했다. 그는 '노력하는 마초'일 수 있어도 '주류 여성주의자들로부터 박해받는 비주류 여성'일 수가 없으며, '타인의 취향'이라는 벽을 세워버린 이상 <디 워>라는 영화 그 자체에 대해 유의미한 언급을 할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남은 것은 동네 파출소의 비유를 통한 본인의 비주류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뿐이었지만, 그마저도 <100분 토론>에 출연한 진중권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외치며 대중들의 관심을 한 몸에 쓸어 담아가버리자, 머쓱해지고 말았다.

7.

그리고 이명박이 당선되었다. 촛불시위가 벌어지고 '촛불소녀'로 호명된 소녀들이 단상 위에 올라가 "미친 소 너나 먹어"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자연인으로 돌아간 노무현은 검찰 수사의 피로와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의 남은 지지자들은 분노의 눈물을, 한때 그를 지지했지만 돌아선 이들은 회한의 눈물을, 노무현 정부에 대해 결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없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인간적 연민을 감출 수 없었던 이들은 각자의 방식을 통해, 기나긴 애도의 시간을 이어갔다. 정치는 마치 바삐 째깍째깍 소리를 내지만 시침과 분침이 움직이지는 않는 고장 난 시계처럼 헛돌고 있었고, 언제나 같은 시간을 가리키는 초침처럼 김규항은 "우리 안의 이명박"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들 바빴고 모두 나름의 정략과 묘수를 부리고 있었지만, 역사는 그저 지리멸렬하게 반복되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린이용 진보 잡지 <고래가 그랬어>를 창간하고 그것을 운영하고 있던 김규항은, "이명박 씨의 등장은 한국 사회가 영성의 위기를 맞았음을 드러냈다"(같은 책, 265쪽)고 진단했다. "그렇게 등장한 이명박 씨는 우리의 영성을 더욱 막장으로 몰아간다. 누구든 이명박 씨를 반대하고 욕하는 것만으로 너무나 쉽게 선인이 되고 정의로울 수 있고 심지어 진보적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같은 곳) 이것은 한국의 진보진영 전체가, 노무현 이후 등장한 이명박 정부를 대하면서 겪게 된 문제였다. 검찰 수사와 부엉이 바위의 비극이 벌어지기 전부터 그랬다. 임기 초 촛불시위를 통해 기세가 꺾이면서, 지난 정권에 대한 회고조의 목소리가 높아져갔고, 진보진영은 어떻게든 그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내놓아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김규항이라는 논객 역시, '진보적 엘리트'들을 대상으로 죄책감을 자극하던 자신의 방법론을 새롭게 갱신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터이다. 이미 영화비평이나 음악평론을 한다며 거들먹거리던 '운동권'들은 끝물의 끝물까지 가버린 판에서 떠난 지 오래였다. 쉽게 비판할 수 있는 대상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여성주의를 건드리는 것은 결코 부담이 적은 일이 아니었으며, 한 번 실패한 일을 또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명박이 공적으로 쉽게 거론될수록 '대동단결하여 투쟁'하자는 목소리를 뿌리치기도 힘들어질 상황이었다. 김규항의 답은 이랬다.

결국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이명박 씨와 싸우면서, 그를 욕하면 욕할수록 그와 더 닮아가고 있다. 이명박 씨가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여유만만한 것도 실은 그래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것인가? 그 유일한 방법은 영성의 회복이다. 적은 둘이라는 것, 적은 내 밖에만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도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내 밖의 적과 싸우면서 내 안의 적과 싸우는 것, 말이다. 그래서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일 수밖에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 말이다. (같은 책, 266쪽)

▲ <예수전>(김규항 지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칼럼 모음집이 아닌, 다른 사람과 대화한 내용이 아닌, 즉 그가 직접 '단행본'으로 써낸 유일한 책인 <예수전>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명박이 강남의 대형 교회인 소망교회의 장로라는 점, 그의 이른바 '고소영' 인사 등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었다는 점 등을 논외로 하더라도, 언젠가 김규항은 예수에 대한 책을 썼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글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유지되어온 핵심적 주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의 하느님, 정치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다가 죽은 청년 예수.

그러나 이명박 정권 들어서 주류 기독교에 대한 반발심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으며, 그들이 말 그대로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인식이 퍼져나간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원래도 종교 출판물은 한국 출판 시장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 이명박 전 서울시장부터 비롯해, 공직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고 그것을 공적인 활동과 결부시키는 사례가 속속 생겨났다. 본격적인 기독교 비판론이, 마치 김규항이 처음 글쓰기를 시작하던 당시 본격적인 '영화평론-평론'의 수요가 생겼던 것처럼, 필요해졌던 것이다.

<예수전>은 바로 그런 분위기, 한국 사회가 전체적으로 정신적 축을 상실하고 더 이상 돌지 못하는 팽이처럼 비틀거릴 때, 특히 강남의 대형 교회들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기독교의 존재감이 도드라져 보이게 된 상황을 반영하는 책이기도 하다.

김규항은 신약의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짧은 마가복음을, '신학적 불순물'이 가장 덜 첨가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예수의 삶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최선의 경로로 지적했다. 그리고 그 텍스트를 읽어나가며 자신의 코멘트를 붙이는 방식으로 <예수전>을 기술했다. 문제는 그 방법론이다. '신학' 내지는 '종교'를 배제하고 '예수'를 읽겠다는 목표는 과연 달성 가능한가?

①<마르코복음>은 AD 70년경, 기독교의 교리나 신학의 기초가 만들어진 후 쓰였다. <마르코복음>은 이미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보는 시각에서 쓰인 것이다. ②그러나 예수가 활동했던 당시에 예수는 전혀 그런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예수는 기껏해야 랍비 혹은 세례자 요한의 뒤를 잇는 예언자로 여겨졌을 뿐이다. ③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전제하고 복음서를 읽는 건 예수의 절절한 삶을,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읽는 이유나 가치를 내팽개치는 일이다. ④복음서는 '한 평범한 시골 청년이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게 되었는가'를 증언한 책이지 '하느님 아들의 인간 흉내 쇼'를 적은 책이 아니다. (<예수전>, 63쪽, 원문자는 인용자)

김규항 본인 스스로가, ①에서 적혀있는 바와 같이, <마르코복음> 그 자체가 일종의 '신학적 구성물'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②는 사실과 전적으로 부합하지 않는 진술이다. 왜냐하면 예수 스스로가 자신의 입으로 '나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선언하고, 본인이 직접 가르친 주기도문에서 감히 신을 향해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파격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신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스스로를 '신의 아들'로 간주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다.

따라서, <마르코복음> 자체가 모종의 신학적 시각에 바탕해 쓰인 책이니만큼, 그것을 통해 '순수한 예수'를 발견하는 것은 더욱 난망한 일이 된다. 하지만 김규항은 오직 그것만이 복음서를 읽는 이유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전>의 전체적인 내용이 바로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 '이 예수는 혁명가 예수이며, 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부활과 영생 등과는 상관이 없다'고. 다만 '이 예수의 삶을 본받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고 진보하게 한다'고, 김규항은 말한다.

8.

이 지면은 어떤 신학적 논의를 위해 적당한 공간이 아니므로, 김규항의 논의를 구체적으로 논박하는 일은 최대한 피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의 일관성이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까지는 '문화'의 바리새인을, 2000년대 초부터 중후반까지는 '교육'의 바리새인을 쫓아다니던 그가, 열렬한 개신교 신자 대통령이 당선되고 난 후 본격적인 종교 비판에 나섰다는 것을 우리는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진보파들 중 주류의 시선이 머물다가 떠나는 그늘에 죄의식의 자리가 있다. 김규항은 언제나 바로 그 위치에 자신의 바둑돌을 얹었다.

▲ <고래가 그랬어>(고래가그랬어 편집부 지음, 고래가그랬어 펴냄). ⓒ고래가그랬어
민주화의 성과가 헛되이 정치권에서 맴돌고, 대중들의 시선은 문화로, 미국에서 직배로 수입되는 영화로 쏠릴 때, 운동권들은 부랴부랴 영화를 '공부'하고 문화를 벼락치기해서 이론의 토대로 삼고자 했다. 그 물결 속에 김규항도 있었다. 비록 지지부진하게 끝나고 말았지만 '진보적 영화 언어'를 퍼뜨리는 출판사도 차리려고 했고, 월간지에 영화평을 기고하기도 했으며, 그 모든 문화의 열풍이 식어버리고 난 다음에도 <디 워> 논쟁을 통해 끝까지 '엘리트 평론가'들을 질타했다. 한국에서 영화평론이라는 것이 의미를 갖던 것도 딱 거기까지였다. 이제는 배급력을 가진 멀티플렉스 체인이 다음 1000만 영화를 결정한다. 심지어 네이버 별점도 이제는 믿지 않는 대중들은, 극장 안에서조차 불안해하며 각자의 카톡창을 열어보고 있을 뿐이다.

그 386들의 자녀들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나이가 되자, 김규항도 자연스럽게 교육 문제로 눈을 돌렸다. 그는 2003년 <고래가 그랬어>를 창간하고, 본인이 평생 '멘토'처럼 모시는 고 권정생 선생을 인터뷰했다. 그의 딸과 아들은 모두 유명 칼럼니스트인 아버지의 글에 연거푸 등장하며 '꼬마 현자' 노릇을 했는데, 부디 그 아이들이 앞으로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현명하고 주체적인 판단을 할 수 있기를, 그들을 오직 글로만 아는 나조차 조용히 기원하게 된다. 아무튼 노무현 정부 시절이 그랬다. 아파트 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그만큼 사교육 시장이 불타올랐으며, 이미 집을 가지고 있던 탓에 올라간 집값만큼 여유 자금이 생긴, 혹은 생겼다고 믿은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좀 더 다른', 혹은 '좀 더 나은' 삶을 제공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 속에서 김규항은 '좀 더 인간다운' 무언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리고, 이미 서울시를 자신이 숭배하는 신에게 봉헌한 경력이 있는 전직 서울시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반면, 두 전직 대통령을 같은 해에 떠나보내고, 점점 다가오는 경제적 먹구름 앞에 할 말을 잃어가던 김규항의 독자들은, 그 정신적 공허를 달랠 길이 없었다. 어쩌면, '저들'이 자신들의 탐욕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 또한 우리의 당위를 비춰볼 수 있는 어떤 거울을 필요로 했던 것일지 모르겠다. '교회'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김규항은, 약 10여 년이 지난 후 <예수전>을 펴내며 그의 책을 믿고 보는 독자들에게 '회개'를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김규항이 새삼스레 "부르주아 페미니즘"을 비판하고 나서게 만들었던 장본인인 박근혜가 결국 대통령이 된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김규항이 원고지 10매의 지면을 꾹꾹 눌러 채워가며 만들어낸 비판의 메커니즘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들여다보게 된다. 단정하면서도 뜨거운 산문, 가슴을 치게 만드는 문구들을 차분히 돌이켜보면, 민주화 이후 우리를 홀려왔고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 주박을 풀지 않고 있는 문화적 흐름의 큰 줄기가 언뜻 보인다. 우리는 그 세월동안 많다면 많은 진보를 이루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뭐가 달라졌다고 자신 있게 외칠 수는 없는 것 같다. 김규항이 '교회'를 썼던 1998년이나, <예수전>을 쓴 2009년, 그리고 2013년 오늘까지, 청년 예수는 "내가 신도들에 파묻혀 한 시간 가량의 공허에 내 영혼을 내맡기고 나오면 그 청년은 교회 담장 밑에 고단한 새처럼 앉아 있다."(8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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