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약의 형세가 이미 현저한데 만일 그들(서양)의 기계를 본받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그들의 침략을 막아내며 그들이 넘겨다보는 것을 막겠는가? (…) 다시는 서양이니 왜(倭)니 하면서 근거 없는 말을 퍼뜨려 인심을 소란하게 하지 말 것이다. 각 항구의 가까운 곳에 설사 외국인이 놀러 다니는 경우에도 마땅히 일상적인 일로 보면서 먼저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 이왕 서양의 각국과 좋은 관계를 가진 이상 경외(京外)에 세워놓은 척양비(斥洋碑)는 시기가 달라진 만큼 모두 일제히 뽑아버릴 것이다. 그대 사민(士民)들은 이 뜻을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임오군란(1882년) 이후 고종이 내린 교서다.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거대한 전환기에 처한 조선조 말 고종은 여러 단계를 거쳐 대외관계의 개방적 현실을 만들어나가는 노력을 기울인다. 부인할 수 없이 전개되고 있는 서구 제국주의의 기세 앞에서 국가의 생존과 새로운 내용의 미래를 확보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 교서에 압축된 의식은, 당시 "조공책봉"이라는 중화 체제의 기존 질서가 근대 국제법의 번역인 <만국공법>이라는 질서로 재편되어가는 과정의 산물이었다. 여기서 중요하게 주목되는 바는, 고종이 이러한 정세 변화에 대해 대단히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조의 근대적 고뇌
▲ <조선 정치사의 발견>(강상규 지음, 창비 펴냄). ⓒ창비 |
이와 같은 시도는 조선조 말 고종의 권력이 근대 체제의 도전 앞에서 무지했던 시기의 정권이라는 단순한 평가와 해석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당대의 집권 세력과 국왕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얼마나 절박하고 치열하게 "전환기의 정치"를 재구성하려 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역사의 복원과 해석은 당연히 오늘날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분단된 한국(조선)의 역사적 명운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다.
"조선의 정치 지형과 문명 전환의 위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19세기 동아시아의 격변에 대한 조선 정치의 대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500년 동안 작동해온 조선 정치의 원칙과 현실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 못하면, 근대적 변화를 기준으로 당시 조선조의 사유방식과 행동, 선택을 오해하는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 강상규는 "공론에 의거한 정치 운영의 전통, 왕권에 대한 강력한 견제 구조, 대원군의 광범위한 정치적 영향력, 조야에 팽배한 화이(華夷)론적 명분론" 등에 부딪힌 고종의 현실을 면밀하게 관찰한다. 다시 말해 고종이 아무리 개혁 군주로서 나서고자 했어도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어온 조선 정치의 전통적 운영 방식과 사고 체계가 극복되지 못한 지점에서, 현실에 대한 인식이 점차 바뀌고 있던 고종의 역할은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정통성 취약한 군주, 그러나…
그에 더해 바로 이러한 관찰을 통해 우리는 고종이 당시의 제약을 어떻게 뚫어내고자 진력을 다했는지도 깨닫게 된다. 임진년 7년 전쟁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의 정체성이 혼란에 빠졌고, 이 과정에서 17세기 조선 중화사상이 그것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지만 조만간 이러한 사유 체계는 문명의 대전환기에 도리어 장애가 되고 만다. 중화 체제의 동요와 해체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구질서 체계를 고수하는 것은 국제적 고립을 필연적으로 낳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군신관계에 있어서 군주의 탁월한 영도력이 발휘되었던 영·정조 시대 이후 조선의 정치는 외척과 붕당정치의 폐해에 빠져들었고 왕위계승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고종은 그 정통성이 대단히 취약했다.
사도세자로부터 시작해서 흥선대원군에 이르는 계보는 정통 왕조의 맥락에서 너무 거리가 멀었고 세자로서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의 출발이라는 점은 고종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한다. 그랬던 그가 대원군의 정치적 영향권에서 벗어나 친정을 하기 시작한 이후, 조선 중화주의라는 생각의 틀에서 점차 달라져 가는 세상에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은 흥미롭고 의미 있다. 이 과정에서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역할을 주목한 강상규는, 박규수가 "진주 민란의 수습 책임자인 안핵사, 평양 감사 시절 대동강에서 미국 제너럴 셔먼호와의 교섭과 화공작전 지휘, 양무운동을 벌이던 청에 사절단장"을 지낸 경력이 고종의 대외 관계 인식의 변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한다.
계몽군주의 가능성을 보인 고종
▲ 고종의 초상. ⓒen.wikipedia.org |
"저들의 이른바 황제(메이지 천황)는 나이가 지금 바야흐로 이십오 세인데, 폐지해야 할 것 같으면 관백도 가히 폐지하고 변경해야 할 것 같으면 제도도 변경했습니다. (…) 천하 각국의 사람들이 모두 영사관으로 와서 머물게 되므로, 그 사람들을 먹이면서 그 기술을 배우고 그들을 후대하면서 (…) 곳곳마다 화륜선, 화륜차를 만들고 또 사람을 시켜 먼 곳에서 상업을 경영케 하였으니 요는 온 힘을 다해 재화를 모으기 위한 것입니다. 군신상하가 부지런히 이로움을 취하고 부국강병으로써 급선무를 삼고 있으니 (…) 지금은 경전문자는 무용지물로서……."
일본과 중국의 빠른 변화 앞에서 고종은 결국 대외관계의 다변화로 국제 정세의 어려움을 뚫고 나가고자 노력하게 되며, 이런 과정에서 자신의 개인 금고를 털어 해외에 사신들을 비밀리에 파견하고 유길준, 윤치호 등의 유학생을 만드는 작업에까지 깊이 개입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고종은 중화 체제의 틀에서 조선이 이탈하는 수순을 밟으려 하고, 이에 대한 청의 간섭이 보다 노골화하고 그의 폐위까지 논의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위안스카이(袁世凱)와 리홍장(李鴻章) 사이에 오간 서한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갑신사(갑신정변)는 일본을 끌어들여 청국을 거부하고자 한데서 나온 오류였는데, 근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국을 배척하려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 이 어리석은 군주를 폐위시켜버리고……."
이런 시기를 거치면서 "고종은 청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프랑스와의 조약을 체결하는 추진력을 발휘하게 된다." 고종의 대외적 결단력이 그간 너무 가볍게 평가되었고 때로는 아예 묵살되었던 것인데, 이에 대해 강상규는 이 조불 조약 체결을 맡은 미국인 데니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껏 고문의 역할을 맡았던 데니를 직접 기용하여 실질적인 전권을 부여함으로써 조불 조약이 체결되는 기반을 만들었다. 자신을 조선의 고문으로 파견한 리홍장으로부터 조불 조약 협상에 참가하지 말고 또한 동협상의 처리는 위안스카이에 위임하라는 권고를 받은 미국인 데니가, 자신에 대한 고종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당시 미국의 대리공사 포크의 도움을 받아 협상이 결렬될 위기를 극복한 것이 이러한 고종의 결단력에 의해 비롯된 것임은 기억할 만하다."
고종은 계몽군주의 가능성을 일정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894년 동학 농민 전쟁 이후 벌어진 청일 전쟁은 이러한 동아시아 전체의 세력 균형이 완전히 파괴된 상황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조선이 1648년 베스트팔리아 조약 이후 주권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국제법적 관계로 진입하는 동시에 식민지가 되어가는 과정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고종과 조선조는 자신이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점차 사라져가면서 붕괴되어가는 절차를 밟게 된다. 중화 체제로부터의 이탈과 근대 체제의 주체적 진입이라는 과제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의 거울, 그 눈물겨운 기록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가 새삼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수많은 내외적 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전환의 시기에 위치하게 된 고종이 눈물겨울 정도로 당시의 정세에 대응하려는 여러 노력을 했다는 점이며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할 대목이라는 사실이다. 군주와 신하 간의 만만치 않은 상호 견제와 권력 균형의 정치, 그리고 이에 기반을 둔 조선 정치의 전통이 수백 년의 체제 유지에 기본적인 동력이 되었으나 그것이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면서 상황 적응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어떤 비극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이 근대의 역사는 그 실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정치는 지금 재편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동북아시아 국제 정세에 대한 상황 적응력 내지 주도력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고종의 무력한 모습만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그 당시의 치열한 고뇌와 그것을 통해 만들어진 각종 국가 생존의 전략의 가치가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처지에 있던 국가 그리고 그 정점에 있던 국왕도 혼신의 힘을 기울여 새로운 미래를 창출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돌파하기 위한 역사의 지침을 깨달을 수 있지 않겠는가?
지난 시기의 고통과 우여곡절을 망각하는 공동체는 동일한 오류에 빠지고 있어도 이를 눈치채지 못한다. "역사의 보복"이라는 말은 허망하지 않다. '조선 정치사의 재발견'은 역사로부터 금맥을 캐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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