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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 자본주의'에 맞선 '통조림 진보'를 성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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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 자본주의'에 맞선 '통조림 진보'를 성찰함

[장석준 칼럼] 김수영 45주기에 부쳐

다가오는 6월 16일은 시인 김수영의 45번째 기일이다. 그는 1968년 이 날, 불의의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떠났다. 마흔 여덟 해의 길지 않은 삶이었지만, 그가 남기고 간 자취는 깊고도 컸다. 그는 위대한 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직은 젊고 가난하던 (그리고 아직도 그러한) 한국어로 어떻게 고뇌하고 저항할지 가르쳐주고 간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나 같은 문외한이 김수영의 삶과 문학에 대해 여기에 몇 마디 말을 보탠다는 것은 별 의의도 없을뿐더러 만용에 가까운 짓이다. 그것은 이 지면의 성격과도 맞지 않는 일이다. 나는 다만 그에 대한 추념을 계기로 그가 떠난 뒤 우리가 살아온 세월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뿐이다.

김수영은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전위' 예술가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좌파' 정치 성향이라는 의미에서도 그렇게 불릴 만했다. 4·19 이후 일련의 혁명시를 발표한 것이나 말년에 문단에서 현실 참여를 강조한 것은 난데없는 게 아니었다. 그는 "혁신당"('만시지탄은 있지만')이니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전향기')이니 하는 말들을 시어로 사용하는 사람이었고, 후배들에게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공부를 강조하는 사람이었으며, 쿠바 혁명을 다룬 찰스 라이트 밀스의 <들어라 양키들아>(윤구병 옮김, 장백 펴냄)를 "뜨거운 마음으로, 무수한 박수를 보내면서"(<김수영 전집 2 : 산문>(민음사 펴냄, 1981년), 345쪽) 읽는 사람이었다.

올해 출간된 부인 김현경의 회고록 <김수영의 연인>(책읽는오두막 펴냄, 2013년)을 보면, 그의 이러한 면모가 좀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이 책에는 해방 공간에서 당대의 좌파 예술 거장들과 어울리던 청년 김수영이 나온다. 그 중에는 임화, 김기림, 오장환 등의 문인들뿐만 아니라 월북 작곡가 김순남도 있었다. 또 '도취의 피안'(1954년)처럼 전형적인 서정시로 읽히는 작품도 뜻밖의 역사적 맥락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김수영은 이 시를 "사회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라고 했다는 것이다(<김수영의 연인>, 73쪽).

김수영 사후 한국 저항시의 계보는 주로 민족주의 주위를 맴돌았지만, 정작 그의 시야는 그 정도 전망 너머를 향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우리의 시의 과거는 성서와 불경과 그 이전에까지도 곧잘 소급되지만, 미래는 기껏 남북 통일에서 그치고 있다. 그 후에 무엇이 올 것이냐를 모른다. 그러니까 편협한 민족주의의 둘레바퀴 속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김수영 전집 2 : 산문>, 264쪽)

김수영은 "인류를 위해" 시를 썼다(<김수영의 연인>, 152쪽). 그는 그 시대에 이쪽 땅에서는 가장 치열한 세계인이었다.

이렇듯 김수영은 '진보'파이되 그 '진보' 성향은 무슨 주의로 정리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요체는 세계와 이 땅 사이 시간대의 어긋남에 대한 시인의 유별난 예민함이었다. 한국 전쟁 이후 세계의 시간과 철저히 격리된 채 외딴 섬이 되어버린 남한에서 그는 자신의 시간을, 아니 이 나라의 시간을 다시 세계의 시간에 맞추는 일에 갈급했다. 카프 문학가들이 죄다 떠나버린 군사 분계선 이쪽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끊임없이 되물은 것도, 좁은 틈을 통해서나마 나라 밖 지성계를 엿보는 일을 중단할 수 없었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4월 혁명은 그에게 세상에는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계시였고, 그 후의 사건들은 그런 기적은 좀처럼 기대하기 힘들다는 쓰라린 통보와도 같았다. 이 씁쓸한 깨달음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 혁명의 기술 / 최근 우리들이 4· 19에서 배운 기술"을 노래하며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에 대한 희망을 놓지 못했다('사랑의 변주곡').

▲ 김수영 시인. ⓒ민음사
그리고 그는 떠났다. 김수영이 떠난 뒤 이 땅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잘 알다시피 자본주의 압축 성장이 있었고,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소용돌이가 있었다. 이 과정을 겪고 난 한국 사회는 이제, 김수영 생전과는 달리, 세계의 시간과 걸음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자본주의 질서에 관한 한 확실히 그렇다.

무서운 속도였다. 서구에서 몇 세대 동안 이뤄진 사회와 자연의 변형이 한 세대 안에 이뤄졌다. 굳이 비유하자면, '통조림 자본주의 근대화'라고나 할까. 요리를 익힐 필요도 없이 뚜껑만 열면 먹을 수 있는 통조림처럼 자본주의가 들어섰다. 사람들은 그 천편일률적인 맛에 미각을 길들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 통조림 같은 삶의 방식이 저 위로부터 공수되어 이 땅 위에 착지했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에 맞서며 그 대안을 만들어갈 주체들의 성장이다. 몇 세대에 걸친 서구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는 그에 대항할 주체들 역시 여러 세대에 걸쳐 서서히 성장했다. 사회과학자들이 '노동 계급 형성'이라고 부르는 게 결국 그런 성장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통조림 자본주의 근대화'는 어떨까? 자본주의에 맞설 주체들의 경우에도 '통조림' 성장이 가능할까?

우리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광주 항쟁 이후 1987년을 거쳐 1997년으로 이어지는 대중 봉기들을 경험하면서 그런 빠른 성장이 실제 실현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이러한 봉기의 연쇄가 가로막히고 나자 진실의 시간이 도래했다. 노동 운동과 진보 정당 운동은 한국 사회에 뿌리박지 못한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마주해야 했다. 진실은 비대칭적이었다. 자본주의는 압축 성장이 가능해도 자본주의에 맞설 주체는 그럴 수 없는 것이었다.

요즘에 와서야 진보 진영에서는 운동의 첫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 비어 있는 구석들을 채워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다. 그래서 지역 중심의 노동 운동, 협동조합 운동, 민중의 집 등이 새삼스레 화제가 되고 있다. 노동 '계급' 그리고 사회주의의 그 '사회' 같은, 아직 외래어로 느껴지는 말들을 진지하게 되씹어보기도 한다. 이제야 '통조림 진보'를 벗어날 길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한데 이 반성에서도 시인은 이미 우리를 훨씬 앞질렀다. 잘 알려진 그의 대표작 '거대한 뿌리'의 한 대목이다.

"나는 이자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거대한 뿌리'(1964년)에서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단지 보편성과 대립되는 토속적인 것의 예찬은 아닐 것이다. 도전 과제는, 과거 불교, 신유학 그리고 기독교의 경우에도 그랬던 것처럼, 보편적인 이상을 이 땅의 풍토에서 우리의 이야기로 펼쳐가는 것이다. "내 땅"에 "거대한 뿌리"를 박는 일이다. 40여 년 전 김수영이 내다본 이 지평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아직 머나먼 여정을 남겨두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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