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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의 <동아일보> vs. 2013년의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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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의 <동아일보> vs. 2013년의 <프레시안>

[프레시안 books] 윤활식 외 <1975>

현직 대통령의 성이 박씨이다 보니 요즘 여기저기서 "박 대통령"이라는 문구가 많이 사용된다. 나는 그 문구를 볼 때마다 잠시 멈칫한다. 내 상념의 장막에는 "박 대통령" 하면 먼저 박정희가 떠오르고, 그 그림자를 걷어낸 다음에야 박근혜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지각이 생길 무렵부터 군복무를 하던 때까지 내 인생의 초창기 18년 동안 "박 대통령"이란 박정희의 다른 이름이었다.


박정희와 같은 악인이 권좌를 유지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악랄한 권력자를 인민이 왜 그대로 놔두는지가 청소년기 나에게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이 고민은 결국 나로 하여금 정치학을 전공하게 만든 연유 중 한 부분이었다. 공부를 하면서 박정희를 악인으로만 볼 일은 아니고, 그의 악행도 어떤 의미에서는 상황의 소산이며, 그 역시 불의한 시대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은 영혼이었다는 이해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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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윤활식 외 지음, 인카운터 펴냄), ⓒ인카운터
모든 생물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생물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 생존의 근본 조건이고, 현실에서 뭔가를 이룩해내려면 모종의 절단이 불가피하다는 인간과 사회의 실상을 직시하게 되면서, 박정희의 악행들이 "불가피했다"고 생각하는 발상도 (그것들을 비인간적으로 간주하는 발상에 못지않게) 인간의 속성 바깥이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박정희의 행적, 특히 법과 절차를 자기 마음대로 망가뜨리고, 국가 권력 기관들을 무고한 시민에 대한 고문과 살인 그리고 은폐와 조작의 무기로 둔갑시킨 행적은 준엄하게 비판하더라도, 비판의 와중에 인간에 대한 증오가 슬며시 섞여 들어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박정희는 이미 죽은 지 수십 년 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용서한다는 것은 사실 나 자신이 그의 망령에서 깨끗이 해방된다는 뜻을 함축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박정희의 행적과 같은 일들은 용서는 할 수 있지만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단 역사적 사실로서 잊지는 말아야 하지만, 잔혹하고 끔찍했던 일들을 일상적으로 되살려야 하는 일은 괴로운 일이 틀림없다. 따라서 이런 사연에 관한 회고와 반추는 자체로 선한 일일 수는 없기 때문에, 오로지 필요에 비례해서만 권유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경우, 박정희 시대를 떠올리고 그의 행적을 비판해야 할 필요가 21세기 들어 점점 줄어든다고 생각했었는데, 2010년 이후로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나 공동체를 위해서나 불행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박정희 때문에 젊은 날의 순결한 이상을 좌절당하고, 그럼에도 박정희를 용서하면서 그의 망령을 내보냈으나, 그 망령이 아직도 그악스럽게 주변에 맴돌고 있어서 38년 전의 불쾌한 기억을 무시로 떠올려야 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 있다. 지금은 저질 인쇄물의 대명사로 전락한 <동아일보>가 인민의 신망을 받는 신문이던 시절에, 그 신망에 부응하고자 열성을 다했던 언론인들이다. 언론의 사명을 도외시하고 정권의 은폐 공작에 협조하라는 압박에 정공법으로 맞서다가 결국 직장을 잃고 말았던 분들이다.


정권에게 불리한 소식 전부도 아니고 그중에 사소한 일부 몇 가지마저 보도하지 말라는 압박을 물리치자, 박정희는 기업가들을 협박해서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못하게 차단하는 치졸한 술수를 썼다. <동아일보>를 소유한 김씨 일족은 처음에는 기자들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방해하지는 않았다. 정권의 눈치가 두려웠지만 동시에 신문사의 신망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권의 광고 탄압이 길어지게 되자 결국 김성수의 자손들은 정권의 눈 밖에 난 언론인들을 정당한 사유 없이 해고하게 된다. 그때 일터를 빼앗긴 113명의 언론인들은 박정희가 죽었어도 민주화가 실현되었어도 <동아일보>에 복직되지 못했다. 빼앗긴 직무와 보수를 돌려받기는커녕, 회사로부터 어떤 사과도 지금까지 받은 적이 없다.


본디 유능한 기자들이자 섬세한 문필가들이었기 때문에, 후일 <한겨레>를 비롯해서 이런 저런 언론 기관에서 언론인의 삶을 이어간 사람들도 이중에는 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다가 숨진 이도 있고, 해직된 지 몇 년 만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이도 있으며,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이승을 떠난 이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38년 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 분들에게 박정희와 유신과 은폐와 조작과 고문과 폭행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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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경제학 원리>(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동천 옮김, 나남출판 펴냄). ⓒ나남출판
197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언론계는 체질이 악화되었다. 진실과 양심에 충실하고자 애를 쓰는 사람들이 소수파로 밀려나고, 권력과 자본의 요구에 영합하는 세력이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언론사로서 신망을 지키기 위해 인생을 바친 자사의 기자들을 쫓아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잘못임을 인정하지도 않는 <동아일보>1975년 이후 저질 황색 언론의 대표로 전락하여 모멸과 치욕을 자청하면서 김씨 일가의 물욕에만 충성을 바치고 있다.


이명박이 청와대를 차지하고 앉아 문화방송(MBC), 한국방송(KBS), YTN 등을 길들인 수법은 박정희가 38년 전 <동아일보> 경영진을 무릎 꿇린 수법의 반복일 뿐이다. 은폐와 조작과 교묘한 편집에 저항하는 기자들을 고립시키고, 당근과 채찍으로 이간질하는 술책이 언론사의 사주와 경영진들에게 일상화되어 버린 셈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지금도 <한국일보>에서는 똑같은 사태가 진행 중이다.


1975년에 해직된 기자들은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동아투위소식>이라는 이름으로 대안 언론을 시도했다. 이명박 치하에서 방송사에서 해직당한 언론인들이 <뉴스타파>라는 이름의 대안 언론을 시도하고 있는 장면과 영락없이 겹친다. 굳이 38년의 세월 사이에 차이를 찾자면, 필경해서 등사한 수준의 <동아투위소식>마저도 긴급 조치 위반이라고 얽어매서 형사처벌을 강제하던 것과 같은 광경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정도이다. 이와 같은 직접적인 탄압만 없을 뿐, 정권의 이익보다 진실과 양심을 앞세우는 대안 언론들은 2013년 박근혜의 치하에서도 온갖 종류의 교묘하고 집요한 방해와 억압을 견뎌야만 하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변신하는 시도는 기대와 주목을 받아 마땅하다. 1975년의 <동아일보>에서 (그리고 <조선일보>에서) 양심을 버리지 않은 기자들은 최소한의 진실을 지면에 담고자 했고, 실제로 담았다. 이들이 신문을 제작하는 한, 그 신문이 정권의 기관지로 전락하는 일은 없었다. 폭력, 협박, 회유에 기자들이 넘어가지 않자, 정권은 경영진을 과녁으로 삼았다. 경영진으로 하여금 줏대 있는 기자들을 해고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그 후 이 방식은 대한민국에서 권력이 언론을 장악하는 표준적인 교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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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 인간이기 때문에 누려야 할 권리>(A. 벨덴 필즈 지음, 박동천 옮김, 모티브북 펴냄). ⓒ모티브북
협동조합은 언론사에서 경영진이라는 집단을 아예 없애는 방식이다. 사원, 즉 기자들이 회사의 소유권과 동시에 경영권에도 각자 일정한 지분을 가지는 방식이다. 이는 19세기에 다양한 갈래로 고안되고 실험되기 시작한 이래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박동천 옮김, 나남출판 펴냄) 4편 제7'노동 계급의 미래'를 참조하라), 오늘날에는 주식회사 방식 때문에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으로 공인되고 있다 (벨덴 필즈의 <인권 : 인간이기 때문에 누려야 할 권리>(박동천 옮김, 모티브북 펴냄) 5'인권의 정치경제학을 향해'를 참조하라).


언론 종사자들 자신이 권력과 자본에 영혼을 팔아버린다면 진실이 보도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들이 언론인의 사명을 다하려는 태세를 갖추고 있는데도, 단지 비겁한 경영진 때문에 일자리를 잃고 신문이 광고 전단으로 둔갑하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협동조합 방식은 언론사의 조직과 관련한 아주 유력한 대안이다.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장윤환 외 지음, 인카운터 펴냄)28명이 쓴 글을 모아 놓았다. 동아투위 위원 21, 작고한 위원들의 유족 가운데 3, 그리고 동료 및 후배 및 연구자 4명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이 책을 읽는 내 눈앞에는 치욕스럽기 짝이 없었던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시절의 광경들이 재현되었다. 그 광경들은 거의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현재 대한민국의 실상과 겹쳐졌다. 분명히 괴로운 기억이자 치사한 경험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내내 절망보다는 희망의 불길이 솟는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을 걸고 분투하게 만드는가? 도대체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38년 더하기 몇 년이 될지 알 수 없는 긴 세월 동안 고초와 탄압을 이겨내면서 진실을 추구하게끔 이끄는가?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야 했던 아버지를 마음의 기둥으로 삼아 반듯한 지식인으로 성장하도록 한 소년을 이끈 힘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떤 이론으로도 해명할 수 없는 신비하고 장엄한 요소가 이 근처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강포한 권력이 어떤 잔혹을 부려도, 눈 먼 자본이 어떤 오만을 부려도, 이 요소를 말살하지는 못한다. 아무리 많은 다수가 잔혹한 권력과 오만한 자본 밑에 굽실거리는 길을 선택하더라도, 그것이 잔혹하고 오만하며 비겁한 짓이라는 진실은 감춰지기는커녕 영원한 빛에 의해 더욱 생생하게 조명될 뿐이다.


동아투위의 위원들은 이 자명한 진실에 주목하고 이 진실의 빛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처참하고 치욕스러운 사연들로 이어진 대한민국 현대사를 종식하고 건강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써나갈 수 있는 희망은 오직 이 빛 안에만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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