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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억 년의 먼지에 불과한 너… 그러나 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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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억 년의 먼지에 불과한 너… 그러나 내 전부!

[이명현의 '사이홀릭']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으니 책마다 이 문장을 약간씩 다르게 옮겨놓았을 것이다. 위의 문장은 최근에 내게 들어온 '펭귄 클래식 코리아'에서 펴낸 <안나 카레니나>(레프 톨스토이 지음, 윤세라 옮김)에서 옮겨 적었다.

처음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던 중학교 2학년 무렵에는 이 첫 문장을 그냥 무심코 읽고 지나갔었다. 좀 철이 들어서 다시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려고 책을 펼쳤을 때는 이 첫 문장에 붙잡혀서 몇 날을 그냥 흘려보내고서야 책의 본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얼마 전 세 권짜리 <안나 카레니나>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오랜만에 읽어볼 생각으로 책을 펼쳤다. 이번에도 첫 문장이 내 마음을 붙잡고는 놓아주려고 하질 않았다. 벌써 세 달 가까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첫 문장 속에 살고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으리라.


▲ <코스모스>(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사실 이번에는 첫 문장을 만나기 전에 지나가야만 하는 이 문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다음에야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책 내지에 써져 있는 이 문장 하나가 마음을 붙잡은 것이다. 이 문장을 뿌리치고 겨우 소설의 첫 문장으로 갔지만 언제 그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지, 이번에는 정말 장담할 자신이 없다.

첫 문장이 그 책의 거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그런 책들이 있다. <안나 카레니나>가 그런 책이다. <코스모스>(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도 꼭 그런 책이다.

코스모스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던 <코스모스>(칼 세이건 지음, 서광운 옮김, 조경철 감수, 학원사 펴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주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TV에서 다큐멘터리 <코스모스>를 처음 봤을 때는 내가 느껴가는 감흥을 채 다스리기도 전에 다큐멘터리의 흘러가는 속도를 마냥 따라가야만 했었다. 하지만 책 <코스모스>를 읽을 때는 나만의 감흥의 속도를 유지하면서 <코스모스> 속에 빠져들 수 있었다. 이 책의 첫 문장도 나를 오래 그 곳에 머물게 했었다. <코스모스>는 책을 펼쳐서 첫 문장을 읽고 나서는 그냥 책을 덮어버리고 한참을 생각에 들게 하는 그런 책이다. 또 한참이 지난 다음에 다시 찾아오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나도 첫 문장을 보고 책을 덮고 긴 명상의 시간을 보냈었다. 다시 <코스모스>를 찾았을 때는 더 벅찬 마음으로 쉬지 않고 책을 읽어나갔었다.

단 한 권의 책을 추천하라고 하면 나는 아직까지는 주저하지 않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꼽는다. 사실 세월이 흘러서 이 책에 나오는 우주 이야기 중 많은 부분은 낡은 지식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스모스>는 생명력을 갖고 생동감 넘치는 책으로 살아있다. 이 책 속에는 '경이로움'과 그 앞에 마주 선 우리들의 '허무함'과 그로부터 불사조처럼 피어오르는 '성찰'과 이어지는 '모험', 그리고 '삶'의 이야기가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칼 세이건은 철저한 회의주의자였고 철저한 무신론자였지만 그 속에 '휴머니즘'이 살아있음을 그의 일생을 통해서 또 이 책을 통해 몸소 보여주고 있다.

<코스모스>에 대해서 내가 직접 글을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등학교 때나 대학교 때 그 흔한 독후감을 써내야할 때도 나는 <코스모스>를 아껴두었었다. 근래 들어서는 서평 청탁도 몇 차례 받았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글을 쓸 기회를 미뤄야만 했었다. 한번은 내가 좋아하는 제자이기도 하고 후배이기도 하고 동료이기도 한 천문학자 한 분께 <코스모스> 서평을 부탁하고 나는 이 책을 바탕으로 이어진 대담회의 사회를 맡았었다. 그녀가 <코스모스>를 어떻게 읽었는지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글과 말을 통해서 <코스모스>에 대한 보편적인 느낌의 연대가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이 책은 '경이로움'과 '허무함'과 '성찰'과 '모험'과 '삶'과 '휴머니즘'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얼마 전에 또 다른 <코스모스> 서평 청탁을 받았는데 단박에 거절했다. 고백하자면 사실 1~2초 정도 마음이 흔들리기는 했었다. 서평 청탁을 거절하기 어려운 분이 부탁을 했지만 내가 끝내 거절한 이유는 단순했다. 서평이 실릴 곳이 내가 글을 쓰지 않기로 한 바로 그 신문이었기 때문이었다. 1~2초 간 망설인 이유는 당연히 그 책이 <코스모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코스모스>도 나를 찾아오고 있었다.

엊그제 어느 카페 옥상에 마련된 작은 야외무대에서 <코스모스>로 강연을 했다. (바로가기☞) 이 강연을 준비하면서 먼저 새로 번역된 <코스모스>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는 오래 전에 번역된 <코스모스>를 찾아서 또 다시 읽었다. 두 권 모두 첫 문장을 만나서는 통과의례를 치르고서야 통독을 하고 정독을 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코스모스> 서평을 쓰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강연이 가교 역할을 했다.

코스모스를 정관하노라면 깊은 울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그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아득히 높은 데서 어렴풋한 기억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주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코스모스를 정관한다는 것이 미지 중 미지의 세계와 마주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울림, 그 느낌, 그 감정이야말로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하게 되는 당연한 반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코스모스> 첫 문장에 이어지는 글이다. 옛 번역본에서는 이렇게 옮기고 있다.

우리의 사고력은 극히 빈약하지만 우주를 생각하노라면 우리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는 달뜨며 먼 옛날을 회상하는 것 같은,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와 같은 그런 기분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참으로 위대한 신비의 세계로 다가간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흥분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연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밤하늘의 별들이든 우거진 숲이든 여름철 뭉게구름이든 간에.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우주가 어떻게 탄생해서 어떤 진화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이렇게 광활한 우주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연 앞에 선, 우주 앞에 선 작은 인간으로서 자신이 느낀 막막한 경이로움을 들려주고 있다. 우리가 가끔씩 문득 경험하는 범할 수 없는 뭐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막막한 바로 그 '경이로움'을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그래서 <코스모스>는 '경이로움'에 대한 책이다.

엊그제 했던 강연에서 나는 화성에서 찍은 지구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토성 고리 사이로 보이는 지구의 사진도 보여주었다. 우리가 지구에서 화성이나 토성을 그저 하나의 점으로 보듯이 그곳에서 본 지구는 작은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1977년에 지구를 떠난 우주탐사선 보이저 호가 1990년 명왕성 궤도쯤에 다다랐을 때, 카메라를 지구를 향해 돌려서 찍은 지구 사진도 보여주었다. 태양계를 떠나 우주 공간으로 날아갈 보이저 호가 우리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다. 물론 칼 세이건의 아이디어였다. 픽셀 하나 보다도 저 작은 점으로 찍혀 있는 지구의 모습.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말조차 무색하리만큼 그저 잡음 같은 작은 점 하나가 태양빛을 간신히 반사하고 있었다. 그 작은 점 속에, 1990년 당시의 지구에 우리들이 살고 있었다.

우주의 경이로움은 곧잘 '허무함'을 대동하고 찾아온다. 우주의 나이 137억 년은 우리의 뇌가 가늠하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다. 그 크기가 무한한지 유한한지조차도 확정할 수 없는 우주의 크기는 그거 광활하다고밖에 더 붙일 수사가 없을 정도이다. 우주의 경이로움을 느끼는 순간 우주의 경이로움 앞에 노출된 순간 우리는 그 앞에서 초라함을 느끼고 왜소함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곤 한다. 그리고는 바로 '허무감'이 찾아온다.

그래서 <코스모스>는 '허무감'에 대한 책이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경이로움과 함께 찾아오는 '허무감'을 그냥 외면하지 않는다.

알고 보니 지구는 참으로 작고 참으로 연약한 세계이다. 지구는 좀 더 소중히 다루어져야할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지난 수천 년 간 우리를 압도하는 자연의 경이로움과 그 속에서 우리를 찾아오는 허무감과 두려움 때문에 가상의 세계를 만들고 위안을 찾아왔다. 종교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해준 가상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종교는 세월이 흐르면서 권력이 되었고 또한 문화가 되었다. 좋든 싫든 인간 종과 운명을 같이 할 문화유산이 되었다. 칼 세이건은 무신론자지만 <코스모스>에서 다양한 종교와 문화권에서 생겨난 설화와 신화를 인용하고 소개하고 있다. 그것들이 곧 인간의 문화유산이고 허무감과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사용한 과거의 도구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코스모스>가 위대한 것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미래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코스모스>는 우주가 태어나고 그 속에서 별들이 만들어지고 은하가 형성되는 과정을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이고 있다. 아주 작고 뜨거웠던 빅뱅 직후의 우주 공간 속에서 수소와 헬륨 같은 원소가 만들어졌다. 우리가 지금 호흡할 때 들락날락거리는 수소는 모두 우주의 나이가 불과 38만 년 정도 되었을 무렵 만들어진 것이다. 수소가 산소와 붙어서 물이 되는데 그 수소가 모두 그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태곳적에 만들어진 수소를 계속 재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가 팽창하면서 시간이 지나자 수소 가스로 만들어져있던 가스구름이 뭉쳐지면서 밀도가 올라가고, 온도가 높아지면서 수소 원자핵과 수소 원자핵이 결합되는 핵융합 작용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빛이 만들어졌다. 최초의 별이 탄생한 것이었다. 별들은 일생을 살면서 계속 핵융합 작용을 하면서 빛을 만들어낸다. 그 작용이 다하면 별은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별 내부의 핵융합 과정에서 산소, 질소, 탄소, 황, 인 같이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인 원소들이 만들어졌다. 별은 죽어가면서 자신이 만들어낸 원소들을 다시 우주 공간으로 돌려보내게 된다.

태양보다 훨씬 더 무거운 별들은 일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초신성 폭발을 일으킨다. 그 격렬한 순간 많은 종류의 금속 원소들이 생겨나게 된다. 물론 그때 만들어진 금속 원소들은 다시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게 된다. 별의 탄생과 죽음이 반복되면서 가스구름 속에는 산소나 산소 같은 원소들 뿐 아니라 다양한 금속 원소들이 풍부해져 갔을 것이다. 이런 별들의 일생이 서너 번 반복된 어느 가스구름 속에서 태양계가 탄생했다.

우리는 코스모스에서 나왔다. 그리고 코스모스를 알고자, 더불어 코스모스를 변화시키고자 태어난 존재이다.

당연히 태양이나 지구는 여러 원소들이 풍부한 토대 속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지구라는 행성에서 생명이 태동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긴 진화의 시간을 지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또한 우주 전체에 대해서 생각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성찰'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인간은 우주 속에 살면서 우주를 통째로 고찰하고 그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성찰할 줄 아는 멋진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생각하는 별먼지'라고 부른다. 빅뱅으로 시작한 우주가 수소 같은 가벼운 원소를 만들어냈고, 별 내부에서 수소와 수소가 결합하면서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원소들을 만들어냈고, 초신성이 폭발하면서 금속 원소를 만들어 냈다. 이 모든 과정이 끊어지지 않고 137억 년의 유구한 우주의 역사를 지켜왔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 자신과 우주를 생각하면서. 결국 우리 인간은 우주의 광활함과 유구함 앞에 한없이 작고 초라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우주의 탄생과 진화에 대한 과학적 성찰을 거치면 사실은 우리가 이 모든 우주의 역사를 한껏 머금은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우주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즉 과학을 통해서 '허무함'을 극복하고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가상의 종교나 초월적인 존재를 상정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탐구할 수 있는 존재임을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를 통해서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 게다.

그래서 <코스모스>는 '성찰'에 대한 책이다.

그리하여 지구상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외계 문명과의 교신을 이룩함으로써 지구 문명도 은하 문명권의 어엿한 구성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코스모스>가 그냥 성찰에만 그쳤으면 그저 그런 철학책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코스모스>에는 우주의 고귀함을 머금은 존재로서의 인간 종이 나아갈 미래에 대한 더 깊은 성찰과 실천의 의지가 스며있다. '생각하는 별먼지'라는 자각은 우리가 우주 그 자체라는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당연히 또 다른 '생각하는 별먼지'를 찾아나서는 대장정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미래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결국은 우리 자신에게 던졌던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여정이기도 할 것이다.

칼 세이건은 우리에게 우주로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당당한 우주의 일원이 되라고 말하고 있다. '모험'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인간은 이제 겨우 달에 두 발을 디뎠을 뿐이다. 화성까지 유인우주선을 보내는 것도 아직은 힘겨워 보인다. 하지만 우주로의 모험이 시작된 이상 인간 종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주 공간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생각하는 별먼지를 향한 구애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코스모스>는 우리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실제로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 과학적 성찰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모험을 멈추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그래서 <코스모스>는 '모험'에 대한 책이다.

인류는 우주 한구석에 박힌 미물이었으나 이제 스스로를 인식할 줄 아는 존재로 이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기원을 더듬을 줄도 알게 됐다. 별에서 만들어진 물질이 별에 대해 숙고할 줄 알게 됐다. 10억의 10억 배의 또 10억 배의 그리고 거기에 10배나 되는 수의 원자들이 결합한 하나의 유기체가 원자 자체의 진화를 꿰뚫어 생각할 줄 알게 됐다. 우주의 한구석에서 의식의 탄생이 있기까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줄도 알게 됐다. 우리는 종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하며, 지구에게 충성해야 한다. 아니면, 그 누가 우리의 지구를 대변해 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생존은 우리 자신만이 이룩한 업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인류를 여기에 있게 한 코스모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우주의 경이로움에 대한 이야기와 인간의 성찰에 대한 이야기를, 결국 우리들 자신의 현실 문제로 환원시키고 있다. 지구는 결국 우리 인간 종이 사랑하고 지켜내야만 할 유산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핵전쟁에 반대하고 소수자를 위한 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평화로운 지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코스모스>는 우주에 대한 이야기책이지만 인간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놓치지 않는 우리들의 삶의 지침서 같은 책이기도 하다. 칼 세이건의 눈은 먼 우주를 향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는 한순간도 그 눈을 우리들 자신에게서 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코스모스>는 '삶'에 대한 책이다. 그래서 <코스모스>는 또한 '휴머니즘'에 대한 책이다.

For Ann Druyan

In the vastness of space and the immensity of time,
it is my joy to share
a planet and an epoch with Annie.


<코스모스>의 첫 문장이 시작되기 전에 책의 내지에서 만나게 되는 이 문장이야말로, 책장을 한참 동안 넘기지 못하게 하는 범인일 것이다.

앤 드루얀을 위하여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하나의 기쁨이었다.

홍승수는 그 구절을 이렇게 옮겼다. <코스모스> 전체를 흐르는 서사적이고 장엄한 느낌을 주는 번역문의 분위기가 이 문장의 번역에도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앤 드류언에게

광대한 우주, 그리고 무한한 시간,
이 속에서 같은 행성, 같은 시대를
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면서.


서광운은 같은 문장을 이렇게 옮겨놓았다. 오래 된 서광운의 번역은 칼 세이건의 포근한 우주 이야기를 잘 전달하고 있다. 서광운의 <코스모스>는 내게는 포근한 첫사랑의 추억 같은 책이다. 홍승수의 새로운 번역본은 칼 세이건을 재발견하고 미래를 다시 꿈꾸게 하는 책이다.

앤 드루얀을 빼 놓고는 칼 세이건을 이야기할 수 없다. 칼 세이건의 세 번째 아내이자 마지막 아내였다는 게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앤 드루얀은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의 첫 문장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런 무지막지한 헌사를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불안정한 인간 칼 세이건을 그녀의 품안으로 끌어들였고 그의 잠재력을 폭발시킨 장본인이 그녀였기 때문이다. <코스모스>를 쓸 때도 앤 드루얀은 칼 세이건의 동지이자 매니저이자 공저자였다. 무엇보다 그들은 서로가 있어서 행복했었다. 내가 앤 드루얀을 만났을 때도 그녀는 온통 칼 세이건 이야기뿐이었다. "지금도 칼은 나에겐 모든 것 그 자체예요." <코스모스> 첫 문장을 낭독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면서 여전히 수줍은 미소를 짓던 그녀 모습이 생생하다.

그래서 어쩌면 <코스모스>는 '앤 드루얀'에 대한 책이다.

한참 잊고 지냈거나 늘 바로 옆에 있지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소중한 사람들에게 칼 세이건이 앤 드루얀에게 바치는 헌사를 살짝 빌려와서 이런 문자를 보내보면 어떨까.

광대한 우주, 그리고 무한한 시간,
이 속에서 같은 행성, 같은 시대를
OOO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면서.
XXX로부터.


그래서 어쩌면 <코스모스>는 우리들의 'OOO'에 대한 책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또 어쩌면 <코스모스>는 우리들의 'XXX'에 대한 책일지도 모른다.

칼 세이건이 다시 그리워졌다. 가슴이 다시 벅차게 뛴다. 다시 <코스모스>를 읽어야겠다. 아무 별이나 보고 싶다.

사족. 그 날 강연이 끝나고 오래된 친구와 함께, 그동안 건강 때문에 찾지 못했던 어느 정든 카페를 정말 오랜만에 찾아갔었다. 그곳에서 와인을 한잔 하고 그 친구가 좋아하는 다른 카페에 가서 옛날 노래를 한껏 들었다. 송창식의 '나의 기타이야기'와 김민기의 '친구'는 여전히 정겨웠다. 그 친구의 집 앞 공원 벤치에 앉아서 한찬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늘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를 재발견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중간에 벤치에서 일어나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무슨 별을 보았을까. 이 글이 나갈 때쯤 그동안 묵혀두었던 그 문자를 나도 그 친구에게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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