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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 직전 300명 공장, 노동조합이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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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 직전 300명 공장, 노동조합이 살렸다

[장석준 칼럼]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의 만남

지난주 토요일(6월 1일) 서울 북한산 인근에서 조촐한 토론회가 있었다. '다른경제포럼'이 주최한 행사였다. '다른경제포럼'은 진보 정당(현재는 주로 진보신당)에 몸담으면서 동시에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에 관심을 갖고 직접 참여하는 분들의 모임이다.

민중당부터 지금까지 진보 정당 운동의 한 길을 걸어온 고참 활동가들이 주축이며 협동조합 전문가로 이미 이름이 알려진 이론가들도 함께 하고 있다. 나는 분에 넘치게도 이 토론회에 지정 토론자로 초청받아 모처럼 많은 것을 새롭게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주최 측은 몇 가지 토론 주제를 미리 정해 지정 토론자들에게 제시했다. 그 중에는 이런 물음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이 전혀 별개의 운동으로 생각되곤 한다.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의 만남은 가능한가? 이것이 가능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기억나는 대로 다시 정리한 것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요지는 이런 것이었다.

이 물음에 나는 그다지 시원스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한국의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둘 다 크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 외에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토론회 끝나고서도 이게 못내 아쉬웠다. 우리의 방략을 제시할 정도가 못 된다면 다른 나라의 흥미로운 사례라도 소개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래서 이 지면을 빌어서나마 그 외국 사례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최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지난 달 시카고에서는 한 창틀 제조 공장이 문을 열었다. 'New Era Windows Cooperative'. 우리말로 하면 "새 시대 창문 협동조합"쯤 되겠다. 종업원이 300명 안팎인 중소기업인데, 사장이 따로 없다. 모든 노동자가 다 사주(社主)인 직원 협동조합이다. 사실 이 공장은 이번에 처음 설립된 게 아니다. 그 전에는 'Republic Windows and Doors'라는 일반 사기업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협동조합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일까?

그 전환점은 2008년 금융 위기였다. 미국을 덮친 경제 위기의 여파로 Republic 역시 경영난에 봉착했다. 경영진은 공장 폐업을 고려했다. 300여 명의 노동자들이 갑자기 실업자 신세가 될 판이었다. 이 회사 노동자들은 '미국 전기·라디오·기계 노동자 연합(UE)' 조합원들이었다. UE는 미국의 산업 노동조합 중에서도 전투적이고 진보적인 것으로 이름난 조직이다. 이 전통이 다시 한 번 발휘되었다. Republic 노동자들은 공장 점거 파업에 돌입했다.

Republic 점거 파업은 마치 1930년대 대공황 시기의 치열한 노동 투쟁을 연상시키며 전국적인 쟁점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낭보가 들려왔다. 시카고의 한 업체가 Republic을 인수하기로 하면서 고용과 단체 협약도 모두 승계하기로 한 것이다. 투쟁은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에는 일렀다. 공장을 새로 인수한 업체 역시 경영난을 이유로 자본 철수를 결정했다. 노동자들은 또 다시 공장 점거 파업에 들어가야 했다. 사측 입장은 확고했다. 더 이상 수익성 없는 사업에 손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선심 쓰듯 한 가지는 양보했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인수해 살려볼 의향이 있다면 인수 자금을 마련할 때까지 기다려줄 수는 있겠다는 것이었다. 이게 작년 일이었다.

Republic 노동자들은 직원 협동조합 형태로 일터를 되살리기 위해 1년 동안 동분서주했다. 문제는 역시 자금이었는데, UE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다행히도 돈 빌릴 곳을 찾았다. 뉴욕에 소재한 마이크로 금융 'The Working World'가 그곳이었다. 그래서 올해 5월에 'New Era Windows Cooperative'라는 새 이름으로 공장이 다시 문을 열게 된 것이다.

ⓒnewerawindows.com

사실 국내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는 없지 않다. 지금도 몇 군데에서 자본이 영업을 포기한 업체를 노동자들이 인수해 스스로 경영하는 실험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New Era 실험에는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한 가지 참신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이들이 천명한 '노동조합-협동조합 파트너십'이다.

이들은 '노동조합 협동조합(union co-op)'이라는 새로운 협동조합 모델을 만들겠다고 한다. 직원 협동조합으로 전환한 이후에도 전 사원이 산업 노동조합 UE의 조합원으로 남아 유니온 숍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New Era 노동자들은 직원 협동조합 조합원일 뿐만 아니라 산업 노동조합의 조합원이기도 하게 된다. 1인 1표의 투표로 경영자를 뽑고 다시 단체 교섭으로 그 경영자를 제어하게 된다. 경영에 개입할 이중의 통로를 확보하게 되는 셈이다.

흔히 협동조합에 따라붙는 의심과 비판 중 한 가지는 그 변질 가능성이다. 처음에야 노동자들이 경영자를 선출하더라도 결국은 그 경영진이 다른 자본의 담지자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을 착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다른 기업들과 경쟁하다 보니 이런 위험을 피하기 힘들다. 그래서 소비자 협동조합과는 달리 직원 협동조합은 몽상에 불과하다는 숙명론이 힘을 얻는다. New Era의 '노동조합 협동조합' 모델은 노동조합의 견제와 개입을 통해 이 위험을 극복해보려는 시도다.

New Era만이 아니다. 미국의 다른 곳에서도 '노동조합 협동조합' 모델이 추진되고 있다. 피츠버그에서는 종업원 100명 규모의 세탁 업체가 노동자(직원) 협동조합 형태로 발족했다. 그 설립 주역은 미국의 가장 막강한 산업 노동조합들 중 하나인 '철강노동자연합(USW)'이다. USW가 세운 이 세탁 업체에서도 종업원은 협동조합 조합원이면서 동시에 USW 조합원이다.

노동조합이 협동조합을 설립하는 실험은 자칫 거대 산업 노동조합의 수익 사업으로 그칠 위험을 안고 있다. 협동조합의 선출직 경영진이 흔히 자본주의적 경영자가 되는 것처럼 노동조합이 또 다른 주식 투자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노동조합 협동조합' 모델은 협동조합을 산업 노동조합의 유니온 숍으로 만들어서 이를 피하고자 한다. 이 모델에서 USW는 투자자일 뿐만 아니라 소속 조합원의 단체 교섭을 책임져야 할 주체다. 그래서 영업 장부의 시각과 노동 현장의 시각 사이의 균형을 찾는 새로운 도전에 임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USW가 몬드라곤 국제 그룹 미국 지부와 힘을 합쳐 이 실험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몬드라곤이라면, 노동자(직원) 협동조합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곧잘 거론되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협동조합 기업 집단이다. USW와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작년 3월에 발표한 공동 성명을 통해 '노동조합 협동조합'이야말로 경제 위기와 대량 해고 시대를 헤쳐 나갈 "99%를 위한 기업"이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바로 보기)

이러한 미국 노동 운동의 시도가 태평양 건너의 신기한 소식일 뿐일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없을까?

이 나라에서는, 날로 늘어만 가는 서비스 영역에서 비정규직 유혈 착취 외에 다른 경영 방식이 있을 수 없다는 게 공리처럼 되어 있다. 노동조합이 직접 서비스 산업에 노동자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하는 USW식 실험은 이런 공리를 깰 실물화된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또한 노동조합이 협동조합 운동에 기여하면서 그것을 노동 운동의 여러 물줄기 중 하나로 되찾아올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 물음을 협동조합 운동의 관점에서 던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협동조합이 자본주의 기업의 경영 방식을 도입해 결국 일반 사기업의 노사 관계를 닮아가는 것은 불가피하기만 한 것일까? New Era의 경우처럼 노동자(직원) 협동조합이면서 동시에 산업 노동조합의 유니온 숍인 작업장을 만든다면 어떨까? 협동조합 총회에 더해 노동조합 총회를 통해 노동자가 경영을 제어할 이중의 통로를 확보한다면 말이다.

막힌 것은 세상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의 상상력이고 단 한 발이나마 앞을 향해 내딛으려는 의지다. 우리보다 먼저 심각한 경제 위기에 맞닥뜨린 미국 노동자들(아르헨티나가 아니라 미국!)이 감행하고 있는 도전이 지금 이것을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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