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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지 않고, 소비하지 않고, 국가를 전복할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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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지 않고, 소비하지 않고, 국가를 전복할 권리!

[3인1책 전격수다]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

몇 번의 봉기가 있었다. 2011년 '아큐파이 월스트리트'가 맹렬하게 펼쳐졌을 때만 해도, 미국 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자발적으로 벌어진 저항 운동이라는 점 때문에 혹시 세상이 뒤바뀌려나 놀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다시금 모든 것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직전인 2010년,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이 <세계사의 구조>(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를 썼다.(고진이 2011년의 저항이 사그라드는 풍경을 보았다 하더라도 이 책의 내용이 결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1990년 경 동구혁명과 소련연방의 해체, 뒤이어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선언에 자극받았고, 1999년 "시애틀의 반 글로벌리제이션운동으로 상징되는 분위기"를 지켜보면서 "각국에서의 자본과 국가에 대한 새로운 대항운동"을 구상했다. 그러나 2001년 그 같은 생각을 담은 <트랜스크리틱> 출판 즈음 발생한 9.11 사태 이후 생각이 달라졌다고 했다. 그는 "자본과 국가에 대한 대항운동은 일정 레벨을 넘어설 경우, 반드시 분열"되어버린다는 점을 통감하고는 <트랜스크리틱>의 고찰을 좀더 근본적으로 파고들기로 했다. 그리하여 쓴 책이 <세계사의 구조>이며, 그는 이 책에서 칸트를 끌어들여 '세계동시혁명'을 주창했다. <세계사의 구조>는 가장 동시대적이고 긴급한 외침이다.

도서평론가 이권우(한양대 특임교수), 서평가 이현우(필명 '로쟈'), <프레시안> 기자 김용언 세 명이 다양한 주제의 책들을 선정하여 같이 읽고 토론하는 자리, '3인 1책 수다'는 인터파크도서 웹진 <북앤>
(☞바로 가기) 에 동시 게재된다. <편집자>

▲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현우, 김용언, 이권우. ⓒ최형락

가라타니 고진, 현재진행형의 놀라운 사상가

이현우 : 가라타니 고진은 국내에 이미 많은 책이 번역된 저자입니다. 도서출판b에서 나오는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의 10권 리스트에 이 <세계사의 구조>가 포함되었고, 컬렉션 리스트 외에도 몇 권이 더 나올 예정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푸코나 들뢰즈 등의 유럽 철학자들이 대표적으로 많이 소개되었는데, 동아시아권에서는 고진이 압도적으로 많이 읽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진이 한국에 처음 수용될 때는 국문학 연구자 중심이었습니다.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옮김, 도서출판b 펴냄)이 많은 영향을 끼쳤죠. 2004년 계간지 <문학동네>에 실린 '근대문학의 종말'이라는 논문이 실렸을 때부터 한국문단 안팎으로 큰 논쟁을 불러왔는데, 그걸 확장시킨 책 <근대문학의 종언>(박유하 옮김, 도서출판b 펴냄)도 상당한 화제가 되었습니다. 국내에 소개된 비평집 중에는 가장 많이 팔린 책이라고 알고 있어요.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 종언론에 대해 우호적으로 동의한다기보다 비판적인 견해가 국내 문단에선 더 많은데, 오히려 문단 바깥의 독자들에게는 더 큰 공감을 얻고 있는 듯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고진은 이전까지 자기 자신을 비평가로 칭했는데 <세계사의 구조>는 좀 예외적입니다. 사상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자부심이랄까,(웃음) 그런 게 좀 보이는 책이죠. 대신 고진의 '비평' 역시 좀 특이한 성격을 띱니다. <트랜스크리틱>(송태욱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도 썼는데,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어내는 게 비평이라고 생각해요. 경제학과 출신이라는 배경에서 출발했겠지만, 독특하고 자극적이죠. 지금껏 개별 텍스트를 치밀하게 해설하는 게 비평이라고 여겨졌지만, 그의 발상과 스케일이 남다릅니다.

저는 맨 처음 <탐구>(권기돈 옮김, 새물결 펴냄)라는 책을 읽으면서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어 경악했습니다. 그 이후 국내 소개된 고진의 모든 책을 읽었죠. 그는 일본 내에서도 거의 유일무이한 수준의 비평가이며, 60년대 말의 전공투 세대가 아닌 60년대 초반의 안보 세대로 분류되는 1941년생입니다. 아사다 아키라 등의 '제2의 고진', '제3의 고진' 같은 인물들이 계속 소개되고 있지만, 고진은 극히 예외적이고 독특한 입지의 비평가라 할 수 있습니다.

▲ <세계사의 구조>(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 ⓒ도서출판b
<세계사의 구조>의 전작 <세계공화국으로>(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와 <트랜스크리틱>에서부터 이미 가라타니 고진의 독창적인 교환양식론이 소개됩니다. 마르크스는 생산양식이라는 관점에서 세계사를 해석하고 사적 유물론을 정립했는데, 고진은 그걸 보완해서 교환양식론으로 보는 세계사를 얘기했지요. 그리고 그 주장을 해명하는 탄탄한 이론적 뒷받침이 바로 이 <세계사의 구조>입니다. 고진 독자에게도 충분히 흥미로운 책이기도 하지만, 마르크스의 독자라든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에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더라도 대안이 막막한 독자들에게 충분한 지적 자극을 줄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 가지 문제라면 이게 그냥 읽으면 되는 책인지라…(웃음) 어떤 말을 덧붙여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얘기 나누면서 이슈를 찾아가보지요. 먼저 읽은 소감을 한 마디씩 해주신다면요.

이권우 : <세계사의 구조>의 요약본이 <세계공화국으로>라고 하시니 그걸 읽으셔도 될 것 같은데, 제 생각엔 이 책은 맨 앞의 서문과 329쪽의 어소시에이셔니즘 파트부터 읽는 것으로도 주요 핵심은 파악됩니다. 다만 꾸준하게 교양적 차원에서 논의됐던 책들을 따라온 독자라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데, 그런 사전지식이 없다면 어렵게 느껴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스의 증여론, 마르크스의 자본론, 월러스틴의 근대세계 체제와 칼 폴라니까지 읽은 분들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에요. 그들의 문제의식을 수용하면서 고진이 독자적으로 자기 사유를 펼치는 부분은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이런 책은 오히려 틈틈이 읽으면 무슨 말인지 모르고요, 내리 읽어야 합니다.(웃음)

문제의식은 아주 선명하고 탁월해요. 동원되는 이론가들에 대한 이해도 놀랍고. 다만 대안이 무엇인가를 중점적으로 찾는 분들에게는 결말 부분이 좀 허탈할 수도 있습니다. 거꾸로 현재 협동조합 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이 책을 꼭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분배적 정의에서 벗어나 교환적 정의, 그러니까 격차를 낳는 시스템의 폐기를 새롭게 얘기하니까요.

고진은 칸트를 매우 집중적으로 살피는데, 칸트를 재해석하여 정의론을 펼친 사람이 존 롤스고, 롤스로 상징되는 선진자본주의가 분배적 정의라는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면 가라타니 고진이 결국 교환의 정의를 새롭게 얘기한다는 걸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진은 교환양식C, 즉 자본주의적 강고한 체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협동주의 방식을 높이 평하고 그에 따라 프루동도 새롭게 재평가하지요. 오늘날 우리가 자본주의적 교환양식을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이 무엇인가를 물을 때 그 대안이 협동조합이라는 점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책입니다.

김용언 :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 하는데요. 대학교 3학년 때 이후로 마르크스 관련 이론서를 한 권짜리로 제대로 읽은 게 이번이 처음이라서 굉장히 힘든 독서였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도 서지 않고 감히 코멘트를 할 입장이 못 되는 듯합니다. 오늘은 무조건 배우겠다는 자세로 경청하겠습니다.

▲ 김용언. ⓒ프레시안(최형락)
다만 아까 이현우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과 관련하여, 저는 책 후반부의 '네이션'의 구성과 '세계공화국'의 가능성에 가장 관심을 가졌는데요. 고진은 책 304쪽에서 "네이션의 감성적인 기반은 혈연적·지연적·언어적 공동체"라면서 그 공동체 내에서 "가족이나 부족공동체 안의 사랑과는 다른, 오히려 그와 같은 관계로부터 이탈한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연대의 감정"이라고 네이션의 감정을 설명하는데요. "호수(互酬, reciprocity)적 교환에서 유래하는 채무감정은 돈으로 변제가 되지 않는 것이어서 경제적으로는 그야말로 '경제합리성'을 결여한 것이다. 네이션이 '감정'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은 네이션이 국가나 자본과는 다른 교환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430쪽에 이르면 국가연방은 교환양식 C 위에 교환양식A를 회복하는 것, 그럼으로써 "새로운 세계시스템을 창설"하고 "증여의 호수성"을 회복하기를 주장합니다.

이 부분은 충분히 흥미롭지만, 아까 이현우 선생님 말씀처럼 고진이 일본 내에서도 소수의 예외적인 존재라고 하신 게 실감난 건 얼마 전 SNS 상에서 발생한 '아즈마 히로키 사건' 때문입니다.(웃음) 아즈마 히로키는 그동안 국내에서 <일반의지 2.0>(안천 옮김, 현실문화 펴냄),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문학동네 펴냄),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장이지 옮김, 선정우 감수, 현실문화연구 펴냄) 등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젊은 평론가입니다.

그가 오사카 시장 하시모토 토오루의 위안부 발언에 대해 "'위안부는 필요했다'가 문제발언인가?" "한창 때의 남성을 전장에 밀어 넣고 실컷 사람 죽이라고 시키고, 전투가 끝났으니 상큼하게 일반시민처럼 욕망과 폭력성을 억제하고 살라고 해봤자, 생물적으로 당연히 무리한 일. 그런 무리를 전제로 삼아 논의를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해석 출처 바로가기☞) 등으로 트위터에 글을 써 일본 내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요.

아즈마 히로키는 1971년생입니다. 이 논쟁을 보면서 젊은 전후세대가 갖고 있는 역사의식의 박약함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일본인 중 일부는 아직도 자신들이 전쟁 피해자라는 점만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담당했던 역할과 아시아 각국에 끼쳤던 악영향에 대해 철저하게 되짚어보고 사죄하고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서는 거의 의식하지 않는 발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진 식의 호수적 관계는 바로 이런 실제 역사에 대한 근본적 죄책감을 해소하려는 증여의 노력에서부터 시작될 텐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여전히 위험스러울 정도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가라타니 고진의 이 같은 지적 성과도 크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세계사의 구조>와는 크게 관계없는 부분을 얘기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웃음)

이현우 : 여담을 덧붙이자면, 아즈마 히로키가 아까 얘기한 '제3의 고진'이었거든요.(웃음) 20대의 나이에 데리다 철학을 종횡하며 쓴 데뷔작 <존재론적, 우편론적-자크 데리다에 관하여>는 놀라운 책이었는데, 그 이후 철학과 거리를 두고 오타쿠 문화로 비평의 방향을 돌리면서 정치적 의식이 퇴행한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70대의 가라타니 고진보다도 노후해 보이죠.

고진은 대단히 격렬한 반국가주의 쪽입니다. 국민국가를 절대적으로 지양해야 한다는 입장이죠. 그의 자부심 중 하나는 일본 헌법 제9조, 즉 평화헌법입니다. 고진에게는 그게 국민국가를 지양할 수 있는 일종의 모델이에요. 그런데 지금 일본 쪽 극우의 움직임은 그 헌법조항을 폐지하고 소위 '정상국가'로 가겠다는 입장입니다.

생산양식에서 교환양식으로

이현우 : <세계사의 구조>의 핵심은 역시 교환양식론입니다.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선 이걸 들고 나온 사상가는 고진이 처음이었어요. 네 가지 교환양식을 잠깐 설명하자면, A형은 증여와 답례로 이뤄지는, 선물을 교환하고 주고받는 호수입니다. B형은 약탈과 재분배, 국가의 지배적인 교환 양식이지요. 화폐를 매개로 한 상품 교환이 세 번째 C형 교환양식인데, 이게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교환양식입니다.

중요한 건 그 사이의 이행입니다. A형이 사라진 다음 B형이 출현하는 게 아니라, 세 가지가 공존하면서 어떤 사회에서는 A형이, B형이, C형이 지배적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를테면 소규모 공동체 사회에서의 교환양식인 호수가 국가 체제의 교환양식으로 어떻게 넘어갔는가, 또 국가의 교환양식은 어떻게 자본제적 교환양식에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나 그 이행과정을 해명하는 것이 '사상가' 고진의 과제였고, 그걸 성취한 책이 <세계사의 구조>입니다. 사실 해명을 제외한 이론적 골자는 이전 책들에 제시되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해명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 이현우. ⓒ프레시안(최형락)

이권우 : <세계사의 구조>를 읽으면서 1980년대 읽은 책들이 많이 기억나더라고요. 사회구성체라는 단어가 참 자주 등장했죠.(웃음) 사회구성체 안에는 여러 요소가 상존하고 있으나 지배적인 양식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 내에도 소작 관계가 있을 수 있는데, 대신 자본주의 상태에서 좀 다르게 변형된다는 뜻이죠. 사회구성체에 관한 예전 책들을 좀 보신 분들에게는 <세계사의 구조> 이해가 쉬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현우 선생님이 방금 얘기하신 대로 교환양식 A형에서 증여하고 답례하는 과정만을 되풀이하면 국가가 탄생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B형에선 국가가 지배만 하는 게 아니라 보호한다는 걸 강조하고요. C형에선 중요한 건, 지금까지 노동자가 자본에 의해 종속되어 생산에만 집중하는 사회계급으로 얘기되었는데, 고진은 상품을 사는 노동자의 출현도 함께 아우릅니다. 상품을 사는 노동자의 출현이야말로 D형으로 넘어가는 사회구성체 요소가 되니까요.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책의 핵심적인 용어인 국가와 자본, 네이션, 스테이트 등에 대한 해설이 없다는 점입니다. 번역자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겠지만, 네이션이나 스테이트 등이 사전적 의미로서 쓰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해설을 따로 붙여주는 쪽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용언 : 저도 첫 페이지부터 그 용어들에서 멈칫했습니다. 고진 전작을 죽 보아온 사람에게는 이미 자주 보아 익숙한 용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요?

이현우 : 어려운 문제지요. 고진이 '네이션'이라고 그대로 썼기 때문에 역자도 고심했던 걸로 압니다. '네이션'은 한국말에선 어떨 땐 민족이고 어떨 땐 국민이라 번역되는데, 특히 민족의 경우 한국에선 단군 이래 죽 이어져 내려왔다는 표상을 갖고 있고, 고진이 말하는 민족은 근대 이후, 절대 왕정 국가 이후에 탄생한 공동체기 때문에 쉽게 일대 일로 번역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독자들이 읽어가면서 정리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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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리 21>(송태욱 옮김, 사회평론 펴냄). ⓒ사회평론
이권우 :
용어 해설까지 있었다면 훨씬 더 잘 읽힐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아쉽네요.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면, <세계사의 구조>의 핵심은 마르크스와 칸트입니다. 특히 예전에 <윤리 21>(송태욱 옮김, 사회평론 펴냄)을 읽으면서도 칸트에 대한 고진의 해석에 상당히 공감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수용하며 국가를 넘어선 사유를 펼치는 것에 감탄했습니다.

이현우 : <트랜스크리틱>에서도 비슷한 횡단 작업을 했습니다. 칸트와 마르크스를 접속시키는 작업, 칸트로 마르크스를 읽고 마르크스로 칸트를 읽는 게 자신의 비평이며 이론적 작업이라고 했지요. 고진에 자주 비교되는 사람이 지젝인데요. 그는 헤겔과 라캉을 '트랜스크리틱'했지요. 두 저자가 2000년대 이후 한국 인문학, 정확하게는 학계 바깥 인문학 독자들과 비평 쪽에 가장 압도적인 영향을 미친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우연한 유행이라기보다 이들의 작업이 보여주는 독특한 문제의식과 이론적 상상력이 많이 어필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고진이 객원교수로 예일대학에 잠깐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당시 예일학파의 거두였던 폴 드 만으로부터 격려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내에서조차 고진의 작업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폴 드 만이 격려를 해주었으니 기운을 낼 만했지요. 머리를 올려주었다고 할까요. 고진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작업을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눈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합니다.(웃음)

국민국가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현우 : 마르크스주의에서 부족한 부분이 국가 이론이죠. 마르크스주의에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극복하면서 자연스럽게 국민국가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요, 고진은 이 결여된 지점을 주목하며 사회주의가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사회주의 이후인 당시에 자본주의도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사회 체제를 모색해야 할까에 대한 부분에 중요한 시사와 통찰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지젝도 그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레닌이 봉착했던 딜레마입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내전에 돌입하게 되는데, 노동자를 위한 국가를 세우기 위해 노동자들이 4년 내내 싸우지만 그들 다수가 희생되지요. 공장이 파손된 건 말할 것도 없고요. 결과적으로 노동자 국가에 노동자가 없는 겁니다. 그때 사회주의 국가가 뭘 대변하느냐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마르크스 이론에는 그 문제에 대한 답이 부족하다는 걸 지적합니다.

자본주의 국가의 자본가, 사회주의 국가의 노동자라는 구도만 가지고 있으면 국가 자체의 자율성이나 독자성에 대해서는 미처 고려하지 못하는 겁니다. 고진의 작업에선 그 자율성을 포착했기 때문에 마르크스와, 그리고 지젝과도 상호보완적으로 읽을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권우 : 세계동시혁명을 얘기하는 부분에서도, 한 국가에서 노동자가 권력을 전복시키더라도 다른 국가가 곧 개입하기 때문에 국가성이 다시 강화될 수밖에 없는 걸 지적하지요. 그러므로 세계동시혁명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현실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의미가 있습니다.

▲ 이권우. ⓒ프레시안(최형락)

고진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추구하는 사회복지국가도 굉장히 억압적으로 보며 비판하는데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론적으로는 고진의 말을 인정하더라도 고진이 말하는 대안과 사회복지 국가의 차이점에 대해 논란이 일어날 수 있을 듯해요. 그런데 왜 고진은 국가에 대해 집요하게 그 틀을 넘어서려고 애쓸까요? 그는 왜 호수적 원리가 항상적으로 재현되는 사회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 걸까요?

이현우 : 국민국가체제라는 게 전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인 것 같습니다. 서문에서도 얘기하는데,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과 국제연합 같은 초국가적 기구가 탄생하는데요. 전쟁이 그런 필요를 불가분 만들어낸다는 거죠. 고진의 계발적인 주장인데, 국가를 내부에서만 파악하는 것은 불완전합니다. 국가의 본질은 외부적이기 때문에요. 그러한 외부성은 국가 간 갈등과 충돌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 극우의 음직임에서도 알 수 있지만, 네이션 스테이트라는 체제 자체는 국가 간의 갈등과 충돌, 전쟁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를 결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네이션 스테이트를 넘어서야 하는데, 고진의 세계공화국론은 그에 대한 이론적 모색일뿐더러 제 생각으로는 아주 실제적인 요구입니다. 전쟁과 함께 살 것인가 혹은 전쟁 없이 살 것인가라는 관건인데, 사회복지 국가 모델은 여전히 강한 국가의 관료주의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인 대안은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죠.

이권우 : 197쪽부터 시작되는 보편종교에 관한 글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고진은 보편종교에서 교환양식D의 모델을 찾고 있지요.

이현우 : 보편종교 혹은 세계종교에 대한 고진의 생각은 <언어와 비극>에 실린 '세계종교'에 관한 장도 참고할 수 있는데요. 그는 종교를 공동체의 종교와 세계종교로 구분합니다. 세계종교는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 혹은 공동체 바깥의 종교로서 공동체 종교를 지양하지요. 예를 들어 기독교에는 야훼의 기독교가 있고 모세의 기독교가 있습니다. 전자가 공동체의 종교라면 후자는 세계종교에요. 보편성이라는 차원은 공동체 종교를 넘어선 세계종교를 통해서만 창출될 수밖에 없다고 밝히죠.

이권우 : 219쪽에 보면 "예수가 시사한 것은 국가, 전통적 공동체, 화폐경제 모두를 부정하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게 바로 교환양식D죠. 226쪽에선 엥겔스가 종교개혁자 토마스 뮌처에 대해 쓴 부분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근거를 마련합니다. "'어떤 계급차별도 사적 소유도 사회의 구성에 대한 자립적인, 외적인 국가권력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회상태'란 교환양식D가 지배적인 사회구성체에 다름 아니다. (…) 보편종교를 자신의 근거를 만들기 위해 도입한 국가는, 그 결과 보편종교가 개시한 '법'을 받아들임으로써 자기규제를 하게 되었(다)." 228쪽 맨 아래쪽에도 "예언자 마호메트가 초래한 것은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상실된 유목민적인 호수적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보편종교가 아직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은 교환양식D에 대한 예고였음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노동조합 VS. 협동조합

이권우 : 346쪽부터 시작되는 노동자와 협동조합 부분도 상당히 의미가 있어요.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국의 노동조합이 더 이상 진보성을 띠지 못하고 비정규직을 차별하거나 그 차별구조를 항존화시킨다는 비판이 많이 나오는 한계를 돌이켜보게 되었습니다.

이현우 : 간명하게 정리하자면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투쟁이고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바깥으로 나가려는 움직임이니 고진은 후자에 더 방점을 두지요. 저희는 예전에 자본주의를 극복한다거나 대안을 모색한다고 할 때 노동운동에 방점을 두어왔는데, 고진의 관점에선 노동운동의 현실적 필요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안에 한정된 투쟁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서기가 어렵잖아요.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 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은 재음미해볼 만한데, 고진이 그 이론적 근거와 성찰을 잘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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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구>(가라타니 고진 지음, 권기돈 옮김, 새물결 펴냄). ⓒ새물결
이권우 :
349쪽 맨 아래를 보면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의 "질적으로 다른" 차이를 설명합니다. "노동조합은 자본이 노동자를 결합시켜 일하게 함으로써 얻는 잉여를 되찾기 위한 투쟁이다. 협동조합은 노동자 자신이 노동을 연합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이윤은 당연히 노동자 자신에게 배분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제는 자본제생산이 아니다. 여기에 노동력상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350쪽에는 "노동조합운동은 이미 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일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노동력상품을 지양하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저 노동력의 가치를 확보하고 높이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에 반해 협동조합에는 노동력상품의 지양, 자본제의 지양이라는 지향이 명확히 존재했다"는 구절도 나오고요.

여기서 스트라이크냐, 보이콧이냐를 결정하는 게 고진의 기발한 상상력입니다. 스트라이크가 노동조합이고 보이콧은 협동조합이 될 수 있지요. 상품을 사지 않는다는 보이콧을 펼치면서 자본주의가 실제로 무너질 수 있는 거잖아요. 그동안 제가 보이콧 운동에 대해 좀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나 싶더라고요. 삼성 불매 운동할 때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냐 했는데, 실제로 이 책 읽으면서는 보이콧 운동이 상당히 의미가 있겠구나 깨달으면서 개인적으로 반성했습니다. 그래서 앞서도 말했지만 협동조합이 사회적 기업 수준으로 생각해서 진행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현우 : 자본주의의 보완재 정도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보다 훨씬 전복적일 수 있습니다.

이권우 : 교환양식A, 즉 국가 없이 쌍무적인 호혜원칙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의적절하기도 하고요. 물론 이게 정말 다인가 싶어 실망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토록 집요하게 세 가지 교환형태를 분석하고 비판한 것에 비해, D형이 협동조합 형태로만 가능하냐에 대한 더 충실한 해석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연속선상에서 본다면 A-B-C형의 이행 과정을 미루어 짐작할 때 가능하다는 고진의 주장은 설득력 있습니다.

408쪽 아래쪽을 볼까요. "노동자도 자본과의 관계에서 위치하는 장소에 따라 변한다. 노동자와 자본가가 만나는 것은 세 가지 국면에서다. 첫째로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 때, 둘째로 고용되어 노동할 때, 셋째로 노동자가 스스로 생산한 물건을 소비자로서 살 때이다." 바로 이 세 번째 단계에서 보이콧을 통해 저항할 수 있다는 거지요.

이현우 : 요새 남양유업 사태 등 때문에 많이 이야기되고 있죠. 실제로 매출이 10퍼센트 이상 급감했다고 하는데, 그런 보이콧 행위가 실제로 변화를 유도한다고 보입니다.

이권우 : 411쪽을 보면 "노동자가 자본에 대항할 때 (…) 자본에 대해 노동자가 우위에 있는 장에서 행하면 된다"라는 구절이 나오죠. 즉 생산 과정에선 노동자가 예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유통과정에서는 자본이 소비자로서의 노동자에게 예속됩니다. 거기서 계급적인 능력을 보여주면 되는 거지요. "노동자계급은 제3국면에서 보편적 '계급의식'을 갖기가 용이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413쪽에선 보이콧에 두 가지가 있다면서 "첫 번째는 상품을 사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는 노동력상품을 팔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즉 비자본주의적 경제권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새 허먼 멜빌의 바틀비(Bartleby) 얘기가 많이 논의되지요. 그 지점과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이현우 : 결론은 국가에 대한 대항 운동, 자본에 대한 대항운동이 어떻게 가능할까입니다. 자본과 국가의 결속체제로서의 현 체제의 비판과 극복이 고진의 문제의식인데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협동조합과 보이콧 등을 제시합니다.

국가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선, 아까 앞에서 평화헌법 얘기도 잠깐 나왔는데요, 국민국가의 군사적 주권을 어떻게 UN같은 초국가 기구에 증여할 것인가를 논합니다. 일본은 지금 그걸 증여한 형태지요. 군사를 갖기 않기로 헌법에 명시되어 있으니까요. 일본의 극우들은 그게 바로 비정상 국가라며 모멸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고진은 거꾸로 일본뿐 아니라 모든 국가가 그런 군사적 주권을 증여하는 것이야말로 일종의 세계동시혁명이라고 주장합니다. 굉장히 유토피아적 발상으로 들릴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런 세계동시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필연적으로 봉착하게 되는 건 세계전쟁이라는 주장은 경청해야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이 생겼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합이 생겼는데, 우리가 한 번 더 전쟁을 겪은 다음 세계동시혁명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전쟁을 겪기 전에 갈 것이냐, 두 가지 선택지만 있는 거죠.

이권우 : 다시 칸트가 나옵니다. 영원평화의 길이 국가연방에서 발견된다는 것이고, 국가연방은 교환양식A를 회복하는 것이며 그게 바로 세계공화국입니다. '증여에 의한 영원평화'를 주장하지요.

어떻게 보면 이 책이 전형적인 변증법적 구조에요. 증여와 답례가 오가는 형태에서 봉건국가와 근대국가로 이행했을 때, 이제 세계가 경제로 일체화된 시대에 증여와 답례의 시스템을 다시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과 해답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비인간적인 세계 구조를 끝장낼 수 있는 새로운 대안에 대해 우리가 함께 고민해보지 않겠냐는, 그런 긴급하고 인류애적인 사유방식이 이 책을 흥미롭게 읽게 만드는 동력 같습니다.

이현우 : 읽어도 좋고 안 읽어도 좋은 책이라기보다는 사실 모두 읽어야 한다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책입니다. 우리가 공유하는 절박한 문제의식에 대한 통찰과 심지어 해답까지도 제공해주니까요. 그러고보니 <프레시안>도 언론사로는 처음으로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게 되었는데, <세계사의 구조>와 보조를 맞추는 듯합니다. 안 그래도 우리 모두 조합원이 되었잖아요?(웃음) 이 두꺼운 책을 읽느라, 또 얘기하느라 긴 시간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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