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2년 임성한 작가가 선보인 MBC <인어아가씨>는 2000년대 이후 한국 드라마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된 '막장'의 징후가 엿보인 작품이었다. 한편,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인터넷 방송을 거쳐 성장한 김구라 역시 소위 '독한 혀'를 바탕으로 2000년대 한국 예능의 수위를 높인 인물이다. 작년 4월 인터넷 방송 시절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발언이 문제가 되어 활동을 중단했던 김구라는 케이블 방송을 통해 복귀한 데 이어 KBS <이야기쇼 두드림>, SBS <화신>으로 지상파 방송에까지 복귀했다. 지난해 가정사가 논란이 되었던 임성한 작가 역시 SBS <신기생뎐> 이후 2년 만에 신작 <오로라 공주>로 돌아왔다. 돌아온 이들의 모습은 예상하거나 기대했던 그대로다. 예의 "현실적인 얘기니까"라는 말과 함께 돌아 온 김구라는 <이야기쇼 두드림>과 <화신>에 활기와 집중력을 더했고, 첫 방송부터 수많은 기사거리를 제공한 <오로라 공주> 역시 '임성한 월드'가 제공하는 익숙한 불량식품의 맛을 일깨우고 있다.
▲ 일일드라마 <오로라 공주>. ⓒMBC |
하지만 동시에 김구라와 임성한, 이 둘에게는 차이점이 있다. 비단 예능과 드라마라는 활동 세계의 차이가 아니다. 그리고 이 차이, 정확하게는 대중이 이들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차이가 초기와는 달라진 지금의 한국 드라마 속 '막장 드라마'의 지형도, 나아가 대중문화에서 '막장'의 좌표를 재검토하는데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준다.
결론부터 말하면, 예전에는 둘 모두에게 '욕 하면서 보는' 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면 이제 김구라에게는 이것이 유효하지 않은 듯하다. 물론 여전히 그의 방식과 발언을 긍정할 수 없는 시청자가 있다. 하지만 지금 김구라에 대한 비난과 비판의 근거는 대체로 과거의 과오에 있다. 이미 김구라의 진행 방식과 발언 수위는 많은 사람들에게 솔직하거나 통쾌한 그래서 오히려 트렌디하고 심지어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것은 임성한이 아직 획득하지 못 한 성과다. 여전히 그의 작품은 '욕 하면서 보는' 드라마다. 이는 물론 임성한이 '막장 드라마'의 거장답게 단순히 자극적인 상황이나 개연성 없는 전개의 반복에 그치지 않고 무당부터 기생에 이르는 소재의 과감성과 속물근성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이야기를 쓰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임성한의 후예, '막장 드라마'의 계승자와 변주자들은 그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 장르의 외연을 넓혀왔고, 그 과정에서 일부는 김구라처럼 어떤 인정을 획득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당연하게도 '막장 드라마' 장르 내에서도 세분화와 차별화가 진행되고 걸작과 아류작이 나뉘고 흥행 작가와 충성도 높은 시청자들이 생겨났다. SBS <아내의 유혹>을 시작으로 '막장 드라마'에 속도감을 장착하며 '포스트 임성한'의 등장을 알린 김순옥 작가가 가장 대표적인 예다.
그 뿐만 아니라 아침, 저녁 일일드라마가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고, 주말 드라마가 깃발을 흔들며 이 장르를 견인하고 있는 터라 사실상 막장이라는 이름표에서 자유로운 작품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지경이다. 동시에 손쉽게 막장으로 낙인을 찍고 비난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결을 품은, 그래서 더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징후가 나타나는 작품들도 있다. 볼 때는 마음 편하게 욕 하면서 보고, 황당하고 허술한 세계를 비웃고 나서 잊을 수 있는 소프 오페라가 아닌 이 드라마들은 김구라가 예능에서 보여준, 그리고 받아들여진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 바로 MBC <금 나와라, 뚝딱!>이다. 총 50부작으로 예정된 <금 나와라, 뚝딱!>은 3분의 1이 방송된 지금 15퍼센트 대의 시청률로 전작 <아들 녀석들>의 부진을 말끔히 씻어냈다. 비단 시청률만이 아니라 내용에 대해서도 꽤 호의적인 평가가 많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 역시 설정만 놓고 보면 최근의 주말 드라마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첩만 둘인 아버지에 각기 어머니가 다른 삼형제의 꼬인 가족관계와 그로 인한 갈등을 중심으로 출생의 비밀, 고부갈등, 사돈 간의 계급 차이 등 소위 '막장'의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부유한 친정을 등에 업고 시아버지에게 "졸렬하시다구요"라며 꼬박꼬박 입 바른 말을 하는 며느리를 비롯해 인물들 역시 평범하지 않고 다소 자극적이다.
▲ 주말 드라마 <금 나와라, 뚝딱!>. ⓒMBC |
하지만 <금 나와라, 뚝딱!>에 '막장 드라마'라는 꼬리표를 선뜻 붙이기도 어렵다. 우선, 인물들이 각자 나름의 납득할만한 상처를 안고 있고 이를 갈등의 근거로 개연성 있게 풀어가는 점은, 이 작품이 통속극이긴 하지만 막장 드라마까진 이르지 않도록 막는 장치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류층을 꿈꾸느라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 중산층의 허세와 실상을 그리겠다'는 기획 의도를 꽤 충실하고 세련되게 살리고 있는 점이다.
"일생 부자 구경은 원 없이 하지만 막상 부자도 못 되는 주제에 부자가 되고 싶어 목이 빠져라 까치발 디뎌 온 셈이지."
보석 매장 매니저인 딸 심덕(최명길)을 두고 친정 어머니 광순(김지영)이 한 이 대사는 그 의미부터 말맛까지 <금 나와라, 뚝딱!>의 정체성과 장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게다가 모든 인물들이 비교적 솔직하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이것이 지금의 대한민국 중산층과 상류층은 물론 그들을 바라보는 다른 이들까지도 인정하거나 체념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금 나와라, 뚝딱!>을 흥미롭게 만든다.
빚을 내서라도 딸을 부잣집에 시집보내려는 심덕과 비록 자신도 정식 부인이 아니지만 "가게 종업원과 사돈 맺을 수 없는" 영애(금보라)의 마음이 솔직하게 부딪히고 "사는 게 원래 치사한 거라네"라 말하는 동시에 "감히 내 아들한테 맞설 생각 말라고 해. 다치고 싶지 않으면" 이라고 노골적인 협박을 하는 덕희(이혜숙)의 욕망이 날 것으로 드러난다. "패 까자고. 당신도 처음부터 나한테 원한 게 이런 거 아닌가?" 결국 부모들에 의해 결혼하게 된 몽현(백진희)에게 결혼 후에도 다른 여자를 만날 테니 너는 돈이나 쓰라고 비아냥거리는 현태(박서준)의 이 대사가 <금 나와라, 뚝딱!>에서 임성한이 아닌 김구라의 그림자를 느끼는 이유다. 패를 까고, 현실을 인정하고, 우리 한 번 제대로 솔직하게 얘기해보자는 패기와 드러내고 말하는 데서 오는 쾌감은 '막장 드라마'의 하수들이 반복해서 재생산 해온 또 다른 허구의 자극들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다. 김구라가 결국 익숙하게 혹은 인정하게 만든 현실의 민낯, 즉 속물성이 드라마에서도 "현실이 그렇잖아" 라는 방식으로 체화되는 것이 말이다. 욕 하면서 보는 것과 욕 할 수도 없이 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쁜 것이냐 물었을 때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김구라가 구원투수가 되어 돌아왔고, 임성한이 건재하다 하기엔 이르지만 여전히 무시할 수 없고, <금 나와라, 뚝딱!>이 호응을 얻는 요즘이 흥미로우면서 불편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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