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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철학, 친하기 어려운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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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철학, 친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렇게 읽었다] 미하엘 비트쉬어의 <철학 오디세이>

정해진 결론은 더 묻지 말라

우리 교육은 오랫동안 질문이 봉쇄된 방식을 고수했다. 답을 잘 모르겠기에 던지는 질문이야 허용이 되지만, "답"이라고 되어 있는 내용 자체에 대한 의문은 배제되기 일쑤였다. 여기에 문제 제기를 하면, 이미 정해진 결론에 왜 토를 다는가라는 반격에 처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고는 더 이상 진전하기를 포기하고 주어진 답에 안주하는 것을 강요당하게 된다. 이러면서 공부란 이 답을 제대로 기억하고 토해내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 되고 만다.

이와 같은 정신 풍토에서 비판적 성찰이나 새로운 문제의식 또는 생각의 모험은 기대하기 어렵다. 기존 질서에 대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태도는 묵살되거나 죄의식을 갖게 만들고, "네"하는 모습이 옳다고 교육된다. 권위로 포장된 힘이 내세우는 주장을 의심하면 공공의 적이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필연적인 결과다. 권력은 "비판의식"이라는 말을 싫어하고, 교육현장에서도 "비판적 성찰"을 강조하는 것은 문제적 존재를 만드는 것으로 여긴다.

등에 붙어 귀찮게 하는 쇠파리 철학

▲ <철학 오디세이 : 초보자를 위한 지혜의 탐험>(미하엘 비트쉬어 지음, 서유석 옮김, 북앤월드 펴냄). ⓒ북앤월드
도대체가 "비판"이라는 생각의 통로를 거치지 않고 옳고 그른 것, 틀린 것과 맞는 것을 가려내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 걸까? 그래서 <철학 오디세이>(서유석 옮김, 북앤월드 펴냄)의 저자 미하엘 비트쉬어는 "철학은 고요한 평온을 깨고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존재다"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준마의 등에 붙은 쇠파리"라고 하면서 귀찮을 정도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전통에 맥을 대고 있다. 그런 쇠파리가 있어야 준마가 제대로 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를 사형에 처하고 나면 여러분은 나를 대체할 만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겁니다." 철학을 도태시키면, 그 철학을 대체할 그 무엇이 없어서 인간은 날이 갈수록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 깨우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다. 그렇지 않아도 이 책의 원제는 <너 자신을 알라-철학의 모험>이다. 정신의 모험이 주는 즐거움과 자신에 대한 진전된 각성의 설렘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에 펼쳐져 있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 방법론의 전문가 서유석 교수(호원대학교)가 10년 전인 2003년 번역한 것을 복간한 철학 입문서이다. 그때와 비교해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도도 달라졌거니와, 철학에 대한 대중의 궁금증도 그 수준이 현격하게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을 위한 철학적 사고의 훈련도 강조되고 있는 시기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복간은 충분한 대중적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내용과 품질을 가지고 있다.

쉬운 이야기, 그러나

더군다나 원본의 집필 동기가 고등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철학에 대해 쉽게 안내하고 이끌어주는 것이기에 우리의 실정에도 적절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제시하는 예나 문제도 쉽고 흥미롭게 서술되어 있으며, 대학생 수준이라면 여러 가지 각도로 함께 토론할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할 만하다. 특히 이 책은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어 우리 자신이 알고 있다고 여기는 지식과 깨우침의 근본 토대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점검하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 바로 이러한 철학적 훈련이야 말로 생각의 한계를 끊임없이 돌파해서 깨우침의 영역을 넓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논리 문제도 열띤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어느 날 악어 한 마리가 아이를 훔친 뒤 그 어머니에게 약속한다. "내가 당신 아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 알아맞히면 돌려주지." 엄마는 무엇이라고 했을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애를 돌려주지 않을 거지?" 자, 어떤 논리가 여기서 전개될까? 엄마의 말이 맞는다면 악어는 아기를 돌려줘야 하며, 틀리다면 돌려주는 것으로 입증해야 한다. 악어의 입장에서는 아니 돌려주기로 했는데 돌려주지 않는다고 틀린 대답을 했으니 돌려줄 수 없다고 할 것이고, 그걸 받아쳐서 결국 엄마의 말이 맞았다면 아기를 약속대로 돌려달라고 할 것이다.

좀 더 복잡한 논쟁이 있다. 철학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문제다.

한 청년이 유명한 법학자에게 수업을 받기 전 계약을 맺는다. 수업료 절반은 강의 전에 내고 나머지는 그 자신이 첫 소송에서 이기면 준다, 지면 주지 않는다, 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수업이 끝나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청년이 아무런 소송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자 법학자가 청년을 고소했다. 법정에서 충돌한 논리는 이렇다.

청년 : 나는 어떤 경우도 수업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 이 재판은 나의 첫 소송이다. 재판에서 진다면 계약대로 나는 돈을 줄 필요가 없고, 이기면 판결에 따라 당연히 돈을 줄 의무가 없다.

법학자 : 무슨 소리야? 너는 어떤 경우에도 돈을 내야 해. 지면 소송의 결론에 따라 돈을 내야하고, 이기면 계약에 의거해서 내게 돈을 지불해야 하지.

어떤 논리가 옳은 것일까? 여기서 공통적으로 포착되는 것은 둘 다 자신에게 판결이 유리할 경우 그걸 내세우고, 계약이 유리할 경우는 그걸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자면 논리라는 것도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동원되는 합리화의 도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달리 말하자면, 논리만 정교하게 세우면 그 어떤 것도 정당화할 수 있고 그것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궤변론자 소피스트들의 철학에 자세가 이러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논리적인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 자명하다고 믿는 것, 뻔하다고 이미 결론을 내린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걸 더 깊게 파고들어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우리의 지식과 생각이란 의외로 잘못된 전제와 관점에 서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어두운 환경에 익숙한 상황에서 보는 사물과, 빛이 있는 조건에서 보는 사물은 우선 그 정확한 실체만이 아니라 가령 "색"이라는 것 하나에서도 엄청난 인식의 차이를 보인다.

전향, 그리고 윤리학으로서의 철학

잘 알려진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너무도 일상이 된 나머지 자신이 어두운 환경에 있다는 것을 아예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 "본다", "안다"는 감각과 정신의 행위는 빛 속에 있는 이가 볼 때 철저한 "무지의 영역"에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조건에서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그 동굴에서 빠져나오는 일이다. 그래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말한 것처럼 진실에 대한 인식은 "영혼 전체를 함께 움직이는 일"이며 방향을 전격적으로 바꾸는 "일종의 전향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은 단지 인식의 문제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핵심으로 삼는다. 철학이 윤리학을 상실하면 사고의 기술로 멈추게 되고 그것은 "영리한 악인"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언제나 어떤 생각과 행동의 윤리적 기준에 대해 치열한 문제제기를 한다. 의도가 선했다고 해서 결과의 선도 보증할 수 있는지, 또는 그 반대는 어떤 경우인지 등. 선과 악, 그리고 정의와 부정의의 문제는 철학의 지대한 관심사이다. 이러한 주제들을 풀어나가지 못하면, 철학은 인간에게 행복한 사회를 기획하고 꿈꾸며 실천할 수 있는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각도에서, 이 책이 수록하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의 한 대목은 주목된다.

"정의가 바로 서 있지 않을 때 왕국이란 거대한 도적의 무리일 뿐이다. (…) 알렉산더가 체포된 해적에게 묻는다. '너는 가당치도 않게 바다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해적은 이렇게 대꾸한다. '당신도 전 세계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았소? 다만 나는 궁색한 선박을 이끌고 다녔기에 도둑이라고 불리고, 당신은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다녔기에 제왕이라고 불리는 것일 뿐이요."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서의 삶

힘이 윤리의 기준을 정하는 것에 대한 전격적인 반박이 여기에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권력에 대한 지속적인 감시자이자 평가자가 된다. 권력과 철학이 친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달리 말해보자면 그런 철학과 가까이 하려는 권력이야말로 자신을 무한히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권력은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철학의 입을 막고 철학이 던지는 질문을 억압하려 든다. 이러한 권력의 논리가 통하는 곳에서 철학은 단지 논리적 사고와 인식론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철학이 아니라 굴종하는 노예를 지적으로 훈련시키는 기술이 될 뿐이다. 여기에 저항하고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철학이다. 이 책의 제목이 <철학 오디세이>라고 붙은 까닭도 달리 있지 않을 것이다. 먼 곳에서 전쟁을 치른 뒤, 거센 풍파를 지나면서 헛된 것에 유혹당하지 않고 본래의 자신에게 돌아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오디세우스의 용기와 지혜를 떠올려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뜨거운 여름철이 시작되는 시기에, 정신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면 책 한권이 주는 선물로서는 꽤나 괜찮은 철학 여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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