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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이버가 영화를 찍었다 …"성미산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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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이버가 영화를 찍었다 …"성미산 사랑해!"

[인터뷰] <춤추는 숲> 강석필 감독

성미산마을의 '소통이 있는 행복한 주택'에 거주하는 <프레시안> 전홍기혜 편집국장에게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린 아들이 한 명 있는데, 아파트에 계속 살았다면 누나, 동생, 형 이런 개념 없이 컸을 텐데 이곳에 살면서 윗집 아랫집 아이들과 함께 뒹굴고 놀면서 가족 공동체에 대한 개념을 새로 깨우쳤다고 했다. '소통이 있는 행복한 주택'이 사실상 '여자가 행복한 주택'이라고, 남편들이 숙덕거린다고도 했다. 얼마 전 부친상을 당했을 때에도, 주택 거주민들이 죄다 빈소를 찾아와서 친지들이 놀랐다고도 했다. 대체, 어떤 곳이길래?

요즘 들어 부쩍 서울시 곳곳에 '마을'이 생겨나고 있다. 삼각산재미난마을, 성대골사람들, 정릉 생명평화마을…. 2012년부터 서울시에서 다양한 사회 문제를 공동체로 회복한다는 목표 아래 힘을 쏟고 있는 마을공동체 사업에 힘입은 덕분에 지금까지 약 90개가 넘는 마을공동체가 생겨났고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언제나 마을공동체의 대표격으로 꼽히는 곳은 마포구 성미산마을이다.

성미산마을은 해발 66미터의 성미산을 중심으로 한 성산동, 서교동, 망원동 등에 거주하는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공동생활을 시도하며 이룬 커뮤니티다. 1994년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시작으로 마을 학교, 마을 기업, 마을 라디오 방송국, 마을 카페 등을 만들어내는 놀라운 실험을 거듭해오며 마을공동체의 놀라운 사례로 안착하게 됐다.


▲ <춤추는 숲>. ⓒ감어인필름

그런 성미산마을이 지난 2010년 큰 홍역을 치렀다. 학교법인 홍익학원이 소유한 성미산 부지에 학교를 이전하겠다며 개발을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자 소중한 놀이터였던 산을 지키기 위해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성미산마을 주민인 강석필 감독은 다큐멘터리 <춤추는 숲>에서 수많은 주민들의 울고 웃는 따뜻한 일상, 유쾌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싸움의 현장을 생동감 있게 담아냈다. <춤추는 숲>을 보고 나면 누구라도 이 특별한 곳, 성미산마을에 가보고 싶어질 것이다.

5월 23일 목요일 개봉하는 <춤추는 숲>의 강석필 감독을 성미산마을 카페 '작은 나무'에서 만났다. 저녁 7시 30분에 도착한 그곳에는 퇴근하고 귀가한 주민들 다수가 자녀들과 함께 모여앉아 왁자지껄 서로의 하루를 나누고 있었다.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와 인터뷰를 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편집자>

(<춤추는 숲> 개봉관 : CGV 대학로, CGV 상암, 인디스페이스, 아리랑시네센터, 아트나인,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CGV 서면, 롯데시네마 부평, 롯데시네마 주엽, 롯데시네마 청주, 롯데시네마 대구. 자세한 정보는 http://d_forest2013.blog.me/ 참조)

▲ 카페 '작은 나무'에 놀러온 마을 꼬마 예원이가 강석필 감독 옆에서 장난을 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춤추는 숲>에서 마을 주민들이 서로 높임말을 쓰지 않고 별명을 부르며 평등한 대화를 주고받는 것에 놀라는 관객들도 많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90년대 후반 대학교 재학 당시 여성주의 모임에서 처음 그런 문화를 접했는데, 동일한 이념이나 주의 하에 모인 사람들이 아닌 제각각의 마을 주민들끼리 그 문화를 지속시킨다는 게 신선했다.

강석필 : 기자 분이 경험한 그 시기 비슷한 맥락에서 출발한 게 맞다. 성미산마을 주민들이 공동육아를 처음 시작할 무렵 교육 원리와 이념 등을 고민하다 부모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조합형 학교, 지식 전달 위주의 교육이 아니라 놀이를 통해 아이들 감성을 풍부하게 하는 생태교육 등으로 방향을 잡았다. 1990년대 중반 대안 교육과 새로운 가족 문화를 연구하던 여성주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고민이 자연스럽게 성미산마을 쪽으로 이어졌다. 학계에서 시작된 새로운 운동 형태가 이 마을의 공동육아와 대안학교와 궤를 같이 하게 된 것이다.

그중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평등한 의사소통이었다. 1994년 공동육아 어린이집 1호가 시작되면서,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거리낌 없이 자기 의견이나 감정을 말할 수 있도록 교사들을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별명으로 부르게 되니 아이들이 교사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놓게 되었고, 자신의 부모들에게도 별명을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교사와 부모 역시 서로의 별명을 부르며 예삿말을 사용했고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오고가게 됐다. 지금도 위아래로 10년까지는 자연스럽게 별명을 부르고 말 놓고 지낸다.

프레시안 : 그럼 본인의 별명이 '맥가이버'가 된 건 어떤 연유에선가.(웃음)

강석필 : 손으로 뭔가 뚝딱거리고 만지고 고치는 걸 워낙 좋아한다. 마을의 시설조 역할이라고 해야 하나. 뭐든지 잘하는 맥가이버 수준까지는 못 되고, <한 지붕 세 가족>의 순돌이 아빠 정도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웃음) 5년 전 처음 카메라를 들고 마을을 찍겠다고 왔다갔다 하니까, 그제야 주민들이 아 맥가이버가 영화 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인지를 했다. 원래 여기서는 직업이나 학력에 대해 전혀 관심 없다. 마을에서의 역할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니까.

프레시안 : 성미산마을 연작 다큐멘터리 3부작을 기획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작업이 2007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이때는 한창 <경계도시 2> 작업 도중이었을 시기다. (송두율 교수를 둘러싼 대한민국의 광증을 담은 다큐멘터리 <경계도시 1, 2>의 연출자 홍형숙 감독과 강석필 감독은 부부다. 강석필 감독은 <경계도시 2>의 프로듀서이자 촬영과 편집을 맡았다.-편집자 주)

두 작품의 테마와 결은 상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쪽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논란을 빚었던 거대한 사건을 다루고 또 한 쪽은 말 그대로 일상을 다룬 '작은' 이야기인데 어떻게 이토록 다른 두 작품을 한꺼번에 준비하게 된 건가.

강석필 : 2003년 송두율 교수님이 한국에 들어오고 2004년 독일로 돌아간 다음 홍 감독이 너무 힘들어했다. 당시 상황을 제대로 돌아보려면 못해도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뒤 독일에서 송 교수님을 다시 인터뷰하고 온 뒤에도 홍 감독에게는 트라우마가 크게 남아 있었다. 촬영 테이프가 5, 600개 정도였는데, 편집하겠다고 그 테이프를 틀고 나면 30분 정도 보다가 한숨 쉬고 꺼버리더라. 스스로 가다듬기까지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다.

원래 <경계도시 2>를 마무리한 다음 제 작업을 하겠다는 암묵적 약속이 있었는데, <경계도시 2>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2005년부터 생각 중이던 성미산마을 이야기를 3부작으로 찍을 준비를 시작했다. 2007년 <경계도시 2> 편집을 마무리할 즈음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춤추는 숲> 작업에 들어갔다.

물론 두 작품을 병행하는 게 물리적으로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도중에 시작했던 게 <경계도시>의 반작용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경계도시>가 너무 고통스러운 작업이었기 때문에 그 반작용으로, 사회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되 행복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 <춤추는 숲>. ⓒ감어인필름

프레시안 : 그런데 막상 촬영 시작하니까 성미산 지키기 싸움이 벌어져버렸다.(웃음)

강석필 : 역시 손쉬운 작업은 안되겠구나 싶었다.(웃음) 상황 발생하면 신새벽이든 한밤중이든 바로 카메라 들고 성미산으로 달려가야 했으니까.

프레시안 : <춤추는 숲> 속 성미산 지키기 싸움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지난 5년간의 개발 광풍, 즉 용산부터 강정, 4대강 사업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의 크레인이 그 이미지를 한층 강조한다.

강석필 : 성미산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벌이던 시기가 2010년부터 2011년까지인데, 온 나라가 하루라도 시끄럽지 않은 날이 없던 무렵이었다.(웃음) 온 나라의 강이 다 뒤집어지던 시기니까, 서울 마포구의 이 작은 산을 지키는 노력은 너무 작은 이유였던 거다. 사실 되게 외로운 싸움이었다. 많은 분들이 개별적으로 성미산을 찾아서 연대의 메시지를 전하고 함께 활동해 주셨지만, 미디어 입장에선 이런 조그만 사안을 다룰 여유가 없었다. 수많은 보도 자료를 보냈지만 <프레시안>을 비롯한 진보 매체들에서만 가끔 다뤄주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성미산, 4대강, 강정마을,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밀양 송전탑 모두가 이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은 분명하다.

프레시안 : 이 부분은 강정마을의 해군 기지 반대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Jam Docu 강정>에 포함된 홍형숙 감독님의 단편에서도 잘 드러났는데.

▲ 강석필 감독. ⓒ프레시안(최형락)
강석필
: 홍감독이 한창 <춤추는 숲> 편집하느라 바쁠 무렵이었는데, 경순 감독님이 강정마을 문제에 영화계가 힘을 보태야 하지 않겠냐며 참여 제안을 해왔다.

마침 <춤추는 숲>의 등장인물 중 한명인 앨리스의 고향이 제주도였는데, 대학 시절 절친했던 친구가 해군 기지 반대 운동하다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내려가서 면회해야겠다고 생각 중이었다.

그 만남을 촬영하기로 했다. 강정마을도 외롭고 성미산도 외로웠는데, 마을 대 마을이라는 연대의 메시지를 보여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성미산마을에 대해 편견이 있다.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잘 사는 '그들만의 리그' 아니냐는 시선이 있다. 하지만 봐라, 마을과 마을이 이렇게 연결될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고 연대의 확장을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다. <춤추는 숲>에도 무척 넣고 싶던 장면이었는데, <Jam Docu 강정>에 양보했다.(웃음)

프레시안 : 의외라고 느꼈던 게, 성미산을 파헤치는 공사 장면보다 마을 사람들의 일상과 합창 준비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더라. 둘 사이의 비중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것 같은데.

강석필 : 포털 사이트에 누군가 올린 리뷰를 보니까, 자긴 귀여운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인 줄 알았더니 나무가 쓰러지는 장면이 너무 많지 않냐는 의견을 올렸더라.(웃음) 생생하고 치열한 투쟁의 현장을 보여주기 위해 <춤추는 숲>을 시작한 게 아니었다. 마을이 살아가는 원리, 마을이 가지는 가치, 현 상태에 대한 안티가 아니라 현 상태를 넘어설 수 있는 실현 가능한 대안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촬영을 하다 보니 2010년과 2011년 성미산마을의 일상을 관통했던 사안이 싸움이었고, 본의 아니게 투쟁의 현장 기록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우리의 의도는 일상의 소소한 가치를 보여주자는 쪽이었는데, 마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성미산 싸움을 아예 없던 것처럼 지워버릴 수 있을까? 혹은 거꾸로 애초 기획을 무시하고 현장 기록으로만 갈 수 있을까? 2011년을 관통했던 싸움을 기록하는 동시에 성미산마을의 일상을 함께 보여주고 싶었다.

프레시안 : 배우 정인기나 고창석 같은 '스타' 주민도 카메라 속에서 마을 사람들의 일부로 그저 스쳐지나간다.

강석필 : 나도 마을에서 카메라 들고 다니기 전까지는 마을 시설조의 한 명이었던 것처럼, 정인기 씨는 마을에선 '달건이 밴드'라고, 말도 안 되는 기타 실력과 노래 솜씨를 자랑하는 밴드 멤버이자 학부모였고, 고창석 씨는 '예원이 아빠'로 통할 뿐이었다.(웃음) 물론 얼굴이 많이 알려진 사람, 셀리브리티가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면 흥행에 도움이 될 수 있겠지. TV에서 보던 모습이랑은 전혀 다르네? 하는 호기심과 재미를 느낄 수 있겠고. 하지만 그건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워낙 바쁜 분들이니 시간이 허락하는 한 합창 연습 등에 참여할 때의 모습만 충실히 담았다.

프레시안 : 주민들이 돌아가며 공사장 주변에서 밤샘 불침번을 서고 성미산을 깎는 공사가 기습적으로 시작되면 열 일 제쳐놓고 달려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150일 넘게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성미산 지키기에 몰두했을 때 오는 피로감도 무척 컸을 것 같은데.

강석필 : 공교롭게 우리 집이 성미산에 바로 붙어있기 때문에 공사현장에서 제일 가깝다. 사건 터졌다는 소식이 오면 부랴부랴 카메라를 들고 아카시아 나무가 빽빽한 지름길로 가시에 찔려가며 뛰어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그냥 으레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나는 어떨 땐 카메라를 들고 있는 주민이었고 어떨 땐 카메라를 들고 있는 다큐 작가로 경계선을 오갔던 것 같다. 심지어 카메라를 팽개치고 경찰이나 용역과 드잡이했던 때도 있었다.

상황마다 고민을 많이 했는데, 분명한 건 이거다. 나는 다큐를 찍으러 이 마을에 온 게 아니다, 카메라로 성미산을 지키는 활동에 일조를 해야 했다. 말하자면 마을에서 고용한 채증조?(웃음)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물론 공사가 지속되면서 심리적으로 불안해졌지만, 그래도 힘을 낼 수 있었던 건 서로 보듬어주고 가능한 한 힘이 되는 말을 주고받았고 서로 원망을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춤추는 숲>. ⓒ감어인필름

프레시안
: 지난한 싸움 끝에 성미산의 80퍼센트를 지켜낼 수 있었던 건 어쨌든 마을 사람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 아닐까.

강석필 : 물론이다. 사실 굉장히 큰 성과였다. 성미산의 소유 관계를 엄밀하게 따져 보자면, 산의 3분의 1은 서울시 등의 공유지, 3분의 1은 홍익학원, 나머지 3분의 1의 절반 정도가 한양재단 소유였다. 한양재단도 2005, 2006년 경 소유지에 아파트를 지으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결코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의 개발 움직임들은 끊임없이 시도됐다.

그러다가 한양재단이 홍익학원 측으로 땅을 팔았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거 만만치 않겠다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홍익학원 측이 끝까지 공사를 강행하다면 나머지 땅도 연쇄적으로 개발이 되는 건 당연하지 않겠나. 하지만 성미산은 마을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소중한 곳이었고, 산 전체를 생태공원으로 꾸미고 싶어했기 때문에 2011년에 그렇게 열심히 막았던 거다.

결국 80퍼센트를 지켜낸 셈이다. 제도와 자본의 결탁구조 속에서 그만큼 지켜낸 것도 대단하다. 결과물만 놓고 봐서는 승리겠지만, 마을 주민들의 심정으로는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주민들은 1퍼센트라도 파헤쳐지는 걸 막고 싶어했다. 산 자체가 아니라 자기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 온전하게 보존되어야 할 가치가 훼손됐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래도 냉정하게 보면 이제 성미산의 80퍼센트가 공원으로 지정됐으니, 더 이상의 개발은 없을 것이다.

프레시안 : 성미산마을에 대한 기사를 처음 봤던 게 2003년경이다. 그때도 사실 이렇게 완벽한 공동체가 있단 말인가 라는 경이로움을 느꼈는데, 이번 <춤추는 숲>을 보면서도 성미산마을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환상을 품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더라.(웃음)

강석필 : 성미산마을에 대한 오해가 있다. 하나는 부정적인 시선이다. 저 사람들 좀 살만하다며? 자기 자식들 잘 키우겠다고 끼리끼리 모여 사는 거 아니야? 또 다른 경우는, 저 사람들 너무 완벽해, 21세기에 어떻게 저런 마을을 만들고 살 수 있지 하며 부러워하는 시선. 두 가지 모두 우리 마을의 일면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야말로 일면에 불과하다. 이 마을에도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갈등이 없고 다툼이 없겠나.

<춤추는 숲> 같은 경우는 환상을 재생산하는 역할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마을살이 동안 힘들었던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갈등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고 성숙해가는 과정은 3부작 다큐멘터리 마지막 작품에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 <춤추는 숲>을 보고 나면 이후의 트라우마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른들 역시 많이 지치고 상처를 받은 게 명백한데, "성미산 사랑해!"를 천진하게 외치던 아이들은 또 어떨지 조심스럽게 묻고 싶다.

강석필 : 어제 상영회에 '소녀'라는 별명의 마을 주민 분과 같이 갔었다. 객석에서 비슷한 질문이 나왔는데 소녀가 이런 얘기를 했다. 나도 깊이 공감한 부분이다.

산이 파헤쳐지기 전에는 아이들과 함께 올라가서 나무에 리본도 달고 노래도 함께 불렀는데, 크레인이 들어오면서부터 아이들이 산에 일절 못 올라가게 했다. 그래서 일단 끔찍한 광경들로부터 아이들을 차단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성미산학교의 생태 교육이 교과서 중심이나 체험 학습 정도에 그쳤다면, 성미산을 지키는 2년 동안에 더 큰 변화가 있었다. 부모가 성미산을 지키기 위해 톱 앞에서 나무를 부둥켜안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아이들은 엄마 아빠한테도 산이 저렇게 소중하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싸움의 과정을 배운 게 아니라 산을 애틋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씀씀이가 전달된 것 같다. 본의 아니게 살아있는 생태 교육이 됐다.

▲ 강석필 감독.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춤추는 숲> 이전부터 마을 속 공간을 함께 만들고 생협을 꾸리면서, 기본적으로 마을 사람들 사이의 '믿음'의 문제가 가장 중요했을 것 같다. 그 믿음이 성미산을 지키는 싸움의 한복판에도 주민들을 든든하게 지켜주었을 텐데, 그게 가능했던 원동력이 뭐였을까.

강석필 : 영화에 나오는 장면 중 인부의 톱에 주민 중 한 사람의 아킬레스건이 베이는 끔찍한 사건이 있지 않나. 그때에도, 보통 같으면 인부 멱살을 잡고 욕을 퍼부어야 맞을 텐데, 그 사람의 부인은 인부 등을 때리면서 엉엉 울기만 했다. 다들 숙맥 같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 사건을 포함해서 이처럼 심각한 상황에서 낙담하거나 갈등 없이, 나름 유쾌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대체 뭘까. 성미산 사람들이 그 사람들답게 대처하는 게 뭘까. 그걸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딱 잘라서 그 답은 이것, 이라고 내놓을 수는 없다. 막연하게나마, 20년 가까이 마을살이를 함께 하면서 가진 신뢰와 애정,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일종의 동지애, 내가 혹여 산에 못 가더라도 사람들이 나를 섭섭하게 보진 않겠지 라는 믿음이 아닐까 싶다.

프레시안 : <춤추는 숲>은 2012년 초 무렵에서 끝난다. 이후 1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마을에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강석필 : 영화 에필로그에도 나오지만, 우선 주민 중 짱가와 쟁이가 서울특별시 마을공동체 종합지원센터에서 일하게 됐다. 또 마을살이를 하던 분들이 마포구 염리동 주민부들과 힘을 합쳐 '나무그늘'이라는 카페를 만들었고, 성산2동에도 또 다른 비슷한 카페를 만들었다. 포자가 생겨 여기저기로 날아가듯 같은 공감대 하에 닮은 공간들이 생겨나고 있다. 한편 영화에서 합창대회가 열리는 마을극장은 희망차게 출발했지만 최근 운영난 때문에 많이 힘들고….

마을 아이들은 '두더지 실험실'이라는 공간을 따로 만들었다. 성미산 학교의 중고등부 아이들의 아지트다. 서울시에서 지원한 청소년 커뮤니티인데, 아이들이 거기서 요리도 배우고 책도 읽고 온갖 작당논의를 한다. 지나가다 들여다보면 너무너무 예쁘다.(웃음)

프레시안 : 3부작의 나머지 두 작품 내용은 어떻게 이어지나?

강석필 : 내년 4월쯤 개봉을 목표로 하는 2부에는 아이들의 성장이 다뤄진다. 공동육아 1, 2호를 거쳐 대안학교를 졸업하고 20대에 접어든 아이들 얘기다. 그들이 중학교 3학년일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촬영하고 있다.

3부는 그들의 부모님, 즉 성미산 마을 1세대를 다룬다. 다들 인생의 황혼을 준비하는 50대 중후반인데, 나이가 들면서 성숙해진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 묻고 있다. <춤추는 숲>에선 사람들이 다른 삶에 대한 꿈을 꾸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3부에선 내적인 질문이 더 많이 등장한다. 풀어나가기가 가장 힘든 작품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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