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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비를 받지 않는 의사가 있다?

[프레시안 books] 김정현의 <철학과 마음의 치유>

병이 든 시대

"자신의 살아있는 몸, 그리고 자신의 발이 딛고 서 있는 땅을 경멸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바로 천상의 세계라는 관념을 만들어 냈고 구원의 핏방울이라는 이야기를 지어냈다. 이 자들은 병들고 쇠락해가는 존재들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장희창 옮김, 민음사 펴냄)에서 니체가 한 말이다. 그는 현실에 뿌리박지 않은 관념과 몸에서 약동하는 생명을 깔보는 일체의 인식에 철학의 비수를 들이댔다.

니체가 가장 크게 문제 삼았던 것은 "병들고 쇠락해가는 시대의 현실"이었다. 따라서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은 중증에 걸려 무너져 내리고 있는 인간 정신을 치료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철학이란 바로 이 작업을 하는 학문이며 그렇게 해서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몸"이 생명의 힘을 되찾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하는 안내자가 된다. 니체는 "죽음에 대한 설교를 듣고 사후 세계에 대해 논하려 들기보다는, 건강한 몸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라고 권하고 있다. 니체는 철학으로 병을 진단하고 고치는 의사였던 셈이다.

한국 니체학회 회장 김정현의 <철학과 마음의 치유>(책세상 펴냄)는 니체 철학의 핵심을 여기에 두고 우리에게 그의 심층 심리학과 철학 상담의 내용과 그 계보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사회에 떠돌고 있는 "힐링"이라는 이름의 피상적인 사회 심리적 요구와 갈망, 그리고 흐름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내면에 본질적으로 육박해가면서 그 삶의 의미를 해석하고 미래를 향한 의지를 길러나가는 실존적 노력이자 깊이 있는 문제의식이다.

삶을 치유하고 싶은가? 철학의 문을 두드려라

▲ <철학과 마음의 치유>(김정현 지음, 책세상 펴냄). ⓒ책세상
그래서 김정현은 "니체의 철학은 삶의 모순과 고통에 대한 날카로운 심리적 통찰과 인간 치유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함께 담고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인간 정신에 대한 시선은 서구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으로 체계화 되는데, 김정현에 따르면 이는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유럽 정신사의 흐름에서 이미 라이프니츠, 칸트, 셸링, 쇼펜하우어, 카투스, 하르트만, 니체 등 무의식의 철학적 담론을 준비한 많은 사상가들이 있었다"고 그 계보의 줄기를 정리한다.

그는 이러한 전통 속에서 니체가 차지하는 의미는 "서양 도덕사의 병리학을 진단하면서, 유럽 문명을 건강하게 복원하려는 미래 철학의 기획으로서 건강 철학을 발전"시킨 존재에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니체는 철학이 인식론이나 존재론 등의 논쟁철학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치유하는 실천철학으로의 대전환을 이룩하는 데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선으로 보자면, 철학이 오늘날 우리의 삶과 생생하게 만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성찰을 할 수 있게 된다.

'몸'과 '땅'으로 돌아가라

여기서 실천철학이란 "삶에서 근본적인 것이 무엇이며, 삶은 어떤 의미가 있고 실존의 가능성은 무엇인지라는 물음에서 출발해, 삶을 조형하거나 자기 강화를 하는데 기여하는 일련의 제안을 할 수 있"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은 개념적 지식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현실과 삶의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의학"이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철학적 출발점은 이 모든 것과 실제적으로 마주치는 "몸"이 될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발을 딛고 살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이 된다.

니체가 이러한 그의 생각을 단적으로 표현한 대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한 발언인 "모든 기록된 것 가운데. 나는 그 자신의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그는 뼈저린 고통 속에서 태어난 지혜를 주목하고 이것이 우리의 건강을 회복하도록 하는 근거가 된다고 선언한다. 그는 이 말에 이어 "피로 쓰라. 그러면 그 피가 곧 영혼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인간의 영혼은 피와 살에서 비롯되는 것을 니체는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니체의 목소리는 그가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유일한 기독교 신앙인은 오직 예수 하나였다"다고 한 것과 그대로 통한다. "피와 살"로 자신의 몸을 찢어 나누고 그것으로 자신의 삶과 가치를 기억하라고 했던 예수의 이야기는 니체의 철학과 다르지 않다. 예수는 자신의 피와 살로 생명과 희망의 역사를 기록하고 남겼으며, 그것을 먹고 마시라고 하면서 몸의 축제에 동참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니체와 예수

이는 역설이기도 하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며 반종교적 저항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신을 살해한 것은 인간과 교회이며, 도리어 "예수에 대한 인간학"을 발전시켜 병이 든 시대에 대한 모범적 명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자 그 자신도 신학 공부를 했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본질과 관련한 그의 본질적 통찰이 깊은 곳에서 나왔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물론 그는 기독교를 앞세운 것이 아니라, 현실의 기독교와 종교가 인간을 노예화시키고 약자로 길들이면서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소멸시키고 있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분노는 인간 내면의 역동적인 생명력을 분출시키는 미래적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런 까닭에 그는 "나는 춤추는 신만 믿는다. 심각하고 무거운 표정을 짓기만 하려는 것은 악마다"라고 단언한다. 예수는 사람들과 먹고 마시며 축제를 벌였고,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예수를 비난했다. 니체는 이러한 점에서 진정 예수를 이해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초인' 또는 '극복인'

그런데 니체는 이 춤추는 생명의 기쁨을 디오니소스적 인간형으로 내세우고, 이에 근접하는 무한한 자기 개혁과 혁명이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과정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신이 그가 처한 조건과 현실에 순응하고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자기로 만들어지는 것"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말한 '초인' 또는 '극복인'의 개념이다. 지금의 자신을 끊임없이 넘어서는 기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체의 가능성을 완성시키는 여정이 곧 인생이 되는 것이다. 김정현은 이러한 니체 철학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가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우리의 인식을 기다리는 텍스트이자, 끝없는 의미를 창조적으로 산출할 수 있는 해석의 텍스트"라는 점을 일깨운 것이라고 본다. 무의미가 의미로 전환하고 그로써 생의 미래적 의지가 여기서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해석의 텍스트 그리고 의미의 창출

따라서 "니체에게 과거는 치유될 수 있고, 현재에 수렴되어야 할 의미 공간이며 현재는 발아되어야 할 미래의 생명 공간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텍스트 속에서 생명력 있고 창조적인 의미를 발굴하여 이를 다시 현실의 내 삶에 적용하는 것,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건강한 인간 성숙의 발효 조건"이 된다.

이렇게 해서 철학은 인간의 대지로 내려오고, 우리는 철학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구출할 수 있는 통로를 발견하게 된다.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렇게 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관념과의 지루한 투쟁이 아니라, 바로 자기 삶의 의미를 꿰뚫어 보고 거기에서 새로운 희망의 의지를 길어 올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가 되는 것이다.

운명에 굴복하는 자, 운명을 창조하는 자

<철학과 마음의 치유>는 이와 같은 니체 철학의 앞과 뒤의 계보를 정리하면서,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니체가 목표로 한 지점으로 수렴해나간다. 그것은 니체가 말했던 "네가 사랑할 수 있는 운명을 창조하라"이다. 니체 철학의 정수를 제대로 포착한 것이다. 그로써 단지 병을 치유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주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노예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인간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논리와 도덕도 붕괴되며 오로지 삶의 축제가 준비되는 감격이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로써, 철학으로 즐겁고 보람 있게 살 수 있는 의미를 창조해나가면서 그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시간 그 어느 것도 무의미하게 버려지지 않도록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니체가 말했던 것처럼 그 어떤 오물이 다 쏟아져 들어와도 여전히 정화의 능력을 발휘하는 "바다"와 같은 존재가 되는 길이다. 그리고 그 "바다"는 그 안에 온갖 생명을 담아내면서 작열하는 태양 아래 억제할 길 없이 뜨겁게 출렁일 것이다.

철학이 철학교수와 철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생명의 표지판이 되고 의미의 길잡이가 되고 절망을 넘어서는 의지의 지팡이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니체가 말한 철학의 본 모습이다.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우치며 보이지 않았던 길을 열어가는 힘을 기를 수 있는 철학과의 만남은 우리 모두에게 환대받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철학은 그 자신이 길을 잃고 있다. 천상에서 지상을 내려다보기만 하려 들고 있는 것이다.

"몸과 땅"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의 자리에 내려오지 않는 일체의 철학, 일체의 의식은 모두 조작된 특권이 된다. 니체를 이걸 망치로 깨뜨렸으며, 부드러운 손으로 그 깨어진 지점을 어루만지면서 생명의 문법을 설파하고 있다.

그 니체는 우리에게 치료비를 청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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