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제2의 '안철수'는 못 되어도…2013년 '재발견의 기쁨'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제2의 '안철수'는 못 되어도…2013년 '재발견의 기쁨'

[편집자가 뽑은 2012 아까운 책] 43개 출판사가 말하다

'사실, 모든 책이 다 아깝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아까운 책' 전문 출판사인 것 같아요. T_T'


마흔세 곳 출판사의 편집자들에게 지난 2012년 펴냈던 책 가운데 가치에 비해 덜 주목받았다고 생각하는 '아까운 책' 한 권을 골라달라고 했더니, 다양한 이유들과 함께 소중한 원고가 도착했습니다. 모든 원고에 위와 같은 말이 직접 쓰여 있지는 않았지만, 행간에서 그 심정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받아도 모자란 것이 사랑, 거기다 판매지수 외에는 반응을 재기 어려운 출판 산업의 특징, 점점 크기가 줄어가는 출판 시장을 생각하면 모든 책이 아깝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노력과 기대에 비해 반응이 좋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할 수도 있습니다. 시간상 지금 막 나온 책이나 곧 나올 책에 집중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책 만드는 사람들이 열과 성을 다했던 지난 작업을, 또 그와 함께 느꼈던 아쉬움과 후회를 돌아보는 것은, 책 읽는 사람들에게도 책이 탄생하는 지난한 과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줍니다.


원제와 다르게 한국어판 제목을 단 이유는 무엇일까요? 완벽한 표지를 위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편집자를 흥분케 한 저자 반응은 무엇일까요? 초판과 재판의 차이에 숨은, 편집자의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요? 책의 첫 독자인 옮긴이와 편집자 사이에 어떤 긴장이 있었을까요? 다음 글들에서 재미있는 '출판 비화'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시대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출판문화 종사자들이 2012년이라는 특정 시기를 어떻게 생각했고 기억하게 되었는지를 덤으로 느껴볼 수 있습니다. 한 사회에 잠재한 정치적 열망은 선거라는 행사와 그 결과인 득표수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요. 정권을 바꾸거나 세상을 뒤집지는 못하지만, 독자들의 내면에 작은 파동을 일으키고자 했던 바람들은 2013년에도 계속되고 있을 것입니다.


갈무리, 강, 개마고원, 교양인, 그린비, 글항아리, 낮은산, 너머북스, 돌베개, 동아시아, 로도스, 마음산책, 마티,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모비딕, 미지북스, 민음사, 북스피어, 사계절, 사월의책, 사이언스북스, 삼인, 서해문집, 시공사, 알렙, 알키, 어크로스, 에코리브르, 역사비평사, 은행나무, 을유문화사, 이매진, 이학사, 자음과모음, 창비, 책과함께, 책세상, 한길사, 현암사, 황금가지, 후마니타스, 휴머니스트 총 43곳(출판사, 출판 브랜드, 임프린트)에서 참여해 주셨습니다. 원고는 가나다순(출판사명)입니다.

1.
갈무리,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조정환 기획, 엮음)


▲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 ⓒ갈무리
후쿠시마 사태 1주기를 맞아 2012년 3월에 출간한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의 기획 취지는 지금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며 절실하다. 일본 새 정부는 핵발전소를 재가동하려 하고, 한국 '핵마피아'는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이다.

한국, 일본, 유럽의 15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참여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후쿠시마 사태와 자본주의를 연결하여 사고하자는 제안이다. 원전에 비판적인 관점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더 큰 재앙을 기다리거나, 원자력에 대한 더 조밀한 관리를 주장하는 관점도 있으며, 풍력, 태양력 등 대체 에너지의 사용을 옹호하는 대안 에너지론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들은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에 본질적인 에너지 과잉 가동이라는 쟁점을 우회하는 것이며, 심지어 핵 추진 세력에 논거를 제공할 위험성도 지닌다. 인류에게 제기된 핵심적인 과제는 인간들 사이의,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인간과 기계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는 것이지, 자본주의를 위한 처방전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 창조적 과제의 달성은, 원자력에 대한 반대운동이 성, 노동, 계급, 인종, 생명 등 온갖 종류의 자본주의적 차별에 대한 비판과 연결될 때만 가능하며, 또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운동들과 수평적으로 연결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전 지구적 핵 체제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시작점으로 우리를 안내할 이 책을 독자들께 추천한다. / 오정민 편집자

2.
강 출판사, <레이먼드 카버: 어느 작가의 생>(캐롤 스클레니카 지음, 고영범 옮김)


▲ <레이먼드 카버: 어느 작가의 생> ⓒ강
한 달 전쯤 미용실에서였다. 거울 앞에 앉자 등 뒤로 모습을 드러낸 원장님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이 어떤 모습으로 미용실 문을 나설지 이미 내 머릿속에 있어요." 새롭게 변한 모습이 얼른 보고 싶다며 원장님은 신나게 가위질을 했다.

<레이먼드 카버: 어느 작가의 생>의 번역 원고가 속속 도착했을 때, 나보다 앞서 원고를 검토했던 선배 편집자(사장님)의 마음도 그와 비슷했던 것 같다. 뒤이어 원고를 본 나 역시 하루라도 빨리 이 책을 세상에 내어놓고 싶은 조급증에 시달렸다. <레이먼드 카버: 어느 작가의 생>은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단편소설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평전이다.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캐롤 스클레니카가 10년 넘게 자료를 조사하고 수백 명을 인터뷰해 완성했다.

900쪽을 훌쩍 넘어서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에서 저자는 흡사 세밀화처럼 카버의 생애를 그려내고 있다. 예민한 감성의 뚱보였던 그의 성장기를 생생하게 재구성하는 한편, 유명 편집자 고든 리시와의 만남, 두 번의 경제적 파산과 중증의 알코올 중독, 존 치버를 비롯한 일군의 작가들과의 우정 등 다양한 계기와 사건들을 통해 카버가 문단에 진입하고 위대한 작가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저술 내내 저자가 보여주는 '균형 감각'이다. 역자의 말을 빌리자면, 저자가 "적절한 거리와 각도의 시선, 알맞은 온도"를 유지함으로써 "풍부한 조사, 정교한 묘사"가 뒷받침된 훌륭한 평전이 탄생할 수 있었다. 작년 7월 출간 당시 카버 팬들의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럼에도 '아까운 책' 목록에 이 책을 올리게 된 연유가 참으로 안타깝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거듭 환호 받아야 할 이유가 충분한 책이다. / 김정현 편집장

3.
개마고원, <전쟁의 경제학>(비제이 메타 지음, 한상연 옮김)


▲ <전쟁의 경제학> ⓒ개마고원
내가 이 책을 한국에 번역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이 책의 초반부에서 전개하는 2008년 금융 위기에 대한 획기적인 해석 때문이었다. 2008년 미국 유수의 금융사들이 줄줄이 무너지면서 전 세계 경제를 위기에 몰아넣은 그 사건이, 미국이 중국에 무기를 팔지 않아서였다면 납득이 가겠는가? 이 책은 그것을 납득이 가게 보여주었다. 말로만 듣던 '군산복합체'가 정말로 사회와 경제에 해악을 끼치는지 실제 사례로 보여주기에 나는 이 책을 국내에 소개하기로 했다. 지금도 계속 신무기를 도입하며 군비 경쟁에 여념이 없는 한국 사회에도 이 책이 주는 의미가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무기 거래에 중독된 경제가 세계의 절반을 계속 구렁텅이로 몰아놓고 있다는 것이다. 군산복합체들은 무기만 만드는 게 아니다. 수많은 하이테크 제품도 만든다.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는 그들은 개발도상국들이 첨단 기술을 획득하는 걸 철저히 가로막는다. 그리고 일부러 긴장을 조성하고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무기 판매에 여념이 없다. 때문에 개발도상국들은 항상 저발전 상태에 머무르며, 경제 발전에 투여할 돈을 무기 구입으로 낭비한다. 선진국들의 더러운 거래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한국도 그 피해 국가 중 하나이다. 연일 군사 훈련이다 뭐다 북한과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전쟁의 경제학>을 한 번 들여다보면 어떨지 조심스레 제안해본다.

덧붙여, 책이 나오고 조금 지난 후 이 책의 저자인 비제이 메타에게서 메일이 왔다. 출간한 한국어판을 잘 받아봤고 뭔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요청해달라고. 원저자에게 그런 메일을 받아본 건 편집자 생활에서 처음이었다. 혹시 비제이 메타에게 용무가 있으신 분은 알려주시라. 기쁘게 연결해드릴 테니. / 김희중 편집팀장

4.
교양인, <프로이트>(1·2권, 피터 게이 지음, 정영목 옮김)


▲ <프로이트> ⓒ교양인
'아까운 책'을 꼽아 달라는 말에 언제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이 있다. 교양인 출판사의 평전 시리즈인 '문제적 인간' 여덟 번째 책,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인 피터 게이(Peter Gay)가 쓴 <프로이트(Freud: A Life for Our Time)>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역사학계의 프로이트'라 불리는 피터 게이는 10년의 연구와 2년의 집필 기간을 거쳐, 가난한 집안 출신의 명민한 유대인 소년이 세기말 빈에서 정신분석이라는 독창적 이론의 창시자이자 세계적인 정신분석 조직의 수장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촘촘히 재구성해냈다. 이 책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프로이트가 자신의 환자들을 분석한 것처럼 저자가 프로이트가 한 실언이나 실수, 농담, 그가 갑자기 자기 분석을 중단한 지점에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적인 충동과 욕망, 갈등을 파헤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 책은 프로이트의 내적 삶과 외적 삶,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의 역사까지 3박자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입체적인 평전이 되었다.

한 편의 역사 소설을 읽는 듯한 흥미진진한 서술 방식, 탁월한 문장 감각과 명쾌한 비유, 편향되지 않은 객관적 시각을 갖춘 원저가 번역가 정영목 선생님의 정확하고 섬세한 번역을 만나 더없이 멋진 작품이 되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나르시시즘' '투사' 등 오늘날 일반 명사로 쓰이는 정신분석 개념이나 프로이트에 관해 궁금해 하는 모든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 이승희 편집자

5.
그린비,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리라이팅클래식 013, 강대진 지음)


▲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 ⓒ그린비
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에 의해 창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오뒷세이아>는 <일리아스>와 함께 서양 문학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전범과도 같은 작품이다. <오뒷세이아>에 등장하는 퀴클롭스와 세이렌, 저승여행 같은 환상적인 모험의 소재들뿐만 아니라, '귀환과 복수'라는 작품의 주요 주제 또한 시대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품들 속에서 무수히 변주되고 반복되어 왔다. 하지만 여느 고전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실체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특유의 고대 서사시의 '문법' 때문이기도 하고, 이야기가 우리에게 익숙한 모험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희랍어와 라틴어 고전들을 집중적으로 연구·번역·소개하고 있는 '정암학당'의 연구원이자, <고전은 서사시다> 등의 여러 저서와 대중적인 강의 등을 통해 희랍 고전에 대한 탁월한 안내자로서 호평을 받고 있는 지은이 강대진은 독자들이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고, <오뒷세이아> 원전에 도전할 수 있도록,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라는 징검돌을 놓았다. 고전 중에 흥미로운 부분만 뽑아내거나 전체를 요약하여 전달하는 '다이제스트'판 고전 소개서가 난무하는 현실에서, 원전을 꼼꼼하게 따라가면서 독자들이 원전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작품의 배경과 숨은 의미를 알려주는 이 책은, 우리가 왜, 어떻게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 박순기 편집장

6.
글항아리,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 옮김)


▲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글항아리
이른바 '마음의 시대'다. 감성과 사회과학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조합과 그 가능성이 시도되고 있는 때이기도 하다. 미국을 대표하는 사회 운동가 파커 파머의 성찰이 집대성된 본 책은 국내 출간 당시 '비통한 자들을 위한'이라는 표현에 꽤 호응을 얻었지만, 사실 이 책의 포인트는 부제인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다.

저자는 다소 감상적인 이 부제를 땅의 언어에서 찾으려 한다. 즉 사람과 사람의 부대낌에서 나오는 언어에 집중한다는 의미다. 그는 사회학적·문화인류학적 태도를 가지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고스란히 전달할 줄 아는 능력을 담담하게 선보인다. 그리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 거기에 담긴 우리 사회를 향한 위로와 우려가 왜 오늘날 정치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는 데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나아가 이 책은 오늘날 간과할 수 없는 주제인 '사회적인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넌지시 던지고 있다.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려기보다는 어느새 느슨해져버린 공공성의 영역 복원을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고민거리를 독자와 세세하게 나누려는 마음씨가 선량한 책이다. 선의가 쉽게 왜곡되고 외려 날선 사회의 의심으로 지목되고 있는 요즘, 이 책은 정치 현실에 상처받은 당신을 위무하기 위한 준비가 호들갑스럽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아직 인간의 선의가 우리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 여전히 우리 시대의 뿌리라는 것에 대한 희망. / 김신식 편집자

7.
낮은산, <민주주의에 反하다>(하승우 지음)


민주주의는 내 문제가 아닐까?

▲ <민주주의에 反하다> ⓒ낮은산
벌써 1년이 지난 이 책의 작업 내용이 들어 있는 폴더의 제목은 '희망을 위한 직접행동'이다. 하지만 '직접행동'이라는 말은 부제에 간신히 살아남았고, 제목에는 '민주주의'라는 말이 들어갔다. 직접행동이 여전히 국내 독자들에게는 낯설고, 조금 더 폭넓게 책 내용을 포괄하는 제목을 지어 보자는 고민의 결과였다.

하지만 2012년 연말 평가서를 작성하면서 나는 "민주주의는 학습의 영역이지 '자기 문제화'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다"라고 적었다. 사실 책을 내기 전까지만 해도 그때까지 낮은산이 낸 인문교양 책 가운데 가장 대중적이며 흥미진진한 책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3.1 운동을 민중의 직접행동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자치 공동체를 이루어 낸 '빨갱이 섬' 소안도를 발굴해 내고, 한국에서 직접행동의 본격적인 싹을 틔운 '부안 핵폐기장 반대 운동'의 의의를 잘 짚어 낸 전반부에 비해 비교적 현대의 사건을 다룬 후반부가 조금 흥미가 떨어진다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 어떤 근현대사 교과서보다 재미있으면서도 생각거리도 풍부한 원고였기 때문이다.

총선 직전에 나온 책은 맥 빠지는 선거 결과와 더불어 바람을 타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적어도 총선 한 달 전에는 나왔다면, 혹은 총선의 결과가 희망적이었다면 어땠을까?'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아쉬운 마음이 크지만 그렇다고 독자 탓을 한다거나 시절 탓을 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이 책은 내게 가장 드라마틱한 근현대사 교과서이며, 어두운 시절을 건너는 우리에게 자존감을 불어 넣어 두 다리에 바짝 힘을 주게 하는 책이니까. 그리고 일단 한번 손에 든 독자라면 누구도 이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으니까. 오히려 이 책을 통해 민주주의가 자신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독자가 한 명 한 명 더 쌓여 갈 테니까. / 정우진 인문교양 팀장

8.
너머학교, <논다는 것>(이명석 글·그림)


▲ <논다는 것> ⓒ너머학교
<논다는 것>은 '너머학교 열린 교실' 시리즈의 일곱 번째 책이다. 출판사의 야심작이라 하자 한 친구가 웃으며 한 말이, "야, 이제 노는 것도 책으로 읽어서 배워야 되냐?"

사실 그렇다. 놀이는 책 안의 표현처럼 모든 생명에게 "조물주가 심어 놓은 버그"인 본능이다. 하지만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 거의 세계 최장 시간의 노동과 학업 노동에 빠져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소비'하는 걸로 논다고 착각하고, 아이들은 휴대전화나 컴퓨터 게임에 매달리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거나 한다. 논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책으로 배워야 한다!

저자 이명석 선생은 잘 놀아서 잘 사는 사람이다. 보드게임하고, 스윙 댄스 추고, 여행하고, 파티 열고, 그 놀이를 글로 쓰고 강연을 다니며 '먹고 산다'. 책에는 그 신나는 놀이의 경험들을 담뿍 담았다. 놀이에서의 좌절과 성공, 실패와 극복, 경쟁과 협동 등 삶의 원리를 깨우치고 감정의 방어력을 높여 준다는 통찰도 묵직하면서도 명쾌하다. 더 나아가 인생 자체를 놀이로 보자고 한다. 인생을 신나는 놀이로 여기고 놀이터에 다른 친구들과 놀 기대감으로 두려움 없이 세상에 나갈 수 있는 자세야말로 청소년기에 꼭 얻어야 할 값진 '아이템'이니 심호흡을 크게 하며 놀러 나가자고 꼬드긴다.

책이 처음 출간된 뒤 꽤 화제가 되었는데 아쉽게도 그 흐름이 더 이어지지를 못했다. 어른들, 특히 부모들이 다시 집어 들고, 아이들이 잘 놀고 잘 자라도록 기다리는 마음을 배우기를, 자신들도 잘 놀기를 간절히 바란다. / 김상미 팀장

9.
돌베개, <예술의 조건-근대 미학의 경계>(오타베 다네히사 지음, 신나경 옮김)


▲ <예술의 조건-근대 미학의 경계> ⓒ돌베개
미학에 관한 책은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 심지어 '미학'이라는 제목을 내세운 어느 국내 필자의 책은 오랫동안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예술과 미에 대한 관심이 한국 독자들에게 분명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미학이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서 대접받고 있는 현실을 간접적으로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의 조건-근대 미학의 경계>는 서양의 근대 미학이 그간의 미학사에서 다루어지듯이 단선적이고 목적론적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학문적 관심과 사회적 조건이 미학이라는 형상을 주조했음을 근대의 방대한 담론의 문맥을 밝힘으로써 재구성하고 있다. 저자인 일본의 미학자 오타베 다네히사의 논지도 매우 담대한 것이 아닐 수 없는데, 한마디로 말해 서양의 미학이 형성되는 데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소유권', '선입견'이라는 취향, '국가론', '방위' 개념, '역사적 사고'가 결정적으로 작용을 했다는 것이다. 미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편견을 여실히 부숴버리는 문제제기가 아닐 수 없다.

대담하고 독창적인 논지에 비해 논의의 설득력이 떨어지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다. 근대의 사회적 조건과 배경이 서로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미학의 개념과 교차되는 담론 구성의 순간을 포착해내는 저자의 논지에 다다를 때는 시적인 에피파니의 전율마저 느껴진다. 이것이 바로 본격 인문서를 읽는 지적 쾌락이 아닐까. 책을 들추었을 때 어려운 책이라고 지레짐작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도전해보자. 책을 읽는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한발 한발 내딛는 발걸음과 같은 것이다. 이 책은 지금껏 한 번도 가지 못한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 김진구 편집자

10.
동아시아,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박동춘 지음)


▲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동아시아
저자 박동춘 선생님을 처음 뵙기 위해 출판사가 있는 명동을 출발해 과천 연구소로 가는 길, 많은 의문과 궁금증이 있었다. 나는 달달한 믹스커피부터 드립커피까지 하루에 대여섯 잔을 마셔대는 커피 중독자다. 반면 밍밍한 녹차나 일명 전통차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나 뵐 박동춘 선생님은 한국의 전통차인 초의차를 적통 계보를 이어 동춘차에 평생을 바치셨고 현재도 직접 만들고 계신다. 판매를 하지도 않으시는데 차 애호가들 사이에서 20그램 한 봉지에 100만원이 넘는 금액으로도 구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과연 우리 차란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가격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햇빛이 담담히 비쳐오는 창을 뒤로 하고 선생님은 의자에 앉아 차를 끓이신다. 아주 작은 찻잔에 뜨거운 차를 조금 부어주시면서 마셔보라고 하신다. 원고 얘기를 나누면서 찻잔에 계속 차를 부어주신다. 그 전날 회사일로 과음을 하고 머리가 흔들흔들 하던 나는 저자를 처음 뵐 때의 긴장감과 숙취가 뒤섞여 몸과 머리가 붕괴 직전이었음을 미리 고백한다. 첫 잔을 마셨을 때의 달콤한 맛, 두 번째 잔의 맑은 맛, 세 번째 잔의 깊은 맛… 어느 순간이었을까.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머리는 맑아지고 온 몸이 투명해지는 느낌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듯한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원고에서 읽었던 '다삼매의 경지'였다고 지금에서야 뒤늦게 깨닫게 된다.

한국 문화의 산자수명한 풍토에서 오는 '고요한 맑음, 은은한 투명성'을 그대로 옮겨 놓은 우리 차의 첫 느낌이었다. 책 제목을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로 하자고 고집한 것은 내가 차를 직접 마셔보았기 때문이다. 제목이 너무 어렵고 불교적이라고 선생님은 걱정하셨고 결국 그 우려대로 책의 판매 부진으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도 책이 출간된 뒤에 하게 되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셨던 제목인 '햇차를 보내주오'로 했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책은 조선시대 다산과 추사, 그리고 초의선사의 차를 통한 교우와, 산사의 선사들을 통해 전해 내려오던 한국 전통차의 원융한 세계를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특히 추사와 초의의 우정은 가슴을 뜨겁게 하는 브로맨스(남자들의 로맨스)로 다가오며, 추사의 호방함과 위트, 익살맞은 모습은 그를 '상남자'로 사랑하게 만든다. / 박현경 주간

11.
로도스, <해적당>(마르틴 호이즐러 지음, 장혜경 옮김)


▲ <해적당> ⓒ로도스
편집자의 눈으로 보면 자신이 만든 책은 결과적으로 항상 아쉬움을 남긴다. 많이 팔린 책은 더 많이 팔렸어야 했고, 많은 주목을 받은 책이라도 사실 더 많은 주목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많이 팔리지도 않았고 특별한 조명도 받지 못한 경우의 서운함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해적당>은 2012년 대선을 멀리 앞두고 기획되었다.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 기존 정당의 개조 혹은 갱신에서 답을 찾기 보다는 차라리 지금은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더라도 새로운 대안적인 세력이 출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유럽에서 기세를 올리고 있는 해적당이 떠올랐고 이후 관계 문헌을 찾아 계약을 한 후 번역 원고를 받는 과정을 빠르게 진행했다.

최근에 새로이 탄생한 정당 중에서 해적당의 사례는 특별한 주목을 요구한다. 해적당 운동이 유럽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보다 유럽에서 안정적인 지지를 확보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독일의 해적당이다. 이 책 <해적당>은 독일에서 해적당이 거둔 엄청난 정치적 성공의 비밀을 자세히 분석하고 전달해주고 있다.

현재 해적당이 예전에 녹색당이 처음 출현할 때 보여주었던 가파른 성장세까지 앞지르고는 있지만, 그들의 실험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들의 젊은 정치적 에너지가 보여주는 것은 역시 정치는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상상력의 문제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책 <해적당>은 그 아름다운 상상력을 입체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 김수영 대표

12.
마음산책, <대니 보일>(브렌트 던햄 엮음, 백한진 옮김)


묻어두기 아까운 사람

▲ <대니 보일> ⓒ마음산책
"레드 콤플렉스 때문이 아니라면 그냥 두는 게 낫겠습니다."
역자한테서 돌려받은 교정지에는 붉은색 펜으로 그렇게 꾹꾹 눌러 쓰여 있었다. 끝을 길게 날린 필체가 신경질적으로까지 보였다. 일인즉 본문에서 대니 보일이 언급한 '계급'이라는 단어를 어감이 격하다 싶어 '계층'으로 바꿔도 될지 여쭈었던 것인데, 역자는 '계급'을 다른 말로 대체하겠다는 느슨한 의식이 적잖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대니 보일> 작업이 불과 1년 전. 돌이켜보건대 그때까지만 해도 느슨하긴 했음을 인정해야겠다. 그가 쏟아내는 영화 이야기에서 장면을 재발견하고 음미하기 바빴지 계급의식을 헤아리기는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아일랜드계 노동자 집안 출신이라고는 해도 책 속에서 그는 그저 둥글고 수더분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를 다시 본 건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다. 그답지 않게 거기엔 국가지대사에서 무려 소시민의 일상을 소박하게 묘사하는 탈권위주의가 있었고, 여왕을 하늘에서 곤두박질시키는 혁명성이 있었다. 요컨대 대니 보일의 계급관은 뚜렷했다.

<대니 보일>이 다시 보인 것도 그때다. 책에 나오는 새삼스러운 사실들, 예컨대 블록버스터에 욕심내지 않고, 필름 값 걱정 없는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길 즐기는 면면에서 뚜렷한 자기 인식이 보였다. 그는 자기 자리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자본이든 계급이든 권력에 응수해왔을 게다.

세파에 휘둘리지 않고 정중동의 자태를 지킬 줄 아는 사람. 아마 지극히 무던하든가 지극히 확신 어린 사람이겠다. 난 후자라고 믿는다. 색깔 분명한 그의 영화를 보면. 예술가의 이런 면모를 보지 못하는 건 무척 섭섭한 일이다. 그래서 내겐 <대니 보일>이 참 아깝다. / 이승학 편집팀 대리

13.
마티, <대중이 돌아온다!>(댄 하인드 지음, 노시내 옮김)

"우리는 진실을 말해도 안전한 혹은 덜 치명적인 세상에 살기를 바란다."


▲ <대중이 돌아온다!> ⓒ마티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한때 2012년은 정치의 해가 되리라고 기대했다. 2011년 말이 지날 무렵 우리는 철저하게 본능에 충실한 MB를 목격했고, 박원순과 안철수는 아름다운 단일화에 성공했으며,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라는 선포에 열광하는 대중을 마주했다. 그리고 다가올 2012년에는 자그마치 전 세계 마흔네 나라에서 선거가 치러질 예정이었고 그 종착역에는 2012년 12월 19일 대망의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풍년도 이런 풍년이 없었다.

그래서 준비한 책이 바로 <대중이 돌아온다!>다. 기가 막힌 타이밍처럼 보였다. '공공적인 것의 귀환을 위하여'(부제) '투표를 넘어 정책에 참여하라'(뒤표지 카피)는 이 책의 메시지가 연예인들의 공항 패션을 포털 1면에서 쫓아내고, '뉴스데스크'를 제자리로 돌리고, 철탑 위 노동자들을 뭍으로 내리고, 구럼비 바위를 지키지는 못 할지언정 적어도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을 한껏 자극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선관위 디도스 공격이나 4대강 공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깊이 있고 전문적인 의견들이 트위터에서 140자에 얽매인 채 표류하지 않고 심층 취재 기사로 거듭날 수 있도록 공공이 지원하는 제도를 생각해 보자는 것인데, 어찌 떨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기대와 달리 2012년 3월 출간된 책은 제대로 조명 한 번 받지 못하고 서가로 직행했다. 선거도 끝났고, 정치적 변화도 없었다. 다만 <뉴스타파>가 2만 7000여 시민의 힘을 모아 시즌 3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 기회를 빌려 <대중이 돌아온다!>에서 구상하는 '공중 주문 취재 제도'를 닮았다고 말하고 싶다. / 이창연 편집부 과장

14.
모비딕, <일본의 검은 안개>(상·하권,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음모와 진실 사이를 종횡무진 하는 글의 힘

▲ <일본의 검은 안개> ⓒ모비딕
'음모론'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숨겨진 욕망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음모론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확인되지 않았다'는 뜻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대개 허구도 사실도 아닌 것으로 취급된다. 그런 의미에서 마쓰모토 세이초의 <일본의 검은 안개>는 허구도 사실도 아닌, 어느 지점에서 쓰였다고 할 수 있겠다. 전후 일본의 뒤숭숭한 시국에서 발생한 12개의 미스터리 사건. 그 실체의 근본을 추적한 이 작품은 픽션(허구)이 아니다. 단순한 논픽션(사실)이라고 하기에는 세이초의 추리가 상당히 대담하다.

"처음 이것을 발표할 때, 나는 소설로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설로 쓰자면 거기에는 다소의 허구를 가미해야 한다. (…) 다시 말해 소설로 쓰면 어중간한 허구를 섞음으로써 객관적인 사실을 혼동하게 되고 진실성이 줄어든다. 그것보다는 조사한 자료를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그 자료 위에 서서 나의 생각을 말하는 게, 소설의 형식보다 독자에게 훨씬 직접적인 인상을 줄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단순한 보고나 평론도 아닌' 특수한 양식이 완성되었다."

그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을 했다. 이 책이 처음 발간되었을 때 일본 사회는 경악했고,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논의는 진행 중이다. 이 책은 픽션인가 논픽션인가. 미스터리인가, 시국 보고서인가. 음모론의 나열일 뿐인가, 혹은 당대의 속살을 꿰뚫은 대작가의 노작인가. 수많은 논쟁거리를 던진 채 <일본의 검은 안개>는 음모와 진실 사이에서 지금도 부유하고 있다. / 박지석 편집자

15.
문학과지성사, <여름>(김유진 지음)


문자로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마음을, 풍경을 통해 바라보게 하는 복화술사

▲ <여름> ⓒ문학과지성사
능수능란한 이야기술로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작품들이 있다. 마치 삶을 대신 겪어낸 것처럼 무섭도록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도 있다. 이런 마력은 독자들이 소설에 기대하는 가장 보편적인 미덕일 것이다. 마력적인 소설들은 빈틈이 없어 흡, 들이쉬어 단숨에 읽은 후에야 간신히 호, 하고 숨을 돌릴 수 있다. 그런 작품들의 맹점은 첫째, 이야기가 끝난 뒤, 그러니까 이야기와 미문으로 독자들에게 적당한 카타르시스와 감성 폭풍을 안겨준 다음 딱히 기억나는 게 없다는 것이며 둘째로, 쉽게 빠져든 만큼 금세 물린다는 것이다.

김유진의 두번째 단편집 <여름>에 수록된 소설들은 그런 마력과는 거리가 멀다. 아마도 그것이 이 소설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유인 동시에,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가지 못해 유독 아쉬운 까닭일 것이다. 거침없기보단 조심스럽고, 종종 깊이 위로받지만 그건 아름다운 문장보다 조용히 스며드는 정서 덕이다. 작품집 전체를 둘러싼 고요하고도 투명한 정서를 조성하기 위해 김유진은 "단번에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옅은 것, 미묘한 것, 그러나 이곳에 있는" 가능한 한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을 응시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풍경들을 끌어들이다 보니 자연스레 특유의 정서가 조성되었다는 게 더욱 적확할 것이다. <여름>에서 김유진은 억지로 '장악'하지 않으며 말도 이야기도 독자도 억압하지 않는다. 그저 응시할 뿐이다.

김유진은 이 소설집으로 고립된 개인이 타인을 만나며 소통과 불화를 거듭하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말은 결국 서로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의미를 잃고 빛이 바랜다. 말이 기어이 무력해지면 가만히 마음과 세상의 풍경을 응시할 시간이 필요하다. 언어의 생성과 소멸을 겪은 후 다시 쓰인 문장들은 그런 의도적 실어를 앓았기에 새로 배운 말처럼 맑다.

제목이 확정되기 전, 이 소설집의 가제는 <희미한 빛>이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지만 그 제목도 썩 잘 어울렸을 듯싶다. 조용한 방, 뽀얀 먼지가 유유히 부유하는 햇빛을 붙든 (표지감으로 작가가 골랐던) 빌헬름 함메르쇠이의 그림처럼, 풍경과 풍경이 빚어낸 정서를 정갈하게 담아내는 소설들은 여운이 진하며 향기가 깊어 쉬 물리질 않는다. / 이민희 한국문학팀 편집자

16.
문학동네, <진리와 방법>(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지음, 임홍배 외 옮김)


▲ <진리와 방법> ⓒ문학동네
신화가 된 책이 있다. 백 살 넘게 장수했던 철학자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1900~2002)의 대표작 <진리와 방법>이 그런 책이다. 온당하건 부당하건 최소한 한국에서 <진리와 방법>은 어떤 신화를 거느리고 다녔다. 전모를 드러내지 않은 채 소문만 무성한 거인, 명성은 있으나 실체 없이 허공을 맴도는 유령, 반드시 온다고 언약했으나 나타나지 않는 귀인처럼. 그렇게들 말이 많았다. 총 3부 중 제1부만 소개되고 출간이 미뤄지자 많은 비난과 기대가 동시에 쏟아졌고, 출간 지체가 출판사가 내보이는 직무 태만을 넘어 한국 학계를 탓하는 자기비하로 이어지기도 했다. 과분한 관심이자 과도한 반응이라 생각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진리와 방법>은 확실히 엄청난 대작이다. 책의 두께도 그렇거니와,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다양한 학문예술 분야에 미친 영향도 그렇다. 더 말해 무엇하랴만, 난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독자의 접근을 불허하는 난공불락의 요새는 아니다. 책에 아우라를 씌운 채 높은 공중에 띄워놓고 입방아만 찧어선 안 된다. 담당 편집자의 손에서 원고가 다듬어지고 책 형태가 갖춰지는 동안 계속 출간을 문의하는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이에 응대해야 했다. "그 책 언제 나오나요?"는 온건한 편, "아니, 대체 책을 내긴 내냐?"는 의심과 불만의 볼멘소리도 있었다.

2012년, 우리는 드디어 책을 완간했다. 임홍배 교수는 겨울이면 강원도의 사찰에 들어가 번역에만 집중할 만큼 정성을 쏟았다. 희랍어와 라틴어는 고전학자 안재원 선생이 꼼꼼하게 점검해 완벽을 기했다. 몇몇 언론사에서 기사가 나갔다. <진리와 방법>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서, 2000년 1권 출간 이후 12년 만의 완역, '철학적 해석학'의 창시자 가다머 필생의 역작, 하버마스 및 데리다와 세기적 논쟁을 부른 현대 철학의 명저… 책이 출간되자 문의전화는 잠잠해졌다. 무관심일까? 아니겠지! / 고원효 인문팀 부장

17.
미지북스, <의혹을 팝니다: 담배 산업에서 지구 온난화까지 기업의 용병이 된 과학자들>(나오미 오레스케스·에릭 M.콘웨이 지음, 유강은 옮김)


▲ <의혹을 팝니다> ⓒ미지북스
급격한 기후 변화를 목도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지구 온난화가 인간의 온실 가스 배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 현상'의 일부로 잘못 알고 있다. 왜 우리는 지구 온난화와 같이 이미 규명된 과학적 사실들에 대해서조차 의문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의심의 상인들'이라고 불리는 일부 극소수 과학자들 때문이다. 화석 연료 산업계의 후원을 받으며 지구 온난화를 부정하는 이 과학자들은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담배 업계를 옹호하기 위해 담배가 폐암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부정해온 전력이 있다. 그들은 사실 지구 온난화뿐만 아니라 산성비, 오존홀, 전략방위구상과 같은 주요한 환경·보건·안보 이슈에서 진보적 정책이 도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업의 용병 역할을 끈질기게 해왔던 것이다.

과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저자들이 쓴 이 책은 한줌의 우파 이데올로그들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진실을 가리고 여론을 조작해온 충격적인 역사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위키피디아에 표제어로 등록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지구 온난화 논쟁의 종지부를 찍고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 우파 과학자들의 역사적 실체를 백일하에 드러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 이지열 편집자

18.
민음사, <한평생의 지식>(강신주·서동욱·우석훈·하지현 외 지음)


▲ <한평생의 지식> ⓒ민음사
웬만한 정보는 모두 인터넷에서 쉽게 채집할 수 있는 SNS 시대에 이렇게 지식을 집약한 책이 필요할까 싶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지식의 큐레이팅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한평생의 지식을 책 한 권에 담을 수는 없지만, 그만큼 큐레이터들의 제안이 중요해진 것이고, 이러한 차원에서 <한평생의 지식>은 바로 우리 시대 지식 생산의 미래를 보여 주는 반짝이는 결과물이다. 경제학자 우석훈이 필자로 참여했으면서도 처음에 이 책을 단순한 지식의 집합일 것으로 생각했다가, 책을 펼쳐 들고는 개인 블로그 서평에서 "책값보다 열 배 이상의 값어치를 하는 책"이라며 칭찬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 서동욱의 표현에 의하면, 탄생에서 노년까지 인생이란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가를 추구하는 삶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호기심'이라 일컬었으니 <한평생의 지식>은 인생의 중요한 국면마다 고개를 드는 이 호기심에 대한 지식의 대답이다. 그리하여 '싸이 현상'을 밈 이론으로 설명하는가 하면 정치인들이 빅데이터를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와 같은 생생한 삶의 현장을 얘기하기도 하고, 한국인은 왜 죽도록 일만 하는가에서부터 재난 경제학이나 아르바이트 경제학 같은 사회 문제를 짚어 주는가 하면, 텔로미어로 본 불멸의 가능성과 노년의 성생활 및 여가의 진정한 의미처럼 생명 연장의 꿈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또한 미디어 아트와 로봇 아트를 통해 예술은 어떻게 변할 것이며 스크린 시대에 연극은 어디로 향할 것이며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이 시점에서 영화는 또 어떻게 변할 것인가와 같이 우리 삶과 뗄 수 없는 예술의 미래도 읽을 수 있다. 독자는 <한평생의 지식>에서 모든 지식을 채집할 수는 없지만 지식 큐레이터들이 제안하는 통찰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 양희정 편집부장

19.
북스피어, <가족 사냥>(상·하권, 덴도 아라타 지음, 이규원 옮김)


▲ <가족 사냥> ⓒ북스피어
덴도 아라타가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은 전부 가족 문제를 다루고 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할머니가 몸져누운 것이 그가 가족 문제에 천작하게 된 원인인 듯하다. 병든 할머니와 보낸 오 년은 작가가 된 입장에서 돌이켜 보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늙어가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그에 대해 가족과 주변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가, 조금씩 죽어가는 할머니와 함께 그는 사춘기를 보냈다. 가족이란 것이 항상 따뜻하고 즐겁고 단란한 곳일 수만은 없음을 이해한 시간이었다.

덕분에 편집자의 조언을 듣고 서스펜스 호러에 도전했을 때, 뭘 어떻게 써야 서스펜스 호러가 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무서워할까를 궁리하다가, "도망칠 수 없는 상황 자체가 공포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이 도망칠 수 없는 대상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모든 사람이 공유하며, 권력도 부도 의미를 잃는 것, 누구나 평등하게 고민할 가능성이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는 <가족 사냥>(1995)으로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수상하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인기를 얻는다.

북스피어가 출간한 <가족 사냥>은 작가가 1995년에 썼던 <가족 사냥>을 완전히 다시 쓴 소설이다. 새롭게 쓴 <가족 사냥>에서는 자국 내의 사회 문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9.11 테러와 같은 세계의 비참한 사건으로까지 소재를 확대하여 가정 내 비극과 세계의 비극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해 고찰한다. 하지만 방대한 소재에 걸맞은 방대한 분량 때문이었을까. 한국에서 <가족 사냥>은 전혀 팔리지 않았다. <아빠, 어디가>와 겨뤄도 좋은 승부가 될 만큼 흥미로운데도 불구하고. 미안합니다, 덴도 아라타 씨. / 김홍민 대표

20.
사계절, <당신의 계급 사다리는 안전합니까?>(뉴욕타임스 지음, 김종목·김재중·손제민 옮김)


▲ <당신의 계급 사다리는 안전합니까?> ⓒ사계절
<청담동 앨리스>에서 디자이너를 꿈꾸는 한세경(문근영)은 풍족하지 못한 집안에서 온힘을 다해 스펙을 쌓았지만, 유학을 다녀오지도 못했고, 명품을 사보지도 못해 취향과 안목에서 낮은 점수를 받는다. <청담동 앨리스>는 새롭게 변한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과거 드라마에 나왔던 가난한 집 자식들이 꿈과 열정만 가지고 부잣집 자식과의 경쟁에서 이겼다면, 이제 더 이상 그러한 일이 쉽지 않음을 드라마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계급은 개인의 능력으로 바꿀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도리어 계급이 우리의 능력을, 더 나아가 삶의 방향을 결정해준다. 잘사는 집 아이의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이유도, 더 많은 문화 자산을 보유한 것도, 더 연봉이 좋은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이유도, 심지어는 더 오래 사는 데에도 계급의 영향이 작용한다. <청담동 앨리스>에서 한세경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유한 남자를 만나 결혼해 신분 상승하겠다고 다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 앨리스들이 드라마처럼 부잣집 남자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도리어 시야를 좀 바꿔봐야 하지 않을까? <뉴욕타임스>가 펴낸 <당신의 계급 사다리는 안전합니까?>는 앨리스가 느꼈을 좌절의 불안감과 계급 상승의 욕구를 미국의 많은 일반인들도 느끼고 있고 그들 사이에서 계급이 어떻게 작용하고 효과를 내고 있는지를 밝히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을 보면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상류층의 사람들조차 계급의 굴레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계급 상승이 아니라 계급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강제하는 시스템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문제제기하는 것이 아닐까? / 진승우 인문팀 편집자

21.
사월의책,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 인문학 편지>(브뤼노 라투르 지음, 이세진 옮김, 김환석 감수)


▲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 ⓒ사월의책
코기토(cogito, 나는 생각한다)라는 라틴어는 아마도 몇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문장이 가장 유명한 예문이겠지요. 하지만 코기타무스(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라는 단어는 다소 생소하실 겁니다. 저 역시 이 책을 편집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코기타무스라는 단어를 알고 나면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가 의심스러워집니다. 나 '홀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함께'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제목처럼 '이 책은 과학과 기술에 대한 책입니다'라고 쉽게 말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상식에 도전하는 도발적인 책이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생각이 따로 있고, 사람과 사회에 대한 생각이 따로 있다는 근대인의 상식에 말이지요. 과학이 홀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혹은, 인문학이 홀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과학과 인문학은 함께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 벌써 미궁에 빠진 것 같습니다. 대체 과학과 인문학이 함께 생각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주의! 브뤼노 라투르는 홀로 생각해서 뜻을 정의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과학과 사회가 뒤엉켜 있는 여러 사례들을 보여줍니다. 원자력 발전, 지구 온난화, 유전자 조작 식품 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많은 과학적, 사회적 논란들을 봅시다. 우리는 저마다의 영역에서 홀로 생각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 함께 존재한다면, 세상은 다시금 흥미로워질 겁니다. 나만의 고독을 벗어나 무수한 너들의 존재와 마주치고 혼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건들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요. / 박동수 편집팀장

22.
사이언스북스, <과학을 성찰하다: 현대 과학의 새로운 지평>(임경순 지음)


▲ <과학을 성찰하다> ⓒ사이언스북스
<과학을 성찰하다>는 과학과 대중 사회의 대화를 위해 노력해 온 임경순 포항공대 교수가 과학과 현대인의 관계를 기업, 사회, 국가, 예술이라는 다양한 시각에서 서술한 책이다. 현대 과학의 여명기에서 융합 과학의 미래까지 20세기 과학을 성찰하며 저자가 내린 결론은 과학 기술의 사용은 결국 철학적 가치관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면서 과학의 올바른 사용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저자는 우리가 '사회에 의한 과학의 구성'이 아닌 '과학에 의한 사회의 구성' 내지 '과학과 사회의 공동 구성'이라는 관점에서 과학을 바라볼 때 융합으로 천변만화하는 미래 과학을 부작용 없이 사용할 길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새 대통령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한 국가 부처의 이름이 세간의 화제이다. 미래창조과학부, 대한민국의 '미래'를 '창조'할 과학 기술을 기치로 20조 원의 예산을 집행할 이 거대 부처는 기초 과학보다 일자리 창출에 중점을 둔 것 아니냐는 우려 속에서도 과학과 정보 통신의 융합을 위해 순항(?) 중이다. 어쨌거나 지금 우리에게는 과학이 중차대한 일인 모양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성찰의 시간은 존재했는가? 과학 기술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가 혼란하고, 그만큼 사회 구성원 각자에게 과학을 바라보는 '밝은 눈'과 '교양'이 요구되는 작금의 상황이 <과학을 성찰하다>를 아까운 책으로 뽑게 된 이유이다. '과학'과 '성찰'을 담아낼 표지(크로아티아 작가의 작품이다)를 위해 인터넷의 바다에서 보낸 수많은 나날도 선정에 영향을 미쳤음을 밝힌다. / 최원 대리

23.
삼인,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이흥환 엮음)


▲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삼인
이 책에 실린 편지는 대부분 1950년에 쓰인 것들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또는 직후이다. 갖가지 사연을 담은 이 편지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편지를 보낸 지 6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수신인에게 전달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엮은 이흥환은 2008년 11월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열람실에서 한국전 당시 미군이 노획한 북한 문서의 목록을 작성하다가 이 편지들을 처음 만났다. 이흥환은 1068통의 편지를 샅샅이 살피면서 그 가운데 113통을 골랐다. 그중 68건은 편지글을 옮겨 쓰고 이해를 돕고자 편지에 대한 설명글도 적었고 45건은 설명 없이 화보로 구성해 이 책을 엮었다.

이 편지들은 남북한 체제 연구, 한국전 전후 시기의 사회상 연구에 꼭 필요한 사료로 가치가 높다. 그리고 딱딱한 역사서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한 시대의 증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책을 낸 뒤 여러 매체에서 관심을 보여 왔고, 이 편지 글을 소재로 연극도 제작되었다.

엮은이와 출판사는 이 책을 내면서 이 편지들의 주인공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나타나주길 바랐다. 그러한 바람으로, 책에 실리지 않은 다른 편지글도 <프레시안>에 한 달 넘게 연재를 했고, 600여 통의 다른 편지에서 보내는 이와 받는 이, 그리고 둘의 관계 및 주소를 따로 취합한 주소록을 별책부록으로 만들기도 했다.

편지를 보낸 사람과 받는 사람이 남한에 살아 있지 않더라도 그 유족 중 한 명이라도 편지의 임자라고 나타나리라 기대했지만, 지금까지 한 사람도 출판사에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편지의 주인공이나 그 유족이 이 책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남한의 분위기가 아직은 "내가 인민군의 후손이다"라고 밝힐 만한 분위기가 아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이 편지들은 여전히 미국 정부가 소유권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을 보고서 편지의 주인공이 직접 나타나준다면, 그리고 정부 차원에서든 민간 차원에서든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이 편지 묶음의 반환을 요청할 수 있다면, 이 책의 출간 의미는 한층 더 커질 것이다. / 김종진 편집자

24.
서해문집, <누가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죽이나>(김재연 지음)


▲ <누가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죽이나> ⓒ서해문집
구글, 아이폰, 갤럭시 등 연일 IT 신제품이 나오고 인터넷 등의 네트워크는 더욱 확장되고 있다. 하지만 뉴스는 새로운 제품, 새로운 서비스를 소개하기에 바쁘다. 우린 IT 기술 발전이 가져올 사회 변화, 그 속에서 발생할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한 성찰과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심상치 않은 IT 전문가(라고만 하기엔 하는 일이 엄청 많은) 김재연을 만났다!

인터넷은 민주주의를 확장시키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여겨졌다. 실제로 인터넷은 언론이 닿지 못했던 곳의 목소리를 담아냈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 문화 생산자들의 생산물에 대한 이익은 플랫폼 업체나 포털로 집중되고 있고, '미네르바 사건'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에서 보듯 국가가 국민의 자유를 침해하고 여론을 바꾸려는 시도도 끊이지 않는다. 또한 중국 정부는 인터넷으로 반정부 인사들을 더욱 쉽게 색출, 탄압한다.

이 책은 권력과 자본이 통제하는 인터넷 생태계를 어떻게 개방과 공유, 자유의 정신이 살아있는 곳으로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자유와 참여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지켜낼 수 있는 것임을, 그리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역설한다.

네트워크 산업의 역사, 그리스 신화, 김본좌 사건, 다큐멘터리 영화, 주말 드라마, 엔도 슈사쿠, 미하엘 엔데의 소설 등 다양한 분야를 통한 설명, 디지털 네이티브인 20대 저자의 인생 궤적과 참신한 생각이 흥미를 더할 것이다.

아직은 IT 제품에만 관심이 집중된 탓이었는지, 인터넷 생태계 통제의 피해에 대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책 판매는 기대를 밑돌았고, 동료들은 "누가 이 책을 죽이냐"고 물어왔다. 한손에 스마트폰, 눈앞에는 인터넷 화면을 켜놓은 우리가 이 책을 살려야 한다. 그것은 이 책 속에 새로운 사회의 다양성과 민주주의를 살리는 길이 있기 때문이고, 아직 담당 편집자가 자책과 고통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 임경훈 편집부 과장

25.
시공사, <나 이재익, 크리에이터>(이재익 지음)


▲ <나 이재익, 크리에이터> ⓒ시공사
현장. 인문 편집자로 살면서 최근 몇 년간 이렇게 되물었다. 지금 만들고 있는, 혹은 만들려는 책에다 대고 '그래서 해봤어?' '알아? 직접 해봤냐고'라고. 고백컨대 '아니, OOO이 해봤대'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책이 적지 않았다.

이제는 유행어가 되어버렸지만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에는 분명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다. <나 이재익, 크리에이터>는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라디오 PD인 이재익의 크리에이티브론(論)이다. 작가는 1997년 문학사상 소설상을 받으며 등단한 뒤, <질주><서울대 야구부의 영광>을 비롯한 13편의 소설을 내고, 3편의 영화 작업에 참여했으며, <두시 탈출 컬투쇼>를 거쳐 현재 <이숙영의 파워FM>의 담당 PD로 활약 중이다. 또 팟캐스트 <씨네타운 나인틴>에서는 진행자로까지 나서고 있으니, 이쯤 되면 '뭐지? 이 사람?' 싶다.

내가 아는 이재익 작가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그는 어느 때 어느 자리에서건 이야기꾼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 그것이 소설이건 시나리오건 라디오건, 때로 사석이건. 그는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정확히 알고, 정말 '잘' 풀어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나 이재익, 크리에이터>는 처음부터 작가의 특성을 잘 살려, 소설·방송·영화 쪽에 관심이 많은, 해당 분야의 지망생들을 위한 책이었다. 하지만 편집자로서 그들의 니즈를 반영하고 큰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많이 부족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현장에서 다져진 뛰어난 이야기꾼이자, '노력에 의해 길러지고 강해지고 예리해질 수 있다고 믿는' 작가의 매력을 '잘' 드러내지 못했다. 이 책에서 필요한 것은 식의 바로 그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책에서 작가가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근성'이다. 근성 있는 작가 이재익처럼, 이 책 역시 근성 있게 독자들의 마음을 두드릴 것으로 믿는다. 현장성과 진정성을 무기로. / 정선영 인문파트장

26.
알렙, <언지록>(사토 잇사이 지음, 노만수 옮김)


▲ <언지록> ⓒ알렙
새삼 '아까운 책'으로 <언지록>을 건져 올리고 싶은 마음의 밑바닥에는, '그들만의 리그'에 다시 한 번 붙여보자는 속셈이 있겠다. '아까운 책'이 그냥 아깝기만 하면 안 된다. 최대한 호소력 있게 소개하고, 사연을 잘 꾸미고, 돋보이는 표현을 써서, 군계 중의 일학으로 만들련다. 하지만, 군학 중의 일계에 머무를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언지록>이란 고전을 첫 번역, 소개하는 작업은 평범하고 정직했다.

지은이는 일본의 대유학자인 사토 잇사이로, 1133조항의 문구를 40년에 걸쳐 4부작으로 남겨놓았다. 옮긴이는 시도 쓰고 번역도 하는 노만수로, 2년에 걸쳐 번역하는 동안 집과 일 안팎에서 대소사를 겪는 등 간난신고가 끊이지 않았다. 출판사로서는 설립 초기에 기획을 시작하여 3년째에야 책을 낼 만큼, 우연찮은(?) 오랜 공을 들였다. 그리고 720쪽 양장본은 초판을 낸 지 3개월 만에 재쇄를 바라보게 되었다. 2012년 대선 정국에서 나와 책 소식이 거의 들리지 않고 푹 파묻혔던 것 치고는 의외의 성과였다.

그렇지만, 오늘날 <언지록> 전체를 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좋은 말과 글이라 한들, 쓸모없는 말도 쓸모 있다 할 수 있을까? 구태여 1133조 모두가 명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초판을 편집하는 동안, 내내 고민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방침을 정했다. <언지록> 초판이 모두 판매되고 나면, (물론 재쇄를 발행하겠지만) 이 책을 리포지셔닝 혹은 리포매팅한 판본을 만들어 초역 <언지록>을 '고전으로써 읽는 독자'가 아닌, <불혹의 문장들>을 '처세훈으로 읽는 새로운 독자'를 만나겠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이 책이 다시 2013년 아까운 책이 될지라도 끊임없이 이 고전의 지평을 넓혀나가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이 항상 기회다. 이 고전을 다시 '그들만의 리그'로 올릴. / 조영남 대표

27.
알키, <너무 다른 사람들: 인간의 차이를 만드는 정서 유형의 6가지 차원>(리처드 J. 데이비슨·샤론 베글리 지음, 곽윤정 옮김)


▲ <너무 다른 사람들> ⓒ알키
누구나 한 번쯤은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런 걸까?' 하고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같은 말에도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통하게 웃고 마는 사람이 있고, 애인과 헤어지고 나서도 세상이 끝난 것처럼 침울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금세 툭툭 털고 일어나 다른 인연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 있다.

무려 30여 년간 인간 정서와 뇌에 대해 연구해온 신경과학계의 거장 리처드 J. 데이비드슨 박사는, 이렇게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각각 다르게 반응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뇌 패턴과 관련 있는 '정서 유형'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정서 유형을 세계 최초로 발견하여, '최우수 과학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타임>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매디슨>이 뽑은 '올해의 인물'이 되기도 했다. 특히 이 책은 출간 후 2012년 미국 아마존 인문 분야에서 1위를 차지하며, 각종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너무 다른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읽은 사람들만 알고 추천하는 우수 도서에 그쳤다. <당신 뇌의 정서적 생활(The emotional life of your brain)>이란 원제를 지금의 제목으로 수정했으나, 책의 내용을 직관적으로 알 수 없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또 저자가 뇌를 변화시켜 정서 유형을 개선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용어와 전문적인 설명을 붙이는 바람에 대중 독자를 놓쳤다는 점도 한계였다.

이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정서 유형이라는 과학적 근거를 통해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공황장애, 우울증 등 정신질환의 원인과 개선 방법을 제시하고 있어 여러모로 유익하다. 책을 끝까지 읽어나간다면, 누구라도 보다 행복한 정서적 삶을 영위하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박나미 편집자

28.
어크로스, <오래된 지혜>(김선자 지음)


▲ <오래된 지혜> ⓒ어크로스
이 책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동아시아 신화 전문가 김선자의 최근작이다. 저자는 직접 동아시아 곳곳, 특히 중국 소수민족들의 땅을 찾아 답사와 취재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한 열심이 빚은 책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 중심의 신화 교양서 시장에서도 유의미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번 책에서 저자는 동아시아 신화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공존'이라는 생태적 메시지에 주목했다. 책은 신화 속에는 옛 사람들이 후대에 전하고 싶은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고 설명하는데, 동아시아 신화 고유의 메시지가 바로 욕심을 덜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것이다. 책은 그 이유로 소수민족이 터전 삼아 살아야 했던 거친 환경을 꼽는다. 땅을 함부로 파헤쳤다가는 그나마 있는 풀도 죽고 마는 초원, 폭우로 모든 걸 잃을 수 있는 가파른 산 속에서 살며 늘 하늘과 땅을 살펴보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은 '공존'이 곧 가장 현명한 생존 방식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욕망이 낭자한 그리스 로마 신화와 달리 왜 동아시아 신화가 만물의 의미를 찾고 자연의 소중함을 노래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으니, 영화로 치자면 '프리퀄'인 셈이다. 좋은 프리퀄이 그러하듯, 흥미로운 이야기에 설득력 있는 해석이 이어지는 매우 단단한 책이다. 사실 이 책은 좁은 시장 안에서 '선방'을 해줬다. 그럼에도 아깝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책의 메시지와 저자의 남다른 일치성 때문임을 조심스레 고백한다. 워낙에 출판사 사람들의 입장을 잘 헤아려주시는 분이기도 하다. 그런 저자의 책이야 블록버스터 급으로 터지지 않은들 늘 안타까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이경란 편집자

29.
에코리브르, <꿀벌의 민주주의>(토머스 D. 실리 지음, 하임수 옮김)


▲ <꿀벌의 민주주의> ⓒ에코리브르
지난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그래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와 움을 틔우고 꽃망울을 터뜨린다. 그러면 꿀벌들도 꿀을 찾아 윙윙거리며 날아다니겠지.

꿀벌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여왕벌의 강력한 카리스마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작은 세상! 하지만 수십 년 동안 꿀벌을 연구한 지은이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여왕벌이 전체 활동의 중심임은 분명하지만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알을 낳는 임무를 맡고 있다. 여왕벌에게 유일한 권한이 있다면 다른 여왕벌을 키우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것뿐.

이 책에는 그 조그만 꿀벌들이 보금자리를 옮기기 위해 새 집터 후보지를 찾고, 각자 찾은 후보지를 열심히 홍보해 더 좋은 조건의 보금자리를 결정해 나가는 과정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치열한 논쟁을 거쳐 민주적 합의에 이르고, 결국 만장일치로 보금자리를 결정하는 과정은 놀라움 그 자체다.

더불어 경탄을 자아내는 것은 과학자로서 지은이의 열정이다. 수십 년에 걸쳐 관찰하고 실험하고 연구한 끝에 마침내 그 조그만 꿀벌들의 세상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너나 할 것 없이 쉽게 결과만 만들어내려는 우리네 세태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아쉽다. '꿀벌'이라는 녀석들의 뜨거운 논쟁과 수용, 지은이의 과학자적 열정과 끊임없는 탐구 정신. 그런데 바로 그것이 이 책을 집어 들기 어렵게 만든다. 가루받이도 인공으로 하는 마당에 꿀벌이 무슨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성과 내기 더 쉽고 빠른 길이 있는데 수십 년씩 한 주제, 그것도 어쩌면 그리 소용없어 보이는 주제로 연구한 결과물이 뭐 그리 궁금할까. 하지만 우리네 삶에는 분명 성과와 소용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리라. / 유은재 편집장

30.
역사비평사, <사통>(유지기 지음, 오항녕 옮김)


▲ <사통> ⓒ역사비평사
확실히 무거웠다. 분량은 말할 것도 없고, 내용도 진중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오항녕 선생님으로부터 <사통> 번역 원고를 받고, 처음 원고 검토를 시작했을 때의 느낌이다. 그러나 읽어 나갈수록 <사통>은 묵직한 진중(鎭重)함이 아닌, 귀하고 소중한 진중(珍重)함으로 편집자를 매료시켰다.

"1500년 전에 쓴 '역사란 무엇인가'" 이 책의 부제다.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즉 당나라 때 쓰인 역사학 개론서, 역사 비평서라는 뜻이다. 유지기는 당나라 실록 편찬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사관직을 내던진 뒤, 역사 서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역사가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사료는 어떻게 수집하고 검토해야 하는지를 <사통>에 담아냈다. 유지기는 <사통>에서 <서경>, <춘추>와 같은 경서는 물론이고, <사기>나 <한서> 같은 역사서에 대한 비평도 빼놓지 않고 서술했다.

<사통>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 무겁지만, 역사 공부의 즐거움을 배가하는 책이다. 당나라 시대의 역사 편찬 방식을 알 수 있고, 곡필(曲筆)과 직서(直書)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으며, 역사가의 역할과 사료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다. 또한 무겁지만,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유지기는 당나라 시대의 역사 편찬이 지닌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얘기하고, 공자뿐 아니라 사마천과 반고도 날 서게 비판했다. 그 서술이 너무나 적나라해서 깜짝 놀랄 때도 있다.

중국의 수많은 역사가와 역사서에 대한 비평이 <사통>에서 펼쳐진다. 조금씩 읽다 보면 어느새 유지기의 깊고 넓은 역사적 안목이 느껴진다. 한국에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유명하지만, 유지기의 <사통>은 낯선 책이다. 그러나 유지기는 카보다 훨씬 앞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방대한 답을 내놓았다.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사통>을 통해 역사란 무엇인가를 진정 곱씹어야 하지 않을까. / 조수정 인문·역사 편집장

31.
은행나무, <인생 수정>(조너선 프랜즌 지음, 김시현 옮김)


▲ <인생 수정> ⓒ은행나무
소위 '페이지터너'라 불리는,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높은 산을 오르듯 고된 여정 끝에 절경을 맞이하게 해주는 작품이 있다. 미국에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하나이자 '21세기의 톨스토이'라는 평을 듣는 조너선 프랜즌의 대표작 <인생 수정>은 후자에 해당되는 소설이다.

<인생 수정>에서 작가는 램버트 가(家)라는 어느 가족의 가정사를 통해 한 사회 전체를 조망한다. 경제적으로는 성공했으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큰아들, 사회적 명성을 잃고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진 작은아들, 노인성 치매에 걸려 존엄성을 잃을 위기에 처한 아버지……. 단절과 해체로 얼룩진 오늘날 가족의 초상이다. 우리네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 램버트 가족은 끝없이 실수하고 절망과 위기의 순간에 맞닥뜨리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끝없이 '견뎌내고' '살아나간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그래도 인생은 수정이 가능하다'는 단순한 명제를 고통스럽고도 강렬한 카타르시스와 함께 선사한다.

"현대판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라는 평을 들은 이 소설을, 고전을 읽듯이 한 문장 한 문장 꼭꼭 되새겨 읽으시기를 추천한다. 높은 산을 한 걸음씩 오르듯, 긴 호흡의 문장을 몇 번씩 되새김질해 읽어나가시기를. 그리하여 프랜즌이 독자를 위해 마련해놓은 놀라운 절경을 만나시기를. / 박나리 편집자

32.
을유문화사, <권오길의 괴짜 생물 이야기>(권오길 지음)


▲ <권오길의 괴짜 생물 이야기> ⓒ을유문화사
을유문화사에서 작년에 발간한 책 중에서 가장 아까운 책은 바로 <권오길의 괴짜 생물 이야기>이다. '달팽이 박사'로 잘 알려진 권오길 선생님은 오랫동안 교단에 몸담아 오면서 재미있는 과학 글쓰기에 평생을 바치신 분답게 전래동화를 읽는 듯한 구수한 입담과 재미난 생물의 이야기들을 잘 버무려서 원고를 보내주셨다.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온갖 크고 작은 생물들에 이르기까지 뭇 생명들의 재미난 이야기와 깊은 성찰이 담겨 있는 이 책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국민일보>, <세계일보> 등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며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읽어도 배가 부르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언론의 조명에 비해 판매는 따라 주지 못해 무척이나 아쉬웠다.

사실 이 책이 처음부터 순조롭게 편집된 것은 아니다. 원래는 책 내용에 걸맞은 재미난 삽화가 들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재미와 스토리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아동 책의 삽화 같다는 평이 많았다. 마지막까지 이 삽화를 넣을 것인지, 뺄 것인지를 놓고 여러 의견 조율을 거친 끝에 결국 빼기로 결정했다. 대신 본문의 내용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다시 한 번 설명하고 재미난 추가 이야기들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지금도 삽화가 빠진 것이 무척이나 아쉽다. 차라리 재미난 글을 뒷받침할 만한 세밀화로 원고의 성격과 서로 상보적인 균형을 잡는 식으로 처음부터 진행했더라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더라면 좀 더 많은 독자들로부터 선택받지 않았을까. 2판에는 이 부분을 반영해서 보완하고 싶다./ 박화영 대리

33.
이매진, <보스턴 결혼-여자들 사이의 섹스 없는 사랑에 관한 사적인 이야기>(에스더 D. 로스블럼·캐슬린 A. 브레호니 지음, 알.알 옮김)


▲ <보스턴 결혼> ⓒ이매진
'보스턴 결혼'은 19세기에 결혼하지 않고 둘이 함께 살며 깊은 우정을 나눈 독신 여성들을 이르던 말이다. 책의 두 엮은이는 이 말을 오늘날 레즈비언들 사이의 섹스 없는 사랑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새로이 빌려와, 서로 다른 결과 색을 가진 25명의 여성들의 섹스, 정체성, 관계 이야기를 들려준다.

편집자에게 어느 책인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이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나는 유난히 아끼고 또 소중하게 여겼다. 다사다난한 성적인 연애들을 거쳐 결국 무성애적인 관계로 정착한 레슬리의 인생사를, 다른 사람과 연애하지만 '가장 온전히 서로 이해하는 사람'으로 만나고 있는 스무 살 차이 매리앤과 엘리자베스의 견고한 유대 관계를. 사랑 또는 우정이라는 협소한 정의로는 담아낼 수 없는 이 다양한 이야기들 속에서 내가 놓치고 있던 친밀함과 관계를 발굴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함께 읽고 많이 이야기해야 할 책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이 되고, 한국 사회 역시 동성애자로 살아갈 권리, 가족이 될 권리를 부르짖고 있는 그런 시대이기에 더더욱. <보스턴 결혼>은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섹스하고, 연애하고, 결혼한다'는 이 단일한 서사 뒤로 억압된 다양한 친밀성을 다시 꺼내주고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고 말이다. 평생의 동반자와 섹스 없이 살아가는, 애인 아닌 친구와 가장 깊고 끈끈한 유대를 나누는, 먼저 그 길을 모색한 여성들의 이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더 널리 읽히지 못해 안타까운 이유다. 우리에게는 아직 더 많은 친밀성이, 숨겨진 종류의 애정이, 눈에 보이지 않는 연대가 함께 이야기해야 할 몫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에. / 최예원 편집자

34.
이학사, <헌법 사용 설명서: 공화국 시민, 헌법으로 무장하라>(조유진 지음)


▲ <헌법 사용 설명서> ⓒ이학사
나는 이 책을 만들면서 나의 무지에 새삼 놀랐다.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인문사회 책을 주로 내는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근무하는 나는 대한민국 헌법이 몇 조까지 있는 줄도 몰랐으며, 제대로 외우는 헌법 문구라고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밖에 없었고, 헌법이 이토록 정치적인 문서이고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강령인 줄 몰랐기 때문이다. 좀 부끄럽지만 그랬다. 나는 학교에서 제대로 헌법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고 헌법을 소리 내서 읽어본 기억이라면 촛불집회 때 노래 부른 것밖에 없다. 이런 나의 무지함은 헌법을 그저 경직된 활자로만 여기는 대한민국 시민 대부분에게 해당되는 얘기일 것이다.

이 책이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해 아쉬웠던 이유는 많은 독자들이 나와 같이 이 책을 통해 공화국 시민으로서 자각을 하는 경험을 하길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87년에 개정된 현행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며, 헌법이 보장하는 덕분에 출판의 자유를 가지며 노동3권을 주장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실감나게 느끼지 못했던 이러한 헌법의 정치성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대한민국 헌법의 모든 조항을 빠짐없이 접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에는 우리 헌법의 지난한 여정이 담겨 있고 이 여정을 통해 얻은 우리의 무기가 담겨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얘기하듯이 지금 우리 사회가 "현금이 입을 열면 모두가 침묵하는 세상"이라면 "헌법이 제대로 작동하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건 우리 몫이다. 우리가 지금 넋 놓고 있을 때는 아니지 않는가. / 김지연 편집자

35.
자음과모음,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자음과모음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 혁명은 거기에서만 일어납니다."
역사상 대부분의 혁명은 피를 대가로 얻어진 이름이었다. 그렇다. 피로 쟁취하는 혁명의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너무나 많은 '안전한' 혁명이 우리 곁에, 대개의 경우 상품 프로모션을 위한 레토릭으로 존재한다. 젊은 사상가 사사키 아타루는 텍스트를 읽고 쓰는 일이 바로 혁명이라고 담담하게, 그러나 열정적으로 말한다. (다시) 읽고 (다시) 쓰는 일은 우리를 앓게 한다고. 앓고 나면 앓기 이전과 같으려야 같을 수가 없다고.

어떻게 보면 문학의 위력과 문학의 무력함은 같은 뿌리에서 나와 같은 결론을 향한다. 문학의 무력함을 성토할 때 우리가 시선을 겨냥하는 곳은 어쨌거나 변혁된, 바뀌어야 할 세상의 모습이다. '귀뚜라미 한 마리 살리지 못하면서 무슨 시를 써!'라며 절망하던 시인도 문학의 무력함을 원망했을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이런 절규에서 혁명을 본다. 시인의 절규는 그야말로 앓는 이의 절규이며 그의 시는 목숨을 걸고 쓰는 시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사키의 '문학'은 글로 쓰인 창작물만이 아니다. "무함마드의 심장을 꺼내 씻어도 그것은 문학"이듯 무엇을 해도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다만 사리지 않고 몸과 마음을, 목숨을 건다면. / 허원 편집자

36.
창비, <나쁜 친구>(앙꼬 지음)


▲ <나쁜 친구> ⓒ창비
<앙꼬의 그림일기> <열아홉>의 작가 앙꼬의 장편 만화다. 단짝인 열여섯 진주와 정애는 가출과 일탈을 일삼는 '비행 청소년'이다. 두 친구는 사고뭉치로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미움을 받지만 둘의 차이점은 진주에게는 나름 온전하고 부유한 가정이 있고 정애에게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폭력을 일삼는 건달 아버지와 어린 동생밖에 없다는 것이다. 두 친구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이였지만 어느 날 아버지에게 심하게 맞은 정애는 다시는 학교에 나오지 않고 홀연히 사라진다. 후에 진주는 후배가 정애를 집창촌에서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비행과 일탈이 진주에게는 '재밌는 일'이었지만 정애에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단 하나의 선택지였을지도 모른다. 정애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으니까.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한 이 작품을 보며 앙꼬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만화가가 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전작 <열아홉>에서 얼핏 보여준 어두운 청소년기를 서른이 된 작가가 한 발짝 멀리서 객관적으로 그려냈기에 더욱 울림이 크다. 진주가 선생님에게 맞을 때도, 여관방을 배회할 때도 손을 잡아준 정애는 진주가 그곳을 빠져나온 후에도 여전히 인생의 뒷골목 어딘가에 살고 있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불행을 재밌는 추억쯤으로 치부하거나 훈장쯤으로 여겨 우쭐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마지막 장면 진주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 깊은 곳이 묵직해질 것이다.

앙꼬는 이 작품으로 '2012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했고 앙굴렘 국제 만화 전시회에 초청받기도 했다. 무거운 이야기를 진지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구사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로 독자들의 손길을 많이 받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다. 소녀에서 성인으로 성장한 앙꼬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 최지수 인문교양팀 편집자

37.
책과함께, <식민지 조선의 또 다른 이름, 시네마 천국>(김승구 지음)


▲ <식민지 조선의 또다른 이름, 시네마 천국> ⓒ책과함께
일간지 토요판을 장식하고 품격 높은 '프레시안 books'의 서평까지 받았으면서 '아까운 책'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게 된 <식민지 조선의 또 다른 이름, 시네마 천국>. 일제 강점기 수용자 중심의 영화 이야기를 기획했을 때, 한국 현대시 전공으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영화에 대한 관심의 끈을 다양한 논문으로 발표해온 김승구 교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식민지 시대 독일영화의 수용 양상 연구>, <1920년대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식민지 관객의 반응>, <1910년대 경성 영화관들의 활동 양상> 등의 논문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당시의 각종 일간지와 잡지에서 찾아낸 관객, 영화관, 영화, 영화배우, 영화정책에 대한 이야기들은 놀랍도록 '모던'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영화배우가 되기를 소망한 견지동 청년, 당대 최고의 변사 서상호, <청춘의 십자로> 남주 영복, 우미관 배급업자, 그리고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다. 이들은 밤마다 영화를 보러 가고 백주에도 보러 가고 머리를 여우 털처럼 물들이고 비 내리는 필름에 웃고 울면서 서구 모더니티의 산물인 영화를 역동적으로 받아들였다. 일제 강점기 영화 문화에 대한 미시사적 접근이 남겨놓은 공백이 아쉽지만, 일단은 모던뽀이와 모던걸의 영화 이야기를 즐겨보시기를 바란다. / 천현주 편집자

38.
책세상,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G. D. H. 콜 지음, 김철수 옮김, 장석준 감수)


▲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 ⓒ책세상
'영국 노동운동사'이되 '영국 노동조합 운동사'는 아니다. 편집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감수를 맡은 장석준 선생이 책을 소개하며 언급한 내용이다. 당시만 해도 이 얘기가 절실하게 와 닿지 않았다. 노동조합운동이 곧 노동운동 아닌가? 임금협상으로 대표되는 노조 활동의 영역을 벗어난 노동운동을 상상할 수 있을까?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운동가인 G. D. H. 콜이 18세기 말 이후 150여 년에 걸친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집약한 이 책은 어쩌면 이 의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콜은 노동조합운동뿐 아니라 정치투쟁과 협동조합운동 등 급진적 운동의 흐름을 형성하며 다양하고 풍부한 투쟁의 역사를 실현해온 영국 노동운동의 얼굴을 보여준다. 근대 자본주의가 처음 성숙한 나라이자 노동자 조직의 선구였던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운동이 노조운동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정치·경제·사회운동의 총체임을, 서유럽의 노동·복지 제도가 노동자들의 기나긴 투쟁의 결실임을, 상대적으로 온건한 시절조차 노동자가 산업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음을 확인하게 한다.

"자본과 대적하며 사회를 바꾸고 삶의 방식을 바꿔온 노동운동의 다양한 얼굴, 다시 히드라가 되자." 이 책의 뒤표지 문구다. 콜의 다급한 메시지가 우리 사회에 적확하게 타전되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책은 많은 독자들과 공명하지 못했다. 노동조합주의에 경도되어온 우리 노동운동의 상황, 그나마 조직 노동자 비율이 10퍼센트에 불과한 현실의 반영인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의 위기이자 노동의 위기이기도 한 오늘, 우리 노동운동이 놓쳐온 것들이 무엇인지, 새롭게 실현해야 할 '사회'는 어떤 모습인지, 뼈아프게 성찰할 것을 이 책은 다시 요구하고 있다. / 김미정 편집장

39.
한길사, <나의 이슬람 문화 체험기>(최영길 지음)


▲ <나의 이슬람 문화 체험기> ⓒ한길사
이슬람은 57개국, 16억 인구를 거느린 세계의 4분의 1이다. 반도 국가에다 자원 빈국인 우리나라가 이슬람 세계를 외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더 잘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저자 최영길 교수는 197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로 유학을 갔다. 당시 시대상으로 보면 '정신 나간' 짓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간 탓에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었고 비웃음도 받았다. 그러나 낙천적인 저자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슬람 세계에 적응하더니 지금은 한국과 이슬람 세계를 잇는 민간 외교의 최일선에 있다. 그는 왕족들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성지 메카의 카으바 신전에 들어간 최초의 한국인이기도 하다.

이슬람에 대해 알고 싶다면 종교나 교리보다는 사람을 먼저 알아야 한다. 저자는 먼저 이슬람을 모르는 것보다 잘못 알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오해가 쌓인다는 것이다.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잘 알기만 하면 충분히 소통할 수 있고 호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충고와 함께 저자는 40년 가까이 겪은 이슬람에 대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놓는다. 청혼은 어떻게 할까? 신부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는가? 이슬람 사람들은 어떤 복장을 좋아할까? 세금은 어떤 명목으로 내는가? 은행은 왜 이자를 주지 않는가? 이와 같이 실생활과 관련된 저자의 생생한 경험은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동반자가 되기 위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슬람이 그리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 홍성광 인문팀 편집자

40.
현암사, <성찰하는 삶>(제임스 밀러 지음, 박중서 옮김)


▲ <성찰하는 삶> ⓒ현암사
다짜고짜 묻고 싶은 것. 어느 책의 소개가 '삶의 방법으로서의 철학을 탐구한다'라면 혹시 읽고 싶은지…. 삶, 방법, 철학 같은 말이 여전히 흥미를 가로막는지…. 어쨌든 마저 소개하자면, 이 책은 서구 지성사의 열두 인물(소크라테스, 몽테뉴, 칸트, 에머슨, 니체 등)의 삶의 내력을 통해, 삶의 방법으로서의 철학의 모습을 살핀다. 즉 까다로운 학술 개념이 잔뜩 오가는 책이 아니다. 저 주목할 인물들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답해보려는 책이다.

저들의 삶이 또 의외로(?) 재밌다. 가히 '생각 있는 생활의 현신'이 되려고 삶을 바쳤다. 막 살지 말자,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테니! 이런 다짐이 엿보인다. "너 자신을 알라"는 금언을 날마다 마음에 새기는 소크라테스가 대표적이다. 때로 불우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저러한 과제에 미친 몇몇의 경우 정말 '미친 놈', '죽일 놈'이라는 낙인까지 얻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삶에서 '미친 지혜'를 길어 올렸으니, '어떻게 살 것인가'를 탐구한 한 본보기로 지금 진지하게 조명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저자가 덧붙여두는 사실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철학자로 산다는 것이 (지금의 강단 철학자의 일과나 임무와 사뭇 다르게) 앎과 삶을 일치시키는 지혜를 좇고, 그 깨우침을 다듬어 삶에 반영하는 일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삶의 문제에서 시작되는 철학의 역사"를 서술해보겠다는 저자의 의도는, 지성사의 한 축을 올바로 살피겠다는 중요한 목적에서 비롯한 것이다. 사실 이 시점에서, 글을 쓰고 있는 본인은 또 난감하다. 이 흥미로운 책을 이 따위 소개로 망치는 게 아닌가! / 최진규 편집부 팀장

41.
황금가지, <개의 힘>(1·2권,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


▲ <개의 힘> ⓒ황금가지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은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대로 꽤 남성적인 소설이다. 섹스, 살인, 첩보, 정치 등 남성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랑과 배신'이라는 통속극의 중요 요소까지 충실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개의 힘>을 아메리카판 <여명의 눈동자>라고 칭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독자와 미스터리 보는 취향이 비슷한 일본에서는 출간 당시 상당한 인기몰이를 하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같은 해에 장르 문학상 중 가장 권위가 있는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 해외 작품 중 1위를 차지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던 <밀레니엄>이 같은 해에 후보로 올랐는데, 3편의 <밀레니엄> 득표수를 합친 것보다 <개의 힘>이 더 높았다고 하니 일본에서 <개의 힘>이 얻은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국내 출간이 결정된 후, 독자 시사를 통해 반응을 보았는데,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워낙 이야기가 진중하면서도 강렬해서 밀리언셀러 클럽 시리즈를 읽는 독자의 구미에 딱 맞는 소설이기도 했지만, 이렇게 대하 장편소설을 미스터리로 만나는 게 놀라운 경험이었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 호응에도 불구하고 <개의 힘>은 2012년도 황금가지의 최고 소설이 되지 못했다. 그해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 두 편의 황금가지 출간 소설 <셜록 홈즈 실크하우스의 비밀>과 <제노사이드>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독자들의 반응은 극찬 일색이었지만, 표지 디자인이나 제목에서 느껴지는 타깃이 워낙 명확하다보니 출판의 주요 독자층인 여심을 공략하지 못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사실 <개의 힘>은 여성이라고 해서 재미있게 볼 수 없는 책이 아닌, 무게감 있는 미스터리 스릴러를 보고 싶은 이라면 누구나 흠뻑 빠져들어 볼 수 있는 책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오판으로 남성 독자층 위주로 어필하는 전략을 취했고, 이는 좋은 입소문을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대중적 성공을 거두게는 만들지 못했다. 지금도 꾸준히 많은 이들로부터 추천되고 있는 저자 돈 윈슬로와 <개의 힘>. 다행히 할리우드에서 영화화 판권이 판매되어 영상으로 다시 만날 기회가 된다니, 그 즈음에 다시 한 번 발돋움을 노려볼 계획이다. / 김준혁 편집장

42.
후마니타스, <마녀의 연쇄 독서>(김이경 지음)


▲ <마녀의 연쇄 독서> ⓒ후마니타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도 책을 좋아하기는 한다. 책이 가득 꽂혀 있는 서가에 가면 읽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는 사람들이 많다. 책을 읽자는 운동도 여러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책 읽는 법을 알려주는 책들도 많다. 하지만 정작 출판계는 불황인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는 어떻게 책을 읽고 있는 것일까. 자기 계발이라는 숨은 논리에서 독서마저도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정작 중요한 지점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의 특별함은 '책을 읽는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독서에 대한 우리 안의 강박에서 벗어나 아무 생각 없이 책의 꽁무니를 좇아 보라고 권한다. 그럴 때 뜻밖의 책을 읽고, 뜻밖의 세상을 만나고, 뜻밖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 저자가 하나의 책에서 다음 책으로 연쇄를 이어가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책을 읽는다는 것이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뜻밖의 즐거움과 마주치게 되고,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는 '깊은 독해'의 영역임을 세삼 깨닫게 된다. 우리가 어느새 잊어버리고 있던 그 즐거운 느낌을 말이다.

하지만 편집자이자 첫 번째 독자인 내가 찾아낸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책을 읽는 즐거움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는 것이다. 유대인 수용소나 자유 죽음 등에 대한 책을 읽어 내는 작가의 글 속에서, 나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세상을 읽고,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제 이 책이 그렇게 하듯이, 책의 뒤를 밟아 나만의 연쇄를 시작해 보면 어떨까. 그 끝이 어디가 될지 열어 놓은 채로 말이다. / 정민용 주간

43.
휴머니스트,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1·2권,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 지음)


▲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휴머니스트
'토론의 난장' 속에서 태어난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는 한·중·일 3국의 대표적 역사학자가 모여 2006년부터 6년간 집필한 책이다. 2001년 일본에서 후소샤판 우익 교과서가 출간되자 3국의 역사학자들이 위기의식을 가지고 모였다. 일본이 전쟁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30만 명의 사상자를 낸 난징 대학살이나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를 사실이 아니라고 왜곡해 가르친다면 3국의 미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인권, 평화, 민주주의의 미래 역사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3국이 가장 첨예하게 부닥친 근현대사를 제대로 알게 하자고 의기투합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두 권짜리 책이다. 1권은 국제관계 변동이 3국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를, 2권은 헌법, 도시, 철도, 이주, 가족, 교육, 미디어, 전쟁 기억 등의 테마를 정해 3국 민중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 3국 역사학자의 연구 성과뿐 아니라 세 나라의 역사인식의 합의 지점을 확인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물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오간 원고와 이메일, 80회를 넘는 국제·국내 회의가 열렸고, 그때마다 편집자도 직접 참여해 저자들과 끊임없이 의견을 주고받았다. 서울, 도쿄, 베이징을 오가며 6년간의 열띤 토론 속에서 탄생한 이 책에는 3국 공동 작업의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최근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가 활발하다. 이를 위한 전제 조건은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3국 공동의 역사인식을 확대해가는 첫걸음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 최인영 역사출판부문 편집자

ⓒ프레시안(손문상)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