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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으로 화재 진압한 영웅! 그런데 월…북?

[금정연의 '요설']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①

<제8장>
걸리버가 항해한 대한민…, 아니, 소인국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라블레를 떠올리게 하는 몇몇 분변학적 장면이 언급된다.


서른일곱의 레뮤엘 걸리버가 문제의 항해를 떠난 것은 1699년 5월 4일의 일이다. 그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어엿한 외과 개업의였지만, 그런 현실도 여행을 향한 그의 오랜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역마살이 끼었다고나 할까. 존재에 깊이 새겨진 잔인한 운명이었다.

11월 15일, 앤틸로프 호의 선원들은 곤경에 처한다. 남태평양에서 동인도를 향해 순조롭게 항해하던 도중 예상치 못한 폭풍에 휩쓸린 것이다. 항로에서 벗어난 그들은 남쪽 위도 30도 2분 근처까지 떠밀려가야만 했다. 열두 명의 선원이 과로와 영양실조로 죽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하기야 건강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앤틸로프 호는 얼마 못 가 사위를 가득 채운 짙은 안개 속에서 암초에 부딪쳐 산산조각 날 예정이었으니까. 여섯 명의 선원들이 보트를 타고 탈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여섯은 너무 많다.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신의 계획에 따라,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오직 한 사람, 서른일곱의 외과 의사뿐이었다.

릴리퍼트의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자연은 그들에게 익숙한 것이었고, 그들은 순응할 줄 알았다. 제 아무리 세상을 날려버릴 듯 사나운 폭풍이라도 그 뒤에는 자비로운 태양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태양과 함께 거대한 공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어질 비극을.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마주했을 때

그날 인류는 떠올렸다
놈들이 지배하던 공포를
새장 속에 갇혀 있던 굴욕을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한, 아주 거대한 괴물이었다.

*

▲ <걸리버 여행기>(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문학수첩 펴냄). ⓒ문학수첩
이렇게 쓰고 보니 그곳이 1699년의 릴리퍼트가 아닌, 845년의 시간시나 구였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걸리버가 사람들을 마구 잡아먹는 충격적인 장면과 함께, 그에게 어머니를 잃은 한 소년의 복수와 성장의 드라마를 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앞에 놓인 것은 화제의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이 아니다. 동화책으로, 명작 만화로, 잭 블랙 주연의 영화로 지겹게 보았던 <걸리버 여행기>다. 신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역사하시고, 세상은 우리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걸리버에 비하면 운이 좋은 편이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높이 떠올라 있었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는 동안 나의 두 팔과 다리가 땅에 단단히 붙들어 매 있었던 것이다. 길면서도 숱이 많은 나의 머리카락도 풀리지 않도록 묶여져 있었으며, 겨드랑이부터 허벅지에 이르는 온몸 전체에 몇 줄의 가늘고 긴 줄이 얽혀있었다. 하늘을 향해 누워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햇볕이 뜨거워질수록 점점 눈이 부셨다. 주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지만 똑바로 누운 채 묶인 자세로는 하늘밖에 볼 수 없었다." (<걸리버 여행기>(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문학수첩 펴냄) 19쪽)

세상은커녕 자신의 몸조차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걸리버다. 불과 15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은 키의 사람들에 의해 자신이 옴짝달싹 못하게 묶여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경악한다. 비명을 지르는 걸리버 — 위협적인 거인이 되기는 애당초 틀려먹은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심약한 성정이 그를 구했으니, 그를 경계하며 바늘같이 조그마한 화살을 날려대던 릴리퍼트 인들도 그가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살려두기로 한 것이다.

곧바로 릴리퍼트의 수도로 옮겨진 걸리버. 쇠사슬에 묶인 채 어느 사원에서 영어의 삶을 시작한다. 가장 큰 건물이라고 해도 그에게는 고작해야 고급형 개집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다. 새장 속에 갇힌 건 소인이 아닌 거인이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온 릴리퍼트 국민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걸리버.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이 있을까? 물론 있다. 그가 여전히 살아있고, 살아있는 한 생리적인 욕구를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대변을 본 지가 이틀이나 지났으니 아주 당연하다. 다급한 마음과 부끄러움 사이에서 나는 무척 난처했다. 생각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은 사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안으로 기어들어가 문을 닫은 후 발에 묶인 쇠사슬이 미치는 구석에서 대변을 보았다. 그러나 내가 이처럼 불결한 행동을 한 것은 이번뿐이었다." (29쪽)

과연 그날 이후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아침 일찍 소인들의 눈을 피해 사원 밖으로 나가 일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항해도 그의 장 건강을 해치진 못했으니 잘된 일이다. 매일 거대한 똥냄새를 맡아야 하는 인근 주민들에게도 잘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불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주민들이 민원을 넣은 탓인지 이내 그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두 명의 시종이 배치된 것이다. 낯모르는 두 사람을 대신해 말하지만, 먹고 사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다. 비극이다.

하지만 걸리버는 잘 먹었다. 릴리퍼트의 수학자들은 그의 키가 자신들의 12배이고, 따라서 1728명 분의 음식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문과대 출신으로서 그들의 계산에 아무런 불만도 없음을 밝혀둔다. 국왕은 그를 먹이기 위해 칙령을 반포,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 900미터 이내의 마을에 식재료를 바치도록 했다. 시민들은 매일 아침 여섯 마리의 소와 40마리의 양, 그리고 고기와 같은 비중의 빵과 마실 것 등을 납품했고, 국왕의 재무성에서 비용을 지불했다. 제법 배포가 큰 왕이었던 셈이다.

다른 국민들보다 (걸리버의 손톱만큼) 크고 당당한 체구를 자랑하는 국왕의 배포는 남다른 인사 검증 시스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릴리퍼트에서 관직에 오르려는 자는 줄타기를 해야 하는데, 약 30센티미터의 높이에 팽팽하게 매달린 60센티미터 길이의 줄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가장 높이 뛰어올라 국왕을 즐겁게 하는 자만이 요직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왕의 남자>에 따르면 연산 또한 이와 비슷한 시스템을 운영하지 않았던가. 유례없는 '인사 참사'로 고민하는 박근혜 정부에서도 한번 검토할 만한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고전이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면 바로 이런 것이다.

한편, 공손하고 예의바른 행동을 통해 신임을 얻은 걸리버에게 국왕이 고민을 털어놓는다. 평화롭게만 보이는 릴리퍼트 왕국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높은 굽의 구두를 신는 당파'와 '낮은 굽의 구두를 신는 당파'간의 격렬한 당쟁으로 국정이 마비될 지경이며, 외부적으로는 이웃 나라로부터 침략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계란을 먹을 때 좁은 방향부터 깨는 릴리퍼트와 달리 넓고 둥근 방향으로 깨는 이웃 나라 블레훠스크가 왕국 내부의 '종블' 세력들을 이용해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고 했다.

"내란은 언제나 블레훠스크가 선동했으며, 진압이 되고 난 다음 반란을 주도했던 주동자들은 언제나 그 왕국으로 망명을 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그동안 1만 1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좁은 방향의 끝부분으로 계란을 깨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했던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 수백 권의 두툼한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그러나 넓은 방향의 끝부분을 깨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출판과 판매의 자유가 금지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법에 의해 그들은 공직에도 취임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 계란의 넓은 방향 끝부분을 깨어 먹는 파에서 망명을 한 사람들은 블레훠스크 국왕으로부터 많은 신임을 받고 있으며, 또한 고향인 릴리퍼트에 있는 자기 파 사람들로부터도 많은 도움과 격려를 받고 있기 때문에 지난 36개월 동안 두 나라 사이에는 언제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54~55쪽)


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아닌가? 멀게는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을 것인지,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을 것인지를 가지고 대립했다던 소문도 있는) 조선의 붕당정치에서부터 가깝게는 남쪽과 북쪽을 둘러싼 여러 문제에 이르기까지… 에이, 아마 기분 탓일 것이다. 그러니 다시 걸리버의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하자. 국왕은 걸리버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자유를 제공하는 대신, 릴리퍼트를 위해 차세대 1인승 주력 전투기 랩터 스텔스를 작전에 투입… 아니, 블레훠스크로 가서 그들의 함대를 무력화시켜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걸리버는 그렇게 한다. 730미터 거리의 해협을 걸어가 수많은 화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군함 50척을 나포해온 것이다. 하지만 국왕은 만족하지 않는다.

국왕의 야망이란 끝이 없었다. 아마도 그는 블레훠스크의 영토 전체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어 다스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망명을 가 있는, 계란의 넓은 끝부분을 깨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모두 처치하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계란의 좁은 끝부분을 깨뜨리도록 강요하며,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국왕으로 남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정치 문제로 일어나는 많은 분쟁을 일깨워 줌으로써 국왕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또한 자유롭고 용감한 국민을 노예로 만드는 일을 도울 수는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61쪽)

순식간에 병력 대부분을 잃은 블레훠스크는 화평을 요청한다. 릴리퍼트 국왕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조약이 성립되고, 업무를 마무리한 대사들은 걸리버를 찾는다. 블레훠스크에 한 번 방문해줄 것을 부탁하는, 호의적인 만남이었다. 걸리버는 릴리퍼트 국왕에게 블레훠스크를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하지만 국왕의 부탁을 거절한 걸리버는 이미 궁정 내부의 공공의 적이 되어 있었으니, 이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후에 계속하도록 하자.

그러던 어느 날, 왕궁에 화재가 발생한다. 소설을 읽다가 그대로 잠이 든 시녀 때문에 왕비의 침소가 불에 타고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소설이 문제다. 그러니 건강한 삶을 살고자하는 사람이라면 담배와 술과 소설을 멀리하는 게 좋다. 담배도 술도 소설도 멀리하지만 운이 없는 걸리버는 잽싸게 궁전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고작 골무만한 물통으로는 좀처럼 불길을 잡을 수 없다. 그는 묘안을 떠올린다.

"어제 저녁 나는 '글리미그림'이라고 부르는 굉장히 맛있는 포도주를 잔뜩 마셨는데, 그것은 소변을 자주 보게 했었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 소변을 보지 않았다. 불 옆에서 소화 작업에 열중하고 있자니 몸속이 뜨거워지면서 곧 소변이 마려워지기 시작했다. 불길 가까이 다가선 나는 곧 참고 있던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게다가 꼭 필요한 곳을 겨냥해 방출했기 때문에 불은 나의 오줌으로 3분 만에 완전히 꺼지게 되었다. 완성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을 궁전의 나머지 부분은 화재의 위험에서 안전하게 되었다." (65쪽)

진압에 성공한 걸리버. 그는 왕의 치하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 집으로 돌아온다. 릴리퍼트의 법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궁전 부근에서 소변을 보는 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국왕은 대법원에 걸리버의 죄를 용서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왕비는 자신의 방에 오줌을 싼 무식한 거인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고, 다른 곳으로 옮긴 후 그쪽을 향해서는 오줌도 누지 않았다. 가뜩이나 좁은 릴리퍼트에서 걸리버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다.

이윽고 걸리버를 시기하던 고위 관료들이 탄핵안을 제출한다. 왕궁에 소변을 봄으로써 국왕을 능멸했을 뿐 아니라, 블레훠스크가 적국임을 뻔히 알면서도 방문을 강행하려는 것으로 미루어 '종블' 세력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주무대신과 해군사령관은 깊은 밤에 집에 불을 질러 참혹하게 태워 죽이자고 주장했다. 육군사령관은 2만 명의 무장한 군사에게 독화살을 쏘게 해 고통스럽게 죽이자고 주장했다. 걸리버의 친구인 비서실장은 그간의 공적을 감안해서라도 눈을 멀게 하는 정도로 마무리하자고 주장했지만 재무대신이 반대했다. 걸리버의 생활비를 감당하느라 국왕의 재정이 파탄 날 지경이라는 것이다. 그는 "어떤 종류의 새는 눈이 멀게 되었을 경우에 더욱 빨리, 그리고 많이 먹어서 살이 찌게 된다"는 이유를 들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식사량을 조금씩 줄여 결국에는 굶어 죽게 만들 것을 주장했다. 문득 전에 다니던 회사의 재무팀장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얼까. 결국 걸리버를 굶겨 죽이기로 결정한 국왕은 신하들에게 계획을 은밀하게 실행할 것을 당부한다.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거인이 그 소식을 듣지 못할 이유가 뭔가? 익명의 제보자에게 소식을 전해들은 걸리버는 블레훠스크로 탈출을 감행한다. 그곳에 한동안 머물며 국고를 먹어치운다. 블레훠스크의 재무대신에게는 아마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영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걸리버. 마침 우연히 발견한 고장 난 보트도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거대한 식객을 보내버려야 한다는 온 국민의 성원에 힘입어 보트를 수리하는데 성공한 걸리버는 드디어 고향을 향해 배를 띄운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의 귀환을 너무 상세하게 늘어놓음으로써 독자들을 괴롭히지는 않을 생각은 없다. 다만 어떤 종류의 우연과 행운을 통해, 1702년 4월 13일, 집을 떠난 지 약 3년 만에 마침내 고향땅을 다시 밟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하지만 천성이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으니, 그는 고작 두 달을 가족과 함께 보낸 후 다시금 수라트를 향하는 300톤짜리 상선 어드벤처 호에 오른다. 참으로 빌어먹을 운명이다. 그리하여 거인국에 표류하게 된 걸리버의 두 번째 모험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계속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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