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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 한류'? 왜 싸이만 돌 맞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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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 한류'? 왜 싸이만 돌 맞아야 하는가?

[기고] 정희준의 싸이 '젠틀맨' 비판을 읽고

나는 <프레시안> '정희준의 어퍼컷'을 자주 읽는다. 정곡을 찌르는 그의 문화 비평을 읽으면 재미도 있으려니와 어떤 때는 정말 속이 시원해지기도 한다. 이번에도 정희준은 싸이의 '포르노 한류'에 대하여 남들이 하기 어려운 말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나는 링 위의 심판으로서가 아니라 정희준의 어퍼컷을 응원하는 군중으로서 이 글을 쓴다. (☞관련 기사 : 싸이의 '포르노 한류', 자랑스럽습니까?)

발매 며칠 만에 유투브 접속자 1억 명을 넘었다는 소식에 대체 뭐길래 그런지 서둘러 싸이의 '젠틀맨'을 봤다. 보고 나니 정희준이 말했듯이 나 역시 산뜻한 기분은 아니었다. 정희준이 외국 매체나 댓글을 인용하여 '여성 학대', '혐오', '선정성', '포르노그래피', '싸구려 저질', '역겹다', '저질 마초', '미국 문화의 첨병'이라는 용어로 '젠틀맨'을 평가했다.

그가 그런 비난적 표현을 통하여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 했는지 나도 금방 알아차렸다. 나는 싸이 내부로 들어가서 문화 비평을 할 생각은 없다. 다만 싸이 개인만을 두고 미국의 첨병이라는 비난을 한다면 한국 사회 전반에 깔린 미국의 패권주의 현실을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이의 선정성은 분명히 선정적이지만 우리 사회에 깔린 범선정성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정희준은 그의 중학생 아들에게 이 비디오를 보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의 자식들은 이미 다 커서 시비가 안 되겠지만, 만약 내 아이들이 중학생이었더라도 나는 아이들에게 싸이의 '젠틀맨'을 억지로 못 보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 그런 수준의 선정성은 도처에 깔렸기 때문이다.

당장 이 글을 쓰면서 컴퓨터 화면으로 마주한 <프레시안> 홈페이지에는 "교수와 여제자 간밤에 무슨 일이", "허리 44 가슴 C컵 환상 몸매", "정력남의 마누라 녹초된 사연?", "성인 여자 사로잡는 비법 대공개" 등의 낯 뜨거운 광고 문구와 그 이상 가는 사진들이 떠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런 광고 문구가 '젠틀맨'보다 더 선정적이며 더 포르노에 가깝다.

<프레시안>이 이 정도니 다른 매체들은 하도 민망해서 말할 수도 없을 정도다. (<프레시안>은 이런 유의 광고를 없애기 위하여 '광고 없는 페이지'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젠틀맨'을 포르노로 간주한다면 우리 주변에는 온통 포르노뿐이라는 말이다. 전에는 대도시 유흥가에만 있던 러브호텔과 룸살롱이 요사이는 동네 방방곡곡까지 퍼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밤늦게 공부를 마치고 집에 가는 우리 아이들은 그런 골목을 지나면서 커가고 있다. 오프라인의 휘황찬란한 골목길과 온라인의 인터넷 환경 모두 선정성으로 도배되어 있다. 우리 주변이 이 지경이거늘, '젠틀맨' 하나 비틀어 막아서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원래 이론적으로만 보자면 "저 드라마가 꽤 선정적이네" 하고 말할 경우, 그 대부분은 여성 학대를 이미 포함하고 있다. 그런 선정성은 어른들이 보기에 저질로 보이고 좀 심하면 역겹기도 하고 그래서 혐오스럽다. 정희준은 문화의 개방성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기 때문에 대중문화의 선정성보다는 '젠틀맨'의 선정성에 관대한 언론과 여론이 진짜 문제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쓴 글의 흐름은 여전히 '젠틀맨'의 선정적 저급성에만 머물고 있다.

'젠틀맨' 뮤직 비디오에 영어로 나오는 욕지거리도 마찬가지다. 비디오에서는 영어 표현을 재치 있게 살짝 비틀었지만 좀 자세히 보면 심한 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말에도 그 영어의 욕과 거의 똑같은 표현의 욕이 있다. 유럽어나 중국어를 포함하여 많은 언어권에서 "엄마(mother)"와 관련한 욕이 있으며, 모든 언어권에서 그런 욕이 욕 중에서 가장 심한 욕이다.

정희준이 말하기를 미국에서 '젠틀맨'에 나오는 그런 심한 욕은 거의 쓰이질 않는다고 했다. 맞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그런 욕이 있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중국에서도 거의 같은 뜻의 욕 말이 있지만 영화에서나 그런 욕이 쓰일 뿐이다. 현실에서 그런 욕을 썼다간 아마 칼부림 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어떠한가. 그런 욕이 일상적이다. 중학생들도 그들 또래에서 그런 욕을 쓰는 것이 일상적이다. 중학생 탓할 것도 없다. 교수, 정치인 포함해서 그런 욕을 사용하는 어른들이 꽤 많지 않은가. 교수, 정치인과 중학생의 차이는 교수나 정치인은 남자들만 그런 욕을 사용하고 중학생들은 여학생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중학생들에게 철학 공부를 좀 시킬까 해서 청소년들을 자주 만나는 편인데 남들이 착하다고 일컫는 학생들조차도 그런 심한 욕을 섞지 않고서는 그들 또래끼리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다. 이것이 우리 현실이다. (중학생이여 미안하다. 그대들을 비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대들도 고등학생이 되면 그런 욕을 별로 안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젠틀맨'의 선정성이나 욕 말은 실은 우리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준 것이다. 아니, 우리 현실은 '젠틀맨'의 선정성과 욕지거리보다 더 저질이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우리 현실이다. '젠틀맨'을 볼 때 각종 한국 MTV류에 등장하는 최근 걸그룹의 몸동작과 노랫말을 같이 보면 좋겠다. '젠틀맨' 정도는 젠틀맨이다. '젠틀맨' 뮤직 비디오의 선정성과 욕 말이 괜찮다는 말이 아니다. 그 비디오는 우리의 자화상이어서 바로 우리 자신을 문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실은 정희준의 포르노 한류 비판의 초점은 싸이가 한류의 전도사라는 이름으로 미국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스런 눈초리에 얹혀 있다. 나도 이점에서 정희준에 동조한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시선으로 현실을 볼 필요도 있다. 특별한 시선이기보다는 앞의 선정성 논리와 마찬가지다. 영어로 하는 공영 국제 방송인 아리랑티비에서 보여줄 것이 그렇게 없었던지 스타크래프트 게임 프로그램을 돌렸고, 아리랑티비는 지금도 엔터테인먼트란 이름으로 케이팝 프로그램을 상당히 많이 내보내고 있다.

만약 한국을 모르는 외국인이 한국의 아리랑티비를 본다면 한국은 온통 컴퓨터 게임과 케이팝만 있는 것으로 알 것이다. 케이팝 프로그램 진행자의 틀은 한국 방송인지 미국 방송인지 모를 정도다. 내용으로 보면 분명히 케이팝을 자랑하려는 방송인데 그 진행자의 냄새는 미국의 냄새만 난다.

일본의 영어 공영 방송이나 중국의 영어 공영 방송과 비교하면 한국의 영어 공영 방송은 정말 미국 문화의 첨병으로 느껴질 정도다. 대중매체는 그나마 괜찮다. 미국 수입 쇠고기 문제를 비롯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과정과 결과를 보면 한국이 미국의 노예라는 생각이 들어 참담해진다. 그런 프로그램, 그런 정치인들에 비하면 '젠틀맨'의 미국 첨병론은 100분의 1도 안 된다.

▲ 싸이의 '젠틀맨'. ⓒYG엔터테인먼트

나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갑자기 한국 안에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것이 오히려 더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정치인들이 대통령의 의중을 미리 받들어 알아서 기는 것처럼, 미국에 미리 알아서 기는 한국 사람도 꽤나 될 것 같다는 뜻이다. 대중문화는 아무리 저급해도 높은 사람에게 미리 알아서 기는 일은 없다. 알아서 기라고 강요하는 권력자는 있어도 말이다.

몇 년 전인가, 어느 국회의원이 농림수산식품위원회 국정 감사에서 가수 이효리가 한우 광고 모델로 부적합하다는 괴이한 발언을 던졌다. 노랑머리 이효리가 황색 한우를 광고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이상한 논리를 국정 감사장까지 들고 나왔는데, 이런 현상은 정치인 그들만의 왜곡된 윤리 논리를 이효리뿐만이 아니라 대중 전체에게 올가미를 놓겠다는 뜻으로 들릴 뿐이다.

정희준의 다른 '어퍼컷'에서 그는 도덕의 논리를 진보 진영에 옭아매서는 안 된다고 이미 강조한 바 있다. 물론 앞의 이효리 이야기와 '젠틀맨'의 문제를 연결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 국회의원이 정희준의 '젠틀맨' 비평을 읽는다면 속으로 쾌재를 놓을 것이다. '거봐라, 내가 몇 년 전에 이효리 비난한 게 맞는 말이잖아'.

'젠틀맨' 비디오 처음에 싸이가 주차 금지 시설물을 발로 차는 것이 나오는데, 그 화면 때문에 한국방송(KBS)에서 발 빠르게 '젠틀맨' 뮤직 비디오를 방송 불가 판정했다. KBS에서 방송 불가 판정을 내린 판정관도 정희준의 '젠틀맨' 비평을 읽으면서 속으로 안심할 것이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왜 싸이에게만 저급하게 욕도 하지 말고 선정적이지 말아야 하고 미국 냄새를 풍기지도 말아야 한다는 주문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 주문은 우리 자신에게 먼저 해야 한다. 그리고 소위 사회를 이끌어간다는 자칭 지도자급에게 그런 주문을 해야 한다.

싸이가 갑자기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고 해도 싸이는 싸이지 갑자기 도덕군자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싸이는 한류를 급하게 탄 것이지만 무임승차는 아니다. 이번에는 젠틀맨으로 이왕에 급하게 탄 한류를 유지하려다보니 무리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싸이의 몫일뿐이다.

'젠틀맨'이 부족하고 저급하다고 여겨지면 싸이에게 그것을 채우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다른 한국 사람들이 또 다른 다양한 분야에서 고급한 것을 세계에 내보여주면 된다. '젠틀맨'은 무수한 한국 대중문화의 한 부분이지 한국의 전체가 아니다. '젠틀맨'이 좀 선정적이고 저급하다고 해서 한국 전체가 '젠틀맨'에 휩쓸린다면 한국은 너무 작은 나라로 입증될 뿐이다. 다른 많은 한국 사람들이 딱히 다양한 분야에서 그렇게 내세울 것이 없으면 좀 안타까울지 몰라도 우리 한국 문화는 '젠틀맨'이 대표하는 것으로 될 수 있다. '젠틀맨'의 진짜 문제는 '강남 스타일'의 엄청난 한류를 유지하려다보니 참신하고 신선한 맛이 좀 떨어진다는 데 있을 뿐이다.

정희준의 비평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이번 그의 어퍼컷 펀치는 약간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급소를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 행간에 놓인 뜻에는 일종의 문화 획일주의에 대한 비판이 있다는 점이다. 문화의 획일적 현상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대중매체에 있다고 분명히 언급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글에서 구체적인 그런 내용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의 글 전반에는 문화 현상이 한 곳으로 쏠리는 증상을 큰 병증으로 보고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적인 사회철학자인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그의 책 <음악가 비판>(1956년)에서 대중음악 특히 민족 음악이 파시즘의 선전대 역할로 빠질 수 있음을 강하게 경계하면서 음악 교육을 비롯하여 음악 전반을 부정했다.

전체주의 나치즘의 악령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그의 철학적 태도의 일환이었지만, 분명 음악은 사람들을 하나로 이끄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 힘을 잘 이용하면 새로운 에너지를 창출한다. 반면 그 힘이 악용되면 음악 소비자는 자본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획일화된 문화 조류가 판을 친다면, 문화 전반은 오히려 축소하고 자멸하게 될 것임을 정희준은 예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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