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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누명 벗은 그이, 새로운 민주주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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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누명 벗은 그이, 새로운 민주주의 씨앗!

[프레시안 books] 이원규의 <조봉암 평전>

네 사람의 이름

여운형, 김구에 이어 조봉암, 그리고 장준하. 한국 현대사의 비장한 이름들이다. 세 사람은 피살당했고 한 사람은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노선의 차이가 있긴 했어도 네 사람 모두 독립운동을 펼쳤던 뛰어난 혁명가였다. 그리고 이 가운데 세 사람은 당시 최고 권력자와는 최대 경쟁관계에 있었다. 훗날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이들의 운명과 아슬아슬하게 맞닿아 있다가 살아난다. 그러나 냉전정치의 폭압과 희생은 지금도 사라진 것은 아니다.

좌우의 대립 가운데 모두를 끌어안고 통합하려던 여운형은 1947년, 이승만을 수장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일 년 뒤인 1949년에는 김구, 그 이승만이 독재의 길로 치달았던 1959년에 조봉암, 그리고 박정희 유신체제가 극에 달했던 1975년 장준하가 각기 죽임을 당한다. 이 가운데 조봉암은 "간첩"으로 처형된다. 1961년 <민족일보> 조용수와 1974년 여정남, 도예종 등 여덟 명의 목숨을 교수형에 처한 인혁당 사건까지 추가하면 북과 관련된 "간첩"으로 몰려 죽은 이들의 수는 늘어난다.

"간첩"의 사형

▲ <조봉암 평전>(이원규 지음, 한길사 펴냄). ⓒ한길사

좌파 민족운동에 대한 인정은 곧 국가보안법의 족쇄에 묶였던 시대를 넘어서면서 여운형이 2006년 독립 유공자로 이름을 올린다. 하지만 조봉암은 조금 더 세월이 걸렸다. 2011년에야 역사의 법정에서 무죄가 선고되어 52년 만에 복권되었다. 장기 집권의 욕망에 사로잡힌 이승만이 대통령 선거 최대의 정적에게 법의 허울을 내세워 저지른 살인사건의 실체가 온 세상에 확정된 것이다. 조봉암의 무죄는 곧 이승만의 유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강화도 출신의 가난하지만 총명한 청년이 고학으로 일본에 유학한 뒤 조선 공산당 창당의 주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에서 볼셰비키 혁명 최고의 이론가이자 지도자 부하린과 만나 조선혁명의 미래 세력을 기르는 등의 역정을 거쳤다. 그가 조봉암이다. 이후 분단 조국에서 그는 "전향"이라는 방식으로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고, 농림부 장관이 되어 농지개혁을 완수한 다음 이승만 독재에 저항,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차점자로 낙선한다. 그리고 진보당을 창당했으나 결국 독재자 이승만의 견제가 그를 형장으로 내몰게 된다.

<약산 김원봉>(실천문학사 펴냄), <김산 평전>(실천문학사 펴냄) 등으로 이미 우리 민족 독립 운동사의 굵직한 흐름을 짚어온 작가 이원규의 <조봉암 평전>(한길사 펴냄)은, 파란만장한 혁명가의 삶을 살다 간 죽산 조봉암을 다시 생생하게 살려낸다. 이원규는 이 작업을 위해 중국과 러시아를 수없이 오갔고 조봉암의 유가족들만이 아니라 주변 인물들을 수소문해서 일일이 구체적인 증언을 모은 끝에, 사실과 소설적 구성을 혼합한 '팩션(Faction)'의 방식으로 인간 조봉암을 그려내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역사적 사실과, 죽산의 내면, 그리고 당대의 현실에 새롭게 눈뜨게 해준다.

조선 공산당 창당의 주역

1899년 강화도에서 출생한 그는 농업 보습학교를 졸업한 후 면서기 보조 정도의 일을 하다가 1919년 3.1 만세 운동 주도자로 고초를 겪게 된다.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YMCA 중학부를 다니다가 독립 운동 혐의로 또다시 힘겨운 고비를 넘기게 되는데, 이후 결심을 하고 일본에 건너가 엿장수를 하면서 주오대학(中央大學)에서 고학을 한다. 애초에는 아나키즘으로 조선의 미래를 풀겠다고 생각했던 그는 점차 사회주의에 기운다. 귀국 후 중국 상하이를 거쳐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 조선 공산당 창당의 기반을 마련해나간다.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에서 수학, 러시아 혁명에 대한 학습과 함께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적 틀을 세워나갔다.

죽산은 당시로서는 첨단의 사회주의 혁명가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여운형, 박헌영, 김단야 등과 동지적 관계를 맺고 독립 운동 지도자의 위상에 오르게 된다. 한국 독립 운동사에서 사회주의 혁명세력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그는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당을 비판하면서 "전향 선서"를 하게 된다. 조선공산당 창당 주역의 전격적인 변신이었고 이는 당시 정국에 충격을 준다. 하지만 이는 당시 냉전체제의 엄혹한 포위망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인 동시에 현실을 제대로 측정하지 못한 근본주의적 공산주의 혁명 노선에 대한 비판이었지, 그가 오랫동안 꿈꾸어 온 사회 민주주의적 이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죽산의 "전향"이란

다시 말해 "전향"이 그를 우익으로 위치 이동 시킨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 중일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의 좌파들이 전향 공작에 휘말려 "전향"을 선언하고 적지 않은 이들이 극우파 이론가가 되기도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경우였던 것이다. 조봉암은 대단히 현실주의적인 정치가였고, 당시 국제 정세가 국내 정치에 압도적인 규정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수용하고 그 맥락 속에서 최선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이승만 아래에서 농림부 장관을 맡아 여러 한계와 저항을 뚫고 농지개혁을 주도했으며, 이후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 그가 내건 진보당의 기본정치는 "책임정치의 구현, 수탈 없는 경제체제 확립, 평화통일 추구"였다. 이외에도 그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상인 "집단안전보장 확립에 의한 국방문제 해결과 군비감축", "종합적인 연차 계획경제를 수립하고 이를 법령화", "노동자의 자유로운 단결권과 단체 교섭권 보장", "교육의 완전 국가보장제 실시" 등을 공약화했다. 지금의 현실에서 보아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정치를 담고 있다.

한국의 진보주의란?

죽산의 진보당 창당 개회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 글을 보면, 냉전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이념을 기준으로 죽산을 몰아세우거나 낙인찍을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진보주의의 지향점을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게 정리해낸 것은 그가 대중정치의 요구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인물임을 증언해준다. 따라서 이승만이 조봉암을 간첩으로 만들어 죽인 것은, 이 진보주의 정치를 압살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난 뒤 혁신계라는 이름의 진보세력이 출현한 것은 조봉암이 뿌려놓은 씨앗의 태동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로 다시 짓밟히고 만다.

<조봉암 평전>에는 혁명가로서의 역정만이 아니라 한 남자로서 살아온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조봉암의 사랑, 조봉암의 여인들의 이야기다. 그는 첫 사랑 여인과 헤어진 후 혁명 동지 김조이와 결혼했고, 상해 시절 그를 찾아온 첫 사랑 김이옥과 함께 살게 된다. 그의 딸을 낳은 김이옥은 죽산이 신의주 감옥에 수감된 시기에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김조이는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고 만다. 그밖에도 조봉암을 사랑했던 여인들이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그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을 얻는다. 조봉암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이런 대목들은, 한편 당혹감과 다른 한편 그의 내면에 몰아쳤을 파도와 바람을 상상케 한다.

"강화도" 그리고 조봉암

사형장의 장면에서부터 시작하는 <조봉암 평전>은 이 시대의 한 역사 교과서이다. 비운의 혁명가가 걸어온 삶과 그 시대를 뜨겁게 느끼도록 한다. 그러면서 특히 새삼스럽게 주목하게 된 것은 "강화도"라는 섬이 겪어온 오랜 역사의 고투가 조봉암의 인생사에 자신도 모르게 일종의 시대적 DNA로 박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상념이다.

몽고군과 결전을 했던 1230년대 삼별초의 항쟁, 1636년 후금과의 전쟁에서 인조가 이곳에 피난 오면서 강화도 주민들이 겪었던 고초, 18세기 초반 당시 주류세력과는 입장을 달리했던 재야 강화학파를 주도한 하곡 정재두의 양명학, 1868년 프랑스와 1871년 미국의 강화도 침략, 1875년 일본의 함대 파견 위협, 한국전쟁 당시 강화도 양민학살 등, 거론해보자면 강화도는 이 나라 역사의 슬픔과 고통을 온 몸으로 껴안고 살아온 현장이다.

정재두의 경우를 보더라도 강화도 내면에는 주류 역사의 흐름과 다른 길을 지향하는 숨결이 흐르고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강화도와 인천을 엮어 서울의 변방에서 형성되었던 시대적 사조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죽산의 추모비를 강화에 세웠으며 인천의 정신을 이끌고 있는 '새얼문화재단'도 이러한 역사의 맥락 속에서 명확히 자리매김될 것이다.

죽산의 옥중 유언, 그리고 우리

죽산 조봉암을 다시 되돌아본다는 것은, 오늘날 이 나라를 중심에서 주도한다는 세력과는 다른 정치와 문화 그리고 역사를 상상하고 세우는 것의 의미를 깨우친다. <조봉암과 진보당>(한길사 펴냄)을 쓴 고 정태영 선생이 전하고 있듯 조봉암은 "이 박사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잘 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담담히 사형을 앞둔 심경을 토로한다.

아니나 다를까 이원규가 전하는 조봉암의 옥중 유언은 이렇게 마친다.

"우리가 못한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나갈 것이네. 결국 어느 땐가 평화통일의 날이 올 것이고, 국민이 골고루 잘 사는 날이 올 것이네. 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

우리는 지금 그 뿌려진 씨앗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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