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분단 체제
먼저 분단 체제론이다. 2011년 캘리포니아 대학 출판부에서 <The Division System in Crisis>가 출간된 바 있다. 이참에 백낙청 <창작과비평> 편집인(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 몸소 오셔서 강의하고 토론하는 마당이 펼쳐졌다. 문자 그대로 '만석'이었다. 아니, 자리가 모자랐다. 서서 듣고, 주저앉아 듣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서재정, 브루스 커밍스, 찰스 암스트롱, 존 던컨, 이남희 등 미국 한국학계의 주역들도 집결했다. 여기에 대만의 천꽝싱도 논평자로 참여해 자리를 빛냈다. 백낙청 교수의 명성에, 위태로운 한반도 정세가 더해 호황을 누린 셈이다. 기쁘면서도, 씁쓸했다.
분단 체제론은 남과 북을 꿰차는 독창적 인식론이자 실천론이다. 남북 체제의 엄연한 차이를 민족 동일성으로 쉬이 지우려 드는 낭만적 민족주의도 아니요, 북을 모른 척하고 남만의 개혁에 매진하는 냉정한 반국(半國)주의도 아니다. 그래서는 남북의 총체적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냉철하게 직시하며 험난한 '변혁적 중도'의 길을 고수한다. 민중-민족-민주를 매개하여 삼자가 튼튼하게 결합하는 최대 연합 전선을 제창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과학적 분석마저 제약하고 왜곡하는 분단 체제에 맞선 투철한 저항 담론이자 실천 강령으로 우뚝하다.
분단 체제가 냉전 체제의 복제만도 아님을 천명한 것 또한 득의(得意)이다. 동서 냉전이 해체되었음에도 분단 체제는 지속한다. 세계 체제의 모순이 해소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냉전의 본질도 폭로된다. 그 자체로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이었다. 소련과의 대결을 빙자하여 제3세계를 통제하는 고도의 술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냉전은 남과 북을 동시에 봉쇄했다. 북의 발전을 제약하고, 남의 발전 궤도를 굴절시켰다. 이를 통해 미국 주도의 세계 체제를 굳건히 한 것이다. 분단 체제가 지속되는 것 또한 한반도가 미국 패권이 관철되는 핵심 장소이기 때문이다. 즉 적대하는 북과 남은 기실 동일한 지배 체제 아래 있다. 그리하여 분단 체제를 허무는 작업은 민족 통일의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현존하는 세계 체제에 균열을 내는 세계사적 과업이다.
물론 미국 탓만 하는 반미주의도 아니다. 분단 유지의 내부 동학, 그 자생적인 면도 간과치 않는다. 외세 압력과 내부 억압이 공진화하면서 분단 체제는 재생산된다. 특히 남북한 권력층과 남북 민중 사이의 모순에 천착하고 있음이 백미이다. 대립하며 공존하는 남북 지배층이 북의 인민과 남의 시민을 억압하고 있음을 통렬하게 고발한다. 분단 체제의 복합성을 묘파한 정수라 하겠다. 그리하여 한쪽의 반체제 운동은 공생하는 반대쪽 지배층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내부 개혁과 남북 통일은 별개의 두 과제가 아니라 동시에 수행되어야 할 하나의 과제이다.
그 분단 체제가 흔들린다 했다. 탈냉전 때문만은 아니다. 소위 '87년 체제'를 달성한 민주화 운동의 성취이다. 기실 북에 대한 남의 우위 또한 이 반체제 운동의 산물이다. 1990년대 '문민(文民) 정부'와 '선군(先軍) 정치'는 극적인 대조를 이루었다. 체제 경쟁에서 남이 앞서게 된 일등 공신이 바로 민주화 운동이었던 것이다. 박정희 독재가 김일성 독재를 누른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자. 반체제 운동의 여부가 한국의 진화와 북조선의 퇴행을 가름했다. 그러자 적대하며 공존하던 분단 체제도 동요했다. 최초의 정권 교체가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으로 이어진 것도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따라서 6·15 공동 선언은 87년 체제가 낳은 최대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통일 시대의 들머리에 진입했다는 '6·15 시대'라는 말까지 회자되었다.
그러나 '6·15 시대'는 어느덧 아련하다. 중장기적 관점에서는 여전히 유효할망정, 작금 심각한 교착 국면에 빠져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중단된 '6·15 시대'를 재차 가동시키려던 역사적 기획이 '2013년 체제론'이었다. 허나 이 또한 2012년 총선과 대선의 패배로 머쓱해졌다. 87년 체제를 이끈 민주화 세력이 분단 체제에 기생하는 구세력들에 의해 '시대 교체'를 당한 꼴이다.
절치부심, 와신상담을 다짐하며, '6·15 시대'의 경험을 복기하고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돌아보면 남북 교류와 협력이 곧 통합과 통일의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그 시기에 북조선은 핵개발도 동시에 진행했다. 북조선은 남과의 교류 협력을 통한 경제 재건 못지않게, 정치적 군사적 체제 보장에도 박차를 가했다. 특히 북핵의 당사자는 미국이라 못 박았다. 그 북핵이 남북 관계의 파탄과 직결되고 있음을 고려하자면 자가당착이다. 다만 그러한 모순을 품고 있는 북조선이 엄연한 실체로 존재하고 있음 또한 불변의 사실이다. 따라서 남북 경협과 북핵 개발이 함께 진행되었던 21세기의 분단 체제를 소상히 분석하는 공부가 긴요하다. 북핵 문제야말로 '흔들리는 분단 체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기우뚱한 분단 체제
1991년 남북은 동시에 유엔에 가입한다. 그 후 20여 년 북과 남의 개별적 국가성은 한층 강화되었다. 국제 사회의 제도적 틀에서 서로 다른 주권 국가임을 명확히 해간 것이다. 이는 적대적 체제 경쟁을 벌이면서도 민족 내 특수 관계를 고집했던 냉전기와는 질적으로 달라진 변화이다. 오히려 적대성을 해소해 가는 것 자체가 남과 북의 개별적 국가성을 더욱 강화한 측면마저 있다. 남북 교류 확대가 북조선의 실상에 대한 실감을 더하면서 북과는 별개의 '대한민국주의'가 더욱 증폭되기도 한다.
개별적 국가성 만큼이나 사회적 이질성도 심화되었다. 더 이상 왕년의 좌/우 독재 간 대결이 아니다. 21세기의 '한류'란 87년 민주화가 촉발한 사회적 활력이 90년대 세계화/정보화의 물결에 올라탄 화학 작용의 결실이다. '글로벌 코리아'와 '김일성 민족' 간의 아찔한 차이를 보라. 즉 국가적 역량의 격차뿐 아니라 사회적 역량의 차이가 커졌다. 이 남북 체제의 비대칭성을 만회하기 위한 비대칭적 전략의 하나가 핵무장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럴수록 사회적 이질성은 더욱 심해진다.
87년 이후 태어난 신세대의 대북 인식이 한국전쟁 세대만큼이나 부정적으로 변한 것은 상징적이다. 아니 옛 세대는 적대적일망정 북에 대한 관심은 있었다. 그러나 87년 이후 세대들은 무관심, 혹은 조롱과 혐오에 가깝다. 남의 독재 정권을 비판하며 북을 동경했던 386 세대(의 일부)와도 매우 다르다. 즉 내부 개혁 운동과 통일 운동의 고리가 갈수록 헐거워지고 있다.
그 틈을 노회하게 파고 든 것이 '종북' 공세이다. 분단 체제 극복을 위한 최대 연합 전선을 흐트리는 것이다. 반해 북도 남북 교류에 과감하게 나서기 힘들어졌다. 정치 경제뿐 아니라, 사회 문화적 실력의 차이 탓에 아래로부터의 '풀뿌리 흡수 통일'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현저한 하드웨어의 차이에도 '민주 대만'의 소프트웨어에 대한 자부심으로 대륙과 전면적 화해에 과감히 나설 수 있었던 대만과도 판이한 지점이다.
더불어 남과 북이 속해있는 '장'(場)의 차이도 따져야 한다. 기실 북조선의 지속과 재생산은 한국과의 적대만큼이나 중국에 경사되어 가능한 것이다. 탈냉전 이후에도 북조선이 체제를 유지하고 지속하는 것은 사실상의 '중화 경제권'에 편입되어서이다. 북조선은 홍콩이나 마카오보다도 위안화 사용이 일반화된 '일국 양화폐' 경제가 되었다. 향후의 발전 궤도 또한 일본과 한국보다는 중국(의 특정 지방 모델)에 근접할 가능성이 한층 크다.
따지고 보면 분단 체제의 태생부터 중국은 깊이 내재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한 것도 중국이며, 북조선의 사회주의 개조가 일단락된 1958년까지 인민지원군 주둔으로 엄호해준 것도 중국이다. 즉 분단 체제는 1945년, 혹은 1948년이 아니라 1953년이 관건이다. 미국과 소련 즉 서구(西歐) 대 동구(東歐)의 대결 구도가 아니라, 미국과 중국이라는 서방(西方)대 동방(東方)의 축으로 변한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신중국이 없었더라면 한국전쟁도, 분단 체제도 없었을 것이라 할 수 있다. 장개석이 중원을 보지했다면 북조선은 조락했을 공산이 크고, 통일 또한 진즉에 이루어졌을 여지가 높다. 즉 분단 체제의 탄생과 지속과 그 변용에 중국은 항상적인 존재였음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나아가 그 존재감은 나날이 더해갈 것이다. 불과 수교 20년 만에 전장에서 총부리를 겨누었던 한국마저 대중화 경제권의 일부로 편입되고 있음이다. 미국은 결국 20세기의 손님이다. 반해 중국은 수천 년의 터줏대감이다. 분단 체제의 미래 또한 이러한 문명사적 전환과 깊이 연동될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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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분단 체제
올해는 정전 협정 60주년이다. 서명 당사자의 면면이 흥미롭다. 유엔군과 중국인민군, 북조선인민군이 서명했다. 출발부터 유엔 대 북·중의 구도였다. 지금껏 북조선의 도발과 핵실험에 유엔이 제재하면, 결국 중국의 지원으로 무마되는 구도가 지속되고 있다. 즉 38선은 유엔으로 담보되는 근대적 국제 질서의 마지노선이다. 반면 중국이 주도하는 유사-중화 질서, 혹은 '근대화된 중화 질서'의 저지선이다. 근대의 논리와 중화의 원리가 길항하는 교착점이 38선인 것이다. 20세기 동아시아를 규정짓던 탈중화와 재중화의 길항이 비무장지대에서 날카롭게 교착했던 것이다. 즉 남북 분단은 동방과 서방, 중화와 근대의 상이한 지역 질서가 대결하는 '문명의 충돌'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한 갑(甲). 이제 남북조차도 비대칭성이 역력하다. 이 구성원 간 격차를 지혜롭게 조화시키는 모델을 적극 탐구해야 한다. 결론을 앞서 말하자면, 중화 질서에 가까운 그 어떤 것일 터이다. 탈냉전 이래 중화 세계는 이미 복합 국가들로 작동 중이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 일본의 식민지이자 국민당의 거점이었던 대만도 대중화권으로 품어내고 있다.
그럼에도 개별적인 장소마다의 정치 제도와 사회 질서는 여전히 지속한다. 일국양제(一國兩制)로 상징되는 복합 질서의 구현으로 복합 국가가 어울리는 복합계를 이루어가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의 중국'은 수많은 소중국들로 이루어진 '다양한 중국'이기도 하다. 일국가 일체제의 근대 세계로부터 왕년의 '천하'를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근대의 우등생' 신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본이 북조선과 100년이 넘도록 과거사의 매듭을 풀지 못하고, 센카쿠/다오위다오 분쟁을 일으키는 모습과는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한반도의 분단 체제를 푸는 작업 또한 이러한 반전(反轉) 시대의 흐름과 무관할 수 없다. 중화 질서의 창조적 갱신이 필요하다. 중세적 공간으로 퇴각하자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근대, 혹은 더 나은 근대, 아니 근대 이후의 신세계로서의 신천하를 개척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통일 과정은 민족주의의 때늦은 분출이 아니라, 신산하고 심란했던 20세기 동아시아에 최후의 안녕을 고하는 집합적 기획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남북 교류 일변도로 가서도 안 된다. 흡수 통일의 위협을 안고 있는 소국에 대한 배려가 아니다. '우리 민족끼리'야말로 그 내심으로는 북조선이 가장 우려하는 상황일 것이다. 북조선 체제의 궁극적 위협은 미국보다는 차라리 한국이다. 따라서 남쪽은 동아시아 국제 분업 네트워크의 촉진자 역할을 해야 한다. 북조선과 동북, 몽골, 시베리아를 잇는 북방아시아의 신천지를 일구는 대사업의 가교가 될 일이다.
본디 유구한 중화 질서의 기저에도 강한 중국이 아니라 부유한 중국이 있었다. 조공은 정치질서에 그치지 않고, 그 근본적인 지점에서 경제 질서였다. 그래서 혹자는 '조공 무역 시스템'이라고도 한다. 주변 소국들도 조공 무역을 통해 더 많은 이익과 혜택을 얻기에 안정과 평화가 장기 지속할 수 있던 것이다. 즉 항산(恒産)이 있었기에 항심(恒心)이 가능했다. 동아시아는 철기 문명과 농경 문명을 통한 비약적 생산력 발전으로 일찌감치 유럽의 근대와 흡사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경험했다. 그 처절한 전쟁 끝에 무(武)를 문(文)으로 다스리는 이념과 질서가 성립한 것이다. 그래서 창을 든 전사를 붓을 든 선비로 개조시켰고, 근육을 과장하던 갑옷을 벗겨내어 치마를 연상시키는 두루마기로 몸을 감쌌다. 남성성을 여성성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따라서 중화 질서는 칼을 찬 기사들의 중세적 질서와는 전혀 다르다. 중화주의 또한 중세적 사상이 결코 아니다.
중화주의에 대한 즉각적인 거부감과 반발이야말로 20세기의 산물이다. 독립, 주체, 자유, 평등이라는 무질서를 촉발하는 관념들을 '진보'라고 떠받들었던 근대의 '발명된' 감정이다. 사람사이 뿐 아니라 나라사이도 도덕적으로 규율했던 동아시아 문명의 미덕이 훼손된 것이다. 일찍이 몽골과 일본, 만주에 의해 중화 질서가 동요했을 때, 한반도의 '동방예의지국'은 피눈물을 흘렸다. 하나같이 중화 질서를 수용하지 않고 '문치(文治)'에 이르지 못한 '오랑캐'들의 소란이었다. 초원과 바다의 무인(武人)과 야인(野人)들의 세계가 끊임없이 중화 세계에 도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들 또한 결국 중화 질서에 귀속되어갔다는 점이다. 기어이 '武'를 '文'으로 다스려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태평천하를 구가하는 놀라운 복원력을 과시해 왔다. 그렇다면 아편 전쟁 이래 '서구의 충격' 또한 그 반복이라 아니할 수 있을까? 더 먼 곳에서 도래한 '최후의 오랑캐'가 중화 질서를 교란했지만, 다시금 옛 질서를 복구하는 과정에 진입한 것이 아닐까? 아니 동아시아 너머 세계 질서 자체를 '중국화'하는 단계에 들어선 것은 아닐까? 중국 사상계에서 다시금 천하와 왕도 등의 담론이 분출하는 것에 기시감을 느끼는 까닭이다. 결국 20세기 또한 중화 세계의 축소와 팽창이라는 동아시아사 특유의 기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 혹독한 이행기의 난세를 겪은 불운한 세대였을 뿐이다.
유라시아의 길
한반도는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다(不一不二). 혹은 '하나 그리고 둘'이다. 억지로 하나를 고집할 것도 아니요, 기어코 둘을 고수할 일도 아니다. 그 기우뚱한 현재를 있는 그대로 제도화할 수 있는 창의적인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먼저 남북의 위계부터 인정할 일이다. 민족애만큼이나 형제애와 자매애의 차등적 사랑이 필요하다. '상호주의'는 실로 쩨쩨한 발상이다. 현저한 실력 차에 눈을 감는 속 좁은 소갈머리다. 남쪽 탓만은 아니다. 북쪽도 감사의 예를 갖추지 못했다. 옹졸한 자존심으로 허장성세를 부렸다. 그 뻣뻣한 태도는 필시 열등감과 조바심의 발로일 것이다. 그 뻔한 허세를 넉넉히 보듬어 주지 못하는 남쪽의 협량한 도량이 아쉽다. 이 쩨쩨함과 뻣뻣함의 악순환을 덕과 예의 선순환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왕성한 잡식성을 자랑하는 저 대륙은 점차 대당 제국에 방불해져간다. 불교와 이슬람 문명을 수용한 코즈모폴리턴 제국의 정수가 당이었다. 작금의 중국 또한 19세기의 유럽과 20세기의 소련과 미국을 소화하고 동서 융합의 신문명을 궁리하고 있다. 따라서 동시대 통일신라와 발해의 활력을 떠올려 볼 일이다. 당시 동아시아는 세계의 중심이었고,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을 잇는 동아시아 네트워크의 연결 고리였다. 그래서 최치원과 혜초, 장보고 등 '세계인'들이 속속 등장했다. 경주를 비롯한 한반도의 도시 또한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드는 '자유 도시'이자 '세계 도시'였다. 작금 대륙의 곳곳에 생겨나고 있는 한국인 거주지 또한 왕년의 신라방의 재림이다. 여기에 화교들의 글로벌 화인(華人) 세계와 재외 동포 800만의 글로벌 한인(韓人) 세계까지 포개노라면, 영토의 한계를 넘나드는 네트워크 국가가 대륙과 반도에서 목하 실현 중에 있는 것이다.
반전 시대의 조짐과 징후는 여실하다. 옛 발해의 땅이었던 북방에는 북조선 및 중국, 러시아, 몽골을 연결하는 길들이 점차 분주해지고 있다. 대륙의 초원길이 다시 열린다. 최치원이 배움을 구하러 장안으로, 혜초가 깨달음을 구하러 천축으로 향했던 바로 그 유라시아의 길이다. 즉 남북을 재차 잇는 길은 한반도에 그치지 않는다. 동서를 다시 잇는 문명사적 대업이다. 한반도 주민이 세계 시민의 일원으로 천하태평과 대동 세계에 기여하는 으뜸의 지름길이다. 따라서 우리부터 '우리 민족끼리'의 협애함을 떨치자. '천하위공'을 사표로 삼는 '동방예의지국'의 명예를 회수하고 회복하자. 그 지고지순했던 심성으로의 되돌림(revolve)이야말로 20세기를 치유하는 21세기의 혁명(revoluti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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