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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을 펼쳐라! 단, '과학'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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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을 펼쳐라! 단, '과학' 위에서

[김창규의 '기계 나비의 꿈'] 버너 빈지의 <심연 위의 불길>

'상상력'이나 '창의력'이라는 단어를 끌어들여서 상품 가치를 부풀리려고 하는 문구나 광고들을 볼 때 마다 괜히 가슴 한 구석이 뜨끔 하는 것은 SF 작가의 원죄인지도 모르겠다. '창의적 학습법'을 내세우는 학습지란 실은 '학생의 창의성을 창의적으로 꺾는 방법'을 담은 학습지일 수 있다. '상상을 현실로 끌어 온' 자동차란 것도 실은 사업성과 고객층을 철저히 분석한 다음에 그냥 넣어줘도 충분할 새 기능을 열댓 가지로 나눠서 추가 금액을 덕지덕지 붙여 놓은 자동차라는 뜻일 경우가 많다.

그리고 여기에 SF가 있다. SF와 상상력은 떼어내려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러면 이 때의 상상력은 앞 문단에서 필자가 씌워 놓은 혐의로부터 완전한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마주하고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그랬으면 좋겠다'이다. 두 번째로 하고픈 말은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이 바로 SF다' 이다.

SF의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작은 한숨을 쉴지도 모른다. 요즘의 SF는 복잡하다. 아이디어 한두 개만으로 감동을 주기가 힘들다는 얘기다. 거기에 더해 여러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장점을 섞는 작품들이 많아지면서 굵고 진하고 뚜렷한 상상력을 곧바로 맛보기 힘들어지는 경향도 어느 정도는 있다. 그 이유나 현황을 파고들면 전혀 다른 얘기를 펼쳐야 하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겠지만, SF는 본래 선이 굵고 힘이 있는 상상력이 내재될 수밖에 없는 장르이다.

그 주된 이유는 태생적으로 SF가 '바깥 세계'를 그리며 출발했다는 데에 있다. 이 바깥 세계는 '미지의 세계'라는 관념적인 의미도 포함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SF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미지와 우주라는 두 단어를 합치면 지적인 탐험을 떠날 수 있는 무대가 세워지며, 대개의 경우 거기에는 모험이 기다리고 있다. 최근의 SF에서는 이런 원형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 <심연 위의 불길>(버너 빈지 지음, 김상훈 옮김, 행복한책읽기 펴냄). ⓒ행복한책읽기
그런데 이런 전통을 잘 지키는 최근작이 있으니 <심연 위의 불길>(김상훈 옮김, 행복한책읽기 펴냄)이다. 작가인 버너 빈지는 수학 및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는 교수이기도 하다. <심연 위의 불길>은 우선적으로 '바깥 세계의 창조'라는 면에서 칭찬을 받을 만하다. 실제 우주의 구조를 다루는 과학 분야에서는 물리 법칙이 (적어도 이 우주에서는) 어느 곳에서건 동일하다는 가정 하에서 연구를 진행한다. 이 가정을 무너뜨리는 증거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극한 상황, 예를 들어서 빅뱅과 그 직후에 이어지는 인플레이션 시기에 대한 연구는 계속 진행 중이지만) 반면에 <심연 위의 불길>은 지구를 포함하고 있는 우리 은하계에서조차 구역에 따라서 물리 법칙이 다르다는 상상을 바탕으로 세계관을 만들었다.

우리 은하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나선팔을 가진 원이다. <심연 위의 불길>의 세계관에서는 은하 중심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에 따라서 물리 법칙이 달라진다. 그리고 법칙의 차이에 따라서 구역을 나눈다. 우리 태양계 및 지구는 저속권(the Slow Zone)에 있다. 저속권에서는 입자의 운동 속도나 정보의 전파 속도가 광속을 넘지 못한다. 따라서 고성능의 인공 지능을 만들 수 없고 초광속 여행도 불가능하다. 저속권보다 바깥인 역외권(the Beyond)에서는 이런 한계가 허물어진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여기에서 특이점(Singularity) 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특이점이란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다가 도달하게 될 어떤 가상의 시점인데, 이 시점을 넘어가면 인간은 육체뿐 아니라 물리적인 제약을 넘어서고 전능한 존재를 향해 나아간다. 특이점은 비단 SF뿐만이 아니라 사회와 기술의 현재와 미래를 연구하는 학문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개념이다.

<심연 위의 불길>에서 역외권은 특이점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은하계의 각 문명들은 역외권 및 그 바깥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한다. 역외권을 넘어선 곳에는 초월계(Transcend)가 있다. 이곳에는 특이점을 넘어서서 신선(Power)이 된 집단지성들이 머문다. 초월계는 전지전능의 영역이다. 하지만 신선도 물리 법칙 자체를 거스를 수는 없으니, 하위 구역으로 내려가면 전지전능 또한 약화된다.

<심연 위의 불길>이 전통적인 상상력을 밀어 넣은 것은 세계관뿐이 아니다. 이 작품에는 여러 종류의 외계 문명과 지적 생물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주가 되는 것은 다인족이다. 다인족은 외형으로는 개와 흡사하지만 일종의 군체 생물이다. <심연 위의 불길>은 그런 외계 종족의 생활을 상당히 현실감 있게 묘사했다. 이로써 바깥 세계의 경이로움과 외계 종족이라는 SF의 고전 요소를 든든하게, 효과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이 책의 최대 장점이다. <심연 위의 불길>은 그 둘에 전쟁과 모험담을 더해 1993년 휴고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힘을 가진 설정의 위력에서 살짝 옆으로 눈을 돌리면 한계가 보인다. 주가 되는 이야기가 진부한 것이다. <심연 위의 불길>의 핵심 갈등은 '고대' 악이라 일컬을 만한 지성체의 부활이다. 주인공들의 핵심 임무는 그 부활을 막는 데에 있다. 여기서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를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고 결말은 세계관에서 보여 준 힘이 민망할 정도로 허탈하고 무책임해 아쉬움을 남긴다.

SF의 '1차적인' 힘은 그 상상력이 비유나 은유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과학적 유추와 개연성이라는 든든한 기둥 위에 세운 세계는 그 자체만으로 경이감을 불러올 수 있다. 그와 같은 힘은 SF의 황금기 때에 전부 소진되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심연 위의 불길>은 좋은 반례가 될 것이다. 대담하고 광대한 SF적 상상력을 아무 의심 없이 느껴보고 싶다면 <심연 위의 불길>의 세계관에 주목하기를 권한다. (*본문에 소개한 작품 내 용어는 국내 번역판을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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