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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거대한 뿌리, '중화'여 부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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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거대한 뿌리, '중화'여 부활하라!

[동아시아를 묻다] 최원식을 넘어서

반풍수

1993년 이맘때다. 최원식의 논설 '탈냉전 시대와 동아시아적 시각의 모색'이 <창작과비평> 봄호에 발표된다. 훗날 '동아시아론'이라고 명명되는 새 담론의 출발이었다. 소련 해체(1991년), 한중/한베 수교(1992년), 문민정부 출범(1993년) 등 역사의 격변에 즉응한 진보 담론의 갱신이었다.

보수/진보, NL/PD를 막론하고 우심했던 일국주의에 균열을 내는 순간이기도 했다. 포스트모던으로 탈주하지도 않고 한반도에 안주하지도 않으며 진보의 새 영토를 개척한 것이다. 들뢰즈 운운하지 않고도 '탈영토화'를 이룬 것이니, '진화하는 진보'의 사표로 삼고 싶다.

꼬박 20년. 뒤를 밟아온 후학으로 소소한 기념행사를 해두고 싶다. 그래서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창비 펴냄)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독서의 흔적도 남겨두려 한다. 이미 충실한 서평이 제출된 바 있다. 헌데 비평보다 겸양이 물씬하다. 이정훈은 "깊은 경의"를 표하고, 류준필은 "찬탄과 자괴"를 토로한다. "사숙의 비망록"이라며 한껏 겸손하다.

깊이 공감한다. 나도 적절한 단어를 찾느라 고심했다. '경전'은 너무 과하다. 반복해서 읽었다는 점에서 '교과서'는 될 것이다. 나침반이나 등대라는 수식어도 떠오른다. 동아시아로 가는 길에 언제나 앞에 계셨다. 그 분이 종종 쓰는 표현을 빌리면, '북극성' 쯤 되겠다. 그래서 '동아시아를 묻다'를 쓰는 동안에도 자주 책을 펼쳤다. 생각이 막히고, 글이 풀리지 않으면, 덮어두고 선생의 책을 눈가는 데로 읽었다. 그러면 문득 실타래가 풀리곤 했다. 지식의 우물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이번에 작정하고 정독하며 흠칫 놀란 대목이 이만저만 아니다. 나의 독창이라 여겼던 생각들이 고스란히 못 박혀 있는 구절을 접하고는 망연자실했다. 거듭 읽고, 씹어 읽고, 곱씹다보니, 체화되고 육화되어 나의 혀를 빌어 발화되었던 모양이다. 낭패감과 당혹감이 인다. 진즉에 문체가 닮는다, 라는 지적을 들은 바도 있다. 혹 발상부터 문장까지, 모방과 흉내에 그쳤던 것은 아닐까.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떠올라 초조하다.

그래서 최원식 동아시아론의 미덕을 열거한 대목을 몽땅 지웠다. 경의와 찬탄을 반복하는 것은 '생산적 대화'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주석과 훈고보다는 여백을 채워나가는 작업이 소중하다. 그래서 요약과 설명은 생략한다. 직접 읽어보시길 권한다. 이미 읽은 분은 한 번 더, 아직 접하지 못한 분은 새로이 읽어보면 좋겠다. 아낌없이, 주저 없이, 추천한다.

이 책이 발간된 후 감사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답장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반풍수는 이룬 듯하다. 이제 군이 온풍수로 성장하길 바란다." 언감생심, 온풍수는 턱도 없다. 반풍수에서 일보, 아니 반보라도 나아가면 더없이 좋겠다. 그 간절한 마음으로 글을 잇는다.

제국들의 황혼?

▲ 최원식 인하대학교 교수. ⓒ창비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제목이 참 근사하고 상징적이라 여겼다. 중화 제국, 일본 제국 그리고 미 제국.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제국의 교체를 돌아보며, 탈제국의 기치와 가치에 크게 감응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현실은 갈수록 담론과 어긋나고 있다고 여긴다. 제국들(Empires)의 황혼보다는 제국(The Empire)의 귀환이 실상에 가깝다. 근대의 제국들이 하나둘 물러나면서 저 오래된 중화 제국의 굴기가 점차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언뜻 대청 제국의 하드웨어(복합적 통치 제도)와 대당 제국의 소프트웨어(세계주의 혼종 문화)를 결합한 '진화한 제국'일 법도 하다.

단도직입, 중화 제국을 근대 제국과 나란히 할 수 없다고 여긴다. 아니 중화 제국이 해체되었던 것이 아니라고 본다. 20세기는 과연 일본 제국과 미 제국의 시대였던가. 중화 제국은 과연 '졸'로 떨어졌던가. 아닌 것 같다. 아니, 아니다. 일본도 미국도 중원을 접수한 바 없다. 중원에는 여전히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위태로이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반제국주의 운동의 저수지 역할을 그치지 않았다. 북조선의 뿌리는 중국 공산당에 있다. 대한민국의 회생 또한 중국 국민당에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보호해 준 것이 국민당이며, 김일성의 출발이 중국 공산당이다. 여기에 호치민 등 여타 국가의 지도자를 보태면 그 목록은 매우 길어진다. 근대 제국에 맞서는 아시아 반제 세력이 대륙의 곳곳에 둥지를 틀고 반전을 꾀했던 것이다.

20세기 후반은 미 제국이라 갈음할 수 있는가? 일견 그렇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 명과 실에서 미국은 가히 극강의 제국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대일통(大一統)을 이룬 적은 단 한 순간도 없다. 과장은 금물이다. 따지자면 중원 진출로는 일본만도 못했다. 외곽에서 군사 기지를 만들고 호시탐탐했을 뿐이다. 오히려 동풍(東風)을 차단하고, 중원 봉쇄에 급급했다. 이른바 '도미노 이론'이다. 즉 동아시아 지분의 절반은 이미 냉전기에 중국이 (되)찾아 간 것이다. 아니 중국의 영향력이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확산된 시기가 이 무렵이다. 아시아-아프리카 운동, 제3세계 운동의 중원이었다. 마오쩌둥 어록은 아프리카로 남아메리카로 널리 널리 퍼져나갔다. 뿐인가. 제1세계(자유주의)와 제2세계(사회주의)를 모두 뒤흔든 68 혁명의 기원 또한 1966년 문화대혁명에 있었다. 즉 포스트모던의 뿌리에 문혁이 있다. 조숙한, 그래서 조로한 '중국 모델론'이었다.

중화 제국은 미약해졌을망정 해체된 바 없다. 중화주의 또한 (긍/부정을 아울러) 해소된 바 없다. 근대의 편벽이 실상을 가리고 눈을 멀게 했을 뿐이다. 특히나 동북아와 동남아를 아우른 지역에는 '중화 사회주의'라고 할법한 영향력이 지대했다. 미 제국에 편입된 일본과 한국과 대만조차 음(陰)으로는(=반체제 세력) 중국에 치우치기도 했다. 기실 동아시아의 냉전이란 이념과 체제만의 대결이 아니었다. 탈중화와 재중화의 길항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 그래야 동아시아론 20년이 지나도록 냉전 구도가 해소되지 않고 있는 작금의 동아시아를 한층 적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제국의 교체라는 관점과 탈제국의 목표는 정곡을 짚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동/서의 상이한 역사적 경로 의존성을 간과해서가 아닐까? 서구에서는 합당한 독법일 수 있다. 패권의 교체, 강대국의 흥망성쇠로 역사를 독해할 수 있다. 그래서 탈제국을 표방하는 유럽연합(EU)가 등장했다.

하지만 동아시아는 다르다. 제국의 교체라기보다는, 중화 제국의 팽창과 축소의 과정이었다. 즉 패권이 옮아간 것이 아니라, 중심과 주변의 관계 방식이 변화했을 뿐(=화이변태)이다. 즉 지중해를 끼고 제국의 수도가 소용돌이치듯 옮겨간 서구와 달리, 중국은 (동)아시아의 '영원한 제국'이었다. 그 반복과 복고가 중화 제국의 학습 능력도 강화했다. 강대국 간 패권 교체가 연속적 학습 능력을 저하시킨다면, 중국은 지나간 왕조 교체의 서사를 모두 '중국사'로 학습했던 것이다. 내면화되고 체질화된 '지속의 제국'이다.

즉 지중해(地中海)의 유동적 중심이 아니라, 지중하(地中河)를 품은 비옥한 중원은 견고한 중심이었음을 두고두고 명심하자. 그 중심성이 통일기에는 압도적 힘의 원천이었고, 분열기에는 주변, 특히 북방 유목 민족의 남하를 유혹했다. 또 인구, 자원, 생산의 항상적인 중심성이 중화 제국의 기묘한 수동성, 자족성이라는 상반되는 특성도 낳았다. 풍요로운 중심을 벗어난 확장과 팽창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기회 비용과 유지 비용이 더 크기 때문이다. 서구 제국과 달리 과도한 팽창이 드물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정화의 거함은 명예롭게 물러났지만, 유럽의 돛단배는 '대항해 시대'를 열 수 있었다.

따라서 동아시아론은 부동의 중심으로서 중국을 그 척추에 새겨두어야 한다. 오해는 고쳐두자. 친중(親中)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북학파가 친중파는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의 현실에 즉하여 실리적이고 실무적이며 실천적이었다. 그들의 실학 정신을 계승하여 동아시아의 실태와 실체와 부합하는 실사구시의 출발을 확인해 두자는 것이다. 그래야 과거를 살피는 눈이 열리고, 미래를 더듬는 길도 열린다.

그 항상적인 비대칭성과 부동의 중심성은 중국과 주변의 관계 맺기 방식을 규정해 왔다. 지배(의 비용)보다는 질서(의 균형)에 방점을 두었던 것이다. 즉 주변 소국을 직접 지배(dominance)하는 것보다 상호 수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관리/경영(management)하는 것이다. 조공-책봉 또한 불평등과 비대칭을 해소한 것이 아니라, 관리하고 조정하는 틀을 제공한 것이다.

즉 관계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조정과 관리가 필요한 '상황'에 가까웠다. 그래서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도 했다. 중국에서, 또 중국을 향해서 베트남은 조공국이었지만,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베트남에서 베트남은 중국과 대등(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북국(北國)에 버금가는 남국(南國)의 자부를 표출했다. 인식의 차이를 동일화로 해소하는 것(law)이 아니라, 차이로 남겨두고 충돌을 피하며 관리해 간 것(禮)이다.

사대와 사소 : 게임의 법칙

최원식의 입론도 어떤 아슬아슬한 경계까지 도달했다고 여긴다. 20여 년의 숙고 끝에 가닿은 것이 '대국과 소국의 상호 진화'라는 발상이다. 20세기를 달군 대국주의를 반성하고, 소국주의의 가치를 설파한다. 그래서 남북 연합이 통일의 최종 형태로도 무방하다는 파격을 감행한다. 한국 내부의 개혁파=통일파의 심층 심리에 똬리를 튼 저항적 민족주의에 일침을 가한 것이다.

자칫 대한국주의로 내달릴 수 있음을 엄중히 또 겸허히 경고한 것이니, 그 냉철한 자기 성찰이 발군이다. 그럼에도 탈근대를 빙자하여 탈민족주의로 질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도시 간 교류, 민간 교류(民際), 문화 교류(한류 등) 등을 섬세히 독해하며 국가를 에둘러 동아시아에 이르는 여러 길을 찾는다. 하지만 이 새 경로를 편애하지만도 않음이 정수이다. 지방 분권이라는 개별 국가의 구체적인 개조/개혁 사업과 접목되고 있음이 돋보이는 것이다. 주변을 천착하면서도, 국가와 국제를 소홀히 여기지 않는 중용의 감각이 탁월하다. 어느새 경의와 찬탄을 읊고 있다. 여기서 그치겠다.

다만 소국과 대국의 상호 진화를 피력하며 인용한 전거들이 아쉽다. 노자와 맹자의 고전에서 출발하여, 20세기의 소태산과 백범이 소환된다. 이 고금을 누비는 사유의 모험 덕에 배운 바가 실로 크다.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유만으로는 세계가 지속되지 않음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더 숙고할 지점은 사대/사소라는 관념의 지속을 허락하는 실천의 누적이다. 대국과 소국이 어울리며 복원과 복구를 지속했던 동아시아의 지구력을 구체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사대와 사소의 '게임의 법칙'에 더 실제적으로 접근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보론이고, 첨언이다.

대/소 간의 물리적 차이는 양자 관계의 모든 면에서 상이한 영향을 준다. 상품 교역과 문화 교류 등 대등하고 자발적인 상호 관계라 하더라도, 경중을 따지자면 소국에서 그 비중이 월등히 클 수밖에 없다. 그만큼 소국은 대국과의 관계에서 이익만큼 위험(risk)도 크다. 반면 대국은 그러하지 않다. 또 다른, 혹은 더 중요한 관계가 있고, 때로는 내부 문제가 더 중대하다. 대국인만큼 외교보다 내치가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 대국과의 관계가 사활적인 소국과는 관심의 지평 자체가 다른 것이다. 비대칭적 규모의 차이가 이해(interest)의 차이와 직결되는 것이다.

이해의 차이는 또 인식의 차이를 낳는다. 그리고 행동의 차이로 이어진다. 소국이 늘 더 대국을 주시한다. 반면 대국은 느슨하고, 느릿하다. 그러나 관심도와 주목도가 곧 정확도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데 역설이 있다. 소국의 높은 집중도가 더 나은 이해도를 보장하지는 않는 것이다. 대국의 작은 행동까지도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것으로 오인하고 오독할 여지가 크다. 즉 소국의 병폐가 과민이라면, 대국의 폐단은 무심이다.

소국의 과민과 대국의 무심은 위기 국면에서 악순환을 일으킨다. 대국은 소국이 처한 조건과 환경을 세심히 살피기보다는 보유한 힘을 사용하여 원상회복하려는 유혹이 승한다. 병통은 대국의 무력 과시가 소국의 위험 인지를 더 강화한다는 점이다. 대국이 손가락을 내밀어도, 주먹을 휘둘렀다고 받아들인다. 본래 질서로 복구하려 했던 대국의 행위가 소국의 결사항전을 촉발하는 것이다. 근사한 예로 중국-베트남의 국경 분쟁(1979년)을 들 수 있다. 교훈을 주겠다는 대국의 징벌 전쟁이 소국의 사생결단을 낳았다. 그리고 베트남-소련 동맹을 한층 강화했다. 겨우 미국의 봉쇄를 뚫고 개혁 개방에 나섰는데, 남쪽 이웃이 영 불편했던 것이다.

따라서 대국은 소국들과의 문제를 일일이 해결하기 보다는 '덕'을 베푸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 도량이 크고 관대한 대국의 미덕을 과시하는 셈이다. 즉 사대와 사소는 덕과 예의 교환방식이다. 소국의 예가 굴종은 아니다. 대국이 소국을 정복하고 지배하지 않는다는 무언의 약속에 대한 화답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소국이 대국과의 관계와 지역 질서를 교란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 대가로 소국은 정체성과 자율성을 보장받는 것이다. 즉 성숙한 비대칭적 관계=중화 질서는 자율성을 상호 승인하는 제도화된 덕과 예의 교환으로 성립된다. 그래서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도 전면적 패배도 아니다. 역동적인 균형, 중용의 상태이다. 동아시아의 태평성세란 이 잠정 협정(modus vivendi)의 지속을 일컫던 것이다. 그래서 호혜적 질서라고 하겠다.

아니 호혜라고 한다면 도리어 대국이 심통날 수도 있다. 대소 간의 불평등만큼이나 교환 또한 불균등하기 때문이다. 평화와 안정, 질서라는 공공재를 대국이 더 많이 제공해야 '잠정 협정'이 지속가능하다. 그래서 그 교환의 속성은 차라리 증여에 가깝다. 전쟁이 그치지 않았던 유럽의 국제법(rule by law)과는 다른 동방의 장기 평화가 도달한 게임의 법칙(rule of game)이었다.

정명(正名) :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

20세기의 전국 시대는 지났다. 혹은 그 말기에 달했다. 북조선이라는 최후의 복병이 남아 있지만, 국가와 민족의 존망이 화두가 되는 시대는 안녕을 고한 것 같다. 정권 교체는 있더라도, 국가를 지우고 식민지를 세우는 일은 (당분간) 상상키 어렵다. 전국 시대의 합종연횡도, 냉전 시대의 동맹 정치도 낡은 것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조공 체제가 부활하리라 전망하기도 어렵다. 동아시아는 이미 외부로 활짝 열려 있다. 세계 체제의 일부인 것이다. 아니 세계 체제의 심장이 되고 있다. 다만 조공-책봉의 공식 관계가 해체되었다 한들, 중국과 주변의 비대칭성만은 변함없이 유구하다. 그래서 비대칭적 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조율했던 중화 질서의 유산은 갈수록 무게감을 더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한국발 동아시아론은 감히 천하, 중화, 조공을 차마 입에 담지 못한다. 혹은 부정적 수사를 동반하여 방치하기 일쑤이다. 그래서 가장 늦게 (동)아시아 담론에 끼어든 중국에 주도권을 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넉넉히 짐작된다. 식민과 분단, 전쟁으로 얼룩졌던 20세기의 경험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자유, 평등, 독립, 자주, 민족, 주체로 내달렸던 20세기형 민주/진보의 관성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소(와 교린)를 교묘히 지우고 사대만 돌출시켜 조선을 업신여겼던 일본의 책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동아시아론도 미처 동아시아의 언어를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반풍수에서 온풍수로 내딛는 출발점이 바로 여기가 아닌가 싶다. 말을 바루는 정명(正名) 작업, 즉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이 요청된다.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를 다시 읽노라니, '중세'라는 수식어가 완강하게 지속되고 있음이 눈에 가시고 목에 걸렸다. 중화 질서가 과연 중세적 질서였는가? 혹 더 나은 근대 질서는 아니었을까? EU가 지향하는 탈국제 질서야말로 흡사 중화 질서에 근접하고 있는 것 아닐까? 백번 양보해서 '중세'의 모자를 씌운다 해도, 중세라는 이유로 배척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국제 질서보다 중화 질서가 더 평화롭고 안정적이었음을 "있는 그대로" 승인하고 적극 (재)탐구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리하여 '중세'의 중화주의와 '근대'의 동양/아시아주의를 등가로 삼아 도매 급으로 내칠 수 없다고 여긴다. 혹 동양주의, 아시아주의의 좌절은 기어이 중화주의에 미치지 못해서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확실히 해두자. 중화가 곧 중국은 아니다. (동)아시아의 태평과 안녕을 제공하는 실력과 덕을 겸비한 집단이면 누구나 '중화'의 자격이 있었다. 중화는 민족과 국가에 한정되지 않는 천하의 공공 개념인 것이다. 누천년 동아시아의 집합 지성이 도출한 평화의 방법이고 지혜이다. 그래서 소중화도 떳떳했고, '중화' 요리도 거리낌 없이 즐길 만큼 일상의 저변까지 스며든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중화 제국과 중화 질서를 '중세'라는 빌려온 수사로 내칠 뜻이 전혀 없다. 또 중국만의 것이라며 스스로(의 역사)를 소외시키고 배타할 생각도 없다. 오히려 더 깊이 궁리하고 천착해볼 작정이다. 옛 것을 익혀, 새것을 배우려는 것이다. 서학(西學)을 딛고, 동학(東學)으로 더 깊이 귀의할 요량이다.

최원식은 1949년생이다. 남북의 분단 건국 이듬해,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던 해 태어나셨다. 반해 나는 중국이 개혁 개방을 선포하던 해 태어났다. 이 한 세대, 30년의 차이를 깊이 음미한다. 20세기의 신문화와 문화 혁명, 그 새 것(modern)을 향한 개화파와 계몽파와 개혁파의 질주와 질곡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운 세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선생(先生)과 선배(先輩)의 삶을 지배했던 '근대'라는 강박을 접어두고, 중세와 봉건이라 타박 받던 선조(先祖)들과 기꺼이 해후하고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의 한 구절을 옮긴다.

비숍 여사와 이야기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 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隱密도 深奧도 學究도 體面도 因習도 治安局
으로 가라. 東洋拓殖會社, 日本領事館, 大韓民國官吏
이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種苗商,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낳는 여자, 無識쟁이,
이 無數한 反動이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第三人道橋의 물 속에 박은 鐵筋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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