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만화책 전시회를 보러 아트 선재 센터에 갔다가 얼떨결에 제시 존스의 전시회를 보게 되었다. 연출된 다큐멘터리 형식의 작품 두 편이 상영되고 있었다. 잠시 둘러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발길을 멈추고 <또 다른 북(北)>이라는 작품을 반복해서 보게 되었다.
"<또 다른 북(北)>은 1960 년대 후반부터 1990 년대까지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주장하는 구교도와 영국 사이에서 발생한 분쟁인 '북아일랜드 분리운동' 기간 중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출발한다. 1970 년대 초반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집단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북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여러 종파, 계층, 분야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집단 심리치료를 실행하였다. 이 심리치료의 실험적인 대화는
전시장 벽에 붙어있는 <또 다른 북(北)> 안내문이다. 회상하듯 배우들이 남과 북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내가 이 영상 앞에 섰을 때, 다른 사람들의 명백한 고통을 단지 자신이 속한 집단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즐기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내가 마음속에 담아두고 숙성시키고 있던 바로 그 주제였다. 그저 덤덤하게 잊고 지내던 일들도 회상하게 되고 옛날 생각을 더듬어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무척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또 다른 북(北)>을 보면서 더 지체하지 말고 내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밀어내버리기로 했다.
아버지가 책을 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이근후 지음, 김선경 엮음, 갤리온 펴냄)는 발랄한 책이다. 은퇴하고 노년을 보내고 있는 전직 정신과의사가 유쾌한 마음으로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이야기다. 가독성도 높고 요즘 유행하는 멘토링이나 힐링 같은 화두와도 잘 맞아 떨어지는 책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될 것 같은 책이다. 잘 팔릴 것 같은 디자인이다.
아버지의 책이니 서평을 쓰는 것은 좀 어색하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고 해서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프레시안 books' 편집위원 한 분이 아들이 아버지 책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서평을 써 보라 권유하셨다. 아버지도 내가 '프레시안 books'에 서평 에세이를 연재하는 것을 아시고는 몇 차례 서평을 써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마냥 외면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이근후 지음, 김선경 엮음, 갤리온 펴냄). ⓒ갤리온 |
오래전에 출판된 아버지의 네팔 여행기에 나의 네팔 여행기를 덧씌운 책을 쓰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한 출판사와 책 작업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도 오가곤 했는데 일이 너무 많아질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그 책 속에서 떡국과 곶감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도 여러 번 등장하는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를 통해서 아버지가 말을 걸어오셨으니 내가 아버지에게 드리는 선물로 내밀하고 개인적인 내 이야기를 이 글에서 해볼 작정이다. 아버지도 이 책에 대한 호들갑스러운 공치사보다는 아들이 털어 놓는 불편한 고백이 더 반가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에게 '아빠'나 '아부지'나 '아버님'이기보다는 아버지다.
"지금은 정신과 치료 영역에서 보편적으로 응용되는 사이코드라마 치료법도 1974년 정신 질환자들에게 처음으로 실시했다. 이론서에 적혀 있던 치료법을 실제 무대에 올린 것이다. 대학로 연극판을 기웃거리며 여러 연극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오영진 작가, 김상열 연출가 그리고 서울예술대학의 이강백 교수가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그들의 열정도 한국정신의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는 나의 재롱을 받아주는 '아빠'였을 것이다. 크면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천문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내가 놀던 골목길 어귀에서 쳐다보던 금성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는 것을 보던 순간의 벅차오름 때문이었다. 장래희망을 써낼 때마다 천문학자와 함께 자주 등장했던 '극작가'는 순전히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다.
극작가 이강백은 나에게 탁구를 가르쳐 준 스승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아직 무대에 오르지도 않은 그의 희곡 초고를 읽어보는 기회를 가졌었다. 내가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르던 극작가 오영진은 나중에 천문학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사로스 주기를 비롯해서 신기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극작가가 멋있어 보였고, 천문학자만큼은 아니지만 극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문화적으로 아버지에게 많은 빚을 졌다. 아버지를 통해서 만날 수 있었던 많은 문화예술가들이 그냥 무심코 던졌던 한마디가 나의 소년기 그리고 청소년기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내가 연극을 좋아하고 틈만 나면 미술관에 가는 취미를 갖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예술적 취향의 직접적인 영향 때문일 것이다. 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사실 아버지에 대한 내 감정에는 큰 진폭이 없다. 물론 내가 이 글의 첫머리부터 예고를 했던 사건은 큰 진폭을 가진 것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 일에 아버지는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아버지는 나를 버리지도 않았고 때리거나 학대하지도 않았다. 방치하거나 굶기지도 않았다. 같이 여행을 갔던 기억도 있다. 가출할 만큼 아버지를 등지고 미워한 적도 없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이 세상 누구보다도 존경한 것도 아니다. 아버지가 내 인생의 롤 모델이 된 적도 없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그냥 한 아들로서 한 아버지를 보는 그런 평범한 감정이었다. 주로 고마운 생각과 아버지의 생활 습관 때문에 짜증이 교차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나에게 아버지는 아빠나 아부지나 아버님보다는 아버지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천문학자인 큰아들과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종종 토론을 벌였다. 이메일로 내 생각을 보내면 아들이 답장을 보내는 식이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런저런 기회에 아버지와 토론을 할 때가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한 인간 대 인간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준 아버지가 늘 고마웠다. 하지만 이야기가 늘 잘 마무리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야기가 교착 상태에 빠지는 경우는 대부분 같은 상황에서였다.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주로 아버지가 내리는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제가 사적인 것이든 공공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아버지의 결론은 항상 '개인의 무의식' 문제로 귀착되었다. 아버지가 정신분석학을 공부했고 그것을 적용해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천편일률적인 결론에는 식상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늘 개인보다는 세계의 문제에 골몰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이 문제는 여전히 내가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힘들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60여 년 전, 아버지 손을 잡고 대구 경북중학교에 입학시험을 보러 갔다. 문득 아버지가 학교 입구에 서 있는 버드나무를 가리키며 당신이 이 학교에 다닐 때 심은 거라고 하셨다. 나는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며 꼭 이 학교에 입학해 아버지가 공부하던 교실에서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중학교 입학 후 칠성동 종합운동장이 건설되었다. 운동장 둑에 플라타너스를 심는데, 우리 학교 학생들이 동원되어 나도 몇 그루를 심었다. 훗날 결혼하여 아버지가 되고 나서 아들과 함께 종합운동장을 찾았다. 나는 플라타너스 앞에서 "이 나무는 아빠가 다닐 때 심은 거란다" 하고 말해 주었다.
그런데 아들은 "그래요?" 할 뿐, 내가 왜 자기를 이곳에 데려왔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소년 시절 나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 심었다는 나무를 보고 감동했는데 같은 상황에서 내 아들은 별 느낌이 없었다. 나에게 동기를 부여해 준 아버지의 방식이 내 아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부자지간의 정을 근사하게 느끼게 해 주고픈 아비의 마음은 싱겁게 끝나버렸지만 얻은 것이 있었다. 같은 상황에서도 아들과 내가 느끼는 감정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아버지와 플라타너스 앞에 서있었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사실 나는 과거의 세세한 일들까지 기억을 잘 하는 편인데, 아버지가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에 길게 써놓은 이 에피소드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어쩌면 기억해내기 싫은 장면이어서 내 의식이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당신의 아버지처럼 나무를 통해서 서로의 인연과 정의 얽힘을 이야기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 순간 아버지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미소를 짓고 있었겠지만 나는 아마도 침을 속으로 꿀꺽 삼키면서 빨리 그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고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모두 대구 출신이었고 대부분의 친척들이 대구나 그 근방에 살고 있었다. 덕분에 어릴 대부터 명절 때나 방학 때면 대구에 가는 일이 많았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외가가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학창 시절을 보냈던 대구는 내 고향이라고 해도 좋을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대구는 설레임만 주는 것이 아니라 악몽을 꾸게 만드는 고약한 곳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에게 거의 대부분이 친척들인 대구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는 충격적이었다. 별 연관성도 없는 대목에서 '빨갱이 김대중'이 등장했다. 막연한 연정을 품고 있던 친척 대학생 누나의 입에서도 그런 소리가 튀어나오자 나는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별 생각 없이' 튀어나오는 빨갱이 소리와 호남 비하 발언은 어린 아이의 귀에도 거슬렸다. 그때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마냥 무섭기만 했다. 외할머니는 그런 말에 반사적으로 발끈하는 나를 벌을 세우기도 했었다.
어린 아이였던 내게 대구는 고향의 푸근함과 폭력적인 언어에 대한 무서움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맛있는 떡국을 먹으면서 어느 놈을 때려잡아서 찢어서 죽여야 한다는 말이 너무 쉽게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오는 분위기가 무섭고 싫었다. 식사를 마친 후 후식으로 내어 놓은 쫀득한 곶감을 앞에 두고 예쁜 빨간 입술로 또 그런 소리를 하는 친척 누나를 보면서는 두려워서 떨었다. 초등학교 3, 4 학년 무렵부터 나는 떡국과 곶감을 이런저런 핑계로 멀리하기 시작했다. 내 무서움과 두려움과 상관없는 떡국과 곶감을 멀리하는 것으로 대구에서 들은 이야기를 잊어버리는 나름대로의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아마 그것으로 두려움을 떨치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대구에 있는 대학교로 직장을 옮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대구는 내겐 여전히 따뜻한 곳이었지만 악몽 같은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던 날 나는 같은 동네에 살던 고모네 집에 갔었다. 만약 아버지가 대구로 직장을 옮기고 우리 집이 이사를 간다면 나는 고모네에서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었다. 사촌 동생이 쓰던 방을 유심히 살펴보고 내 몸 하나 정도는 더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를 했었다. 어떻게 내 결심을 말씀드려야할 지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다행히 그 일은 없던 것이 되었고 내 고민도 자연스럽게 풀렸었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세상에 대한 분별이 생기기 시작했다. 빨갱이니 전라도 사람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지지 않고 받아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척 어른의 말에도 내가 발끈하면 분위기가 어색해져서 그런 이야기가 쉽게 다시 나오지 못하곤 헸었다. 하지만 떡국이 나오고 모여앉아서 사람들 사이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별 생각 없이' 또 그런 이야기들이 시작되곤 했었다. 나는 차려준 떡국을 한 술도 뜨지 않고 그대로 남기는 것으로 내 소심한 복수를 하곤 했었다. 이 무렵 내 심정은 수치심이었다. 이런 사람들과 피를 나누었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수치심으로 나를 자극했다. 죄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나날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대해서 분노가 생기기 시작했다. 집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떡국과 곶감을 먹지 않기 시작했다. 그냥 상징으로 시작한 거부가 생리적인 작용으로까지 이어졌는지 떡국이나 곶감을 먹으면 속이 탈이 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애꿎은 떡국과 곶감이 내 화풀이의 대상이었다.
아버지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범인은 나의 무의식이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내게 필요한 것은 정신분석이 아니라 나의 두려움과 수치심을 감싸 안아줄 한마디였다. 아버지의 책임은 아니다. 아버지도 그냥 그렇게 그곳에서 태어난 것뿐이었다. 그런 상황을 내가 견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청소년 사춘기 시절에 기득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권력의 형성과 남용에 대한 생각도 많이 했다. 두려움과 수치심과 죄의식으로 변신해온 대구와 대구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피할 수 없는 숙명 속에서 대구 사람으로 살고 있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그 모든 것과 나 자신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돌이켜보면 내 사춘기 화두의 대부분은 권력의 발생을 어떻게 하면 억제할 수 있을 것인지, 발생한 권력을 어떻게 남용하지 않을 것인지, 기득권화 된 권력을 어떻게 파괴할 것인지 하는 것들이었다.
소심한 모범생인 나는 떡국과 곶감을 먹지 않는 소심한 복수와 함께 또 다른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권력을 부정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었다. 반장일 때는 반장이 마땅히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포기하거나 태업하는 식으로 반항을 했다. 덕분에 죄 없는 같은 반 친구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집에서는 장남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동시에 의무도 실행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정당한 권력 행사도 부정하는 극단적인 아나키즘에 골몰하기도 했다. 일부러 빨갱이 행세를 하면서 도발하기도 했다. 아버지 책임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와 관련된 일에는 그것이 아무리 내가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일이라도 나서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대구와 관련된 일들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야만 내가 살 것 같았다. 수치심과 죄의식을 피하려는 생존 본능이 발휘된 것이었을 것이다.
광주에서 학살이 일어난 뒤에도 '별 생각 없이' 튀어나오는 말들을 계속 들어야만 했다. 그들의 고통이 때로는 희화화되어 또 때로는 빨갱이와 연결이 되어 같은 방식으로 회자되는 것도 지켜봐야만 했다. 여전히 '별 생각 없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수치심도 적개심도 지쳤고 연민이 느껴졌다. <또 다른 북(北)>을 보면서, 고립된 시공간 속에서 환영을 보면서 고장 난 뇌 회로를 따라 같은 이야기만 되새기는 대구의 친척들 모습이 겹쳤다. 나는 전반적으로 아버지를 좋아했지만 아버지가 숙명적으로 속해 있고 나도 반쯤은 걸쳐있던 그 반동적 상황을 견뎌내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절연을 선언할 용기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대구에서 학교를 시작했지만 일제에 항거하는 학생운동에 연루되어서 쫓겨 다니면서 인천을 거쳐서 목포에 가서야 학교를 졸업하셨다. 아버지는 4·19 혁명과 5·16 쿠데타 격변기에 시위를 주동해서 투옥되기도 했었다. 시대를 외면하지 않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행동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환경이 미웠고 그것을 떨쳐버리지 않는 (그럴 생각도 없는) 아버지가 미웠다. 그렇다고 절연을 하고 가출할 용기도 없었다. 자살을 처음으로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도 이런 더러운 상황과 숙명적으로 얽혀 있던 내 자신의 실존적인 고민 때문이었다.
사춘기 때 또 다른 소심한 장난을 했었다. 떡국과 곶감을 먹지 않는 것으로 자존심을 지키면서 내 분노를 토해낼 장치를 만든 것이었다. '스비드로가이로프'라는 단어와 '블라이슈티프트'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스비드로가이로프는 <죄와 벌>에 나오는 인물을 내 방식대로 발음한 것인데 내 마음대로 '이 비열한 놈아' 정도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정했었다. '블라이슈티프트'는 '야 이 씨발 새끼야' 정도의 강도를 갖는 것으로 정해주었다. 한 때 대구에 가면 이 단어들을 자주 사용했다. 물론 듣는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소심한 나는 그런 식으로라도 복수하면서 나 자신을 지켜내고 있었다.
대구에 갈 때마다 내 마음 속에는 온통 이런 나쁜 생각뿐이었다. 아버지가 대구의 인연을 이야기 하면서 나무 한 그루를 보여주셨을 때 내 마음이 어땠을지는 뻔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가서 객지 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이가 들면서 이런 생각들은 자연스럽게 마음속에서 사라져갔지만 나는 여전히 집에서 떡국과 곶감을 먹지 않는다. 그냥 지키고 싶은 자존심 같은 낡은 상징이 되어버렸다. 가족들은 요즘도 영문도 모르면서 명절 때면 나에게 떡국 대신 만둣국을 내어놓는다. 이미 시효가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하는 일에는 거리를 둔다. 긴 세월 동안 나를 휘감고 있던 두려움과 수치심과 분노가 아버지에게도 불똥이 튄 까닭이다.
떡국과 곶감을 다시 먹고 아버지가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울 때가 올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무를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소년의 마음을 한번쯤은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제는 아버지도 그런 내 마음을 나의 무의식의 발로라고 밀어붙이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도 아버지를 대구와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할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 싶다.
"정신과 전문의로 은퇴한 뒤 나에게 감투를 주려는 단체들이 몇 군데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은 딱 하나, 더 이상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다는 점이다. 자존심을 세워주는 그럴 듯한 자리라도 나는 명예보다는 즐거움, 책임보다는 재미를 택하면서 살기로 했다."
나의 아버지는 대체로 좋은 아버지다. 세상이 이야기하는 잣대로 봐도 그렇다. 노년에 망가지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알량한 욕망과 명예보다는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고 외치는 멋진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그 자랑스러움에 대한 수줍은 선물로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내밀하고 창피하고 불편한 내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이 글을 썼다. 얼마 전에 딸아이가 한참 동안 일기처럼 은밀하게 써놓았던 글을 때가 되면 내게 보여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내밀한 글을 보여주겠다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내가 고백하는 어설픈 나의 성장기 한 편을, 딸아이가 내게 바친 그 마음에 실어서 아버지에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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