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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 전쟁'의 그림자는 넓고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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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 전쟁'의 그림자는 넓고 짙다

[동아시아를 묻다] 大東亞와 大中華

전쟁의 이름, 이름의 전쟁

'그 전쟁'은 이름이 많다. 우선 '태평양 전쟁'이다.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면서 공식 명칭이 되었다. 가려진 것은 '대동아 전쟁'이다. 즉각 사용이 중지된, 불온한 금기어였다. 효과는 크고 오래다. 태평양이 도드라지면서 미국과의 전쟁이 부각된다. 반면으로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와의 전쟁은 경시된다. 집합적 기억도 재편된다. 진주만 공습부터 핵폭탄 투하가 또렷하다. 난징 대학살은 흐릿하다.

굴절된 기억은 착종된 역사 인식과도 직결된다. 2005년 여름 도쿄에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추모하고, 8월 15일을 맞았다. 히로시마/나가사키 기념행사는 TV로 지켜보았고, 8·15는 몸소 야스쿠니 신사에 가보았다. 이 공식 서사 속에서 패전에 대한 회한은 자연스러웠다. 옛 군복을 입고 군가를 부르는 (우익) 노인들이 애잔했다. 슬쩍 연민도 일었다. 결코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일정 납득은 되었다.

그래서 이름을 고쳐 부르기도 한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다. 1937년 중일 전쟁부터 1941년 미일 전쟁을 아우른다. '15년 전쟁'이라는 명명법도 있다.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의 패전을 불가분으로 여긴다. 일본의 침략이 한층 강조되는 편이다. 가치중립적인 이름도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다. 하지만 너무 건조하고 밋밋하다. '그 전쟁'의 복합적 성격을 전혀 담아내지 못한다.

나는 '대동아 전쟁'이 옳다고 본다. 옳다기보다는 생산적이라 함이 더 적절하겠다. 대동아는 당시 일본 정부의 공식 명칭이었다. 그래서 역사의 실상에 육박해 들어가는데 한층 부합한다. 전후 일본(과 미국)이 억압한 무의식의 심층에 가닿는 첩경이다.

돌파구를 연 쪽은 우익이었다. 아베 신조가 상징하는 강경파의 입장은 단호하다. 대동아 전쟁의 목적은 (동)아시아의 해방이었다. 서구의 압제로부터 독립과 안정을 꾀한 것이다. 당시 아시아는 온통 백인의 식민지였다. 결과적으로 졌지만, 결국은 모두 독립했다. 대동아 전쟁이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 회복을 앞당겼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모든 책임을 일본에 돌리는 것은 점령 체제가 낳은 자학사관이다. 역사인식을 바로 잡고, 전후 체제도 청산해야 한다.

우리는 즉각 '망언'으로 질타한다. 일장기도 불태운다. 전쟁에는 졌지만 그 목적은 이루었다니, '정신 승리 법'이라고 나무랄 만하다. 그러나 호응하는 여론이 절반에 이른다. 이들이 식민지 지배와 전쟁을 옹호하는 '성전(聖戰)론자'도 아니다. 지하드의 과대망상을 품은 이는 극소수이다. 다수는 불가피론자에 가깝다. 당시 세계의 행동 규범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독일과 일본만을 탓하는 것이, 역사의 실상을 가리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나도 일정 수긍한다. 일본은 책임 중 일부를 갖는다. 응당 그 몫은 가장 크고 무겁지만, 전부만도 아닌 것이다. 일본의 폭주를 낳았던, 일본의 행동을 규정했던 맥락, 즉 20세기 초의 세계 질서야말로 문제적이다. 심지어 조선조차 '대한제국'이 되려 했다. 모두가 제국을 욕망했다. 제국(주의)이 글로벌 스탠더드였다. 대일본 제국 또한 그 중 하나였던 것이다. 무도하고 무례한 근대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

물론 심란하고 곤란하다. 한일 병합도 불가피했다고 한다. 살아남기 위하여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아니었다 해도, 한반도는 러시아제국의 치하 아래 떨어졌을 것이다. 혹은 티베트, 내몽골, 신장처럼 중국의 한 성으로 복속되었을지도 모른다. 망언임에 틀림없다. 속으로 울컥한다. 하지만 실언일지언정 맹탕 허언만도 아니다. 화를 누르고 그때를 복기하노라면 전혀 가당치 않은 얘기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마냥 매도만 해서는 안 된다.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역지사지의 태도이다. 이웃애의 발현이다. 그래야 오해를 풀고 이해에 가닿을 수 있다. 이미 하루 이틀이 아니다. 억압된 트라우마는 반복하여 귀환한다. 외면이 아니라 치유를 해야 한다. 맺힌 울혈을 풀지 못하면 속병이 골병이 된다. 한 갑이 지나도록, 일본과 아시아는 화병을 키워왔다.

작금 대동아의 재평가가 일본이 또 다시 아시아 패권을 장악하려는 책동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망상은 자유다. 하지만 의도만으로 되는 일은 없다. 이미 객관적인 역량이 모자라다. 오히려 적응 지체 장애를 겪고 있다. 그래서 안쓰럽다. 중국의 (재)부상으로 주변적 지위로 되돌아가는 것에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속도가 너무 가파른 것이다. 그래서 지난날의 향수가 짙고 독하다. 게다가 중국의 굴기를 통해 가시화되고 있는 동서 반전의 세계질서는 1930~40년대 일본이 앞서 꿈꾸었던 바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온건파의) 회한이 있고, (강경파의) 시기도 있다.

대동아의 논리와 심리가 완전히 파탄난 것도 아니다. 복류하던 불만과 욕망이 간헐천처럼 분출한다. 비단 일본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혹여 미중 간의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 일본을 달군 대동아의 정서와 논리가 중국에서 지펴질 공산이 없지 않다. 즉 대동아는 과거사만도 아니다. 미래를 점검하고 전망하는 데도 진지하고 투철하게 접수할 일이다.

대동아의 논리와 심리

중일 전쟁이 미일 전쟁으로 확전되면서 '대동아'가 전면에 섰다. 영국과 미국이 대표하는 서구적 근대를 극복하는 유토피아적 기획으로 제시된 것이다. 동양을 서구적 논리로 계몽해야 한다는 게오르크 헤겔의 역사철학을 전복하려 든 것이다.

그 전위에 교토학파가 있었다. 오사카와 교토가 축이 되는 간사이 지역은 메이지 유신 이래 근대화의 중심이었던 도쿄와는 사뭇 다르다. 아시아의 바닷길로 연결된 오래된 역사의 유산이 역력한 것이다. 지금도 교토 대학의 중국학/아시아학이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함은 우연이 아니다.

교토학파에게 대동아 전쟁은 헤겔의 페르시아 전쟁과 유사했다. 동/서의 대결전이라는 중차대한 의미를 가졌다. 헤겔은 페르시아 전쟁을 서(그리스/민주정/도시 국가)가 동(페르시아/전제정/제국)에 승리하는 역사의 증거라고 보았다. 이 승전보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이 곧 역사의 '진보'였다. 이에 교토학파는 '대동아 전쟁'을 통해 서에 대한 동의 재역전을 꾀했다. 세계사 최후의 전쟁이라고 (잘못) 여겼던 것이다.

그들도 근대와 심히 불화했다. 자유주의와 척을 졌다. 자유의 이상과 실제의 괴리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자유 경쟁은 필연적으로 약육강식의 불평등을 야기한다. 그럼에도 자유의 원리에 입각한 휴머니즘을 강조한다. 커다란 모순이다. 그리하여 "내용이 없는 윤리적 이상과 권력이 횡행하는 현실 사이의 병존으로 귀결한다. 세계의 영구 평화를 가져다주는 어떠한 실질적, 도의적 힘도 갖지 못한다"고 날을 세웠다. 이러한 세계 질서는 대공황(1929년)과 함께 붕괴하고 새로운 세계 질서로 재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신세계 질서란 무엇일까? "국가도 아니고, 국가의 연합도 아닌, 또 근대적인 제국주의도 아닌 공영권 혹은 광역권이라고 할 만한 특수한 세계"였다. 또 "지리적, 역사적, 경제적인 연대성과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친근성에 기초하여, 긴밀한 정치적 통일성을 갖는 것"이 라 했다. 나아가 "주권의 질적 분할과 새로운 배분 조직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어딘가 낯익다. 반세기 후 유럽에서 출현한 유럽연합(EU)에 방불한 조숙한 지역 공동체였던 것이다.

교토학파뿐 아니다. '쇼와 연구회'에 참여한 일부 지식인들도 동아협동체를 구상했다. 이들은 강대국 간 세력 균형을 배척했다. 동시에 세계주의(아나키즘/코즈모폴리터니즘)도 아니고, 원자론적 국제연맹도 아닌 동아시아 단위의 협동체를 궁리했다. 세계는 자연과 문화의 유기적 통합으로 형성된 몇 개의 지역으로 분화한다고 전망했다.

이념적으로는 차이가 있었다. 교토학파가 우파에 가깝다면, 쇼와 연구회(의 일부)는 좌파에 근접했다. 우파들은 개인주의/자유주의를 문제로 삼았고, 좌파들은 민족주의/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했다. 그리하여 대동아 전쟁이 시간적으로는 자본주의를 타개하고, 공간적으로는 대동아의 통일을 실현하리라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오류였다. 큰 오판이었다. 그럼에도 근대에 압도당하지 않는 패기가 있었다. 혹은 근대에 대항코자 하는 결기가 있었다. 가상한 구석이 없지 않다. 이런 기상이 꺾이고 민주주의를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자유/혁신 세력이 지성계의 주류가 된 것이 '전후'이다. 핵폭탄 투하라는 전대미문의 충격 이후의 사태이다. 그리하여 근대로부터의 일탈을 반성하고, 민주를 천주처럼 떠받드는 '전향'이 대거 일어난다. 전후 학계의 천황으로 등극한 마루야마 마사오의 유명한 논설 제목이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이다(한국에서는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김석근 옮김, 한길사 펴냄)의 1장으로 번역되었다.). 정상 궤도에서 이탈한 일본을 뼈저리게 반성함으로써, 근대에 투철할 것임을 결연히 다짐했다.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다. 대동아의 실제가 그 화려하고 장대한 수사와 일치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현실은 가혹한 폭력을 수반한 제국주의적 지배의 확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 웅대한 기획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지배와 착취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래서 서구의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던졌던 일갈을 되돌려 줄 수도 있다. "내용이 없는 윤리적 이상과 권력이 횡행하는 현실의 병존"으로 귀착된 것이다. 반복과 반동에 그쳤다.

왜인가? 단도직입, 근대에 내재되어 있던 폭력성을 확대 재생산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근대 초극의 기획이 부정해야 할 '패도'의 문화를 답습하고 말았다. 지양이 없는 미완의 변증법으로 사산되었다는, 제법 학술적인 어투로 고쳐 말할 수도 있겠다.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오키나와의 일본 기지를 폭격하는 미군 전투기. ⓒwikipedia.org

대동아와 대중화

교토학파는 헤겔에 포박되어 있었지만, 흥미롭기로는 100년을 앞선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더하다.

라이프니츠 또한 과학, 특히 수학과 군사력에서 중국이 유럽에 뒤진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그 평가가 사뭇 대조적이다. 동양을 폄하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던 것이다. 그는 군사력의 상대적 약함이야말로 문명도가 높음을 방증한다고 말했다. 즉 전쟁의 억제를 중국의 지혜로 꼽았다. 칼을 찬 중세의 기사도 사회에서 벗어나던 차, 붓을 든 선비들의 나라가 이상적으로 보였을 법하다.

헌데 이러한 동서 문명 비교는 20세기의 쑨원도 공유하던 바였다. 그는 무력과 공리의 유럽 문화를 '패도의 문화'로, 인의도덕의 동방 문화를 '왕도의 문화'라고 했다. 지나친 도식과 고정관념은 사절해야겠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낭설 또한 아닐 것이다. 유학으로 말미암은 문약(文弱)에 대한 탄식은 동아시아 도처에서 일었다. 숭무(崇武) 기운이 승했고, 무단(武斷) 통치와 선군(先軍) 정치가 20세기를 지배했다. 전국(戰國) 시대였다.

흥미로운 것은 서구 근대와 대비되는 동방적 세계상의 원리를 쑨원만 제기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화민국이 '오족공화(五族共和)'를 표방했다면, 일본이 만든 만주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지향했다. 그 속셈과는 무관하게 동방의 유토피아를 지향했던 만주국은 중국적 세계상에 근접했던 것이다.

일본 또한 동아, 대동아로 확장되면서 그 정당성을 역설해야 했다. 서구 제국주의와의 차이를 강조하면 할수록, 중국적 세계의 원리와 가까워져 가는 역설이 일었다. 탈중화의 여로가 재중화로 굽어간 것이다. 영미식 자본주의도, 소련식 공산주의도 아닌 대동아 공영권은 점점 더 대중화권을 닮아갔다.

오키나와와 홋카이도는 복속하고 대만과 조선은 식민지로 삼았지만 만주국은 위성국으로 두었다. 그리고 동남아 국가들은 독립을 인정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일본이 대동아의 중원이되, 개별적 정치체의 자주권은 인정하겠다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유사 중화 질서에 근사하다. 즉 (동)아시아에서 행동하며 근대와 각을 세우면 세울수록 중화 세계의 발상과 개념들에 속박되어 간 것이다.

유별난 현상도 아니었다. 아니 매우 익숙한 풍경이다. 몽골족도, 만주족도 그러했다. 왜족도 그들처럼 중원의 심장에 다가갈수록 중화의 논리에 젖어든 것이다. 즉 대륙에서 면면히 전개되었던 왕조 교체의 대서사와 방불했다. 20세기를 유별나게 취급하는 근대의 편향을 거둔다면,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이다. 뿐인가. 중일 전쟁의 이면에 국공 내전이 잠복했고, 그 최후의 승자가 공산당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신세기 삼국지'이기도 했다. 동경(東京)에서부터 발기한 일본, 남경(南京)을 근거지로 삼은 국민당 그리고 연안으로 물러나 호시탐탐하던 공산당. 이 세 세력이 북경(北京)을 쟁취하고자 일대 경합을 벌인 것이다.

애초 중화라는 관념부터 한족만의 배타적인 소유물이 아니다. 동아시아의 공유재였다. 그래서 소중화도 떳떳하게 자부할 수 있었다. 천황이 자금성에 눌러앉아 대동 세계를 선포하는 역사적 상상력을 가동해 볼 일이다. 그들이 끝내 국/공으로 분화되고 남/북으로 쪼개진 한족의 도전을 뿌리치고 소수 민족과 약소 민족의 동의를 구해 공존과 공영의 공공재를 제공했다면, 천하는 다시 태평을 회복했을지 모른다. 물론 한낱 백일몽에 그친 불발탄이었다. 실력이 부족하고, 베품이 넉넉지 않고, 덕이 모자랐던 것이다. 여전히 중화제국에 미치지 못하고, 근대 제국주의에 그쳤던 것이다. 중원은 결국 공산당이 접수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제국에 가장 가까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탈아입구, 즉 탈중화의 지향이 기어이 재중화로 회귀하는 이 강력한 관성이야말로 집합적 화두로 삼을 만하다. 단지 유학적 세계관을 공유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관념의 모험'만으로는 세계가 지속되지 않는다. 시행착오를 겪어낸 실천론이라 해야 온당하다. 누천 년 동방의 역사가 축적한 '합리적 선택'의 귀결이자 진화의 소산이다. 그래야 그 놀라운 복원력과 지속성을 설명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비대칭성은 항상적이다. 중원의 압도적 대국과 주변의 소국들이 존재하는 구조가 행위자 간 게임의 법칙을 규정한다. 그 게임이 도달한 최적의 균형 상태가 중화 질서였다 하겠다. 즉 사대와 사소의 원리를 설파한 <맹자>나 <노자>도 깨우쳐 읽되, 이를 설명하는 방편으로 게임 이론도 요긴하게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한학(漢學)과 과학(science)은 지나치게 서로를 소 닭 보듯 한다. 동/서/고/금이 갈래로 찢긴 학문의 분단 체제가 안타깝다. 동방 고전과 현대 과학의 해후는 '오래된 미래'의 첩경일 것이다.

포스트-대동아

대동아에 투신한 이들의 뒷담화를 일부만 풀어둔다. 대동아 전쟁이 한창일 때 대아세아주의협회라는 민간조직이 왕성하게 활동했다. 일본인 뿐 아니라, 화교(華僑), 인교(印僑), 이슬람 상인들도 참여했다. 여기에 동참한 이들은 전범의 혐의 탓에 전후 공직에 나서기 힘들었다. 그래서 초야에서 세계 연방 운동을 펼쳤다. 미국과 영국, 소련이 주도하는 국제연합(유엔)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서구가 비서구를 지배하는 근대의 지속이 유엔이라 여긴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일본-아랍 협회를 꾸렸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의 해방 운동을 지원했다. 1984년 알제리 혁명 30주년 기념식에 특사도 파견했다. 1986년에는 알제리에서 훈장도 받았다. 즉 '대동아 정신'을 계승하여, 일생을 아시아와 비서구의 해방에 헌신했던 것이다. 탈식민주의를 읊는 이들은 프란츠 파농을 열심히 읽고 즐겨 인용한다. 헌데 그 파농의 후예들이 대동아의 후예에게 훈장을 주었던 사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실로 대동아의 논리와 심리는 간단치가 않다. 냉전기 아시아-아프리카 운동, 비동맹운동, 제3세계운동 또한 대동아와 전혀 무관하다고 하기 힘들 것이다.

이 흐름들이 대동아의 이념을 계승했다면, 그 뼈대를 이어받은 동향도 있다. 일본의 동남아 진출과 개발이 그러하다. 명목은 반공 진영 구축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원조와 자본을 활용했다. 하지만 발상 자체는 대동아 공영권의 유산이다. 당시에는 (유럽 자본과 경쟁했던) 화교 자본을 이용하려 했고, '남양(南洋) 개발'이라고 불렀다.

비단 동남아에 그치지도 않았다. 이집트의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에게 아스완 댐 건설을 제안한 이도 대아세아주의협회 출신이었다. 압록강의 수풍 댐 건설 경험이 있는 일본의 기술력을 활용하여 앵글로색슨 제국주의에 맞서자고 했던 것이다. 즉 경제 협력과 건설 지원을 취한 대동아의 변형이었다.

전후 일본에서 세계로 뻗어나간 기업가들 중에도 대동아의 후신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이 1990년대 이래 동아시아 경제 공동체의 밑바탕을 닦은 셈이다. 대동아의 그림자는 길고도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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