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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 알고 보니 '원조'는 따로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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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도올 김용옥, 알고 보니 '원조'는 따로 있었네!

[이명현의 '사이홀릭'] 김용준의 <사람의 과학>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마치 여러 번 만났던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사람이 있다. 직접 배운 적은 없지만 아미 오래도록 그 사람의 강의를 들었던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과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은 환각마저 불러일으키게 하는 사람이 있다. 늘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과학>(통나무 펴냄)을 쓴 김용준이 내겐 그런 사람 중 한명이다.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김용옥의 강의를 들으러 갔다가 그의 큰 형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의 전공 수업은 곧잘 빼먹으면서도 다른 과나 남의 학교의 소문난 강의는 들으러 다니던 시절이었다. 몇 차례 경험했던 김용옥의 수업 중에 에피소드처럼 등장하던 그의 큰형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김용옥에게 큰 지적인 자극을 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큰 형에 대한 김용옥의 사랑과 질투와 존경과 원망이 뒤섞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저 약간의 호기심이 발동했었지만 그뿐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강의를 준비하면서 한 달 동안 책을 집중해서 읽는 시간을 가졌었다. 한동안 우리나라를 떠나 있었으니 우리말로 강의를 하려면 읽기와 쓰기와 말하기를 좀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강의에 필요할 것 같은 천문학 책도 몇 권 골랐지만 대부분의 책은 천문학과 크게 관련이 없는 책들로 골랐었다. 주로 제목과 서문과 목차를 본 후 무작위로 책의 서너 곳을 펼쳐서 읽어보고 마음에 들면 고르는 식이었다. 서점에서 50권 정도의 책을 골라서 샀다.

▲ <사람의 과학>(김용준 지음, 통나무 펴냄). ⓒ통나무
그 책들 중 한 권이 <사람의 과학>이었다. 제목을 보고 책을 골라서 들고 목차를 보는데 '나의 큰형, 김용준'이라는 제목을 단 김용옥이 쓴 긴 서문이 눈에 들어왔다. 서문은 무려 54쪽까지 이어졌다. 김용준이 이런 사람이었구나, 그러면서 그냥 담담하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큰 배낭에 책을 잔뜩 넣어서 집에 돌아와서 몇 권의 책을 동시에 읽기 시작했다. 침대 옆에 한 권, 거실에 한 권, 식탁에 한 권, 이렇게 집 여기저기에 책들을 널어놓고 마음이 가는대로 읽었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미 여러 권의 책을 읽은 후에 <사람의 과학>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숨에 읽혔다. 앉은 자리에서 금방 다 읽어버릴 것 같은 추세였다. 그런데 책을 읽는 동안 생각이 많아지지 시작했다. 한 쪽을 읽자 서너 가지 생각이 치고 들어왔다. 한 문장을 읽고 나면 그만큼의 생각이 또 치고 들어왔다. 한 달 내내 조금씩 달팽이 걸음처럼 <사람의 과학>을 읽었다. 그러는 사이 '김용준'이라는 사람이 내 마음을 깊고 넓게 염색시키고 있었다.

"내가 오늘까지도 집회벽을 버리지 않는 것, 어디에서든지 어느 때든지 주변의 사람들을 모아 가르치고 같이 토론하며 공부하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내가 남다른 명 강의자로서 명성을 휘날리게 된 것은 사실 알고 보면 모두 큰형 흉내 내기 소꿉장난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맹모삼천이라는 말이 결코 고사 속의 한 구절이 아닐 것이다."

<사람의 과학>을 읽고 나도 김용옥이 서문에 쓴 그대로 '김용준 흉내 내기'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천문학 전공과 교양 강의를 하는데 유독 '사람'이 강조된 커리큘럼을 짜려고 노력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의 그늘 속에 묻혀서 나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채 '사람'이라는 말을 남발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관점과 연륜을 전혀 따라잡을 수 없었으니 흉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시점에서 내가 <사람의 과학>을 우연히 만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흉내라도 낼 수 있는 대상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과학은 분명 문명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행위다. 그런데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과학이 문명을 뛰어넘는 어떤 신적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허나 이제 인간은 과학에 대하여 자신의 인간 다음을 주장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학 그 자체의 의미를 깊게 파악해야 한다."

박사학위를 갓 마친 과학자에게 꼭 필요한 말인 것 같다. <사람의 과학>을 다시 읽다보니 이 부분을 접어두었었다. 당시의 나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였을 것이고 나도 이에 공감했었던 모양이다. 과학은 인류가 발명한 사고체계 중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과학은 과학자들이 수행하는 것이고, 그들은 종종 과학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으로 만들어버리는 우를 범하곤 한다. 종교가 걸어온 실패와 파멸의 길을 스스로 가려는 관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과학>에 실린 과학에 대한 세밀하면서도 비판적인 에세이들은 과학도 '문명' 속의 존재라는 지극히 평범한 자각과 성찰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과학의 의미를 잘 인식하고 파악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과학이 종교의 길을 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원칙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과학의 역사성이다. 물론 오늘날 과학철학 분야에서 거론되고 있는 논쟁을 여기서 문제 삼으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연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관찰의 이론 의존성을 무시하고서는 자연현상에 대한 이론의 변천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관찰의 이론 의존성에 대한 시비도 그렇게 간단히 처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오늘의 과학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은 과학이론의 변천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그 해결을 모색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만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사람의 과학>을 통해서 김용준이 강조하고 있는 또 다른 덕목은 과학의 인식론적 한계에 대한 부분이다. 과학은 모형을 세우고 그 모형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발전한다. 그런데 그 모형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들의 인식의 범위 안에서 결정되고 발명되는 것이니 그 한계를 인식하자는 것이다.

당연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현대 과학에서 아주 중요한 논쟁 중 하나인 문제다. 실체가 있는 자연의 속성을 모형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뇌가 구성하는 세계를 우리가 발명한 모형을 통해서 확인하는, 되돌림하는 인식 체계 속에 우리가 갇혀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그 자체로서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과학자들이 모형 자체를 숭배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이콥 브로노프스키의 말대로 과학이란 우리가 만나고 경험하는 세계를 기술하는 언어이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그 언어는 인간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과학이 없이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두절되고 만다. 어떤 의미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만이 아니라 모든 삼라만상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없어지고 말 것이다. 서로서로 오고감이 없는 세계란 암흑일 따름이다."

<사람의 과학>에서는 문화로서의 과학이 강조되고 있다. 문화의 원천은 커뮤니케이션일 테니 과학도 마땅히 그 바탕 위에서 소통되어야할 것이다. 요즘 과학문화라는 말이 유행이다. 말뿐이 아니라 행동하는 과학문화에 대한 성찰이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책은 김용준이 투고했던 글들을 모아놓은 에세이집이다.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의도로 쓴 글들 사이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의 글들은 마치 휘리릭 써내려간 전작처럼 큰 맥을 따라 흘러가는 강 같았다. 나는 그의 강을 따라 이리 저리 오가면서 때로는 강가에 서서 때로는 그 강물 속에 몸을 던지면서 그의 책을 즐겼다.

그의 삶의 무게가 더해져서 가속된 그의 에세이들은 더 큰 충격과 감동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그의 글은 가끔씩은 고답적이고 따분해 보이지만 김용준의 진정성은 그 모든 것들을 덮어버리기에 충분한 진폭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과학을 문화와 문명 속의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과학 모형의 인식론적 한계를 지적하는 부분은 현대 과학이 꼭 받아들여야만 하는 필수요소일 것이다. 과학을 커뮤니케이션으로 파악한 것도 무척이나 현대적이다. <사람의 과학>은 현대 과학이 자각하고 성찰해야만 하는 많은 요소들을 이야기한다는 현대성을 지니고 있다.

나는 여전히 만난 적 없는 김용준의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사람의 과학>에서 보여준 그의 삶의 철학과 과학에 대한 태도에는 대부분 공감한다. 만난 적 없는 그를 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공상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의 정신세계의 뿌리를 구성하고 있는 기독교적 윤리관이나 세계관에는 결코 찬성할 수가 없다. 그것의 성찰의 결과가 이 책 속에 나타난 휴머니즘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과학>에서 그가 견지한 과학에 대한 태도를 그 자신이 정작 기독교에도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용준이 그런 시도를 하거나 했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결국 허망한 바람일 것이다. 기독교는 그가 살아온 원천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의 자산이자 그가 결코 넘을 수 없는 인식의 벽 같은 한계일 것이다. 그래도 그가 보여준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는 박수를 보낸다. <사람의 과학>을 이끌고 가는 휴머니즘에는 진한 공감을 보낸다.

"그 쪼끄만 세계 속에서 하루 종일 뒹굴면서 과학은 '싸이언스'라고 외치고 또 지금도 열심히 독서 토론을 벌이고 있는 인간 김용준의 생애야말로, 어쩌면 내가 지금 이제 와서 생물학도로서의 마지막 도박을 한의학에 걸게 된 만용의 원천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 도올의 김용준 흉내 내기는 계속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과학>이 있는 한 나는 매일 김용준을 만나고 산다. 그의 흉내를 내면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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