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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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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번역'이다!

[이권우의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윤여일의 <여행의 사고>

<호모 부커스>(그린비 펴냄), <죽도록 책만 읽는>(연암서가 펴냄)의 도서평론가 이권우가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는 여행기와 자서전, 즉 바깥으로 혹은 자기 안으로 여행을 떠난 이들의 기록을 다룹니다. 4주에 한 번 게재됩니다. <편집자>

지식인은 왜 여행을 떠날까? 지성사에서 여행이 한 사람의 학문세계에 결정적 전환이 되었던 사례는 수두룩하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이나 다윈의 비글호 항해,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의 브라질 열대지역 여행을 떠올리면 된다.

얼핏 보면 이해되지 않는다. 공부한다는 것은 정주의 행위일 가능성이 높다. 깊이 뿌리 내리고 한세월 지켜보아야 학문 성과라는 열매를 맺을 법하다. 그런데 안 그렇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그들이 쓴 여행기다. 절망 속에 방황하거나 낯선 문명세계에 뛰어들어야 비로소 큰 깨달음을 얻는 일이 벌어진다. 어쩌면 고여 있다 흘러 다니다 다시 고여야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게 공부인 모양이다.

▲ <여행의 사고, 셋 : 사상의 흔적을 좇다-중국·일본>(윤여일 지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윤여일의 <여행의 사고>(전 3권, 돌베개 펴냄)를 펼쳐본 이유는, 지식인이 여행 다니는 이유를 재차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한꺼번에 기행서를 세권이나 펴냈는데, 관심사가 뚜렷이 정해진 마당이라 세 번째 책인 '사상의 흔적을 좇다-중국·일본 편'만 보았다. 지은이는 이른바 동아시아학을 공부한다. 자신의 지적 화두를 내걸고 떠난 여행기를 봐야 궁금증이 풀어지리라 여겼다.

서둘러 답을 말하자면, 지식인에게 여행은 번역이구나 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행기 곳곳에서 번역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문맥마다 서로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으나, 결국 지적인 여행을 한마디로 정의해준다 싶었다.

"행간이 많고 품이 넓은 원작을 번역할 때 좋은 문구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까닭은 외국어 능력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번역자가 모어의 풍부한 가능성을 충분히 체득하지 못한 까닭에 문장을 성숙하게 형상화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괴테는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언어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비슷한 의미에서 외부의 맥락과 부딪히는 와중에 내가 모어 사회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러면 상대의 사회와 비교할 수 있는 것처럼 모어 사회의 상황을 내가 대변하듯이 말해도 되는지, 자신의 모어 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그 속으로 진입할 수 있는지가 물음으로 부상한다. 이때 상대의 사회와 모어 사회 사이에서 외관의 유사함에 의지하기를 거부하면서도 접점을 발견하려면 또 다른 번역 능력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 쓴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느낀 바를 설명한 대목이지만,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하면 이보다 좋은 여행론이 없을 듯싶다. 안에 있을 적에는 잘 알고 있다 싶으나 바깥에 나가야 비로소 깊이 알지 못했다고 깨닫는 법이다. 더욱이 가서 본 충격을 소화해내고 이를 설명하는 과정은 복잡하다. 대체로 여행을 하면 비교해 서술하기 마련인데, 그럴 때 과연 여행지의 독자성을 잘 이해했는지 의문이 드는데다 비교하는 자신의 문화에 정통한가 하는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번역자가 느낄 두려움과 망설임을 여행자도 느끼는 법이다.

그래서 "원작의 생명력을 보존하려면 번역자는 그 원작을 낳은 토양을 지반째 옮겨야 하지만, 결국 번역에서 가필하거나 새로 쓰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번역은 원문이 지니는 가능성의 폭 안에서 그 생명력을 되살려내는 금욕적 실천이다"라는 말을 귀담아 듣게 된다. 여행을 하면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고 겪고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 무엇인가를 언어로 옮기는 일은 상당히 지난하고 위험하다. 자칫 여행기가 감상의 범람으로 넘치고 마는 일이 벌어진다. 진짜 여행기는 '금욕'의 수사학이어야만 한다. 함부로 말하지 않되, 그곳의 활력을 전하는 글은 쓰기 어렵다. 더욱이 해석하는 대목에서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번역만큼 어려운 것이 여행기 쓰기란 말이다.

이런 성찰이 있었기에 지은이는 여행기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집요하게 고민한다. 책 제목이 왜 <여행의 사고>인지 알 수 있을 터다. 지은이는 여행기를 한 잡지에 연재하기로 하면서 "타지의 사건과 맥락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아울러 내 체험에서 독자들과 공유할 만한 요소를 끄집어낸다는 '이중의 번역'에 도전"하겠노라 다짐한다. 옳거니! 내가 제대로 읽었구나, 하며 무릎을 쳤다. 거듭 말하거니와, 여행은 번역인 셈이다. 지은이가 정리해 놓은 여행기의 과제를 볼라치면 이렇다.

첫째는 어떻게 체험을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했단다. 여행기가 빠지기 쉬운 감상의 나열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사유의 실마리가 된 경험의 공유에 신경 써야 한다는 말이다. 두 번째는 보편주의와 문화 상대주의 사이에서 사고를 벼려내야 한단다. 경험의 고유성을 살리면서도 타문화와 맺는 의미 있는 접촉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세 번째는 타자성에 대한 물음이다. "타자는 쉽사리 만날 수 없다는 태도로써만 만날 수 있다"라는 깨달음을 담아야 한다는 것.

이 여행기는 지은이가 사표로 삼는 지식인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일본의 다케우치 요시미와 중국의 쑨거를 연구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두 지식인이 루쉰 연구가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지은이는 루쉰이라는 은하계에서 지적 우주여행을 하는 셈이다. 그러다보니 이 책의 고갱이는 아무래도 다케우치의 삶과 사상을 쫓는 '한 사상가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 도쿄'와 쑨거와 맺은 인연을 담담하게 말하는 '베이징, 번역에서 여행을 사고하다'이다.

다케우치는 1910년생으로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지나 문학과를 졸업했다. 1937년부터 2년간 베이징에서 유학했으며, 1943년 육군에 소집되어 중국에서 패전을 맞이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중국의 모임'을 조직했고, 1977년 <루쉰 문집> 번역에 매달리다 죽었다. 이력에서 알 수 있다시피 다케우치는 일본의 내로라하는 중국 및 루쉰 전문가다. 지은이는 바로 이 지식인에게서 여행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낸다. 다케우치가 스물두 살에 중국을 여행하고 온 소감에 대해 "베이징이라는 도시의 자연에도 감탄한 바가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거기서 사는 사람들이 저 자신과 몹시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던 것입니다. 당시 우리는 대학의 지나 문학과에 적을 두고 있어도 곤란했던 것이, 중국 대륙에 우리와 같은 인간이 실제로 살고 있다는 이미지는 당최 떠오르지 않았죠"라 했단다. 여행을 통해 비로소 중국의 실체를 만났다는 말이다. 그 충격은 당연히 어떻게 중국을 이해하고 연구해야 하나로 확산했다.

다케우치는 나중에 베이징으로 2년간 유학을 다녀왔다. 그러나 베이징에는 중국 지식인들이 없었다. 일본이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다케우치의 유학 생활을 "타국에서 무언가 새로운 지식을 익히는 기간이었다기보다 자신의 깊은 고독을 응시하고 거기서 자신이 살아가야할 바를 좀 더 뚜렷한 형태로 길어 올렸던 시간"이라 평가하는 이유다. 베이징 유학에서 돌아온 다음 다케우치는 이른바 지나학과 일대 대결에 나선다. 여기서 지나학은 "중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지식'으로 바꿔놓고 중국을 '과학'의 대상으로 삼는" 학문 풍토를 일컫는다. 결국 다케우치도 여행과 유학을 통해 학문의 대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래서 지은이는 말한다.

"나는 주목한다. 그는 베이징을 여행하고 나서 그 체험을 중국 연구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베이징에서 그는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과 닮은 사람들을 만났다. 혹은 실제로 살아가는, 자신의 고뇌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자 했다. 그의 모습은 지역 연구자인 내게 연구와 아울러 여행의 의미마저 다시 생각하도록 이끈다."

무릇 지식인에게 여행이란 추상에서 구체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지식이란 어차피 회색을 띤 이론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푸른 생명의 나무는 없다. 그러니, 박차고 나가 생명의 나무를 찾으려 할 수밖에. 물론 구체성으로서 여행은 다시 추상으로서 여행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두 범주의 충돌에서 우리는 특수성이라는 빛나는 대목을 만나게 된다. 여행기가 결국 문학의 한 갈래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줄곧 번역과 여행의 유사성을 말하던 지은이는 쑨거를 만나 돌아오면서 그 두 가지와 학문하기에 필요한 정신이 일치함을 토로하는 바. "선생의 사유를 어떻게 나의 사회 속으로 번역할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답할 수 있을 때까지 이 한 사람을 향한 나의 여행은 끝나지 않는다"라고 한다.

이 지점에서 지식인이 왜 여행을 하는지 알고 싶었던 호기심이 충족된다. 결국 지식인에게는 여행 그 자체가 이미 학문인 셈이다. 세상 무엇이 공부 아닌 것 있겠는가만은 여행이 곧 공부라는 깨달음은 울림이 크다. 내 것으로 나와 다른 것을 만나지만, 다른 것 때문에 내 것의 내용이 변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왜 여행이 곧 공부인지 다음처럼 명토 박는다.

"자기 체험을 소재로 삼아 거기서 생각의 자원을 건져내는 장이라는 의미에서 학문과 여행은 공동의 토대를 지닌다. 체험에 육박하지 못하고 감정으로 고양되지 못하는 학문과 여행은 생명력을 갖지 못한다. 대신 날것의 체험과 감정이라면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없다. 그리하여 자칫 지식과 개념에 걸러질 수 있는 개체의 체험과 감정을 소중히 다루되, 사변적 언어로 그 체험과 감정을 정제하지 않고 개체가 지닌 개성을 훼손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표현을 일궈내야 한다. 바로 이 여행이 내게 안기는 사고의 실험이자 여행이 공부로서의 의미를 갖는 이유다."

역시 독자성의 세계는 상반된 가치가 공존하는 데서 비롯하는 긴장관계에 깃들어 있는 모양이다. 날것과 익은 것의 공존, 개인적인 것과 소통 가능한 것의 공존을 익히려면 여행하고 그 기록을 글로 남기는 훈련을 해야겠다. 자고로 공부가 여행이고, 여행이 공부라는 말을 가슴에 새겨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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