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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그랬다. "개천에서 용 날 생각 하지도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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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그랬다. "개천에서 용 날 생각 하지도 마!"

[프레시안 books] 아네트 라루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

1.

불평등한 어린 시절.

제목을 맨 처음 접하고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남루한 옷을 입은 꼬질꼬질한 얼굴의 어린 아이가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는 장면이었다. 똑같이 잘못해도 못 살면 더 야단을 맞을 수밖에 없는 현실. 그래서 누군가는 어린 시절을 불평등한 대접을 받으며 보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안쓰러움과 암담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적어도 어린 시절만큼은 누구나 소중하게 대접받으며 자라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는 걸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더 밝힌다는 것인가. 부제는 더하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불평등의 대물림'. 리얼리즘 영화를 보고 싶지 않은 것처럼, 암울한 교육적 현실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영어 제목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Unequal Childhoods. 아, 그 책이구나! 수년전 미국에 잠시 머무를 때, 교수법 좋다는 몇몇 강의를 몇 번 청강한 적이 있었다. 그 가운데 단연 뛰어난 수업이 사회학개론이었는데, 는 그 때 사용된 부교재였다. 담당교수는 대중조작이나 인종 학살 등의 사회적인 문제와 함께 어린 시절의 양육 문제를 다루었는데, 이 책은 자신의 교육 경험을 성찰한다는 목적 하에 사용된 책이었다.

막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들은 자신의 경험을 이 책의 사례와 비교해 가면서 토론에 손쉽게 참여했다. "나는 중산층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부모님은 상당히 노동 계층적으로 양육했던 것 같다", "부모님이 이혼해서 엄청나게 단절된 경험을 한 경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부모님이 말을 안 하는 경우는 어디에 속하는가?"등등. 그 과정 속에서 학생들은 자신을 하나의 '경우의 수'로 삼아 "나의 경험이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에 대해 탐색해갔다. 담당교수는 그런 다양한 사례에 대하여 사회학적 차원에서 진단하고 한계 역시 찬찬히 짚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책이 교수와 학생을 매개한다는 점이었다. 대개 우리나라에서 책은 지식을 집적해 놓은 것, 진리를 담고 있는 것, 그래서 시험 문제가 출제되는 곳으로 여겨진다. 교사나 교수는 책의 순서에 따라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책의 내용을 더 잘 알려주는 존재가 '가르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그때 청강했던 '추천할만한 수업' 대부분에서, 책은 읽어가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었다. 교수들은 그런 학생의 상태를 진단하고, 해석하고, 더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교수는 학생들이 해석한 내용을 개념화하고, 그 개념이 이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런 방식으로 학생의 자기 이해-세계 이해가 확장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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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평등한 어린 시절>(아네트 라루 지음, 박상은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에코리브르
<불평등한 어린 시절>(아네트 라루 지음, 박상은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은 그런 수업에 정확히 들어맞는 책이었다. 열두 가족의 이야기를 생생히 풀어놓으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해석과 범주화를 친절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흑인과 백인, 중산층과 노동 계층, 빈곤층으로 구획되어 진행된 심층적 인터뷰와 참여관찰은 독자의 몰입을 쉽게 유도한다. 이런 내용을 보자.

거실에 있던 스펜서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만! 그만해! 저리 가!" 동생 샘이 울기 시작했다. (…) 거실로 걸어온 엄마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스펜서는 "얘가 자꾸 날 따라다니잖아요!"라고 대답했다. 탈링거 부인은 화가 난 목소리로 "동생이 좀 따라다닐 수도 있지." (…) (108쪽)

어느 집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충실하게 기술된다. 아이들의 신체적 발달 상태와 부모의 직업 및 외모, 살림살이에 이르기까지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로 되는 모든 부분에 대한 충분한 묘사로, 독자들은 이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지를 선명하게 그려보게 된다. 한국의 독자도 그러하니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미국의 대학생들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아, 우리집은 스펜서보다는 잘 살았어, 마셜네보다 엄마가 착했지, 내가 좀 더 주장이 강했어…' 열두 명의 아이들이 어떻게 나름대로의 자아를 형성해가면서 유년기를 보내는지를 그림처럼 생생히 보여주고, 여기에 자신의 경험을 대입하여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는 훌륭한 문화기술서(ethnography)인 것이다.

2.

그렇게 이 책의 사례들에 자신을 대입해보고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한마디로 '나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존재이다'라는, 다소 슬프고 냉혹한 현실이다. 흑인 소년 해럴드는 백인 중산층의 개릿처럼 축구와 야구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키워졌다면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웬디가 중산층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난독증 등의 문제를 집에서 적극적으로 해결해 유급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 그러니 나 또한 그렇겠구나 하는. 다시 말해 나는 내 삶의 주체거나, 노력하면 뭐든 이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다. 그런 막연한 낙관과는 반대로, '나는 내가 구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노력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구조적 현실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구조를 만드는 변인으로 많은 학자들은 인종-성-계급을 꼽는다. 어떤 인종으로, 어떤 성별로, 그리고 어떤 계급으로 태어났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론이나 학자로 갈 것도 없이, '부자는 대물림'이라는 속담이 이미 이런 현실 인식이 상식임을 알려준다. 흑인-여성-빈곤 계급은 백인-남성-상층 계급과 인생의 트랙 자체가 다르다.

교육사회학자들은 여기에 학교 변수를 더하여, 학교가 계급의 재생산과 상당히 깊은 관계가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학교가 독자적인 변인으로 작용하여 개룡남(개천에서 용 난 남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제한다는 것이다. 학교는 상층 계급의 자녀가 다시 상층 계급을 형성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지, 하층 계급이 학교를 통해 상층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통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학자들에 따라 그 이유는 자본주의적 지배 방식이나 문화자본 등 다양하게 제시되었지만, 결론은 한가지였다. "학교는 계급 상승과 같은 사회이동의 통로가 아니라, 기존의 사회 계급을 재생산한다"는 것.

저자 아네트 라루는 초점을 학교에서 가정으로 이동시킨다. 가정에서의 양육이 어떻게 계급-인종적으로 아이들의 습성이나 자아 존중감을 형성하는지를 밝힌다. 열두 가족에 대한 면밀한 연구의 결과는, 계급이 인종을 압도한다는 점이다. 흑인 중산층 부모는 백인 하층 부모와 비교도 되지 않는 경제적-지적 환경을 아이에게 제공한다. 경제적 계급이 결정 변수이다. 그러면 어떻게 다른가? 라루는 그것을 '집중 양육'과 '자연적 성장'으로 구분한다. 중산층은 축구나 클럽 활동 등 다양한 인위적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의 환경을 집중적으로 만들어주고, 아이를 중심으로 부모의 생활을 설계한다. 반면 경제적 하층 부모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커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동네 아이들끼리 모여 노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이들과 부모의 생활은 거의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더구나 아이들과의 대화는 이런 차이를 가속화한다. 중산층 부모는 아이들의 학교 생활을 잘 알고 있고, 적절하게 개입하여 성과를 낸다. 아이큐(IQ) 검사 결과가 좋지 않으면 사설 검사기관에 재검사를 받도록 해서 영재 프로그램에 등록시킨다. 아이가 느리면, 그 특수성을 계속 설득하여 교사의 태도를 변화시킨다. 아이들은 이런 과정에 작동하는 '권리의식'을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내면화한다. 누구를 만나건 당당하게 협상할 수 있는 태도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하층 부모는 학교를 전문적이며 다소는 두려운 기관으로 인식한다. 학교에 대해 복종적이며, 교사의 전문성을 인정하지만, 학교가 가지고 있는 편견에 대해 속으로는 분노하고, 체벌을 하는 부모들은 어쩌면 자신들을 아동학대로 고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에게 학교생활이 일임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편안함을 느끼지만 학교에서의 문제를 집안 차원에서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위계적인 관계맺음 방식은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언어, 지시적인 대화 속에서 아이들은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게 된다.

이것이 아이들에게 사회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층 부모가 중산층 부모의 양육을 따라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중산층 부모뿐 아니라 하층 부모 역시 '자신이 보기에 아이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양육'방식을 선택한다. 하층의 부모라고 해서 한탄만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방과 후 활동이 많은 중산층의 아이들에 대해 "안쓰럽다"고 연민을 보내며,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아야 한다고 여긴다.

문제는 각 계급마다의 '자연스러운 선택'이 진학이나 취업 담당자 등 "기관의 문지기"들의 "가치 부여 방식"(433쪽)에 의해 다른 중요성을 부여받게 된다는 점이다. 중산층 아이들은 자존감과 협상력이 높은 반면, 하층 아이들은 스스로 즐거움을 찾을 줄 안다. 아이들의 행사로 번잡한 중산층이, 아이들과 거리감을 두고 사는 자족적인 하층보다 우월하다고 볼 근거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지원과 학업 성취도에 대한 사회적 지지, 취업과 승진 등의 보상이라는 방식을 통해 중산층의 가치는 대표 가치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원 동원이 가능한 중산층의 양육 방식이 재생산의 일정한 기제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중산층과 하층의 자녀는 다양한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다른 '몸에 밴 습성'을 가지게 되는데, 사회는 여기에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개인주의적' 미국이여, 계급적으로 접근하자, 이것이 부르디외의 틀을 잇는 라루가 제시하는 하나의 출구이다.

3.

자신의 문제를 대입해보던 미국의 학생들은 자신이 '자연적 성장' 쪽인지 '집중 양육'쪽인지를 생각해보는 듯했다. 교수는 부모의 태도가 어떻게 자신에게 내면화되었는지, 그래서 '세대의 경험'과 '가정적 배경'은 어떻게 교차하며 세계관을 형성하는지에 대해 논의를 이어나갔다.

책을 다시 본다. 우리나라는 계급과 무관하게 아이의 교육에 '올인'한다. 고시원에서 라면을 주식으로 살면서도 대치동 학원에 다닌다. 모두가 집중 양육으로 몰입하는 셈이다. '자연적 성장'의 가치는 대안학교나 홈스쿨링 정도에서만 발견되는, 상당히 '나이브'한 입장으로 여겨진다. 초근대와 전근대가 섞여있는 우리나라의 특수성은 아이들의 양육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가정일 뿐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부모들이 어떤 가치로, 계급적으로 어떻게 다르게 양육하고 있는지는 누구도 잘 모른다. 책을 다시 집어 든다. 한국인들의 양육 문화를 계급에 따라 기술한 500쪽 가까이 되는 책이 있는가. 책을 읽으며 자신을 대입해보고, 자신이 어떻게 '구성'되어있어서 지금 이런 상처와 자부심을 지니고 살게 되었는지 성찰하게 돕는 그런 책이 있는가. 불평등한 어린 시절을 잘 보듬고,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그런 수업이 교양에서 체계적으로 제공되는가.

물론 모든 문제가 양육에 대한 설명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양육과 그에 밀접히 연결된 학교 경험이 개인과 계급과 사회를 동시에 형성-유지-변화시키는 고리인 것은 확실하다. 이제는 그 고리에 대한 세밀하고 구조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내 안의 상처받은 아이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우리의 아이들을 제대로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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