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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가 잘나서 자본주의 세계 제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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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가 잘나서 자본주의 세계 제패?

[프레시안 books] 에릭 밀란츠의 <자본주의의 기원과 서양의 발흥>

막스 베버의 근대와 전통의 대립구도

막스 베버의 관심은 어찌해서 자본주의가 서양에서는 이루어졌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그렇지 못했는가의 문제였다. 그의 논리는 결국 근대와 전통의 대립 구도를 만들어냈고, 서구의 정신사적 흐름은 자본주의 작동에 반드시 요구되는 합리적 사유를 탄생시킨 반면에 다른 지역은 그런 정신적 동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결론으로 압축되었다. 서구 역사 내부에 자본주의의 기원적 동력이 존재한다는 결론이다.

이러한 막스 베버의 비교사회학적 논리는 서구의 근대가 역사 발전의 모델이며, 서구 아닌 다른 지역의 전통은 근대를 가로막는 장애 요소라는 1960년대 발전론의 근간이 되었다. 정치경제적 낙후라는 현실적 고통을 겪고 있던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는 이러한 베버의 논리에 토대를 둔 발전론, 또는 근대화론의 수입을 통해 서구의 발전 경로를 국가 정책으로 선택하는 단계로 진입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냉전 체제의 사회과학은 이와 같은 내용을 그 핵심으로 삼아 전 세계에 전파, 학습되어 나갔다. 그러나 근대가 곧 자본주의라는 등식에 휘말린 결과, 다른 경로에 대한 모색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공격 목표가 되었으며 현실에서는 내부의 계급 모순의 심화와 사회적 양극화, 그리고 국제적 착취 구조에 지속적으로 빨려 들어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종속론 또는 세계체제론은 발전론 또는 근대화론이 이러한 세계적 착취 구조를 지닌 자본주의의 확산 전략을 옹호하는 학문이라는 지점을 격파해간 지적 산물이었다. 특히 세계체제론은 종속론에 기초하면서도 이것을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적 연관 관계라는 맥락을 통해 밝혀나가 서구가 어떻게 자기를 중심으로 착취의 위계 질서를 만들어냈는지를 규명해나갔다.

"서구의 발흥"과, 자본 축적의 착취적 본질에 대한 논쟁

▲ <자본주의의 기원과 서양의 발흥>(에릭 밀란츠 지음, 김병순 옮김,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에릭 밀란츠의 <자본주의의 기원과 서양의 발흥>(김병순 옮김, 글항아리 펴냄)은 그와 같은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의 핵심을 재평가하고 이에 기초하면서, 서구가 지닌 독특한 동력이 자본주의를 만들어냈고 이것이 서구의 세계 지배를 가능하게 했다는 논지를 해체한다. 그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서구 중심주의적이라든가 아시아의 역량을 과소평가했다든가 하는 식의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세계체제론이, 서구 자본주의가 세계를 자신을 중심부로 해서 재편해온 구조 위에서 만들어진 "자본 축적의 착취적 본질"을 가진 것을 명확히 했으며 이로써 세계 자본주의의 식민성을 가장 중요한 논의의 주제로 삼도록 기여하게 했다고 반박한다. 자본주의는 서구가 잘나서 다른 지역을 압도하는 동력을 애초부터 가지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서양사, 그리고 세계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리고 "서양의 발흥"이라는 단어와 개념 자체가 서양 이외 지역의 몰락, 쇠퇴, 붕괴, 해체 등의 현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는 서구의 역사적 우월성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1960년대 중반 이후 역사학에서 치열한 논쟁을 가져왔다.

윌리엄 맥닐, 마샬 호지슨 그리고 서구 아닌 지역의 활력

돌아보면, 역사학자 윌리엄 맥닐 1963년, <서양의 발흥 : 인류 공동체의 한 역사(The Rise of the West : A History of Human Community)>라는 제목의 세계사 책을 냈을 때 미국은 열광했다. 그 내용의 질적 수준 때문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발전과 세계사적 주도력에 대한 해설로 이 책의 의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 자신은 이러한 오해를 가져온 것에 대해 자기 비판적 성찰을 남긴다. 뿐만 아니라 서구가 아닌 지역의 역사적 동력과 기여를 재조명하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그의 역사에 대한 태도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은 이슬람 역사 연구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시카고 대학 시절 그의 친구인 마샬 호지슨이다.

호지슨은 서구 중세와 근대 사이에 가로 놓인 이슬람의 문명사적 충격에 대한 이해 없이 서양사의 발전 경로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폈는데, 윌리엄 맥닐 자신은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논지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했다고 토로했을 정도였다. 호지슨은 서구의 우월적 지위가 명백해진 상황에서, 서구가 아닌 지역의 낙후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 경로가 정해져 있었던 것이라는 식의 역사 해석에 대한 반론을 폈던 것이다.

호지슨과 마찬가지로 아부 루고드는 그녀의 <유럽 이전의 헤게모니>를 통해 서구가 봉건 체제의 기초 위에서 도시 국가의 여러 가지 활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13세기, 이미 인도양을 중심으로 다른 지역의 세계체제적 연관 구조가 존재했고 서구는 여기에 자신의 젖줄을 대면서 세계 자본주의의 기반을 갖춘 것이라는 논지를 폈다. 막스 베버와 같은 내부 동인론에 대한 부정이었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발전의 동력은 서구보다는 도리어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에 있다고 한 <리오리텐트>의 경우도, 서구 자본주의의 발흥이 오래 전부터 존재해온 아시아 세계 체제에 서구가 자신을 유기적으로 연관시키면서 가능했다는 논지를 편다. 아부 루고드든 프랑크이든 모두 서구 밖의 세계가 가진 동력이 보다 중요한 자본주의 발전의 기초라는 주장을 제시한 셈이다.

서양 학문의 주도권, 그 내부의 작동 원리는?

그러나 에릭 밀란츠는 프랑크나 아부 루고드 등의 논지가 서구 중심주의를 돌파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 세계적 연관 구조의 성격을 본질적으로 밝히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서구 학문 전체의 사고, 또는 그 접근의 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유럽 중심주의자들은 여러 세기 동안 지속된 서양의 식민주의가 끼친 영향과 유산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서양의 학문적 논의 자체는 본질적으로 서양의 발흥, 자본주의의 역사, 근대성 그리고 서양의 국가 제도와 학문 분야, 문화, 착취 기제의 세계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도 학문 연구의 주도권을 잡고 있으며 식민지 시대 이후의 대학과 정치계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서양 세계에서 사회과학의 형성과 서양의 학자들이 나름의 다양한 방식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의 조건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은 지금까지 서양의 지식이 서양 이외의 세계를 머릿속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 통제하고 식민지화하고 지배해온 방식과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역사학도 "19세기 부르주와 국민국가를 정당화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비판하면서, "세계의 불평등 문제가 가장 긴급한 과제로 부각되어야할 시점"에 경제사를 비롯한 비교사회학 등의 분야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까닭에 그는 그의 책 전체를 통해 유럽 상업자본주의 발전의 경로를 아시아, 남아시아, 북 아프리카 등과 비교하면서 다른 지역이 남을 희생시키지 않는 자기 재생력의 원리를 중심으로 삼았던 반면에 서구는 "노동을 시간으로 통제"하면서 "주변부를 지속적으로 식민화"해왔으며 "식민지로 만들되 산업화를 막는 치밀한 정책"이 서구 열강들이 장기적으로 경제 성장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설파한다.

에릭 밀란츠는 따라서 중국이나 남아시아 등은 "다른 지역을 희생양 삼아 발전하지 않았던 반면", 서구는 도시 국가 내 중상주의 권력이 식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상업 제국주의"를 목표로 국가와 자본의 동맹 체제를 만들었다고 정리했다. 바로 이 동맹 체제의 중심에는 전쟁과 제국주의가 있으며, 이것이 유럽을 다른 지역과 차별화한 체제적 동력의 진상이라고 강조한다.

식민화의 문제 논쟁, 실종되지 말아야

그의 이러한 논지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에 대한 옹호와 함께, 제국주의적 본성을 지닌 서구 자본주의 체제의 주도력을 발전의 모델로 볼 것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으로 봐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길을 연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새롭다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기원과 발전, 그리고 세계적 확산과 그 동력의 여러 가지 변화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이 "식민화의 문제", "타자의 희생"이라는 중심 요소를 놓친 채 어느 특정 지역의 고유한 동력이나 서구 아닌 지역의 역사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에 대해 제동을 걸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월러스틴 자신도 아시아의 활력을 주목한 프랑크나 이슬람의 역사적 동력의 시기를 조명한 아부 루고드등의 기여를 인정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는 이러한 접근과 발상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의 모순에 따른 고통을 해결하는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을 내놓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에르네스트 만델과 앙리 피렌느

에릭 밀란츠는 벨기에 출신의 학자다. 벨기에는 두 사람의 뛰어난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자와 세계적 역사학자를 배출했다.

한 사람은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앙리 피렌느(Henri Pirenne)이다. 만델은 그의 <후기 자본주의(Late Capitalism)>에서 자본주의의 후기적 발전 과정이 여러 변화를 가져온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의 작동 방식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고 했다. 앙리 피렌느의 경우는 <유럽의 역사(History of Europe)>에서 로마 제국 붕괴 이후 유럽의 형성사를 경탄할 만큼 치밀하게 분석해 들어간 바 있다. 피렌느는 중세의 권력과 도시 국가,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왔는지를 "긴 역사의 관점"에서 파악했다. (두 책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이러한 학문적 전통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을 하나로 응집시켜나가 본다면, 우리의 자본주의 논쟁과 그 돌파의 학문적 성취는 가치 있는 자산을 얻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의 불평등,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사회 안에 가져다주고 있는 모순과 대립의 심화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에 대해 좀 더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단계가 와 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우리의 경우 아직 이에 대한 역사적 시선과 분석, 비교사회학적 논쟁 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에릭 밀란츠의 책은 그러한 논쟁에 자극적 단서로 작용할 것이라 기대한다. 박정희 체제가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는 역사 해석과 정치적 논리가 다시 주도권을 잡아나가려는 지점에서, "식민화와 타자의 희생"이라는 주제는 더욱 절실한 논쟁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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