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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망원동으로 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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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망원동으로 간 까닭은?

[5년, 가능성] 쉼보르스카의 <끝과 시작>

2013년 첫 '프레시안 books'는, 향후 5년을 건너가는 데 함께 하면 좋을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5년'인 이유는 새로운 대통령과 정권이 들어서는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비록 전부는 아닐지라도 많은 이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며 그들의 희망과 절망을 교차시키는 변화입니다. 여덟 명의 필자가 이 '5년'을 마주하며 책 한두 권씩을 꺼내 들었습니다. <편집자>

2013년 새해에 하고 싶은 일을 친구와 적어보기로 했다. 내가 제일 먼저 적은 건 '망원동 기록하기'였다.

망원동은 경주에서 살던 내가 처음 서울에 올라와 살던, 내 십대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아직도 나는 꿈속에서는 80년대의 망원동을 돌아다니곤 한다. 그 망원동엘 요즘엔 자주 가는데, 골목을 기웃거릴 때마다 괴짜들이 차려놓은 괴짜 가게가 의외로 꽤 많이 숨겨져 있단 사실에 즐거워한다. 대형마트가 들어서면 사라질지도 모를 망원 시장도 망원동의 한가운데에 이어져 있고, 여전한 감나무가 한 그루씩 여전히 뉘 집 마당에서 오래토록 성장해 골목 바깥까지 가지를 뻗고 있다. 80년대에는 공터가 많았고, 그보다 더 전에는 개천이 많았다. 개천은 복개되어 도로가 되었고 벽돌공장으로 쓰였던 공터들은 모두 연립주택들이 들어차 있단 점만 빼면, 내 기억 속 골목들은 그대로 있다.

갑갑할 때면 무작정 찾아가서 오래오래 두리번거리다 겨우 펜 한 자루나 공책 한 권을 사오던 삼화 문방구도 여전히 있고, 선배 언니 네가 운영하던 만생당 약국도 여전히 있다. 나에게 떡볶이를 쏘울 푸드로 만들어준 망원 시장 떡볶이 가게는 대를 이어 계속 운영되고 있다.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온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작은 가게들 몇 군데가 몇 십 년의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 좋아서 그곳들을 하나하나 탐방하여 사진도 찍고 주인장을 만나 인터뷰도 하며 고스란히 기록해 두고 싶어, 새해 첫 소원으로 이걸 꼽았다.

망원동이 어떤 특별한 상징을 가져서도 아니고, 망원동에 담긴 내 십대의 기억이 소중해서도 아니다. 망원동은 내가 가장 잘 기억할 수 있는 서울의 유일한 공간일 뿐이다. 30년 이상의 세월 속에서, 이토록 무시무시하게 변해버리는 서울 속에서 옛 모습을 고스란히 기억할 수 있는 내가 있고, 그리고 한 동네가 있다는 사실이 나에겐 소중하다. 많은 것이 변해버렸지만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몇 군데가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겐 무엇보다 소중하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김홍기 옮김, 길 펴냄) 식으로 말하자면, "아직 완전히 소멸하지 않은 것을 보는" 건 능력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걸 보는 것에서 출발해서, "이런 혐오스러운 역사의 현재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현하는 것을 상기의 새로움과 '순결한' 새로움으로서 보는 능력"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아주 자그마한 믿음이 있다. 30년 전의 변두리 골목의 일들이 2013년으로 여전히 이어져 있는 그 가느다란 생존을 기록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과거를 회억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순결한 새로움을 주시하고 싶은 간절함에 가깝다.

한 달에 두세 군데씩, 일 년이면 삼십 군데 즈음이, 5년 정도라면 백 군데가 넘는, 골목에 잔존해 있는 터줏대감들을 찾아낼 수 있을 거다. 그걸 찾아내는 시간 동안에 나에게는 미미하지만 어쩌면 엄청난 변화가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의 접촉면으로 시를 쓰는 시인인 나에겐 정말로 근사한 딴짓이 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 시간 동안에 나는 아마도 그 가게들과 그 골목에서 거의 모든 소비를 하게 될 거다. 인터넷 쇼핑몰이나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나 프랜차이즈가 아닌 그 괴짜 가게들에서 내게 필요한 옷가지와 학용품과 상비약을 사면서, 이야기가 깃든 물건들을 소비하는 사람이 될 거다.

자연스럽게 변해왔지만 허하기만 했고 도무지 잘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던 내 삶의 패턴들이 '망원동 기록하기'를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회복의 패턴으로 옮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반성이란 것을 성찰이 아니라 접촉면의 변화를 통해서 겪게 될 것 같아서 무려 설레기까지 한다. 여태껏 나는 부지불식간에 나의 접촉면을 선택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로 선택해왔지만, 새해에 하고 싶은 일에 첫 번째로 적은 이것은 난생 처음 의식적으로 선택한 내 의식의 가능성을 만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반성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영화들을 떠올린다. 미국 영화를 별로 좋아한 적이 없었지만, 9.11 이후엔 잘못 치달아온 욕망들을 반성하는 현명한 영화들이 종종 눈에 띈다. 앞으로의 5년을 이끌어갈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가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는 강정마을과 제주도를 두고서, '하와이처럼 만들겠다'고 발언했단 기사를 접했을 때에는 하와이를 배경으로 했던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 <디센던트>가 떠올랐다.

불행하고 암울한 일들로 점철되던 주인공은 조상 대대로부터 물려받은 거대한 땅을 리조트 개발로 매각하려고 오랜 준비를 해왔지만, 불행의 끝자락에서 그걸 포기하는 선택을 한다. 가족을 잃었고 상처를 얻은 한가운데에서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가는 주인공의 선택 과정이 아름답고 잔잔하게 펼쳐진 영화였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자본을 추구해온 자기 자신을 돌려세워 행복하게 살기 위해 자신이 누구의 후손인지 누구와 혈연인지 가족의 행복은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지를 차근차근 짚어나가던 영화였다.

그저 평범한 속물일 뿐인 한 개인의 선택, 그것이 가져다주는 희망의 거점을 목격할 수 있어 참 좋았다. 선택의 한순간에 그는 많은 것을 포기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 넓은 땅에서 살고 있는 풀포기와 벌레들과 나무들과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지내온 수많은 세월과 세월에 깃든 추억과 세월과 추억이라는 가치를 지킨 사람이 되었다. 결국은 모든 것을 지킨 사람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누군가 내게 편지로 물었다.
이것은 내가 다른 이들에게 묻고 싶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또다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앞에서 내내 말했듯이,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보다
더 절박한 질문은 없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 부분 (시집 <끝과 시작>(최성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 <끝과 시작>(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순진하기 짝이 없기를 선택하고, 그로부터 절박한 질문과 대면하고, 끊임없이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요?"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란 낡은 질문을 다시 꺼내는 일을 시작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닐까. 가장 촌스럽고 가장 순진하고 가장 낡은 질문들이라서 차마 입 바깥으로 꺼내기에 망설여지는 질문을 다시 꺼내는 일이 가장 버거운 용기가 되어버린 세상. 그래서 모두가 겁쟁이로 사는 세상. 수많은 겁쟁이들 중 또 다른 겁쟁이일 뿐인 나는 선택의 가능성이 주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불운을 떨치기 위해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인지 물어보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존재, 그 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 쉼보르스카, '선택의 가능성' 부분 (시집 <끝과 시작>)

나는 쉼보르스카의 저 시구에서 '가능성'이라는 말이 '일말'이라는 말 뒤에 이어져 있는 것을 보며, 희망이 어떤 식으로 잔존해 있는지를 살갑게 느끼곤 한다. 그 잔존을 만나기 위해서 나는 카메라를 메고 자전거를 타고서 망원동에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보고 들은 것들만을 고스란히 기록할 것이다. 보고 들은 것들이 희망에 가깝지 않을수록 참담하고 비루한 것일수록 고스란히 기록할 것이다. 잔존해 있는 것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그대로를 선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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