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은 공감을 표해 왔다. 내 속에서 뭉클거리고 있었으나 뚜렷하게 뭔지 잘 몰랐던 섬세한 정황들을 현이 대신 말로 표현해 주었다며 후련해 했다. 현이 그렇게 소설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실제로 그렇게 느껴 봤기 때문이었다.
현에게는 오래된 남자친구가 있었다. 오랫동안 그와 연애하면서 각종 신경증적 혼란을 느꼈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많이 싸웠다. 연애 소설 쓰기는 그녀에게 치유의 한 방편이기도 했다. 감정을 극단적으로 과장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언어화한 과정은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평화를 찾고 난 지금, 현은 남자 친구를 다시 바라본다. 갑자기 현은 충격을 받는다. 자기가 한때 목숨만큼 사랑했으며, 때로 죽일 만큼 미워했고, 온갖 신경증적 혼란을 가르쳐주었으며, 각종 환멸을 선사했고 그래서 사랑이 불구를 견디는 일 혹은 기꺼이 고통에 참여하는 일임을 깨우쳐준 그, 애물단지이자 보물단지, 노회한 교사이자 철없는 아이였던 그는 배 나오고 머리 벗겨진 초라한 아저씨일 뿐이었다.
아, 이게 웬일이야? 나는 고작 이런 사람 하나 때문에 그 널뛰기를 한 것일까? 내 널뛰기는 변화무쌍하고 사연 많고 장구했으나, 그것은 더없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한 인간을 두고 홀로 수행한 자폐적인, 일방적인 널뛰기였을 뿐이었다.
그의 현실과 별로 관련 없는 그녀만의 널뛰기. 게다가 그녀의 널뛰기에 이용된 그는 볼품없다 못해 불쌍할 지경이었다. 널뛰기 자체가 차라리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한 바탕 꿈을 꾼 걸까. 어안이 벙벙해진 그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정향재 옮김, 현대문학 펴냄)를 읽는다.
(현에게 미리 위로를 던진다. 그런데 진짜 사랑은 이러한 정열의 일방성에서 빠져 나온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초라하고 볼품없는 한 인간으로서 상대를 발견한 이후에, 자기의 온갖 감정의 일방성과 자폐성을 깨닫고 난 이후에 진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상실 후에 바라보는 에로스
▲ <잠자는 미녀>(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정향재 옮김, 현대문학 펴냄). ⓒ현대문학 |
잠자는 미녀의 집은 엄격한 규율로 운영된다. 노인들은 아가씨가 깊이 잠든 이후에만 방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녀가 깨기 전에 나와야만 한다. 노인들은 깨어 있는 아가씨를 절대 접할 수 없다. 격한 성적 접촉 역시 금지되어 있다.
말이나 표정 등 어떤 인간적 메시지도 주고받을 수 없다는 점이 이 집의 독특한 조건이며, 노인들에게 특별한 매력을 선사한다. 상호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교류가 원천 봉쇄된 가운데, 오직 노인들만은 일방적으로 자유롭다.
노인들은 아가씨를 샅샅이 볼 수 있다. 결코 잠을 깨지 않는 여자야말로 "안심할 수 있는 유혹이고, 모험이며, 일락"(25쪽)이다. "잠에 빠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여자는 이미 남자로서 여자의 상대가 되지 않는 노인에게 있어 무엇이든 말을 걸어주고 뭐든 들어주는 그런 존재"(26쪽)이다.
67세의 에구치는 잠자는 아가씨 옆에서 복잡다단한 심경을 느끼며 일평생에 걸친 에로스적 사건들을 회상한다. 그의 복잡한 마음과 회상이 이 소설의 주된 골격이다. 죽은 듯이 자는 나체의 미녀 옆에 누운 노인의 마음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처음 방문한 날, 가늘게 그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는 그런 자신을 비웃지만 그보다는 꺼림칙한 허무를 강렬하게 느낀다. 그런 자신을 추하게도 생각한다. 어떨 때는 아가씨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며, 아가씨를 안으며 무아의 황홀경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아가씨를 희생물 삼았다는 생각에 죄의식을 느낀다. 은밀한 죄의식 때문에 희열이 더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복잡다단한 심경 중 무엇보다 강렬한 것은 회한과 동경이다. 상실해 가는 것, 사라져 가는 것, 붙잡을 수 없는 것, 즉 에로스에 대한 회한과 동경.
과거 67년 동안, 에구치는 헤아릴 수 없는 성의 광범위함, 바닥을 알 수 없는 성의 깊이에 과연 얼마나 접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물며 노인들의 주위에는 신선하고 젊은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끊임없이 태어난다. 애처로운 노인들의 못다 이룬 꿈에 대한 동경, 붙잡지 못한 채 잃어버린 나날의 회한이 이 비밀의 집의 죄악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52~53쪽)
에구치는 생각한다. 노인들이 아가씨들을 손쉬운 회춘 방법으로 삼는다 해도 그 밑바닥에는 "이제는 후회해도 돌아오지 않는 것, 발버둥 쳐도 치유되지 않는 것이 숨어 있"(60쪽)을 것이라고.
때로 에구치는 잠든 아가씨 옆에서 죽음의 유혹을 강렬하게 느낀다. "아가씨의 젊은 몸에는 노인으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생각을 유발시키는 어떤 슬픈 것이 있는"(86쪽) 듯하다. 에구치는 아가씨가 먹은 수면제만큼 강한 수면제를 요구하지만 그 집의 주인은 거절한다.
또한 에구치는 지난날의 배덕(背德)을 회상하며 회한에 젖는다. 그는 결혼했고 딸들을 양육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선이지만, 실상 악이 아니었을까. 그가 여자들의 인생을 지배하고 성격까지도 비뚤어지게 했으니 오히려 악이었을 수도.
그는 생각한다.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노인들도 지난날의 배덕에 회한을 느끼고 잠든 아가씨를 부처님 삼아 울며 아우성치고 위로를 받지 않을까.
에로스와 '나'
잠자는 미녀의 집이 노인들을 매혹시키는 이유는 아가씨들이 결코 노인들을 알 수 없다는 조건 때문이다. 깨어 있는 여자라면 노인의 노쇠를 알아볼 것이다. 노인은 그 앞에서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 수치를 미리 두려워하기에 노인은 잠자는 여자들 앞에서 편안할 수 있다.
그래서 에구치는 생각한다. 여자가 "더 이상 남자가 아닌 노인으로 하여금 수치스러운 생각을 하지 않게끔 살아 있는 장난감"(21쪽)이 되었다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니"(51쪽)라고도.
잠자는 미녀들은 노인들을 침입할 수 없다. 이는 노인들을 수치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는 효과 이상의 것을 선사한다. 노인들은 잠자는 미녀를 두고 각종 감상에 젖고 몽상에 빠져들지만, 순전히 홀로 그 일을 수행한다. 아가씨들의 침묵과 부동(不動)이라는 조건으로, 노인들은 "나이를 초월한 자유"(53쪽)를 느끼며 망상과 감상에 자유롭게 젖을 수 있다.
여자들은 존재감을 상실한 백지(白紙)이다. 미녀는 에로스를 둘러싼 노인의 감상과 몽상의 도구일 뿐이다. '타인의 존재감 제로'라는 조건이 노인들에게 일방적인 자유를 선사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방성을 비난해야 하는가? 아니, 이는 에로스의 보편적인 정황 아닌가? 타인은 나의 에로스를 위한 도구이자 매개일 뿐 아닌가? 과연 타인은 순수하게 나의 에로스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누구나 사랑의 이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실현하려고 한다. 종종 상대는 그 이상을 이루기 위한 도구이자 매개가 된다. 어떤 남자는 에구치처럼 여자의 몸에서 섬세한 세부적 아름다움을 상감하고 싶어 한다. 이때 남자가 상감하는 것은 고유 명사인 그녀 자체보다는 익명으로 존재하는 여체의 아름다움이다. 그때 여자의 몸은 그 욕망의 실현을 위한 도구이다.
어떤 남자는 여자를 완벽한 황홀경으로 이끌고 싶어 한다. 이때도 남자가 욕망하는 것은 익명의 여체를 극단적인 황홀로 이끌 수 있는 강인한 자기 자신이지, 고유 명사인 그녀 자체가 아니다. 이런 경우도 남자는 여자를 자기 욕망 실현을 위한 매개로 사용한다.
어떤 여자는 모든 희로애락과 뒷담화와 하소연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꿈꾼다. 그녀 역시 남자를 매개로 자기 사랑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다. 실은 이런 사랑의 이상을 충족시켜줄 수 있으면 누구라도 괜찮다. 반드시 그여야 할 이유는 없다. 많은 경우 연인은 고유명사로서의 상대보다는 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익명의 상대를 만난다.
뿐인가. 상대의 현실은 내가 상상한 나의 현실이다. 불교에서 상(相)이란 자아를 투사한 영상이다. 법은 주관적 가치관이 전혀 섞이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실체이다. 어떤 것의 지각(知覺)은 자동적으로 무엇인가를 선호하는 행동을 포함한다. 이는 자기 이해와 자기주장, 그리고 자기 강화와 자기 확대와 연관된다. 이것은 이기적이지 않기가 어렵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칭찬하고 욕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한형조 지음, 문학동네 펴냄), 134쪽, 149쪽)
우리는 내 안의 미덕을 투사하여 누군가를 칭찬하며, 내 안의 악덕을 투사하여 누군가를 비난한다. 가령 외모 꾸미기에 능숙함을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은 남을 칭찬할 때 "세련된 멋쟁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누군가의 이해 타산적 면모를 주로 비난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이해 타산적 면모를 인식하는 사람이다.
연애처럼 상이 난무하는 장도 없다. 상대의 현실은 자주, 나의 주관적 영상을 투사한 나의 복제품이다. 내 판타지를 투사할 때 상대는 미덕 그 자체가 되고, 내 안의 악덕을 투사할 때 상대는 위험한 나쁜 남자/ 여자가 된다.
우리는 누군가의 매력을 안다고 생각하거나 말한다. 그런데 그 매력이 정말 그의 것인가. 내가 상상한 매력, 내 안에서 길어내 그에게 투사한 매력 혹은 내 안의 소망을 투사한 매력은 아닌가.
예순일곱 살의 에구치는 이미 친척이나 친구의 죽음도 수없이 겪었지만, 그 애인과의 추억은 젊디 젊다. 아기의 하얀 모자와 은밀한 곳의 아름다움, 유두의 피로 압축되어 지금도 선명히 남아 있다. 그 빼어난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아마도 이 세상에 에구치밖에 없고, 머지않아 에구치 노인의 죽음에 의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수줍어하던 애인이 순순히 에구치의 시선을 허락했던 것은 그녀의 천성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 자신은 분명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으니까. (40쪽)
그녀가 모르는 은밀한 아름다움을 에구치는 안다고 생각한다. 일면 멋있는 말이지만 뒤집어 보면 '그녀가 모르고 에구치만 아는 아름다움'은 에구치 식대로 편집한 매력이다. 그녀가 모르는 자질이란 그녀의 자의식을 구성하지 않는 것으로, 그녀에게 속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상대의 매력은 종종 내 판타지를 투영한 나의 상(相)이다.
때로 연인은 자신에게 필요한 자질을 상대에게 투사하면서, 그것이 상대의 매력이라고 믿는다. 가령 어떤 여자가 상대에게서 결단력이라는 매력을 발견한다. 그녀는 결단력이 필요했기에 상대에게서 결단력이라는 매력을 가공하고 편집한다.
또한 우리는 상대에게서 '나와 닮은 것'을 찾는다. 종종 우리는 상대 안의 나에게 매혹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내 소망과 내 결핍이다.
우리는 내가 가지고 싶은 자질을 가진 그, 내 소망을 실현한 듯한 그를 사랑한다. 박식해지고 싶은 사람은 박식해 보이는 그에게 매혹된다.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성공한 듯 보이는 그에게 매혹된다.
자기 결핍을 의식하는 사람은 유사한 결핍을 가진 듯 보이는 그에게 매혹된다. 누군가 묻는다. 그에게 왜 반했니? 그는 상처 받기 쉬운 어린 아이 같아. 이때 생략된 말, 그러나 가장 중요한 말은 '나처럼'이다.
나의 현실, 내 소망과 결핍은 상대에게서 매력을 생산해 내는 발전기다. 나의 소망을 투사할 때 나는 상대를 예찬한다. 나의 결핍을 투사할 때 나는 상대를 안쓰럽게 여긴다. 상대의 매력의 원천은 '나'이다.
뿐인가. 시작하는 연인이 진정으로 경탄하는 대상은 상대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 빠져 있는 나이다. 나는 그의 실상이 덜 궁금하다. 그를 만났을 때의 나의 모습을 곱씹어 떠올리며, 나의 행동이나 말을 자화자찬한다.
그와 함께 있었을 때 나는 얼마나 아름다웠는가. 그때 나의 말은 얼마나 멋있었는가. 그에게 비친 나는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 그에게 나는 얼마나 괜찮은 인상을 주었을까. 이런 상상을 하면서 스스로를 사랑스러워한다. 연인은 상대의 매력에 경탄하는 예찬자 이상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자기의 사랑스러움에 매혹된 나르시시스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재룡 옮김, 민음사 펴냄)의 테레자는 기술자와 동침 한 후 자기 육체를 유심히 바라본다. 그와 잤을 때의 그녀의 모습을 곱씹어 떠올리며 깊이 각인한다.
그녀는 사우나로 돌아가 다시 한 번 거울 앞에 섰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기술자 집에서의 정사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기억나는 것은 애인이 아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녀는 그를 묘사할 수조차 없었고 그의 벗은 모습이 어땠는지 눈 여겨 보지도 않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자신의 육체였다. (…) 그녀는 낯선 남자의 성기를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이 성기에 근접해 있는 자기 자신의 성기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주 가깝게 다가와서 아주 다른 이물질처럼 보였기 때문에 불쑥 더욱 선정적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육체를 원했던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264~265쪽)
상대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자기애를 충족할 수 있다. 그런데 보다 우회적인 회로도 있다. 내가 상대에게 어떻게 대접받는지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
그가 나에게 경탄했다. 이 명제는 곧바로 다음 명제를 낳는다. 그는 나에게 잘 해 준다. 그래서 연애할 때 대두되는 핵심적 관심사는 이렇다. 그가 나에게 얼마나 잘해주는가. 그가 나를 얼마나 대단하고 멋진 사람으로 생각하는가.
그런데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과거의 여인들이었다. 그리고 고맙게도 노인에게 떠오르는 것은 교제한 기간의 길고 짧음, 얼굴의 미추, 영리함과 둔함, 고상함과 천박함,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아, 죽은 듯이 자버렸어요. 정말 죽은 듯이 잤어요"라고 말한 고베의 유부녀와 같은 그런 여자들이었다. 에구치의 애무에 이성을 잃고 민강하게 반응하며 무아의 희열에 빠진 여자들이었다. (102쪽)
에구치는 상대 여인들의 성격이나 특질, 심지어 외모도 떠올리지 않는다. 그녀들이 그에게 보인 반응만을 기억할 뿐이다. 죽은 듯이 잤다는 고베의 유부녀의 고백은 그녀가 에구치를 매우 편하게 여겼음을 뜻한다. 에구치는 그녀보다도 그녀에게 편안하고 친밀한 분위기를 만들어준 자기 자신을 기억한다.
그의 애무에 이성을 잃고 무아의 희열에 빠진 여자들의 경우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녀들 자체보다 자기가 그녀들에게 대단한 성적 쾌락을 주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즉 상대의 본색보다는 상대가 받아들인 나의 이미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셈이다.
상대가 받아들인 나의 이미지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곧 상대가 나를 대하는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대접하는가? 여기에서 확인하고 싶은 것은 물론 나의 가치이다. 나는 상대가 이러이러하게 잘 해줄 만큼 대단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연인은 상대의 반응을 통해 자기애를 만족시키고자 한다.
이토록 에로스는 일방적이고 이기적이고 자폐적이고 자족적이고 고독하다. 이 모든 경우에서 타인은 소외된다. 에로스는 통상 두 사람을 주체로 상정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자기와의 대화, 고독한 독백이다. 시작하는 연애는 대체로 나만의 사업이다. 주연 배우는 비대하고 이기적인 '나'다. 타인의 개입은 불편하다. 뿐만 아니라 어떨 때 타인의 개입은 침입이다.
그래서 에구치와 노인들은 잠자는 여인을 더 달콤하게 여긴다. 자기 안에서만 아름다운 에로스. 그 성벽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의 침해 없이 더 안전하게 에로스를 즐기기 위해서. 잠자는 여인이라는 조건은 나의 에로스를 극단적으로 누리기 위한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을 제공한다.
사르트르의 말대로 타인은 지옥일까. 우선 타인은 나에게 싸움을 건다. 나에게 자기 존재를 주장하며 나의 벽을 허물기를 요구한다. 나의 에로스적 환상을 훼손하고 불구로 만든다. 타인은 나를 실망시키고 절망시킨다.
어쩌면 잠자는 미녀처럼 아무런 존재감을 주장하지 않고 나의 에로스를 맘껏 펼칠 수 있게 해 주는 백지 같은 상대가 만인의 은밀한 이상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에로스의 일방성은 그러나 시작하는 연애, 미성숙한 연애에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성숙한 사랑에서는 물론 사정이 다르다. 그런데 시작하는 연애에서 간과하기 힘든 역설이 하나 있다. 상대의 현실이 나의 자아를 투사한 상이 되기 쉬운 이유는 역설적으로 상대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상대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폭발한다. 상대의 현실이 미치도록 궁금하여 곱씹어 생각한다. 그러나 상대의 현실이 내게 전달되기에는 알아 왔던 시간이 짧다. 그러므로 그 시간차를 메꾸기 위해 나는 공상하고 몽상한다. 자료의 부족으로, 공상과 몽상의 결과 조성되는 상대의 이미지는 나의 자아를 투사한 상이다.
아니면 넘쳐나는 나의 정념이 상대의 현실이 내게 오는 길을 차단한다. 나는 그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에 대한 정념을 부풀리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당연히 그의 현실이 다가오는 것을 허락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결국 관심과 애착이 많기 때문에 상이 난무한다. 일례로 부모는 어느 누구보다 자식을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알아채기보다 부모 식대로 편집한 부모의 상으로써 자식을 판단하기 쉽다.
이렇게 사랑이 지극할 때에 더욱 오인(誤認)의 영역이 넓어진다. 사랑하지 않는 상대에 대해서는 공상의 나래를 펼 일도, 오인할 일도 없다. 이러한 오인은 온전한 사랑으로 가는 디딤돌이기도 하다. 상대를 오인했음을 깨닫고, 그것이 넘치는 사랑의 필연적인 귀결임을 깨닫고, 그것을 딛고 일어설 결심을 했을 때 진정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잘 사랑하려면 필히 오인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셈이다. 그래서 대리언 리더도 말한다. "사랑이 근거하는 동시에 숨기고 있는 환영에 대해 당신은 오직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다."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대리언 리더 지음, 김종엽 옮김, 문학동네 펴냄), 207쪽)
에로스는 소풍, 꿈
에구치는 잠자는 미녀의 집을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인생 바깥"(45쪽)으로 생각한다. 에로스적 사건이 비일상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로 자기 전에 섹스를 나눈다. 하루 중 가장 몽롱한 시간, 가장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시간이기 때문에.
에로스는 소풍이다. 일상에서 잠시 바깥으로 떠나는 나들이다. 하지만 "인생 바깥"이란 단지 이런 뜻만은 아니다.
에로스는 꿈인가. 에구치는 과거의 에로스적 사건을 회상하며 묘한 기쁨에 젖는다. 일어나지 않은 에로스적 사건을 몽상하며 희열을 느낀다. 색즉시공이라 했던가. 색, 즉 에로스는 현실보다는 꿈이나 회상에서 더욱 행복하다.
꿈이나 기억에서 더욱 생생하게 존재하는 에로스. 이 소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에구치의 에로스가 몽상의 차원에서 펼쳐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원래 에로스가 그러하지 않을까. 현실보다는 꿈에서 더욱 아름답지 않을까. 에로스는 가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아련하게 존재해야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아름다운 모든 것은 꿈속에서나 존재하는가.
결말에서 잠자던 여인은 죽어 나간다. 아마도 죽은 듯 자기 위해 섭취했던 독한 약물이 이상을 일으켰을 것이다. 노인들이 고독하게, 자폐적으로 그러나 그렇기에 충만하게 만끽했던 에로스는 '상대방의 극단적인 무력'이라는 조건을 전제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기형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다.
기형적인 에로스 안에서 홀로인 사람은 극단적인 쾌락에 취할 수 있었지만, 결국 그것은 현실에서 존속 불가능한 것이었다. 극단적으로 자폐적인 에로스, 그리고 극단적인 쾌락의 끝은 죽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명하게 극단적 쾌락과 현실 감각 사이에서 조율한다. 조율 감각을 잃어버리고 극단적인 쾌락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현실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다.
에구치는 미녀의 죽음으로 꿈에서 깨어난다. 극단적인 에로스는 꿈이었다.
생의 선율, 생의 유혹, 생의 환희
공정해지자. 물론, 에로스에 이런 삐딱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깊은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 겉가죽만 보는 것은 어리석다. 하지만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전체를 놓치는 것은 한층 더 어리석다.
에구치가 아가씨를 안고 그녀의 팔을 자신에게 두르니, 아가씨는 정말로 부드럽게 에구치를 안았다. 에구치는 "거의 무심의 황홀경"(66쪽)을 느낀다. 그러다가 깨닫는다. "이 곳에는 노인들이 느끼는 노쇠의 애처로움, 추함, 비참함만이 아니라 젊은 생의 축복도 가득하지 않은가."(67쪽)
에구치의 다단한 감정은 하나로 수렴된다. 생의 교류, 생의 선율, 생의 유혹, 생의 회복. 한 마디로 생의 환희. 결국 생이 축복이라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에구치는 그토록 다감한 상념의 숲에서 헤매었나 보다. 에구치는 잠자는 미녀에게서 흐드러진 겹동백의 환영을 본다.
그러나 인간인 아가씨의 몸이 지닌 풍요로움은 눈으로 보기만 해서는, 점잖게 옆에서 자기만 해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백꽃 따위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가씨의 팔에서 에구치의 눈꺼풀 안으로 전해져오는 것은 생의 교류, 생의 선율, 생의 유혹, 그리고 노인에게는 생의 회복이다. (77~78쪽)
쇠락은 일상이요,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의 입장에서 어린 미녀는 생 그 자체이다. 신비롭고 축복에 가득 한 생.
늘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지만,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가족, 연인, 친구 등.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이 '살아 있음'의 축복이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그 가치를 깨닫기도 한다. 봄날의 새순, 첫여름의 연두, 갓난아기의 해맑은 미소에 경탄하면서 우리는 충격적으로 깨닫는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답구나!
그러나 무엇보다 그 축복에 전율하는 것은 상실을 앞두고서, 혹은 상실 이후다. 우리는 무엇이든 잃은 다음에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본다. 죽음의 비탄 속에서 왕성한 생을 발견한다. 이 때 보이는 생은 상실 이전의 생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흔히 에로스는 생명력과 등치 관계에 놓인다. 에로스가 축복인 이유는 살아 있다는 것이 축복인 이유와 같다. 에로스 역시 잃은 후에야 그것이 축복이었음을 더 절실히 깨달을 것이다. 당연한 것이 실은 놀라운 기적이었음을 충격적으로 보여주는 마법이 상실이라는 사건에 존재한다. 우리는 어리석기에, 흔전만전 그것을 누릴 수 있었을 때에는 그 축복을 잘 모른다.
때로 에로스적 정열은 수난이자 고행이다. 젊은이들은 에로스적 정열 때문에 각종 신경증에 시달린다. 그러나 신경증은 호르몬의 과다 분비 때문에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생이 왕성하기 때문이다.
폭발하는 감수성과 감당할 수 없는 혼란 때문에 고통스러운가? 그러나 그것은 생의 증좌다. 에로스적 정열로 수난을 겪는 젊은이여, 그것이 아무리 힘겨워도 축복임을 잊지 말자.
연재를 마치며 이번 회를 끝으로 '박수현의 연애 상담소' 연재를 마칩니다. 더없이 훌륭한 지면을 허락해 주신 '프레시안 books'와 관심과 응원을 보내 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간 발표한 글들에 못 다한 이야기들을 보충하고 내용을 가다듬어서 2013년 새해 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묶을 예정입니다. 모든 독자 여러분들께 행복한 새해를 기원합니다. 저는 사랑의 구원적 힘을 믿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의 연재물에서 사랑의 부정적인 면을 주로 이야기해 왔습니다. 고통스러운 혼란이나 치명적인 갈등, 환상을 벗긴 누추한 면모들 말입니다. 건강하기 위해서는 병의 존재를 잘 알아야 합니다. 병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면 영원히 치유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길에 놓인 비극적 요인을 잘 알아야 더 잘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사랑의 아름다운 면을 소략하게 다루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런 아쉬움을 단행본에서 극복할 수 있을 듯합니다. 어쨌든, 사랑은 축복입니다. 새해에는 더 잘 사랑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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