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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영토 대란, 상생과 공멸의 갈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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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영토 대란, 상생과 공멸의 갈림길!

[동아시아를 묻다] 新 문명의 충돌

임진년 영토 대란

임진년(2012년)이 저문다. 동아시아는 흉흉했다.

센카쿠/다오위다오, 독도/다케시마, NLL 문제가 연이어 불거졌다. 그래서 뜻 깊은 기념일을 축하하고 덕담을 나눌 여유가 없었다. 한중수교 20주년은 머쓱하게 지나갔고, 한베(트남) 수교 20주년은 어물쩍이다. 중일 갈등은 험악하다. 관계 정상화 40주년 행사마저 무산되었다. 반일(反日)과 혐중(嫌中)의 반목의 골이 매우 깊다.

왜 2012년이었을까. 일단 미국의 아시아 귀환을 꼽을 수 있다. 태평양의 파랑이 동아시아의 지중해를 출렁이게 한다. 다오위다오/센카쿠 사태의 방아쇠를 당긴 장본인은 전 도쿄 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였다. 그 심상치 않은 발언의 현장이 바로 워싱턴이었다. 사실상 미국의 묵인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동아시아의 긴장이 고조될수록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득이 된다. 일본을 통하여 중국을 견제하면서, 빈 지갑도 채울 수 있는 일석이조이다.

그러나 미국 탓만 하는 것은 모자란 짓이다. 목청껏 반미를 외쳐도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동아시아의 내분이 개입의 명분을 주고 있음을 뼈아프게 인정할 일이다. 철수했던 미군이 필리핀으로 돌아갈 수 있던 것도 중국과 필리핀의 영토 갈등을 해소하지 못해서이다. 아울러 동아시아의 구성원 모두가 권력이 교체되는 예외적 국면도 영향을 미친 듯하다. 특히 선거라는 민주주의 기제와 전혀 무관치가 않다. 천하보다는 국익이 우선이고, 국익보다는 정당의 당파적 이익이 중요하다. 민주주의가 민족주의를 억제하기는커녕 도리어 부추기는 경향이 없지 않다.

역사적 조망도 필요하다. 60년 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미흡한 전후 처리가 곪아 터진 것이다. 당시 일본은 반세기를 통치했던 타이완의 권리를 포기했다. 반면 오키나와는 미군정 치하에 있었다. 센카쿠/다오위다오는 타이완과 오키나와 사이에 자리한다. 이 섬들이 어느 쪽에 귀속되는지를 놓고서 매듭을 짓지 못했다. 6.25전쟁의 위기 속에서 미국-일본-한국-타이완의 반공 태세를 강화하느라 서둘러 봉합해버린 것이다.

더 길게 보면 120년을 거슬러 오른다. 류큐 왕국의 몰락과 청일 전쟁과도 깊이 결부되어 있다. 즉 중화 질서와 국제 질서의 충돌로부터 기나긴 불화의 불씨를 남긴 셈이다. 본디 이 동중국해의 섬들은 대륙의 중화 세계가 해양 세계와 이어지는 연결 고리였다. 일종의 윤활유 역할을 한 것이다. 허나 국가 간 체제로 이행하면서 거듭 파열음이 이는 분쟁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임진년의 영토 대란을 상이한 지역 질서 간의 논리를 따지고 견주어 보는 '역사 논쟁'의 계기로 삼을 만하다.


미일 안보 조약(1952년)과 중일 공동 성명(1972년)

이참에 40년 전 중일 공동 성명을 읽어 보았다. '사회 체제의 차이를 뛰어넘어 평화 우호 관계를 구축하자'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생각과 생활이 다르다고 우격다짐을 벌인 20세기이다. 제국주의가 정당화되었고, 열전과 냉전도 겪었다. 이제 보니 그 논리를 뒤집은 것이 중일 공동 선명이다.

정치는 다를지언정, 경제는 통할 수 있다. 이른바 '정경 분리'의 출발이다. 다오위다오/센카쿠가 발목을 잡지도 않았다. "대국(大局)을 중시하여 당장의 갈등은 접어두고 후세의 지혜에 맡기자"고 했다. 쌍방 공히 양보가 어려운 영토 문제를 봉인해 둔 것이다. 같음을 구하되, 다름은 남겨 두고(求同存異), 같지 않더라도 어울리기(和而不同)로 했다. 즉 서로가 '동의하지 않음을 동의한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아량을 베푼 셈이고, 다나카 가쿠에이는 화답한 것이다. 둘 중 하나라도 아집을 부렸다면, 담판은 깨졌을 것이다. 이들의 발상과 논리가 영판 생소한 것은 아니다. 속 깊이 중화 질서에 방불한 것이다. 기실 다나카는 서일본의 바닷가 마을 출신이다. 아시아의 바다에서 놀았던 어부들의 후손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일본 열도 개조론'이다. 중국/아시아와 해후해서 서일본을 부흥시키겠다는 복안이었다.

중국이 발끈한 것은 이 40년 전의 합의를 일본이 깼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기존의 관할권을 인정하고 군사력으로 현상을 변경하지 않기로 했다. 일본에 유리한 것이다. 그럼에도 기어코 국유화를 운운한다. 그리하여 중국도 일본과 똑같은 논리로 맞불을 놓았다. 역사적으로도, 국제법적으로도 중국의 '고유의 영토'라는 것이다. 일본이 19세기 문헌에 의거하면, 중국은 16세기 문헌으로 되받아친다. 일본이 국유화를 단행하자, 중국도 행정 관할권을 강화하고 순시선을 파견했다. 일본이 개입하는 만큼, 중국도 개입하여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 용호상박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타이완의 대약진이다. 마잉지우는 호위선을 끌고 다오위다오 근처까지 접근하여 동중국해 평화 구상을 발표했다. 때는 8월 5일, 마침 파일(華日) 평화조약 발효 6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중국, 일본, 타이완의 3자 교섭으로 영유권 분쟁을 거두고, 자원의 공동 개발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실천 방안도 마련했다. 1단계는 평화적 대화와 호혜적 협력이다. 먼저 중일, 양안, 일본-타이완의 양자 협의를 진행한 후, 점차 3자 협의로 이행한다. 2단계는 자원 공유와 협력 개발이다. 어업과 광업의 이해를 나누고, 해양 과학 연구 및 해양 환경 보호, 해상 안전 보장에 협조를 다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동중국해 행동 준칙에 조인하는 것이다. 베이징(北京)과 도쿄(東京)의 다툼을 중재하는 소국의 지혜라 하겠다.

기실 다오위다오 영유권을 가장 먼저 주장한 것이 타이완이다. 1960년대 말 오키나와 반환이 가시화되자, 미국의 타이완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어대'(釣魚臺, 중국은 釣魚島) 운동을 전개했다. 마잉지우는 바로 그 시기에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박사 논문도 동중국해의 대륙붕 문제이다. 새삼 전문가임을 과시하며 지지율 반등을 꾀한 측면도 없지 않다.

실제로 타이완인의 70퍼센트가 일본의 국유화 조치에 반대하고 있다, 중국과 협력하여 권익을 지키자는 견해도 절반을 넘는다. 나아가 대륙에서 타이완, 특히 국민당의 신뢰도를 크게 신장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오성홍기와 청천백일기가 함께 나부끼는 어선의 사진이 크게 보도될 정도였다. 중화민국 국기가 대륙의 미디어에 등장한 것은 1949년 이래 처음이라 한다.

경제 협력 기본 협정(ECPA, Economic Cooperation Framework Agreement)의 경제 합작에 이어, 외교에서도 국공 합작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친일적인 타이완마저 잃는 자충수를 둔 것 같다. 혹 타이완을 대신하여 스스로 '아시아의 고아'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잉지우의 구상 또한 낯설지 않다. 그는 이미 타이완 독립과 중국 통일의 이항 대립을 넘어서, 현상 유지라는 제3의 길을 선택했다. 통일도, 독립도, 무력 사용도 하지 않는다는 3불 정책이다. 후진타오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그래서 경제 합작과 인적 교류의 확대를 도모할 수 있었다. 이미 양안 간에는 매주 500편이 넘는 항공기가 운행 중이다.

국공 내전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이다. 평화 협정을 여태 체결한 바 없다. 그럼에도 교류와 협력으로 성큼성큼 나아간다. '하나의 중국'에 대한 해석은 각자에 맡긴다는 특유의 유연성을 발휘한 것이다. 이 융통무애(融通無碍)한 사고야말로 왕년의 중화 질서에 근접한 형태라 하겠다. 꾸준하고 일관되게 옛 정치 질서를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탈(脫)중화와 재(再)중화

임진년 영토 대란은 지구적 차원의 권력 이동, 더 정확히는 권력의 '재'이동과 불가분이다. 중국의 '재'부상이라는 현상과 결부되어 시공간 관념이 재편되어가는 조짐이다. 즉 동아시아 신냉전의 요체는 좌우 이념과 체제 대결이 아니다. 중화 질서와 국제 질서의 두 번째 대회전, 재중화와 탈중화의 길항이 핵심이다. 비유컨대 '문명의 충돌'에 가까운 것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중일 공동 성명(1972년)과 미일 안보 조약(1952년)의 모순이라 하겠다. 전자가 재중화의 초석이라면, 후자는 탈중화의 지속을 담보한다. 미일 안보 조약의 전제는 한반도의 분단과 양안의 분열이다. 타이완 해협 유사시와 북조선 위협이 미일 동맹의 근거이다. 헌데 양안 합작이 미일 안보 조약의 전제 중 하나를 허물고 있다. 그래서 갈등의 축이 센카쿠/다오위다오로 옮아간 것이다. 즉 동아시아의 지중해는 미국, 중국 주요 2개국(G2)의 각축장이자, 탈중화와 재중화의 동력이 힘을 겨루는 경합의 무대가 되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근대 국가의 영토(territory)는 공포(terror)와 어원을 같이 한다. 영토란 위협하는 것(terrify)으로 사람을 내쫓아 획득한 장소라는 뉘앙스가 물씬하다. 이 자의적이고 독선적인 폭력을 제도화한 것이 소위 '국제법'이다.

일본이 제시하는 19세기의 문헌에는 '무주지(無主地)'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주인이 없는 땅이다. 어떠한 주권 국가도 영유하고 있지 않은 토지를 일컫는다. 이곳은 선점하는 자가 임자이다. 깃발을 먼저 꽂아 지배하면 그만이다. 즉 주권 국가(=제국주의 국가)의 판도 밖에 있는 토지와 섬은 모두 무주지로서 쟁탈의 대상이 되었다.

그 장소들의 역사적 배경과 원주민들의 생활은 묵살당하는 무참한 질서이다. 타이완, 류큐, 조선, 홋카이도, 다오위다오/센카쿠, 다케시마/독도 등등, 그 목록은 매우 길다. '법의 지배'란 그렇게 예도 없고(無禮), 도리도 없는(無道) 차디찬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 '정상 국가'는 없다. 한반도의 북조선/한국, 대륙/타이완/홍콩/마카오의 양안4지, 일본/오키나와/홋카이도, 내/외몽골 등 동아시아에는 '보통 국가'가 하나도 없다. 중국은 천상 제국이다. '독립 국가'도 드물다. 한국은 전시 작전권이 없고, 일본은 국방군이 없다. 도리어 '중화 사회주의권'에 편입되었던 북조선과 베트남이 주체적이다.

소련의 동유럽 위성국가들과도 판이하며, 미국의 하위 동맹국들과도 다르다. 독립하지 않고도 자주적일 수 있었던 중화 질서의 오랜 유산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는 지금도 제국(중국), 열도 국가(일본), 분단 국가(남/북한), 도시 국가(홍콩/마카오), 도서 국가(타이완/오키나와) 등이 도열해 있는 모자이크이다. 국민국가의 단순계(Inter-state system)가 아니라 복합계(Complexity systems)인 것이다. 다소 과장을 하자면 동아시아는 결코 '근대'였던 적이 없다.

사실에 입각해 올바름을 구해야 한다. 허학이 아니라 실학을 해야 한다. 서학을 답습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서둘러 동학을 재건할 일이다. 이제야 '독립'하고, '보통 국가'가 되고, '강성 대국'을 꿈꾸면 어쩌자는 것일까. 지난 세기의 낡은 논리들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작금의 권력 이동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언어와 문법과 발상이 전혀 달라질 것이다.

어느 쪽이 답이라고 미리 편을 들지는 않겠다. 각자가 곰곰 생각해 보길 바란다. 2012년의 동아시아가 남긴 공통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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