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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올해의 소설'입니다!"

[2012 '올해의 책']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

'프레시안 books' 송년호(121호)는 '2012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가 따로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대신, 1년간 필자·기획위원으로 참여한 12명이 각자의 '올해의 책'을 선정해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들을 2012년과 함께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후안 가르시아 마데로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면 어떨까. 숙부의 뜻에 따라 법학 대학에 입학했지만 문학을 포기할 수 없어 인문 대학의 시 창작 교실을 기웃거리던 얼치기 시인. '피리를 불어주겠다'는 제안도 이해 못하는 숙맥이지만 이어진 (성적) 행위를 두고 "그녀 말의 의미가 외롭고 지친 수영 선수처럼 내 무지의 검은 바다를 헤치며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고 제법 근사하게 표현할 줄 알았던 열일곱 소년. 가르시아 마데로는 어느 날의 일기를 이렇게 쓴다.

11월 2일

내장(內臟) 사실주의에 동참하지 않겠느냐는 친절한 제안을 받았다. 물론 나는 수락했다. 통과 의례는 없었다. 그게 더 낫다. (13쪽)


일기는 끝나고, 우리는 당황한다. 내장 사실주의라는 낯선 단어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개를 저으며 책을 덮을 필요는 없다. 뜻을 모르는 건 비단 우리만이 아니다. 다음 날, 가르시아 마데로는 고백한다.

11월 3일

내장 사실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13쪽)



▲ <야만스러운 탐정들>(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우석균 옮김, 열린책들 펴냄) 또한 여기서 시작한다. 정체도 모르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모임에 가입한 가르시아 마데로가 남긴 1975년의 일기로부터. 그리고 이 서평은 마데로의 남은 일기를, 아직 950여 쪽을 남긴 두 권의 뚱뚱한 책을 이 자리에 고스란히 옮기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쓰는 중이다. 그보다 더 이 소설을 잘 설명할 방법은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분명하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대신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시인 지망생 가르시아 마데로가 아르투로 벨라노와 울리세스 리마를 만나 내장 사실주의라는 전위적인 문학 그룹에 합류하고, 서로 다른 가슴과 매력을 지닌 여자들 사이에서 방황하며 사랑과 섹스와 문학과 세상을 알아가는 이야기라고.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달콤한 청춘의 고민을 거듭하던 가르시아 마데로가 루페라는 창녀와 기둥서방 사이의 갈등에 휘말려 도망치듯 도시를 떠나고, 벨라노와 리마를 따라 내장 사실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진, 그러나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시인을 찾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라고. 그러니까 온갖 담론과 육체와 이상 속에서, 무엇보다 문학이라는 도달할 수 없는 꿈을 좇으며 길 위에서 청춘을 탕진하는 흔한 '문학청년'의 이야기라고.

설마.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물을지 모른다. 한 마디로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은 성장 소설 아니냐고. 성장을 말하는, 전혀 성장하지 않는 소설들로 가득한 오래된 장르에 던져진 또 하나의 성장 소설. 문학에 대한 당신의 입장과 지식에 따라 반(反)성장 소설이나 교양 소설, 어쩌면 빌둥스로만(Bildungsroman)이라는 단어를 택할 수도 있겠다. 대답은 간단하다. 아니.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그런 소설이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3부로 구성된 소설에서 고작 1부의 이야기를 요약했을 뿐이다(그리고 나는 형편없는 요약자다).

소설의 핵심은 600쪽이 넘는 분량을 뽐내는 2부다. 1976년부터 1996년에 이르는 세월을 채우는 것은 각각의 장소에서 저마다의 시간을 살아가는 서른여덟 명의 인물들이다. 삶의 어느 순간 벨라노와 리마를 만났던 그들이 추억하는 리마와 벨라노에 대한 이야기. 온전히 그들에게 주어진 각각의 장을 통해 진술되는 일종의 목격담.

그 속에서 벨라노와 리마는 엉터리 초현실주의자에서 마약 밀매상으로, 가짜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이도저도 아닌 얼간이로 계속해서 모습을 바꾸지만, 그 어디에도 가르시아 마데로의 자리는 없다.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내장 사실주의자들을 연구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연구자'조차 "아니, 그 사람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다. 틀림없이 내장 사실주의 그룹에 속한 적이 없을 것이다"라고 잘라 말한다. '말 좆'처럼 발기된 성기를 어쩔 줄 몰라 5분 동안이나 거리를 달리던 가련한 소년은 모두에게 잊힌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온전한 벨라노와 리마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의 기억은 선명하지 않고, 앞뒤도 맞지 않으며, 무엇보다 그들에겐 인생이 있다. 한때 어떤 방식으로든 문학과 관계를 맺었던 그들은 이제 다른,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몫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학-이후의 삶. 볼라뇨는 끊임없이 문학(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을 찾아 떠도는 벨라노와 리마의 삶을 쫓는 대신, 마이크를 돌려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한다. 마치 (벨라노와 리마가 좇던) 문학이라는 것이 더는 소문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저마다의 관점으로 훼손되고 뒤틀린, 혹은 불행과 낭만으로 채색된 기억의 파편에서밖에 찾을 수 없다는 듯. 그렇다면 지금 볼라뇨는 죽어버린 문학을 애도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서른여덟 명의 그들이야말로 유령인지 모른다. 한때 매혹되었던 그들의 영혼은 오직 문학에(다른 예술에, 사랑에, 우정과 그 밖의 것들에) 바쳐졌지만, 매혹은 사라졌고, 영혼 또한 간 데 없다.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그들이 포기한, 혹은 치러야 했던 어떤 것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 볼라뇨는 젊은 날의 반항적인 꿈의 대가로 시간이 어떻게 우리를 벌하는지 보여 준다. 실망, 고통스러울 만큼 사소한 성취들, 깨진 사랑, 질병, 심지어 비명횡사, 그리고 단순하게는, 젊음의 종말은 시간이 주는 벌이다. (프랜시스코 골드먼, '위대한 볼라뇨',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박세형·오숙은 옮김, 열린책들 펴냄), 89쪽)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목소리가 있다. 깨지고 실망하고 병들었지만 여전히 스스로의 존재를 주장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담고 있는 저마다의 삶. 그렇다면-볼라뇨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그것은 왜 문학이 아닌가? 우리 모두에게는 목소리가, 삶이, 이야기가 있고, 그것을 들려주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는, 낡은 경전에나 남아 있을 법한 문학의 어떤 소용. 그것이 볼라뇨가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2부에 나오는 수많은 목소리의 흐름을 미시시피 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이 소설은, 멕시코 시인 마리오 산티아고의 삶의 파편들을 어느 정도 충실하게 옮겨 쓴 것이다.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나에겐 행운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어떤 세대적인 패배와 한 세대의 행복을 반영하려고 했다. 여기서 행복이란 어떤 경우엔 용기를 뜻하지만, 용기의 한계를 뜻하기도 한다. 내가 보르헤스와 코르타사르의 작품에 영원한 빚이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내 소설은, 소설에 나오는 많은 목소리만큼이나 다양한 독법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고통스럽게 읽을 수도 있고, 또한 신나게 읽을 수도 있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대하여')

결국, 하나의 정설과 몇 개의 가설로 정리할 수 없는 이 방대한 소설을 판단하는 것은 순전히 읽는 이의 몫이다. 심지어 우리는 26장으로 나뉜 2부의 이야기를 별개의 단편 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볼라뇨가 만들어 놓은 이중의 구조. 벨라노와 리마가 세사레아 티나헤로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탐정이듯, 2부를 통해 벨라노와 리마의 흔적을 쫓는 우리 역시 일종의 탐정이 된다. 증거를 선택하는 것도, 그 증거들을 꿰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도 모두 탐정의 일이다. 그러니까 바로 당신의.

어쩌면 이 짧지 않은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몇 번쯤 길을 잃을지 모른다. 주인공들이 때때로 그랬던 것처럼. 깨지고 실망하고 병들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매일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마침내 진실을 찾는 데 성공했지만 진실을 찾았지만 그 끝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어떤 파국일 수도 있다. 다시 돌아온 가르시아 마데로의 일기로 진행되는 3부의 이야기처럼.

하지만 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책장을 넘겨 버린 것이다. 별 수 없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나도 모르게. 살아 있는 이상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야 하는 것처럼, 읽어버린 이상 우리는 계속해서 읽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볼라뇨는 용기라고 불렀다.

자, 그렇다면 가르시아 마데로의 일기로 시작한 이 글은 어떻게 끝나야 할까? 올해의 책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에 걸맞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이렇게 말해야겠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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