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 송년호(121호)는 '2012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가 따로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대신, 1년간 필자·기획위원으로 참여한 12명이 각자의 '올해의 책'을 선정해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들을 2012년과 함께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이 땅에서 살면서 다시, "잘 살아 보세"라는 말을 들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 구호에는 강제성, 계몽성, 폭력성 등이 스며 있다. 오늘의 삶을 유예하고, 더 큰 가치의 실현을 미래로 미루어 놓는 독재의 철학이 들어 있다. 소수가 더 큰 부를 차지하기 위해 다수의 희생을 요구한 역사의 생채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중이 그 구호에 환호하다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얼마나 더 잘살아야 한이 풀리기에 이런 선택을 했을까? 아니면, 지금 우리 삶이 극도로 가난한데, 이를 정확히 짚어냈기에 응답했던 것일까? 골방에 처박혀 술잔을 기울이며 이모저모 생각해보았지만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렇지만, 한마디 할 수는 있다. 당신들은 속았다, 라고. 잘살아보기는 애당초 글러 먹었다고.
정치적 관점을 달리 하는 사람이 부리는 몽니라 탓하지 마시길. 조은이 쓴 <사당동 더하기 25>(또하나의문화 펴냄)를 읽어보면 괜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터이니 말이다. 이 책은 한 사회학자가 사당동 철거민 가족을 3대에 걸쳐 관찰하고 조사한 결과다. 그러니 일단, 놀랍다. 대학 교수들 공부 안 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되었고, 논문 편수로 평가하는 제도가 얼마나 허망한지도 알 수 있다.
▲ <사당동 더하기 25>(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 ⓒ또하나의문화 |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주거 문제가 해결되면 과연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이다. 결론은 아니다, 이다. 금선 할머니 가족은 이른바 빈곤할 수밖에 없는 특성에 감염되지 않았음에도 결국 가난의 굴레를 벗겨내지 못한다. 일하지 않아, 게을러 가난하다는 말은 더는 통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래도 우리가 잘살 수 있다는 말을 믿어야 할까?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어려운 역사 상황이 금선 할머니를 가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고, 온갖 수단을 다 부려도 그 후손들은 가난의 늪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했다. 책을 읽다보면 만약, 금선 할머니네와 비슷한 환경이었음에도 스스로 잘살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늘이 내린 복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몇 년 전 조은이 장편 소설을 펴낸 적이 있는데, 그 때 냉큼 읽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 이 책을 볼라치면, 지은이의 감성과 문장력이 소설을 쓸 만하구나 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관찰자 처지에서 금선 할머니네 식구들과 관계를 맺었다.
연구자와 피관찰자 사이의 긴장과 교류, 이에 따른 갈등과 감정 이입을 기록한 부분은 마치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그것과 비교해볼 만하다. 끝까지 거리를 지켜야 하나, 그것을 넘어서게 하는 연민 의식이 읽는 이를 사로잡는다. 더불어 이 책에 나오는 조연급들의 삶도 지은이 글 솜씨 덕분에 흥미롭게 읽게 된다는 점도 지적해둘 만하다. 가난한 삶 한복판에서 피어오르는 여유와 넉살 그리고 이중적인 삶의 태도 등은 그야말로 한편의 소극이다.
임대 주택을 지어 주거 문제를 해결해도 가난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지은이는 이 문제에 답을 주지는 않는다. 어찌 그러하지 않겠는가. 사회 구성원의 지혜를 모아도 해결책을 내놓기 어려운 문제인데. 그런데 구호를 바꾸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 싶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만 잘 살아보겠다는 탐욕을 버리고,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공동체를 이루자고 하면 말이다.
그러니, 제발 질문을 바꾸어 보자. '어떻게 하면 잘 살아 볼까'를 버리고 '어떻게 해야 함께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로. 진짜 나라를 사랑한다면, 다음 세대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고, 노력하면 꿈꾼 바를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당동 더하기 25>. 함께 읽고 공동체의 문제를 고민하고 토론하게 해주는, 진정한 의미의 올해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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